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47)-(48) 다산 정약용

Gijuzzang Dream 2008. 4. 13. 18:50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실학자 정약용

 

 

임금께 병든 국정실상 조목조목 따지다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

영조 38년, 1762년은 오래된 조선이라는 나라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던 해였다.

조선 최고의 학자로, 희대의 실학자로, 높은 수준의 개혁가이던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해였다.

음력 6월16일 다산은 태어났지만, 그 한 달 전에는 조선 최대의 비극으로 꼽히는 ‘임오(壬午)사건’,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야 했던 참극이 일어난 해였음을 알아야 한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馬峴)마을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與猶堂).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여유당전서>를 완성하며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사진작가 황헌만>

 


사도세자의 죽음과 다산의 탄생, 참으로 무관한 일이었지만, 역사의 전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라는 당쟁이 격화되었고,

시파 계열에 속하던 자신의 집안 가계로 인해, 다산은 자연스럽게 시파에 속하게 되었다.

벼슬하던 동안의 어려움이나, 감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고, 귀양살이의 긴긴 고난이

이런 정치적 관계로 연유되었으니 사도세자의 죽음과 다산의 탄생은

따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세자의 죽음에 한없이 분노한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세월을 보내던 때에 다산이 태어났고, 패악한 정치의 계절에 가슴아파하던 아버지는

태어난 아들이 벼슬하는 것보다는 농사나 지으며 행복하게 살라는 뜻으로

다산에게 ‘귀농(歸農)’이라는 아명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와 세월은 변하며 흘러가는 것이다.

관료생활에 길이 들었던 아버지는 얼마 뒤에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 덕택에 다산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록 아홉 살 때에 어머니 해남윤씨께서 세상을 떠나 비애에 젖기도 했으나,

영특한 다산은 주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다산이 조선 최고의 학자요, 사상가라면, 그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기본적 학문을 습득했던 곳,

벼슬살이와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한 <여유당전서>를 완성하느라

18년을 보냈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馬峴)마을은 그야말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세상을 바꾸고 국가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그의 꿈과 희망이 영글었던 생가가 복원되어

덩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가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바로 생가의 뒷동산에 묻혀

지금까지 170년이 넘도록 고이 잠들고 계시는 곳이 바로 그곳이니,

그곳을 어찌 역사의 땅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생가인 ‘여유당(與猶堂:다산 서재)’은 바로 사상의 고향이다.

비록 먼 뒷날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그의 주저(主著)들이 완성되었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이 배태되었던 곳은 바로 그의 서재가 아니었겠는가.

1818년 귀양지이던 ‘다산초당’에서 완료한 <경세유표>라는 대저는

누가 보아도 그의 경세학으로는 대표적 저술이다.

나라를 경륜할 계책이 있지만, 죄인의 신분으로 어찌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유언(遺言)으로 올리는 정책이라는 뜻으로 ‘유표(遺表)’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국가경영의 방책과 통째로 나라를 개혁하자던 그의 계책은 대체로 그 책에 정리되어 있다.

왜 책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가. 어떻게 나라를 개혁할 것인가.

큰 계책은 무엇이며, 세부적인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놓은 문자가

‘경세유표서문’이라는 글이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께 국가경영의 정책을 조목조목 아뢰어 바친 내용이 바로 <경세유표>다.

그래서 다산은 그의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에서 경세유표의 저작 목적을 밝혔는데,

글자로는 다섯 자인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었으니,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전제조건이 ‘개혁’이라는 두 글자다. 개혁하지 않으면 우선 나라가 망한다는 무서운 경고를 하면서,

법과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경세유표>를 저작하였다.

법과 제도가 제대로 집행되려면 공무원들이 청렴한 도덕성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에

<목민심서>를 저작하였다.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만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 사는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에

<흠흠신서>를 저작하였다.

