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암 채제공의 경륜과 충성심 | ||||||
당쟁 소용돌이서 국정을 바로잡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 받기가 어렵다. 운명하고 난 뒤, 관의 뚜껑을 덮고 나야만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다.
1720년에 태어나 80수를 누리고 1799년 초봄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명재상이자 경륜 높은 정치가에다 시문에도 뛰어났던 채제공은 죽은 뒤에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영조의 특명에 의해서 29세에 한림벼슬을 거쳐 34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가 돼 균역법의 폐단을 알아냈고 변방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국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벼슬은 1798년 79세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날 때까지 55년의 세월 동안 계속됐고, 영의정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영조·사도세자 · 정조의 3대에 걸친 명재상으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문신이 채제공이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세상이어서 어진 재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번암 채제공의 삶과 높은 경륜의 지혜를 살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 흩어져 살아가는 이유로, 고향인 청양읍에는 ‘상의사(尙義祠)’라는 조그만 사당이 있을 뿐 번암의 생가나 유적지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그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가 대표적인 유적지다. 또 근래에는 후손들이 경기도 수원시에 번암의 유품이나 유물의 대부분을 기증해 수원시의 ‘화성역사박물관’에 보존되고 전시될 예정이니 바로 그곳이 번암의 삶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될 것이다.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돼 총책임을 지고 영조의 장례를 치렀고, 정조의 치세를 맞아 본격적으로 국왕을 보필하는 희대의 재상으로 온갖 역량을 발휘해 격화된 시·벽의 당쟁 속에서도 국정을 제대로 바로잡는 중신의 임무를 다해냈다.
정조 재위 24년 중 23년을 보좌하고 정조보다 1년을 앞서 영면한 번암은 인신(人臣)으로서는 최대의 예우와 최상의 대접 속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다. 평생 동안 번암의 친구로 형조판서에, 홍문제학의 지위에,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로 세상에 큰 이름을 얻었던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 : 1723~1801)는 번암의 일대기로 정리한 ‘신도비(神道碑)’라는 장문의 글에서 그가 타계한 뒤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바로 하교(下敎)해 자신과 채제공의 깊은 인연에 대한 말을 전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하고 시장(諡狀)도 없이 시호를 올리게 해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해 3월28일 장례일에는 임금이 직접 뇌문(文:祭文)을 지어 각신(閣臣)으로 해 읽도록 했다. 신하에 대한 최대의 찬사이자 높은 칭송으로 세상에 없는 예우가 아닐 수 없었다. 파란만장한 번암의 일생은 500여 글자에 가까운 정조의 제문에 모두 열거됐으니, 다른 어떤 역사가의 평도 필요 없이 당대의 제왕이 내린 평가에 온전하게 그의 일생이 정리돼 있다.
번암은 24세 때 문과에 급제해 하급관료에서 영의정이라는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고 79세의 치사(致仕) 때까지 55년의 긴긴 세월 동안 영조 · 사도세자 · 정조로 이어진 세 조정의 큰 신하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이나, 그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삶을 마칠 때까지 번암은 온갖 충성심을 발휘해 세자를 보살폈다.
당쟁에 휩싸여 세자를 폐위한다는 영조의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졌던 1758년, 39세의 도승지 채제공은 죽음을 각오하고 뿌리치는 영조의 옷소매를 붙잡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하게 애걸복걸해 그 부당한 명령을 취소하게 했던 세자의 충신이었다. 1772년 53세의 판서 채제공은 21세의 세손(世孫)이던 정조의 우빈객(右賓客)이 돼 세손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이래,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의 정승으로 꼬박 10년을 보필해 정조의 치세를 이룩하게 했다. 호조판서를 맡아 세손을 돕고 다음해에 영조가 승하하자 국사를 책임지고 새로운 임금 정조를 보필한다. 사도세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구제하려 했으나, 1762년 아버지 상을 당해 조정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그런 끔찍한 뒤주 안의 죽음이 일어나고 말았다.
