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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문화)

[한국의 창종자들] 한국의 통일교

Gijuzzang Dream 2008. 5. 3. 23:05

  

   

 

 

 

 (1) 한국의 통일교, 세계로 뻗어가다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로 출발… 1994년 교명 바꿔

4월 18일 문선명 총재(오른쪽)의 막내아들(왼쪽)인 문형진 목사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세계 회장과 한국 회장에 취임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세칭 통일교)은 1954년에 공식적으로 출발했다.

처음의 교명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교회의 첫 간판을 달면서 문선명 총재는 “하루 빨리 이 간판을 떼는 날이 와야 한다”고 했다.

1994년 드디어 그 간판을 떼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지난 4월 18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공식적인 대표자는

문선명 총재의 막내아들인 문형진 목사로 전해졌다. 세계 회장과 한국 회장직을 물려준 것이다.

그의 형인 문국진씨는 통일교 사업을 주관하는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다.

통일교에서는 문형진 목사의 등장을 ‘섭리의 실현’을 향해 한걸음 더 나간 역사적인 일로 보고 있다.


“부활절 기도 중 예수계시 받았다”


한국에서 태어난 종교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널리 세계로 뻗은 것이 통일교다.

통일교를 일으킨 문선명 총재는 1920년 평안남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문용명(文龍明).

여덟 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15살에 오산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그해 가족을 따라 장로교 신자가 되면서 기독교인이 됐다.

이듬해인 1935년 부활절 기도 도중 문선명 총재는 예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통일교의 역사를 기록한 ‘통일교회사’에 따르면

예수가 문선명 총재에게 자신의 인류구원 사업이 실패했음을 알리고

그 대명을 맡아줄 것을 거듭 부탁했다는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강력한 종교정책은

민족종교의 억압뿐 아니라 기독교에도 미쳐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을 때다.

기독교계는 이 시기를 종교적으로 철저하게 유린된 시기로 보고 있다.

바로 그런 때 문선명 총재의 종교적 각성이 일어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중앙대학교 교목실장 이재하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1930년대 후반의 기독교는 일제로부터 정신적 강간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종교적 가르침이 작동불능 상태가 되자 일부는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찾아나서게 됩니다.
어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목숨을 걸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고, 반대자들은 사탄의 영에 접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쪽이든 공통점은 강력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19살에 소학교를 졸업한 문선명 총재는

서울로 유학 와 경성 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여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이때 흑석동의 명수대교회를 다니면서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주일학교 교사를 맡고 창경궁과 서울역 등에서 노방 전도를 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문 총재는

경기 파주군의 ‘이스라엘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했다.

6개월간 머물면서 그 계열인 상도동 집회소의 인도자로 일한다.

수도원은 신비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기성교단으로부터 배척받고 있었다.

지도자인 김백문은 ‘성신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지어 독특한 성서해석을 펴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통일교의 교리인 ‘원리강론’의 뿌리가 그로부터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통일교는 그런 지적을 일축하고 있다.

수도원에서 나온 직후인 1946년 6월 6일 문선명 총재는 평양으로 월북한다.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평양은 한반도에서 당시까지 기독교 교세가 가장 큰 도시였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기독교의 활동이 활발했고

한국에 새로운 재림 예수가 나타난다는 신비주의 운동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중 일부는 재림 예수가 입을 옷을 준비해놓고 끼니마다 밥을 지어 기다릴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재림 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총재는 평양에서 전도하며 간판을 내걸지 않고 교회를 운영했다.

‘광야교회’라는 이름의 이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새로운 해석의 성경 원리를 가르치며 함께 예배를 드리던 문선명 총재는

몇 달 후 사회질서 문란 혐의로 체포되고 100일간 구속된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기성교회와 다른데다 간판도 없이 집회를 여는 그가

여러 모로 의혹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석방되어 다시 목회활동을 펴던 문 총재는

1948년 초에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번에도 주변의 신고가 결정적인 단서였다.

흥남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져 운좋게 석방됐다.

 


연대 · 이대 교수와 학생들 개종

 

문선명 총재는 피난생활을 하던 부산 범내골에서 통일교의 경전인 원리강론을 집필했다.

원리강론엔 새로운 진리가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진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은 시대에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은 진리를 가르쳐주지만 시대의 흐름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원리강론이라고 주장한다.

교의체계가 완성되자 피난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문 총재는

1954년 5월 1일 서울 성북구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이름으로 교단을 창립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세간의 주목을 끄는 일이 발생한다.

36쌍의 축복식.


통일교는 자신의 주장대로 기존의 기독교가 규명하지 못하는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다.

문명이 발달한 시대의 젊은이들이 갖는 종교와 과학의 충돌,

신념과 이성의 상충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한다.

 

통일교는 논리와 이성과 성서의 현대적 해석을 무기로 대학 사회에 선교활동을 폈다.

결과는 연세대학교 박상래 교수와 학생들의 통일교 개종,

이화여자대학교 양윤영 교수 등과 학생 수십 명의 통일교 개종으로 나타났다.