국민 모두의 실천과 행위가 없이는 나라가 개혁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정신과 철학을 근본 뿌리부터 바꿔주기 위해서

국민의 교과서였던 주자학의 사서육경을 재해석하여,

 성리학적 경서를 민중적이고 실학적으로 전환시킨 232권의 방대한 경학연구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서적을 읽으며 마음이 열리다

1792년은 정조 16년이었다.

그해 31세이던 다산은 벼슬아치라면 최고의 명예로 여기던 옥당벼슬에 임명된다.

옥당인 홍문관의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 이런 낭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무렵,

세상이 무너지는 비보를 받았으니, 진주목사로 재임하던 아버지가

임지에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고 말았다.

진주까지 달려가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반장하여 장례를 치른 뒤,

집상(執喪) 중이던 다산에게 정조대왕의 명령이 내려졌다.

집상하는 때야말로 책을 보고 글을 짓기 좋은 시간이라며

수원 화성을 축조키로 하였으니 성(城)을 쌓을 설계도와 방법을 올리라는 분부였다.

다산 아니면 그런 큰 역사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정조의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다산은 사실 23세 때인 1784년부터 친구 이벽(李檗)을 통해

천주교 관계서적이나 서양 책들을 읽기 시작했었다.

우물 안 개구리이던 조선 사람으로 서양에 대한 눈을 뜨면서 다산의 마음은 넓고 크게 열리고 있었다.

그 후 1791년에는 자신의 외종형인 진산의 윤지충이 천주교도로는 최초로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산은 천주교에서는 손과 마음을 떼었다고 했지만,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기술에 대한 책들은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던 다산에게 정조는 성의 설계도에 참고할 만한 서적이라고 하면서

<도서집성(圖書集成)> 안에 있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었다.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가 쓴 과학기술서적이다.

이런 책을 참고하여 다산은 기중기나 거중기 등의 도구들을 발명해내는 위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의 옛날 고전에 해박했던 다산, 거기에 서양의 과학사상과 근대적 논리가 합해지면서

그의 실학사상은 뿌리가 튼튼한 실용주의적 논리로 굳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경학연구서도 읽었다

“일본에서는 요즘 훌륭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물부쌍백(物部雙柏)이 바로 그런 사람으로

호를 조래(徠)라 하고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으며 제자들을 많이 거느렸단다.

지난번 수신사가 오는 편에 소본렴(篠本廉)의 글 세 편을 얻어왔는데

글이 모두 정예(精銳)하였다. 대개 일본이라는 나라는 원래 백제에서 책을 얻어다 보았는데,

처음에는 매우 몽매하였다.

그 후 중국의 강소·절강지방과 직접 교역을 트면서 좋은 책을 모조리 구입해갔다.

책도 책이려니와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는 그런 제도가 없어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그 학문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게 되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示二兒)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두 아들아 보거라’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사람들은 무조건 일본은 왜(倭)이고 못된 나라로 학문도 별볼 것 없는 나라로 여겼다.

그러나 다산은 예의 유학자들과는 달랐다.

일본의 경학연구서를 얻어 보면서 그들의 학문수준이 어느 정도였나를 명확히 관찰하고 있었다.

<일본론(日本論)>이라는 몇 편의 논문을 지어서 일본 사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중국과 조선의 학문만을 고수하지 않고, 서양과 일본의 학문에 눈을 돌리고 마음을 기울이면서

세계사적 안목을 넓혔던 다산의 학문 경향은 확실히 남다른 면이 많았다.

요즘 말로는 이른바 ‘세계화 마인드’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의 열린 마음과 바로 뜬 눈에서 근대의 여명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탐관오리나 세도정치의 탐학과 부패에 시달리던 조선은

다산을 유배 보내 바닷가에 유폐시키고는 긴긴 어둠의 중세만을 계속하고 말았다.


역사의 땅 마현(馬峴)

다산의 고향 마현마을, 다산이 열수(洌水)라고 부르던 한강물이 넘실대고,

멀리 운길산의 수종사가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여

나라의 개혁과 인민의 해방이 완성되는 희망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산은 눈을 감고 지하에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역사의 땅이다.

