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악한 정치에 분노, 자연에 숨은 도학자 김인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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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학자, 군왕 실정 서슴없이 꾸짖다 조선 중종 5년(1510) 음력 7월19일 오후,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에서 태어났다. 큰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참봉이라는 말단 벼슬에 그친 아버지 영(齡)이라는 분은 행실이 옳고 글도 잘해 선비의 칭호가 높던 분이었다. 하서는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기상이 헌걸차서 비범한 인물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그냥 문리가 터졌을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태도가 일반 아이들과는 달랐다. 하루는 파(蔥)를 들고는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며 속 내부까지 파헤치는 놀이를 하자, 아버지가 그런 장난질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니까, 물건이 태어나는 이치를 알아보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답해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았다는 기록도 있다. 5세에 시를 짓기 시작했고, 6세에는 저 인구에 회자하는 <영천시(口永天詩)> 즉 하늘을 읊은 시를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중국의 기(杞)나라 사람들은 왜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했느냐라는 5세 어린이의 지적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이런 시가 사람들 입으로 전해지면서 김인후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전주 감영에서 장성의 하서를 찾았다. 재주를 시험해보고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솜씨에 할 말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그 무렵에 기묘명현으로 이름 높던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고향인 장성을 찾았다가 하서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붓 한 자루를 선물하면서 나라의 동량으로 크도록 격려했다는 내용도 있다. 천재로 이름이 났지만, 공부에 게으르지 않던 하서는 어린 시절부터 면앙정 송순, 신재 최산두, 모재 김안국 등 당대의 석학들을 찾아가 뵈며 학문에 온갖 정성을 바쳤다.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모재 김안국에게 수학하던 하서는 모재가 귀경하자 서울까지 왕래하며 글을 배웠다. 이에 참석한 하서는 <칠석부(七夕賦)>를 지어 장안의 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24세에 진사과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이때 진사과 동방(同榜)인 퇴계 이황과 만나면서 평생의 학문적 동지가 된다. 31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가 시작된다. 이후 32세에는 초급 관리로 가장 명예로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어 호당(湖堂)에 들어가 학문연찬에 정력을 바친다. 이때에도 퇴계 이황 등 당대 명사들과 동기동창이 돼 서로의 학문을 도우며 함께 생활했다. 32세의 하서와 9세 연상인 퇴계는 41세, 이들이 호당에서 함께 자고 먹으며 학문을 토론하고 강론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제대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하서나 퇴계의 학문은 그 시절에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당의 공부를 마치자 선비라면 원하는 벼슬이 옥당, 즉 홍문관의 벼슬로 하서에게 홍문관의 정자(正字)·저작(著作) 등의 벼슬이 내려졌고 34세에는 홍문관 박사(博士)에 시강원 설서(設書)로 세자를 가르치는 임무에 종사한다. 높은 군왕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세자, 뒷날의 인종(仁宗)과의 만남은 바로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는 어수지계(魚水之契)의 본보기로서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이었다. 요순시대의 도래가 점쳐졌다는 당시의 이야기들에서 당시 하서의 학문과 덕망이 얼마나 높았고 세자의 호학하는 자질이 얼마나 훌륭했나를 대변해준다. 하서의 인품과 학문에 매료된 세자는 온갖 예우를 다 했고, 하서에게 손수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하는 정성을 바치기도 했다. 궁중에 있던 <주자대전> 한 질을 하서에게 선물하면서 가르쳐주는 공에 보답하기도 했다. 언관(言官)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했으니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죽은 충신들을 사면해 신원시키라는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정책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갈고 닦은 학문의 뒷받침과 수양한 의리정신을 발휘해 본격적인 벼슬아치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예부터 훌륭한 정치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고,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는 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해 보필을 받고 교화하는 일을 맡깁니다.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아야 인륜이 밝혀지고 풍속을 순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기묘사화 때의 억울한 신하들에게 모든 선비들이 원통하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나 본심을 개진하지 못하고 무죄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직언을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한 내용이 바로 하서의 그 차자(箚子)였다. 너무나 옳은 하서의 주장에 은연히 마음이 동한 중종은 그때부터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게 되고, 그런 하서의 주장이 원인이 돼 끝내 그 문제는 풀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 그러나 그런 요순정치를 아무나 하는 것인가. 