소위 말하는 ‘연대사건’과 ‘이대사건’이다.

개신교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학에서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까지 개종한 것이다.

더욱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파견한 이대 김영운 교수도 개종해버렸다.

기독교계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고 연세대학교에서는 김 교수가 파면되고 학생 2명이 제적됐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도 관련 교수 5명이 파면되고 학생 14명이 제적되고 말았다.

이 사건에 위기를 느낀 개신교단에서는 통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다.

게다가 1955년 문선명 총재는 교단의 간부와 함께 병역법 위반 등으로 구속된다.

무죄 판결로 석 달 만에 석방되지만 여론은 통일교를 매도하기 시작했다.

일단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통일교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나섰다.

1957년 전국 116개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그 이듬해부터 일본과 미국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국내 기성 교단의 비난을 딛고 해외 선교에 성공하는 발판을 이때부터 마련하기 시작한다.

 

58년 일본·미국에 선교사 파견

남과 북, 이념의 대립이라는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려 통일교는 승공(勝共)을 내세웠다.

국제승공연합을 조직하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공을 들였다.

마침내 이념을 바탕으로 국내 조직을 확산하는 데 안착한다.

통일교는 이념의 싸움을 인류의 마지막 싸움이라고 공언했다.

원리강론의 설명이다.

 

“마지막 싸움이란 어떠한 싸움인가? 그것은 이념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유물사관을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가 나오지 않는 한,

민주와 공산 두 세계의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통일교는 1960년대부터 해외로 눈을 돌렸다.

문 총재는 당시 40여 나라를 순방했고 1972년 도미하여 미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통일교의 이미지를 깊이 새긴 사건은 국제 합동결혼식.

1961년 문선명 총재의 주례로 36쌍의 부부가 탄생한 이래

해마다 계속되어 수십만 쌍의 국제 부부를 만들어냈다.

국제합동결혼식은 세계 평화를 이루는 시발점이고 통일의 길이라는 주장이다.

1994년 통일교의 공식적인 교명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뀐 것처럼

가정은 구원의 최소 단위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기본 단위고

가족구성원의 통일을 통해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문선명 총재는

1988년 10월 3일 천주통일국(天宙統一國)의 개천을 선포하고 자신이 그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선포사에서 이렇게 밝혔다.

 

“남북의 해방부터 아시아의 해방, 세계의 해방, 지상세계의 해방은 물론이요,

천상의 지옥 해방, 그리하여 참부모의 소원 해방과 더불어

하나님의 참다운 해방 세계까지 미칠 수 있게 하기 위해

120개 국가에 사랑의 깃발을 높이고 이제 새로운 통일의 등대를 세워 불을 밝히옵니다.”

가정연합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섭리가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지상천국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고난을 딛고 살아온 모든 인간의 꿈이기도 하다.

가정연합의 가르침대로 이 땅에서 그 위대한 꿈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5/06   뉴스메이커 773호

 (2)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동양서 온 새 가르침에 신선한 충격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에 모인 사람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은 세계적인 종교가 됐다. 전 세계 150여 나라에서 신앙한다.

우리나라에서 창종된 종교뿐 아니라 현대에 일어난 종교 중 유례를 찾기 힘들다.

문선명 총재는 일찍부터 국내라는 울타리를 버렸다.

교회의 틀이 막 갖춰질 때부터 미국과 일본에 과감히 선교사를 보냈다.

1950년대 말 한국의 어떤 종교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을 시도한 것이다.

지금과 같은 통일교 발전의 기틀은

그렇게 시작한 미국과 일본 선교에서 비롯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목사들 사이 원리공부 붐 일어


1960년대 초 이미 일본과 미국, 독일을 거쳐 유럽 각지에까지 통일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문 총재는 이윽고 1971년 직접 미국으로 가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도미 직전까지 국내에서 통일교가 치중하던 것은

초교파 운동. 교파를 초월해서 교회의 일치와 발전을 위해 출발한 기독교 운동이다.

그 중심축이 된 것이 통일교다.

통일교 한국협회장을 지낸 선문대학 신학대학원 이재석 초빙교수의 이야기다.

“처음 통일교에 대한 기성교단의 반대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도 노방전도대회를 우리와 함께 여는 분위기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초교파 운동을 시작해 교회 간 화해운동이 일어나자 반발이 커졌습니다.

기성 교단에서는 개신교에 침투하기 위한 전위부대가 초교파 운동이라고 보고

본격적이고 조직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던 기독교장로회의 고(故) 강원룡 목사는

1968년 9월 9일과 10일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개신교와 통일교의 대화를 주선했다.

개신교 목사 40명과 문선명 총재를 포함한 통일교 목회자 10명이 모여

통일교 교리인 원리공부를 함께 했다. 이 사건은 개신교 내부에 격렬한 파문을 일으켰다.

기성 교회의 일부 인사들은 항의를 넘어 회의장에 오물을 던지는 사건까지 벌였다.