정약현 · 약전 · 약종 · 약용 등 4형제의 뛰어난 학문과 사상이 피어나 형성된 곳이다.

천주교의 초기 신앙인들인 이벽·이승훈·황사영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곳이다.

정약종과 그의 두 아들 정철상 · 정하상, 그의 조카사위이던 황사영이 죽음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수호를 위해 장렬하게 순교한 피가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정약용과 그의 중형 정약전의 실학사상이 자라났고,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 · 정학유 등의 계승,

다산의 외손자 윤정기가 외가를 드나들면서 실학사상을 꽃피게 했던 곳도 그곳이다.

더구나 다산이 해배한 뒤, 1818년에서 세상을 떠나던 1836년까지의 18년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당대의 석학들이 그곳을 출입하면서 다산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의 범위를 넓혀갔던가.

석천 신작과 대산 김매순의 학문논평의 서찰이 수없이 오고갔고,

홍석주 · 길주 · 현주 3형제와 다산과의 교유는 얼마나 성대했던가.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또 정조대왕의 외동사위인 해거도위 홍현주의 마현출입은

외로운 다산의 노년에 얼마나 위로되던 일이던가.

이런 모든 역사를 그냥 말없이 간직하고 있는 마현,

그러나 열수라던 한강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만 있다.

 

 

선각자의 혜안으로 역사와 백성을 보듬다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유교의 창시자는 공자였다. 뒤이어 맹자가 태어나 공자의 인(仁)에 대한 사상을 계승하고

더 확대하여 의(義)를 첨가하여 유교의 중심사상으로 확립했으니,

바로 인의(仁義)의 세계가 경(經)으로 집약되었다.

대표적인 경은 공맹의 철학으로 사서육경(四書六經)에 수렴되었다.

진(秦)나라 때에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만나 경은 대부분 일실되었으나,

한(漢)나라 때에 대부분 복원되고 새로운 주석으로 경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었으니,

본격적인 경의 연구인 경학(經學)이 학문의 맨 윗자리를 점하게 되었다. 때문에 한문(漢文) · 한자(漢字) · 한학(漢學) 등으로 한나라 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일에 인색할 수가 없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있는 다산초당.

이곳에서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의 저서가 이룩되고

다산학이 완성되었다. <사진작가 황헌만>


그러나 한나라 때의 경전해석학은 당나라에 이르러 매우 쇠퇴하여 불교의 연구를 따라갈 수 없었으나,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등장으로 유교의 부흥기를 맞게 된다.

정자의 철학을 계승하여 더 확대심화시킨 주자의 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새롭게 성리학(性理學)적 논리로 해석한 유학이 한 때 동양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로 자리잡아

고려말엽에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조선은 바로 주자학, 즉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정하고 국교(國敎)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사서육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주자학과 병칭될 수 있는 ‘다산학’을 수립해내기 이전의 조선 사회는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하고

절대시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18년의 귀양살이에서 유배 초기 강지읍내의 사의재(四宜齋)라는 주막집 방에서 연구하고

강진읍내의 뒷산에 있던 고성사에서도 연구는 계속했지만,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에 있던 윤씨들의 서재인 ‘다산초당’에서 다산학이 완성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행위와 실천보다는 이론 위주의 학문인 성리학에서 관념과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용적이며 실천적인 다산학을 연구했음은 조선 500년 온갖 학문 중의 금자탑이었다.

경세유표 · 목민심서 · 흠흠신서 등 경세학이 이룩되고 경학인 다산학이 수립된 다산초당이야말로

다산학의 산실임에 분명하다.

‘다산초당’은 생가인 ‘여유당’과 함께 조선 학문의 금자탑인 다산학의 양대 보금자리였다.

다산초당을 둘러보자. 소유권도 연고권도 전혀 없는 남의 산정(山亭),

다산은 그 산정을 자신이 소유주인 양 경관을 참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물을 끌어다가 비류폭포인

인공폭포도 만들고, 그 물이 고이는 곳에 연못을 파서 경치를 아름답게 단장했다.