하서의 옳고 바른 주장도 쉽게 실현될 기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순군민(堯舜君民), 요순 같은 임금에 그 치세에 살아가던 백성의 시대를 열자는 하서의 꿈과 희망은 참으로 위대했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세상을 한 번 통째로 개혁하고 싶은 욕망이야 가득했지만, 시대는 결코 하서에게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과거에 합격하던 무렵 김안로(金安老)가 쫓겨났고 김안국 · 이언적 등 여러 어진 신하들이 조정에 들어가며 한 번 치세가 도래하려는 희망도 있었으나 외척들인 소윤(小尹)과 대윤(大尹)이 알력을 일으켜 시사(時事)가 도리어 우려됐다”라는 하서 연보(年譜)의 기록처럼 화란의 징조만 높아지고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란의 기미가 높아가자 부모봉양을 앞세워 고향근처의 수령으로 나가기를 원해, 하서는 34세 12월에 옥과현감(玉果縣監 : 곡성군 소속)으로 부임한다. 그 다음해 중종대왕이 승하하고 인종이 등극해 세상이 바뀌는 듯했으나, 대소윤(大小尹)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고 병약한 인종이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자기 붕어하면서 정국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고, 큰 꿈의 소유자 천재 학자이던 하서는 영원히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인종의 등극 이후 한 차례 서울에 온 뒤, 인종이 승하한 36세 이후, 그는 영원히 서울을 떠나 고향인 장성, 그 이웃 고을인 담양 · 순창 등의 자연 속에 몸을 숨기고 강학과 교육에 일생을 바치며 먼 훗날 요순시대의 도래를 위한 도학(道學)을 정립하고 도학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명종실록 16년 정월 16일의 기사는 그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인품과 학문, 그의 고결한 생애를 정리해 기록하고 있다. 자(字)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다른 호는 담재(湛齋)였다. 장성 출신이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에 문자를 이해해 글을 지으면 사람을 놀라게 했고, 커서는 시문(詩文)을 지으면 청아하고 고묘해 당대에는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시와 술을 아주 즐겼고, 마음이 관대해 남들과 다투는 적이 없었다. 그의 뜻한 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어서 전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은 세상물정에 어둡지 않은가라고 의심하기도 했다. 30세 이후에 문과에 급제해 부수찬을 지내고 옥과현감이 됐으나, 오래지 않아 중종 · 인종의 상을 당하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몸이 상해 을사년 겨울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일절 응하지 않았다. 고향집에 거처하면서는 성현의 학문에 전념해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순서대로 힘쓰며 실천했다.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상 · 제례(喪祭禮)에 삼간 마음으로 실천했다. 모든 제사에는 아무리 병중이라도 반드시 참례했고 세속의 금기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도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문예(文藝)는 뒤에 하게 했다. 남과 대화할 때에도 자기의 견해만 주장하지 않았으나 한 번 스스로 정립한 원칙은 매우 확고해 뽑아낼 수가 없었고 너무 높아 따를 수가 없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써서 필적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51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하서집(河西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실천하는 지성, 한평생 요순시대를 꿈꾸다 그의 죽음이 결코 병사일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하서 김인후. 약원의 처방전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자고 요구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고 거절당하자, 인종의 죽음에는 반드시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고 믿고, 뛰어난 군왕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패악한 정치에 몸담을 수 없다고, 35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관계를 미련 없이 떠난 사람이 바로 하서였다.
인종의 이복 아우 명종이 등극하고 그의 생모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무서운 독재가 진행되고, 을사사화가 발발해 어진 학자나 선비 벼슬아치들이 온통 살육의 화란에 빠지자, 혹자는 하서가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미리 점치고 낙향하고 말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이상이나 이루고자 했던 꿈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겠는가.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요순시대의 신하들처럼 뛰어난 어진이들이 임금을 보필해 참다운 요순시대를 만들자는 꿈을 접고 세상을 등지고 낙향할 때의 그의 심정이 오죽 했겠는가.
후손 김시서(金時瑞)는 호가 자연당(自然堂)인데, 글 잘하는 사람에게 의뢰해 국문 시조를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김시서는 하서의 5대손이니 집에서 전해오는 시조를 애송하다가 자신의 호를 ‘자연당’이라 하였으니 다른 견해도 있지만 그 시조의 작자가 하서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래의 지도자가 될 후학들을 가르쳤던 하서의 유적지인 생가와 필암서원과 묘소를 찾아갔다. 후손 김재수 교수와 김진석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청랑하기 그지없는 가을 하늘과 황금빛 들판을 구경하면서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와 맥호동 일대를 살펴봤다. 하서가 세상을 떠난 그 날짜의 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 그만한 평가를 받은 도학자의 현양사업은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서 사후 8년째인 1568년에 제자 조희문(趙希文)이 쓴 <하서전집> 서문을 보면 일찍부터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梁子징)에 의해 1561년, 하서 타계 직후에 가장(家狀)까지 지어졌으나, 국가적 현양이나 후학들의 찬양 작업은 먼 뒷날을 기다려야 했다. 필암서원이라는 사액(賜額)이 그 해인 1662년인 현종 3년에야 내려졌다. 우리가 찾은 필암서원(筆巖書院). 당대의 명필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로도 명성이 높은 서원이다. 대원군 시절에 전라도 일대의 모든 서원이 다 훼철되었으나 오직 이 서원만은 그대로 보존된 호남 제일의 서원이다. 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은 옛날에는 지원현이었다. 그 지원현이 폐현되면서 옮겨온 관아의 건물로 지었다는 ‘확연루(廓然樓)’는 조선의 어떤 서원에도 없는 필암서원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란다. 신실에 동재 · 서재가 격식에 맞게 갖추어져 있었고, 더구나 근래에 성역사업이 이룩돼 광활한 서원의 광장이 공원으로 꾸며졌고, 기념관이나 유물관이 새로 건립되어 규모로는 세상에 없는 우람한 서원이었다.