고 강원룡 목사가 내린 결론은 더 큰 파장을 불러왔다.

한마디로 통일교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통일교와 개신교는 성경 해석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통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던 기존 교단과는 다른 견해였다.

그 다음 해 통일교에 대한 신학적 비판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다.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장이자 연합신학대학원장이던 서남동 교수는

1969년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한국 기독교의 소종파 운동’이라는 주제의 신학 강연에서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원리강론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신학서라는 내용이다.

한국의 지도적인 신학자가 통일교 교리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서자

개신교단의 불같은 반발이 일어났다. 서 교수는 그래도 주장을 굽히지 않고

거듭 한국적 신학으로서 통일교의 가치를 발표했다. 결국 그는 퇴직한다.

통일교가 한국 교회의 화제로 등장하면서 목사들 사이에 원리공부의 붐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조직적이고 격렬한 반대운동이 시작됐다.

문선명 총재는 그 반대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개신교회의 노회장급 이상 지도급 목사 300여 명에게 기독교 성지순례를 시켜주었다.

그러자 기성 교단에서는 성지순례 참석자 중 74명의 목사를 제명처분하고 나섰다.

이재석 초빙교수는 당시의 전후 사정을 이렇게 말했다.

“개신교 측에서 초교파 운동과 통일교에서 실시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접촉 자체를 원천봉쇄했습니다. 통일교는 이후 활동 방향을 사회적인 쪽으로 치중하게 됩니다.

미국에 통일교가 건너간 초기에는 각 종교의 종교학자와 교수를 초빙하여

국내에서 못 다한 기독교 종교연합운동을 시작합니다.

차라리 세계 문화와 기독교의 중심지에서 시작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미국 보수교단도 경계심 가져


1976년 9월 18일 미국의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에서 3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가정연합 문선명 총재가 설교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국내 사정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문 총재는

뉴욕 근교에 통일신학대학원을 설립하는 일로 첫발을 내디뎠다.

종교는 진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진리부터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격렬한 문화적 충격을 경험할 때였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킹 목사 암살, 냉전체제,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미국적인 가치에 대한 일대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 불교 잡지 트라이시클 창간자 헬렌 트루코프는 그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말한다.

“하루아침에 옳다고 믿을 만한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젊은이들이 느끼는 혼돈과 절망감이 너무 커서 문화적인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한 가지 명백한 기준이 생겼는데 미국적인 것과 아닌 것을 나누어서 보게 됐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미국적인 것은 악,

미국 이외의 것은 선.

이런 이분법적인 표현이 거침없이 쏟아졌고

특히 동양에서 온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통일교는 이렇게 절망스러운 상황의 틈바구니를 파고들었다.

미국의 건국 이념인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갈 것과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일반 신자를 대상으로 한 전도보다 기성 목사와 신학자 중심으로 교리를 전파하던 통일교가

미국 사회에 일대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76년 9월 18일 미국 수도 워싱턴 광장에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를 열었다.

이전까지 기록은 1963년 같은 자리에서 킹 목사가 2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집회였다.

통일교 집회에 모인 군중은 30만 명.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동양에서 온 새로운 가르침과 가치관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탓이다.

가족의 붕괴와 미래 희망의 상실에 따른 정신적 혼돈 상태에 대해

순결과 가정의 가치를 앞세운 통일교의 강력한 메시지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통일교 강창식 미국총회장이 전하는 당시의 분위기는 이렇다.

“경제적 풍요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미국 젊은이들에게 문선명 총재의 가르침은

새로운 내용이었습니다. 문 총재는 기독교의 사명과 책임을 강조하고

기독교의 부활과 재생을 주로 주장했습니다.

당시 모인 30만 명은 각 교단의 목사가 종파를 초월하여 데리고 온 신도들입니다.

이것이 미국 사회에 엄청난 반응과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통일교는 이후 몇 차례 더 대형 집회를 열었다.

일거에 미국과 세계에 통일교의 존재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워싱턴 집회의 성공은 미국 보수 교단의 경계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통일교는 이후 미국 보수 사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는다. 갖가지 의혹이 무차별적으로 제기됐다.

결국 1980년부터 통일교 성금의 이자 소득에 대한 탈세 혐의로 재판이 시작됐다.

표적수사 논란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갖가지 문제가 제기된 가운데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1984년 문 총재는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한다. 생애 여섯 번째의 옥살이였다.

강창식 회장이 전하는 미국보수교단과의 충돌에 대한 견해는 이렇다.

“보수적인 주요 교단에서는 문 총재의 가르침을 진보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관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서의 문자적 틀에 갇혀 있을 때 통일교는

기독교의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고 나선 것이고,

그들은 이것이 비성서적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지금은 통일교 원리강론이 성서의 핵심 철학이라는 점에 대한 이해가 널리 전달됐습니다.”

문 총재의 재판 이후 통일교는 활동 방향을 전환한다. 특히 평화운동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1991년 12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난 일이다.