흐르는 물을 받아 산자락에 계단밭을 일구어 미나리를 가꾸며 용돈도 벌고 반찬감도 장만했다.

바위 절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삼았고, 약천·다조 등 아름다움의 최상을 만들어

선비의 연구처로 삼았다. 귤동마을에는 가을이면 노랗게 유자가 익어가고,

마을 앞까지 밀려오던 구강포의 바닷물은 빠져나가면서 다산의 시름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초당의 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학승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백련사 절이 있어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에 넉넉하였다.


백성의 참 힘을 발견하다

강진 유배살이는 다산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시골의 무지렁이 백성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당하던 압제와

핍박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른바 다산의 사회시 및 참여시라는 그 많은 시들은

그 속에 핍박받는 인민들을 해방시키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그가 황해도 곡산도호부사 시절에 직접 판결했던 이계심(李啓心) 사건(시위주도자를 무죄석방한 재판)이

머리 속에 담겨 있어, 백성들을 등에 업고 투쟁하면 이기지 못할 싸움이 없다고 주장했던 생각이나,

‘목위민유(牧爲民有 · 통치자는 백성을 위하는 일을 할 때만 존재이유가 있다’(<원목>)라고 선언한

그의 사상은 역시 백성들의 힘을 가장 구체적으로 발견해낸 선각자의 철학이었다.

19세기 후반의 농민전쟁이나 민란 및 민중봉기로 타오르던 횃불은

그런 역사적 평가에서 연유했다는 고찰도 필요하리라고 생각해본다.

다산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강진읍내의 사의재에서 낮은 신분의 제자를 가르쳤다면

다산초당에서는 양반신분의 자제 18명을 가르쳐내, 이른바 ‘다산학단’이라는 학파를 형성해냈다.

쟁쟁한 제자들이 다산의 학문을 계승하여 망해가던 나라에 온갖 방법으로 복무(服務)했던 점은

또 다른 다산의 공로였다. 근래에 <다산학단문헌집성>이라는 자료가 책으로 간행되어,

이제야 본격적으로 다산이 조선후기 사회에 미친 학문적 영향도 제대로 밝혀질 기회가 오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조선시를 짓자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본을 ‘왜’라고 얕잡아보았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는 야만국이자 ‘뙤놈’의 나라라고 백안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은 한 · 당 · 송 · 명의 중국은 한없이 우월시하면서 시를 지어도 중국시,

글을 지어도 중국글을 지어야만 참다운 시이자 글이라고 고집하고 살았었다.

역사책을 읽어도 중국의 <사기> · <한서> · <송사> 등에 매달리면서

<삼국사기> · <삼국유사> · <고려사> 등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나라의 역사나 문학의 전통은 아예 백안시하고,

그저 미국이나 서양 학문과 사상에만 매력을 느끼는 현대인들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을 것인가.

 

중국의 모든 역사와 학문을 섭렵하였고 조선의 역사와 학문을 제대로 연구한 다산은

그렇던 당시의 지식인들 태도에 한없이 분노하면서,

“나는 조선사람, 즐거이 조선시를 짓겠노라”(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는 혁명적 선언을 감행하였다.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도 우리의 역사적 사실, 글을 지어도 우리식 글을 짓자는 그의 주장은

바로 오늘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고하는 주장이 아닐는지.

다산은 아들에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수십년 이래로 한 가지 괴이한 논의가 있어 우리 문학을 매우 배척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우리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눈도 주지 않으려 하니 이거야말로 큰 병통이다.

사대부집안 자제들이 우리나라 옛일들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의논했던 것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해도 엉터리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책이나 옛날의 어진 이들의 문집이나 저서들을 탐독하도록 권장하였다.

겸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적 내용만으로 시를 지은 유득공(柳得恭)의 시가 중국에서 간행되었고

중국인들이 즐겨 읽는다는 것까지 첨부하였다.