수십년간 영조의 조정에서 중신으로 일했던 채제공이었기에, 영조도 그를 너무나 잘 알았고 그의 능력을 크게 인정했다. 마침내 영조는 왕위를 세손인 정조에게 물러주기 직전, 채제공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정조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영조께서 제 손을 잡고 해주시는 말씀에, ‘나와 너로 해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은혜를 온전하게 해준 사람은 채제공이다.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지만 너에게는 충신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셨다” 라는 내용이었다. 죽어서 말이 없는 사도세자야 채제공을 평할 수 없었지만, 영조와 정조는 채제공에 대해 ‘순신’과 ‘충신’이라는 가장 명확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 (정약용의 ‘번옹유사’에 나오는 이야기) 번암의 나이 72세로 몇 년째 정승의 지위에 있으며 노재상으로 마음껏 정치의 경륜을 펴며 정조의 문예부흥기가 전성기에 이르던 때다. 70평생 동안 지었던 시문(詩文)을 정리해 ‘번암시문고’라는 이름으로 엮어놓자, 그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 시문집에 대한 평을 겸한 서문을 지어주었다. ‘어제어필(御制御筆)’이라고 앞에 쓰고 ‘서번암시문고(書樊巖詩文稿)’라는 글을 내렸다. 제왕이 신하의 문집에 서문을 짓고, 친필로 써서 하사하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 드문 일이자 신하로서의 영광은 어떻게 비교할 방법이 없는 일이다. 노재상의 글솜씨를 찬양하고 그의 인간됨을 칭찬한 전고에 없는 큰 문자다. 호주(湖洲) 이후에도 그만한 후손이 있으니 그 후손에 번암이 나왔음을 칭찬하고 높은 재상의 지위에서도 시문으로 뛰어났다는 내용은 얼마나 정조가 번암의 시문을 애호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60의 나이에야 정조와 번암은 함께 정치를 시작했다. 그래서 만년의 만남이 밝았다고 했다.
생전에도 정조는 모든 정치를 채제공에게 의뢰해 시행했다. 채제공의 문집도 임금인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했고, 또 책의 체제나 편찬도 왕명에 의해서 정리돼 그대로 따랐다.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대부분을 채제공과 의논했고, 채제공의 조언을 받아 집행했음을 문집의 소차(疏箚)조항이나 서계(書啓)나 헌의(獻議)에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정조시대의 대부분의 정책이 채제공과의 의논 속에서 나왔음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왕권을 제대로 강화시킨 채제공은 1793년 새로 설치된 화성유수부의 초대 화성유수가 돼 정조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 앞장선다. 화성유수에서 바로 영의정에 올라 1794~1796년 3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화성을 쌓는 성역의 최고 책임자인 총리대신이 된다. 그의 지도력으로 화성을 2년 9개월 만에 완공했다. 탁월한 영의정 채제공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비명에 보냈던 정조의 한을 그렇게 해서 풀어주었다.
이런 신하를 정조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정조는 생전에 시문집의 평을 써준 글을 문집의 서문으로 삼아 국가에서 간행하도록 채제공 장례일의 치제문에서 엄명했다. 문집을 교정하고 정리해 인쇄만 하면 간행되게 했으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에 49세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해인 1801년 신유년에 신유옥사가 일어나 채제공 일파는 온통 풍비박산으로 궤멸되면서 문집간행도 중지됐다.
1801년 가을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신서파의 원로로 지목받아 채제공은 모든 관작이나 시호까지 추탈당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정조 재위 24년 동안 큰 힘을 못 쓰던 벽파들이 정조의 죽음으로 재등장, 반동보수로 우회전하여 일대 보복정치를 감행해 ‘번암집’은 간행이 중단돼 다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ㆍ독과점 철폐 경제 살린 명재상
영조에서 정조로 이어지던 조선후기, 이른바 문예부흥기라는 밝은 역사의 시대를 이끌었던 노재상 번암대감이 세상을 뜨고 정조가 승하하자 밝고 찬란했던 역사는 큰 서리를 맞으면서 반동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오랫동안 궁중의 안방에 묻혀지내던 영조의 계비 정순대비가 11세의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면서 모든 실권이 그에게 돌아가자 바야흐로 벽파의 시대가 왔다. 1762년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뒤주에 갇혀 죽게 했던 주동자들이 대체로 벽파에 속한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할 일을 한 적이 없고 영조의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던 채제공 일파가 다름 아닌 시파였다. 시벽의 싸움은 대단한 당쟁이었다. 벽파의 방해로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겪고 겨우 왕위에 오른 세손 정조는 자연스럽게 시파를 선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채제공 · 이가환 · 정약용 등 시파의 유능한 신하들이 정조를 보필하면서 정조의 치세가 왔다.