수십 년간 승공운동에 앞장섰고

교리에 공산주의가 사탄의 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통일교의 지도자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당시 핵사찰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관계가 냉각기에 접어들었고

미국의 대북 압력이 거세던 때라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1991년 평양서 김일성 만나

 

가정연합 문선명 총재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있다.

문 총재는 김 주석과 단독 면담한 자리에서 자신의 통일관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후 통일교는 종교가 아닌 기업의 형태로 북한에 진출했다.

합작회사인 평화자동차를 설립하여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고 평양에서 호텔을 운영하며 문 총재의 고향인 정주에 평화공원을 세우는 일을 진행한다.

통일교와 북한 당국의 밀월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당시 세계일보 사장을 맡고 있던 박보희씨의 조문 파문으로 잠시 주춤한 상태였다가 회복됐다.

통일교에서는 남북 관계를 성서 속의 카인과 아벨의 관계로 보고 있다.

결국 참사랑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할 형제라는 인식이다.

통일교는 대부분 종교가 창종 과정에서 겪는 수난과 박해를 겪었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통일교의 발생은 우리 사회의 구조와 그 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기성 교회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통일교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적 특성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무기로 세계에 진출하는 데 일단은 성공했다.

세계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라는 공식 명칭에는

통일교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 교리체계가 담겨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그리고 세상과 미래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담겨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일이 필요한 때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5/13   뉴스메이커 774호

  

 

 (3) 독자적 경전인 원리강론 만들다

 

영적 교류 통해 얻은 계시 엮어… 신·구약에 견주어 성약(成約)으로 불러

가정연합 문선명 총재와 한학자 총재는

가정연합 내에서 ‘참부모’로 불린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의 뿌리는 기독교다.

기독교 성서를 기본적인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기독교의 신인 하나님을 신앙하고 있다.

통일교에서는 문선명 총재를 참부모님으로 섬긴다.

문 총재를 이어 한국회장과 세계회장을 맡은 문형진 회장은 취임사에서 자신을 목회자로 표현했다. “아버님은 북한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도할 때도 목사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모든 섭리적인 내용을 행하실 때도 목사로서 행하셨습니다.

지금도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우리를 성장시켜주시는 것도 목사로서 그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참부모님이시지만 목사로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문 총재뿐 아니라 자신도 종교적으로 목사의 신분이라는 것이다.

통일교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예수의 구원은 실패했다” 주장


통일교는 성서 외에 독자적인 경전을 가지고 있다.

문선명 총재가 성서를 해석한 내용과 신과 직접 영적 교류를 통해 얻은 계시를 엮어

원리강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통일교에서 원리강론은 신·구약에 견주어 성약(成約)으로 부른다.

세상을 창조한 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신·구약이 미완성이라면 성약에 해당하는 원리강론은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정연합의 경전 원리강론

 

원리강론이 성약이라는 주장은 통일교의 역사관에서 비롯됐다.

아담의 창조로 시작된 인류는 아브라함까지의 역사가 후대를 준비하는 기반이 된 시대라고 설명한다.

그 이후 예수까지의 시기를 인간의 지성과 심성이 막 자라나기 시작한 구약의 시대로 보고 있다.

예수 이후의 때를 인류 역사가 장성해간 신약의 시대라고 한다.

즉 인류가 자라온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가 지금까지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문선명 총재의 가르침대로 인류가 완성을 향해 나가는 성약의 시대라는 것이

통일교의 주장이다. 이들은 인간의 타락 이후 실패해온 신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통일교가 기존의 기독교계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는 출발점은

성서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해석에 있다. 어떤 종교든 경전은 절대적이고 신성하다고 믿는다.

진리를 담고 있으며 현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경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계는 통일교의 성서 이해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과 같은 해석의 바탕에는 성서와 계시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기존의 신앙과 어긋나는 것일까.

기성 교회의 입장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예수의 구원이 실패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상징으로 여기는 십자가 역시 실패의 상징이라고 본다.

통일교에서는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타락한 인간을

완전히 구원하려한 신의 뜻으로 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지상천국을 먼저 완성해야 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그 실패를 딛고 신의 뜻을 이룰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통일교 신자들은 문선명 총재를 이 땅에 온 구원자, 즉 재림주인 메시아이며 참부모님으로 섬긴다.

원리강론은 이 부분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이시다.”

문 총재를 메시아요 참부모로 섬겨


이어서 문 총재가 세상을 주관하는 섭리를 계시받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영계(靈界)와 육계(肉界)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많은 성현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현실세계뿐 아니라 영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신과 영적인 교류를 꾸준히 해오며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영계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고 영적 대상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통일교의 세계관은

다분히 한국적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인간 세계와 교통하는

영적 존재는 기존 기독교의 설명과는 다르다.

오히려 접신과 강력한 신비를 주장하는 동양의 신비적 종교과 닮아 있다.

통일교 교리에는 이 같은 동양의 색깔이 많이 드러난다.