‘가장 한국적인 것만이 가장 세계적이다’,  ‘가장 조선적인 것만이 가장 보편적이다’라는 멋진 뜻을

다산은 익히 인식하고 있었으니 그의 혜안은 역시 높기만 했다.

내 나라, 내 민족, 우리 정서에는 눈을 감고, 세계화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밖으로 외국으로만 향하는 지식인들은 이점에서 한번쯤 다산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다산의 유적지를 다니면서

황해도 북쪽에 위치한 곡산(谷山)땅, 36세 때부터 2년 가까이 다산이 목민관으로 지낸 곳이다.

참으로 <목민심서>의 내용대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백성을 위해서만 선정을 베풀었던 곳이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땅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는 1801년 2월부터 10월까지 다산이 귀양 살았던 쓰라린 곳이다.

 

18년 유배살이의 시리디 시린 강진은 다산학의 산실이다. 그가 나고 자랐으며 학문을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나 지금까지 묻혀있는 마현은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다.

17~18세의 젊은 시절, 사또 자제로 형제들과 함께 지냈고,

그곳의 학자나 학승들과 어울려 지냈던 전남 화순군 화순읍은 그의 이상과 꿈이 키워졌던 낙토였다.

천주교에 관계했다고 정치적 반대파들의 드센 공격 때문에 귀양살이처럼 턱없이 좌천되어 생활했던

충청남도 청양군의 금정도찰방으로 지냈던 유적지는 흔적도 없어졌다.

실학자, 사상가의 위상에서 더 높은 현자의 대접을 받아야 할 다산 정약용,

그가 남긴 저서도 귀중하게 여기며 간행하고 번역해야 하지만, 그의 유적지도 그냥 버려져서는 안 된다.

다산을 가장 깊이 연구하여 가장 정확하게 다산학을 재발견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선생 한 분에 대한 고구(考究), 곧 조선역사의 연구,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심혼(朝鮮心魂)의 밝혀지고 가리워졌음과 전체 조선의 성쇠존멸(盛衰存滅)에 대한 연구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도 과장이나 잘못 판단한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학문적 대업을 이룩한 분이 또 누가 있는가.

때문에 필자는 40년에 이르도록 다산학에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다산이 그처럼 부패하고 부란(腐爛)한 조선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했듯이,

오늘의 우리 사회도 너무나 도덕성은 해이되었고 부패는 만연해 있다.

세상이 썩고 부란해질수록 다산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공직자들의 최고 덕목으로 다산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청렴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다산이 그처럼 강조했던 법과 제도의 개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이 대접받고

수사와 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인가.

내 나라, 내 민족, 내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나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세상이 올 것인가.

다산이 들었던 횃불을 다시 잡아 백성들이 주인이고,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인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다산의 유적지는 길이 보전되어야 하리라.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2008년 11월 21일, 11월28일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시리즈 끝.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ㆍ시리즈를 끝내며

 

“24명의 옛 선비 따라가보니 위대한 민족의 혼 느껴졌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이 지난해부터 집필해온 시리즈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이

지난달 48회로 막을 내렸다. 조선시대가 낳은 걸출한 선비 24명의 고향을 찾아

그들의 삶과 학문, 업적을 되돌아보고 학맥과 인맥을 밝혀 한국 유교사상의 전모를 소개한 이 시리즈는

관련 학계와 일반독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집필 계기와 탐방 소감, 후학에 대한 당부 등을 담은 박석무 원장의 마무리글을 싣는다.

 

 

퇴계 이황 당대에 세워진 도산서원 / 사진작가 황헌만

 

역사의 땅과 사상의 고향을 찾았던 2년

 

지난해(2007년) 정월 연재를 시작한 이래로 만 2년 조국의 산하를 누볐다.