하서의 도학정신과 학덕이 탄생 500주년(2010)이 다 되는 금년에야 빛을 보는 셈이니, 역시 진리는 연착하는 기차와 같지 않은가.
황룡면 필암리의 필암서원에서 멀지 않은 대맥동(大麥洞 : 麥湖洞)에는 하서가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의 터가 그대로 있었다. 하서가 생전에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술을 마셨고,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했던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만 근래에 복원돼 옛 정취를 보여줄 뿐, 생가는 빈터만 남아 있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하서의 부모 묘소와 하서의 묘소가 있는 울산김씨의 선산이 있다. 입구에 당대의 학문과 정치의 대로(大老)였던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우람하게 서 있고, 묘소도 초라하지 않게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묘의 바로 앞에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표(墓表)의 글을 새긴 비가 서 있어서 그의 일생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었다.
생가의 백화정이나 묘소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보면 산과 산 사이에 계란같이 둥그런 조그마한 산이 있다. 그 산이 바로 난산(卵山)으로 인종의 제삿날이면 하서가 그 산속에 들어가 통곡했다는 통곡단(痛哭壇)이 있었다. 하서의 애제자 송강 정철은 하서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하서가 죽은 뒤 추억하는 글에서 인종의 제삿날에는 반드시 ‘난산’에 올라가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 내용이 담긴 ‘난산비(卵山碑)’가 세워져 있는데, 정조 때 윤행임(尹行恁)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묘소와 생가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난산, 거기서의 통곡이 하서를 다시는 정치에 가담하지 못하게 했고 또 평생 동안 임금을 그리워하며 도학을 닦으며 자연과만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해줬으니, 어떻게 보면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닌가. 이씨 왕조의 종통(宗統)을 이은 제왕들의 신주를 모셔 왕권을 상징하는 곳이 종묘이고, 유교(儒敎)의 창시자인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을 모시고 우리나라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18명의 어진이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 문묘이니, 바로 학문과 사상의 상징이다. 신라 때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 때의 안향과 정몽주, 조선의 퇴계와 율곡 등 14명이 배향된 곳이다. 퇴계 · 율곡 등은 오래전에 배향됐건만 하서는 많은 선비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요구가 강력했으나 결실을 못 맺고 지연되고만 있었다. 하서가 타계한 뒤 237년이 되는 정조 10년(1786)에야 하서가 문묘에 배향된다. 그런 학자가 배향의 절차에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필암서원에 사제문(賜祭文)을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라는 교서를 내려 절차에 맞게 배향 고유제를 지냈다.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분이 바로 하서였다. 퇴계가 그렇게 찬양했고, 고봉 기대승이나 율곡이 그처럼 숭앙했던 하서의 배향이 그렇게 늦었음도 또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라도 그런 절차가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황 · 유성룡 · 김성일 등의 500년 400년은 세상이 그렇게 요란했는데, 하서의 500년은 아직도 조용하다. 도학(道學) · 문장(文章) · 절의(節義)를 모두 제대로 갖춰야만 참다운 도학자다. 비록 하서의 높은 철학사상인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라는 글과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이라는 글이 일실되어 하서 학문의 진면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해도, 이미 알려진 <천명도(天命圖)>나 많은 도학문자나 도학시(道學詩)에서 나타나 있듯이, 하서는 도학에 뛰어났고 문장도 탁월했으며 임금과 나라를 걱정했던 애국적인 절의정신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송시열의 <신도비명>은 저간의 사정을 제대로 설명해주고 있다. 패악의 정치에 분노해 정계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와 자연시와 우국시를 읊었지만, 요순시대를 만들어야한다는 사명감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생애가 바로 하서의 삶이었다. 시로 의분을 달래고 술로 끓는 가슴을 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북대 김기현 교수의 주장대로, “시는 어두운 사회에 깨어 있는 지성의 아픔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주는 의의를 지녔으며, 술은 그의 도의정신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파격이었다” (<하서 김인후의 도학과 절의정신>)라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에 탐닉하고 술에 세상을 잊으면서도 그는 절대로 예의와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관(史官)의 평가를 기억해야 한다. 도덕과 윤리가 파괴된 패악의 정치시대에 세속의 권력에 합류하지 않고, 가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위해 자신을 지키며 높은 사상과 철학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도학자다. 하서야말로 자신을 자학한 삶이 아니라 도의를 몸소 지켜 나라와 인민을 보전할 철학적 기반을 닦으며 살았던 일생이었다. 문장가들이야 많았지만 마음에서 얻어낸 철학과 사상을 실제의 삶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권력과 부를 미련 없이 뿌리치고도 예의 법규에 벗어나지 않게, 시와 술로 자연을 벗 삼아 살았던 삶을 몇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정조대왕은 문묘에 배향을 마치고 하서에게 영의정의 벼슬을 증직하고 문정(文正)으로 개시(改諡)했으니 “바름으로 남을 굴복시켰다(以正服人)”는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 2008년 10월 24일, 10월 31일, 경향,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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