특히 음양(陰陽) 철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설명은 전통적인 동양의 세계관이다.

원리강론의 내용은 이렇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사이에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통일교는 이성성상이 존재를 형성하는 근본 원리임을 주장한다.

문형진 회장은 문 총재가 그 같은 가르침을 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님은 자연을 살펴보면서 이성성상의 원리를 깨달으신 것 같습니다.

전자와 양자, 식물의 암술과 수술, 남자와 여자, 몸과 마음. 세상은 이렇게 두 가지 상대적인 원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화와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오셨습니다.”

1995년 잠실경기장에서 치러진 36만 쌍 축복식.


통일교는 이 두 가지 상반돼 보이는 것이 대립을 끝내고 통일되어야

신의 섭리가 완성된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본다.

그것이 외형적으로 가장 잘 드러나 있고 직접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가정이니, 가정의 행복을 결국 세계 평화가 이루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의 적대적 관계도 그런 점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종교학회의 김탁 박사는 통일교에 한국적인 종교의 특징이 분명히 내재한다고 설명한다.

“강증산의 가르침은 이후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역사의 전개를 원한을 풀어나가는 해원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점과

창종자 자신이 우주 최고주 자재거나 그 대리자임을 자각하는 점이 그렇습니다.

통일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 천일국도 결국 후천개벽의 사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상생(相生)이나 해원(解寃) 등의 가르침은 통일교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일교는 인간의 타락으로 창조자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예수의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으므로

해원시켜주는 것이 통일교인의 사명이라고 한다. 지상천국을 이루는 것으로 예수의 해원이 되며

그것이 복귀섭리를 통한 해원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세계 평화의 근본은 가정의 행복”


동양적인 시각과 종교관으로 성서를 해석함과 동시에 통일교는 동양적인 가치관을 강력히 주장했다.

통일교 양창식 미국총회장은

통일교의 동양적인 가치관은 미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젊은이들이 정신적 공허 속에서 혼란을 겪을 때

통일교에서 가르치는 순결과 가정의 가치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왔습니다.

성적인 문란, 이혼과 가족의 붕괴에 대한 확실한 메시지를 준 것이 문 총재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성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 타락의 시초로 설명한다.

통일교는 이것을 인간의 성적타락으로 해석한다.

통일교가 벌이는 순결운동은 이런 교리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원죄가 불륜과 음란으로 인한 성적 타락에서 비롯했다는 통일교의 타락론은

기성교회의 강력한 비난을 받는다.

게다가 통일교 비판자들은 이것을 피가름 논쟁의 근거로 삼으며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단초가 됐다.

선문대학교 김봉태 총장은 성서 해석의 논쟁에 대해 이런 견해를 밝혔다.

“성서의 내용은 현대에 와서 과학과 이성적 판단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기존 기독교에서는 문구에 매달려 성서를 해석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물음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 총재는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 성서의 원리를 해석했습니다.
창세기 당시로 돌아가고, 예수 시대로 돌아가 직접 보고 해석한 내용이 원리강론입니다.”

인간 타락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야 말로 신의 섭리로 복귀하는 근본이 되며

통일교의 타락론은 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영역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옛것만으로는 오늘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새로운 종교가 나타나는 것은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문제와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를 뿌리로 기독교의 가지가 뻗어났고 그 배경으로 이슬람교가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의 사막으로부터 이 땅에까지 그 씨앗이 날아와 통일교가 태어났다.

통일교는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종교를 이해하려면 백 마디의 교리를 듣는 것보다,

그 종교를 믿는 한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 더 쉽고 빠른 경우도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알기 위해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2008 05/20   뉴스메이커 775호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4) 통일그룹, 통일교의 든든한 후원자

문국진 이사장이 3년 전부터 이끌어… 국내에만 20여 개 기업

2008년 1월 9일 통일그룹 단배식에서

문국진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는 모습.


어떤 집단이든 시간은 변화를 불러온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은 지금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창종자인 문선명 총재가 아직 건재하지만 고령임을 감안할 때 미래를 위한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통일교의 활동은 크게 교회와 기업, 사회단체들로 나눌 수 있다.

그중 교회는 문형진 회장이 문총재의 뒤를 이었고 기업에 해당하는 통일그룹은

문국진 이사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은 상태다. 통일교의 핵심인 교회와 기업이 2세들에게 승계됐다.

일화 · 용평리조트 · 세계일보 등 경영


통일교는 문선명 총재 부부를 참부모님으로 섬기고 그 자녀를 참가족님이라고 부른다.

참부모에서 참가족으로 통일교 사명의 섭리가 이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통일그룹의 문국진 이사장은 이미 3년 전부터 통일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가 밝히는 통일그룹의 목표는 이렇다.

“통일교회를 도와주는 조직이 통일그룹입니다.

이 조직을 통해 교회활동을 돕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통일그룹은 기업과 교회의 일치를 보여줄 것입니다.

기업을 통해 창조한 가치를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겠습니다.”