멀리는 경상도 안동의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전라도의 보길도와 해남의 녹우당을 찾았고

가까이는 경기도 포천 · 용인 · 양평 등지의 유적지,

연천의 비무장지대인 민통선 안의 허목 유적지도 돌아보았다.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역사의 흔적과 사상의 흐름을 느끼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서있는 나무 하나, 구르는 돌멩이 하나에서도 역사와 사상의 숨결을 감지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들의 족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역사적 인물들이 살다간 땅, 그곳이 바로 역사의 땅이요,

그들이 남긴 숨결이 바로 민족의 혼이요, 사상의 고향이었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

 
필자는 아주 젊은 날부터 꿈이 있었다.

20대이던 1960년대 후반, 전라도 장성의 고산서원(노사 기정진의 사당)을 찾았을 때

우람한 담대헌에서 노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을 강론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세상에서 잊혀진 이런 역사와 사상의 고향을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70년대 초반 고등학교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으로 안동의 도산서원을 방문하고도

이런 역사의 땅과 퇴계사상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 땅에서 살다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삶의 족적과 사상의 대강을

역사현장과 연결지어 글로 쓰고 싶은 욕구를 지녔던 것이다.

 

5공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80년대 중반 역사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의 산하를 휘젓고 돌아다닌 결과가

그 무렵에 간행한 졸저 <다산기행>이라는 책이었다. 우선 다산 한 사람에 대한 족적이라도 찾아내서

사상까지 설명하자는 의도로 다산의 유배지를 모두 찾아다녔다.

위대한 실학자의 유적지를 찾아보고 살펴보는 일은 독재에 시달리던 그 시절,

유일한 위안이자 실낱같던 희망의 샘이었다. 다산이 권력에 짓눌려 귀양지로 내침을 당해

깊은 고뇌에 빠졌던 다산초당에서 우리가 당하던 고통의 얼마라도 상쇄할 수 있었고,

그가 저술에 몰두하면서 고통과 시름을 극복했던 경험을 전수받으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실의와 절망의 늪에서 조금의 용기라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땅과 사상의 고향은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으면서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미 찾아갔던 곳을 다시 가보고, 가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던 곳은 새로 찾아다니면서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글로 써서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 체험하는 그런 기회를 갖고 싶었다.

이런 염원 때문에 시작한 작업이 2년 동안 겨우 24명의 인물을 통해 땅과 사상을 소개하는데 그쳤다.

비록 시작에 불과한 일이지만,

독자들의 반응으로 보면 이런 작업이 의미가 있고 계속해야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의 염원과 열정이 식지 않고 시간과 건강이 허락한다면 계속해야 한다는 마음은 간절하다.

학자와 사상가, 높은 학식과 경륜을 갖춘 재상들, 나라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렸던 의인들,

그들이 역사를 개척하고 사상의 씨앗을 뿌린 유적지를 그냥 방치해두어야 되겠는가.

내 조국, 내 땅, 내 강산을 죽을 때까지 노래하자던 어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그런 유적지를 노래하고 현양하여 역사를 살려내야 한다.

과거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예견이 가능하겠는가.

 

왜 그곳을 찾아야 했던가

 

현실의 삶이 괴롭고 고달프거나 가야할 방향이 어두울 때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아니고 어디서 지혜를 얻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겠는가.

나라 정치가 혼란해 근심이 깊어지면

난세에 어떤 역량을 발휘하여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재상들의 경륜과 삶의 족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 번암 채제공 등의 정치적 능력은 그래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성리학의 쌍벽인 퇴계와 율곡의 족적은 의당 살펴야 했고,

도학자로 분류되는 하서 김인후, 창계 임영 등의 깊은 철학도 한 번쯤은 밝혀야 할 분야였다.

 

조선시대 학문의 주조가 성리학이었다면

성리학의 폐단을 밝혀 새로운 사유체계 수립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실학자들의 논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이래서 구암 한백겸,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존재 위백규, 다산 정약용 등의 유적지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실학자들의 학문과 철학이 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하여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시절,

성리학자들이 다시 위력을 발휘한다. 성리학의 논리를 위정척사의 논리로 변화시킨 학자들인데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등이 경기도 · 전라도 · 경상도에 자리잡고서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으니 이들에게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망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의혼도 찾아나섰다.