통일그룹은 통일교의 외적 규모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 20여 개 기업을 거느린 기업 집단으로 준재벌에 해당한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통일그룹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통일교의 실제 신자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종교계에서 종교적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교가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배경에는 막강한 경제력이 있습니다.

통일그룹이 경제력의 주축입니다.

통일교의 교리가 경제적 투신을 촉진하는 윤리를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성장이 가능했습니다.”

통일그룹은 문선명 총재가 예화산탄공기총제작소를 설립하여 공기총을 만든 데서

그 뿌리가 시작된다. 이후 사업체가 번성하기 시작하여 음료수와 약품을 만드는 일화를 비롯해

일신석재, 한국티타늄, 일성건설, 용평리조트 등

알짜배기 기업군과 언론사인 세계일보를 경영하고 있다.

일본에선 해피월드그룹이 주축


그러나 통일교의 경제적 기반은 해외에서 유입되는 헌금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일본은 통일교의 외적 발전을 이루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신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통일교의 기반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문형진 회장의 설명이다.

가정연합에서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만든

대표적인 문화예술단체인 유니버설발레단


일본에서 통일교가 퍼지던 초기 돌항아리, 도장 등의 국내 가공제품은

일본 신도들에 의해 고가에 팔렸다.

그러나 영감상법(靈感商法)이라는 이름의 판매행위는 일본 사회에서 일부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통일교 기업의 주축은 해피월드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통일교는 훨씬 더 큰 기업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선 언론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경영난을 겪던 세계적인 통신사 UPI를 인수했고,

워싱턴타임스를 경영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호텔, 항공기운항사 등을 갖고 있어 재산의 외적 규모를 추정하기가 힘들 정도다.

그중 가장 큰 이익을 주고 있는 곳은 트루월드그룹이다.

이곳은 미국 내 수산물 유통망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미국 내 9000여 개 스시업체와 거래하고 200여 개 고급 일식집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내 통일교 관련 기업의 성공에 대해 노길명 교수는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미국 젊은이들이 어려운 일을 기피할 때

통일교에서는 원리강론으로 무장한 청년들을 그 분야에 투입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원양어업 등의 수산업 부분입니다.

아무도 일하려고 하지 않는 부문에서 통일교의 청년들은 기꺼이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청교도 정신이 자본주의를 성장시키는 중추가 됐던 것처럼

통일교 신학도 경제적 발전의 핵심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통일교의 핵심 인사인 이재석 전한국협회장은 통일교가 헌금에 의지하기보다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벌인 교리적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만물이 타락한 인간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에서 회복되면 만물도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 통일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통일교를 통해 회복된 인간이 경영하는 기업은 물질도 회복되므로 번성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초기 통일교회의 경우 입교하면 3년 동안 세 사람 이상 전도하고 만물복귀를 하여야

신앙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만물복귀란 통일교 기업에서 일하는 것도 포함한다.

통일교 계열 기업의 성공은 이렇게 헌신적인 교인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국내 통일그룹도 IMF 외환위기를 비켜가지 못했다.

가장 먼저 위기가 닥친 곳은 통일중공업이었다.

국산 정밀가공기술의 선구자로 각종 방산장비의 생산과 독자적인 기술을 갖고 있던 통일중공업은

기업의 규모가 커지자 노사분규의 대표적인 사업장이 되고 말았다.

초창기 신도 중심의 가족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대규모 사업장이 겪을 수밖에 없는 기업의 시험이 닥친 것이다.

결국 회사는 부도를 맞고 통일그룹으로부터 떨어져나간다. 그룹으로서는 최초의 시련이었다.

통일중공업을 시작으로 지급 보증 관계에 있던 한국티타늄, 일성종합건설, 일신석재 등이

연쇄 부도를 겪었다. 이들도 통일그룹의 품을 떠났지만 지금은 경영권을 되찾은 상태다.

통일그룹 관계자들은 그룹의 미래에 어느 때보다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

통일그룹 방영섭 부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문국진 이사장이 경영을 맡은 3년 동안 그룹 내 모든 기업이 정상적인 운영으로 돌아섰습니다.

세계일보를 제외한 모든 사업체가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70%가 적자였던 과거에 비해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런 가시적 성과를 보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문 이사장으로부터 통일그룹의 새로운 출발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에선 UPI · 워싱턴타임스 경영


문국진 이사장은 독특한 경력의 인물이다.

세 살 때 문선명 총재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후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마이애미대학교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쳤다.

부친과는 무관하게 총기를 만드는 세일로라는 회사를 설립해 미국에서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공했다.

 

그는 총기 제작과 관련한 특허를 6개나 가지고 있다.

통일그룹이 공기총 제작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돌아보면 특별한 인연이다.

문국진 이사장이 주력하는 것은 경영의 합리성과 투명성 회복으로 건강한 기업을 만드는 일이다.