면암 최익현, 향산 이만도, 매천 황현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죽어갔는가의 사적도 살펴야 했다.  

시인이자 영의정이던 사암 박순, 서예가이자 학자 정치인이던 미수 허목, 시인 정치가 고산 윤선도 등도

그들의 전문성을 밝혀야 했다. 

 

기쁨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경기도 포천의 백사 이항복 묘소를 찾았을 때 노천에 서 있는 신도비의 또렷한 글자,

400년의 세월 속에 어떻게 그렇게 좋은 빗돌이 있어 그렇게 선명한 글자를 보여주고 있는지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양평의 한음 이덕형 묘소를 찾았을 때 비각까지 세워 정성껏 보존하던 신도비의 비면은

왜 그렇게 닳고 마모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는지 비애를 느끼게 했다.

일제 때 왜인들이 개울에 빠뜨려 그렇게 되었다는 후손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너무나 마모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퇴계선생의 빗돌은 질이 좋아 글자를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으나

율곡선생의 신도비는 글자가 마모되어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전북 부안의 반계서당은 찾아가는 길도 정비하지 않아 슬픔을 느끼게 했으나

전남 광양에 있는 황현의 묘소로 가는 길은 표지판을 여러 개 설치하여 찾기가 너무 쉬워서 기분이 좋았다.

 

우리를 가장 비탄에 빠지게 했던 유적지는 강화도의 영재 이건창 묘소였다.

당대의 문장가, 뛰어난 직신, 훌륭한 역사학자이던 영재의 묘소는

알아보기도 힘들게 빗돌 하나도 없었고, 찾아가는 길에 푯말 하나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정말로 너무한 일이 아닌가.

조선 최후의 문장가 묘소가 그렇게 보존되어서야 어디 역사적 유적지라고나 말할 수 있을까.

한창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역사적 인물들을 현양하는데 앞장서는 지방자치단체도 많은데

이런 기회에 문제가 있는 단체에서는 한 번쯤 그런 유적지를 살펴보고

더 옳게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조치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퇴계학의 산실이자 조선 성리학의 고향이다. 조선 최후의 문장가인 영재 이건창의 묘소(사진 왼쪽)는

영재의 묘소인지조차 알 수 없게 쓸쓸히 버려져 있다. / 사진작가 황헌만

 

내 것, 우리 것으로 돌아가자

 

젊은 시절 고등학교 교사 때에도 청소년들이 우리 것과 내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외국의 일이나 남의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에 언제나 가슴이 아팠다.

나이가 들어 대학에서 강의하면서도

요즘의 젊은이들은 내 것, 우리 것에 대하여는 너무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외국이나 남의 것에는 그렇게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지만 우리 것은 정말로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내 것, 우리 것도 이렇게 훌륭하고 멋지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이런 작업을 하게 된 첫 번째 동기다. 권력과 물질의 귀함에 정신을 팔고

정신적 가치나 역사성에 대하여는 오불관언을 표방하는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옛날 선조들도 그렇게 훌륭하였고, 우리 역사의 땅이나 고향도 그렇게 가치가 높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려주고 싶은 필자의 간절한 뜻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서양에 대하여나 일본에 대하여도 공부했지만

그는 애초에 중국과 우리 조선의 모든 학문과 사상에 달통한 학자였다.

내 것, 우리 것에 대한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그 다음에 외국의 사상이나 철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창조에 매진할 때

우리 것인 역사와 사상이 창조되는 것이지

내 것,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영어몰입교육에나 빠져들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이나 민족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것만 알고 거기에 빠지는 국수주의적 생각도 좋지 않지만,

밖의 것만 알고 우리의 안을 모른다면 국적 없는 국제미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 나라, 내 강산을 노래하고 우리 옛 선조들의 경륜과 의혼을 배워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일단의 작업이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찾았던 긴긴 여정이었다.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 경향신문, 2008 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