그는 경영 성과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제까지 통일그룹은 제대로 된 경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기업은 이익을 내야 한다는 존립 목적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을 그룹 경영에 쏟아 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문 총재가 강조하는 ‘위하여’ 사는 삶이 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통일교는 이밖에도 리틀엔젤스, 유니버셜 발레단 등의 문화예술 단체를 이끌고 있고

일화축구단을 경영하고 있다. 그것이 다 건강하게 일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자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종교적 이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터뷰 / 문국진 통일그룹 이사장

통일그룹 경영을 맡게 된 배경과 경영 성과는.

 

“통일그룹을 경영하는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회사를 설립해서 성공시켰습니다. 지금도 총 만드는 일은 재미있고 관심 있는 부분입니다.

 

아버지의 사상은 잘 이해합니다만 제게 맞는 일은 종교적인 부분보다 관리하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요청으로 그룹을 맡게 됐는데 이제까지는 교회와 관련한 분들이 경영해왔습니다.

제대로 된 경영과 관리가 없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경영을 합리화하고 조직 정비를 하면서 투명화에 치중하자 세계일보를 제외한 모든 회사가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경영이 개선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최대한 이익을 내는 기업으로 만들어갈 것입니다.”

통일교의 종교적 이념과 통일그룹의 기업 목표는 어떻게 일치하는가.

“지금은 통합의 시대입니다.

과거에는 종교와 기업의 목적과 이해가 달랐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통합되는 추세입니다.

통일교의 이념은 분열된 것을 화합하고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신념과 세속과 시장의 철학이 융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업이 돈을 번다는 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공익과 합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의 행복과 회사나 사회 등 전체의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통일그룹의 목표입니다.”

통일교와 그룹의 비전은.

“통일교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도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은 교회와 자산이 제대로 관리돼 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전 세계에 이만큼 퍼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동생(문형진 회장)이 교회를 맡아 이제 교회는 다시 성장해갈 것입니다.

통일그룹이 힘을 더해 교회를 도우면 먼 미래에는

우리나라 사람들 중 다수가 통일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그 미래를 위해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문국진 이사장은 그룹의 집중 관심 사업을 묻는 질문에 ‘레저사업’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2008 05/27   뉴스메이커 776호

 

 

 

 

 (5) 종교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

 

“통일교로 인해 갈등 생기면 종교 버리고 가정 지켜라” 강조

문형진 목사가 4월 18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회장 겸 한국회장으로 취임했다.


"만일 집안에서 통일교로 인해 종교 갈등이 생긴다면 종교를 버리고 가정을 지키라고 권합니다.

종교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입니다. 평화와 행복을 주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황선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 전 한국협회장의 말이다.

종교적 가르침과 집단이 절대화되면 순교는 자연스러운 가치가 된다.

그러나 통일교는 종교보다 가정을 선택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신과 인간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고, 자식의 행복을 원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뜻이라고 한다.

등록신자 80만·활동 인원은 30만


현재 통일교의 등록 신자는 80만 명. 실제 종교활동을 하는 인원은 이보다 훨씬 작아

30만 명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신자는 10만 명 남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전국에 약 450여 개의 교회가 있고 한 교회당 평균 300여 명이 출석한다고 추정되므로

대략적인 신자의 수를 가늠할 수 있다.

통일교에 대규모 교회는 찾아볼 수 없다.

역사가 시작된 청파동의 본부교회조차 초창기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은 규모다.

통일교회가 작은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문선명 총재의 뜻이다.

평화교수아카데미 손대오 한국회장은 문 총재의 교회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교회를 크게 짓고 대형화하는 것은 정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와 인류를 위해 재정을 운용해야 하며

교회 자체의 외형과 자산을 위해 신도들의 헌금을 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인류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선교에서도 적극적인 활동을 권하지 않는다.

통일교를 믿으라고 외치지 말고 대신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라는 것이 문 총재의 권유다.

좋은 가정을 만들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주변에 보여주는 것이

선교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선교 대신 교육 · 사회활동에 역점

선교와 대외적인 교회활동 대신 통일교는 교육기관과 사회활동, 비정부기구(NGO) 활동에

공을 들인다. 선화유치원, 선화예술중 · 고교, 경복초등학교, 선정중 · 고교, 선정실업고,

청심국제중 · 고교, 청심신학대학원대학교, 선문대학 등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교육기관을

운영한다.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대학교와 선문대학의 일부 학과를 제외하고는

종교적 색채를 크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통일교 운영 학교의 특색이다.

문선명 총재가 초종교활동의 일환으로 여러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고 있다.


선문대학 순결학과는 통일교가 지향하는 교육 목적을 가장 잘 보여줄뿐더러

통일교의 핵심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9년 학과 설립 당시부터 성차별 논쟁과 더불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가정의 건전한 사랑 실천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학과를 개설했다.

인간의 성적 타락으로 인해 지상천국을 만들려는 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순결한 인간이 되는 것은 신의 섭리로 복귀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통일교의 핵심 교리다.

신학의 실천적 운용과 교육에 통일교가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통일교에서 지원하는 대부분 사회활동은 이렇게 통일교의 기본원리가 짙게 깔려 있다.

평화교수아카데미, 국제승공연합, 남북통일운동 국민연합, 세계평화 여성연합,

유엔평화군 성전추모연합회 등 보편적 활동을 펼치는 통일교 지원 단체들도

창조 원리의 복귀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종교적 배경을 갖는다.

비교적 최근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초종교 초국가연합, 천주연합, 평화대사운동 등은

인류의 공통선인 평화와 화해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대부분 활동은 평화와 종교 간의 화해를 표면에 내세운다.

특히 평화대사운동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지도층 인사 수백 명이 활동하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180여 개국에서 운영한다.

통일교 사회활동은 국제적 연대를 이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미주와 아프리카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통일교 교회가 진출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사회활동도 함께 한다.

통일교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것이 세력 확장을 위한 위장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지적에 대해 황선조 전 한국협회장의 설명은 다르다.

“다양성과 열린 가치를 지향해야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갈등은 대부분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집니다.

통일교가 평화와 화해, 상생을 위해 애쓰는 것은 인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통일그룹의 주 사업 분야가 레저스포츠에 집중되고 있고 피스컵 축구대회 등을 개최하는 것도

이념과 종교를 떠나 동질성을 느낄 수 있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외형적 형태를 내세워도 통일교는 종교다. 믿음이라는 기반이 없으면 종교는 불가능하다.

그 믿음의 중심에는 종교를 세운 이가 있다.

통일교를 신앙하는 이들은 문선명 총재가 재림한 구세주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자들은 문 총재가 가르친 원리강론의 합리적 해석에 수긍하고,

그의 종교인으로서 헌신적인 모습에 감복했다.

초창기에 통일교에 입교한 제자일수록 문 총재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선문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재석 초빙교수는 초기 통일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문 총재는 교회에 찾아온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사람이 되도록

심령을 길러주는 목회를 했습니다. 청파동 교회에서 노인 한 명을 위해

밤새도록 원리강론을 설명하고 축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목회 때마다 감동이 넘쳐났습니다.”

교세가 커짐에 따라 초창기 교회의 강한 일체감이 옅어졌다고 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사는 삶을 보여주라는

문 총재의 주장은 자신에게도 철저했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불만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자식인 저보다 항상 남에게 더 잘 대해주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지금도 모든 생활이 낱낱이 공개돼 있어 양치질하실 때도 개인적인 시간이 없으십니다.”

아들인 문형진 회장의 이야기다.

초창기 청파동 교회 시절의 문선명 총재와 신도들.


통일교가 지향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지상천국의 건설이다.

오해받기 쉽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쉬운 주장이다.

2006년 6월 13일 문선명 총재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장락산에서 열린 천정궁 박물관 개관식에서

태평성대의 이상천국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했다.

“기나긴 한의 세월 선천시대를 접고 이 땅에 신천신지를 창건할 수 있게 될

후천개벽의 시대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실체적으로 이 지구성을 하늘 앞으로 환원하기 위한

역사적 대혁명의 출발이었습니다.” 그 전 해에 이미 지상천국인 천일국의 출발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 총재가 밝힌 수많은 종교적 계시 중 하나지만 그 의미는 자못 다르다.

영적으로는 이미 지상천국이 이루어졌고

앞으로 그것이 현실적으로 구현되는 과정만 남았다는 것이다.

언제 이루어질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고

지금도 그 목적을 향해 세상의 변화가 시작됐다고 한다. 쉽게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믿고 열렬히 구현해가는 신자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정당 만들어 현실정치 진입 시도

근래 통일교는 ‘가정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현실정치의 진입을 시도했다.

총선을 통한 원내 진출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실패가 아니라는 평가다.

집단의 이해와 대립만 존재하는 정치의 틀을 바꾸기 위해 첫발을 내딛었다는 주장이다.

통일과 평화를 실현시키려는 먼 계획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종교는 현실을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비전을 보여준다.

통일교가 전해주는 미래는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상이다.

그 세상을 위해서라면 통일교는 종교의 형식을 벗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인류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황선조 전 한국협회장은 통일교의 진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종교와 국가, 사회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행복과 평화를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굳이 종교적 외피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거창한 가르침도 허망할 것입니다.

화해와 조화의 세상을 위해 나가는 것이 통일교의 목표입니다.”

통일교는 한국적인 종교다. 세계 곳곳으로 뻗어가고 있지만 이 땅에서 태어났고

한국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신령, 해원, 상생, 후천개벽 등

한국의 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 깔려 있다.

외국 신자들도 한국은 신앙의 모국이다.

지상천국이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곳이며 신심의 고향이 우리나라다.

한국에서 태어나 가장 먼저 이념과 종교와 민족의 국경을 넘었다.

문선명 총재가 펼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구원이 완성되고

지상천국이 이루어질지는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야 할 것이다.
- 2008 06/03, 경향   뉴스메이커 777호
- 김천<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