그러나 정조의 승하는 이런 정치판도를 바꿔놓았다. 어린 순조를 대신한 정순대비의 집권으로 시파는 신서파, 즉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종교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파와 공서파, 즉 서양의 모든 것은 ‘사(邪)’라고 규명하며 사를 물리치기 위해 신서파를 공격해야 한다는 정파로 갈리게 되었다. 그 해 벽두부터 정순대비의 ‘척사윤음’이 내려 천주교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은 역적으로 몰아 코를 베어 죽여야 한다는 법령이 반포되기에 이른다. ‘신유옥사’라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이 진행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죽은 사람만 300여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이가환 · 권철신 · 이승훈 · 정약종 등이 옥사하거나 참수 당했고 정약용 형제 등 수많은 사람이 귀양가는 핍박을 받아야 했다. 1801년 가을의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심지어 채제공까지도 관직을 추탈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역사의 반동은 또 다른 힘에 의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 신유옥사 이후 18년째에 다산 정약용은 귀양지에서 돌아왔고, 23년째인 1823년에 채제공은 영남 선비 1만여 명의 상소에 의하여 다시 모든 관작이 복권되고 신원될 수 있었다. 그 때에야 ‘번암집’도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된다. 번암은 정승의 지위에 번갈아 오르며 최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1791년 신해년에는 조선왕조 상업사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진다. 바로 채제공이 도고법(都고法)의 폐지를 주장한다. 독점적인 매점(買占)행위가 ‘도고’인데 정부에서 인정해준 ‘육의전’ 이외의 ‘시민도고법’이라는 독점행위가 난무하여 상거래의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고, 힘없고 약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거래가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 채제공은 이런 악폐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임금이 이것을 받아들이자 마침내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획기적인 조치가 이루어져 조선후기 상업사에 큰 변혁을 가져오기에 이른다. 모두 채제공의 정치적 경륜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특히 연암 박지원 일파인 북학파에서도 중국으로부터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이용후생법을 배워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던 때가 그 무렵이다. 박제가의 ‘북학의’ 저술이 있던 시절이다.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열에서도 서양의 과학사상은 반드시 수입하여 이용후생의 방도가 강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른바 ‘신서파’가 그들인데 매우 진보적인 그룹이었다. 이가환 · 정약용 · 이기양 · 권철신 등이었고, 이들의 후원세력이자 지지세력의 중심이 채제공이었다. 뒷날 이가환이나 정약용도 그랬듯이 채제공은 서양사상인 천주교를 신앙으로 믿는 문제에는 절대로 반대입장에 있었다.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이용후생의 논리가 그 무렵 그 정도로 도입되어 발전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채제공의 힘이 가장 크게 적용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홍국영의 세도에 억울하게 당한 곧고 바른 사람은 모두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케 했던 것도 채제공의 노력에서 왔고, 유능한 인재들을 강력히 추천하고 발탁하여 제대로 행정과 통치가 이룩되도록 임금을 설득하는 경륜을 지닌 사람도 채제공이었다. 그만한 일세의 정치가 채제공의 유적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행히 근래에 6대 후손인 채호석(蔡虎錫)씨와 그의 부인 김양식(金良植) 시인이 어렵게 보관해오던 유물과 유품을 모두 수원시의 화성사업소에 기증했기 때문에 국보급 유물들을 접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 일행은 화성사업소의 김준혁 박사 안내로 번암의 유적지를 찾아나섰다. 정조는 자신의 영정을 그리게 한 후, 어명으로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궁중에 보관하고 여본은 본가에서 보관토록 하였다. 당대의 화가 이명기가 어진을 그린 솜씨로 73세의 노재상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렸다. 살아서 천하를 호령이라도 하는 듯한 품위 있고 유순한 모습이 너무나 너그럽게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새것처럼 온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는지,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에 감복할 뿐이다. 남을 해롭게 하거나 사물을 해치려는 생각은 평생에 아들처럼 귀여움을 받았던 정약용은 평생의 은혜를 이 화상찬으로 갚았다. 42세 연상이던 번암, 정약용은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10세 연상인 번암을 가장 경륜 높은 정치가로 여기며 아버지나 스승처럼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정약용의 꿈은 채제공 같은 국가 원로이자 대신이던 재상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뜻과 같지 않아, 재상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희대의 학자로 남고 말았다. 의정부 영의정, 경연 · 홍문관 · 춘추관 · 관상감의 영사(領事)를 지냈고 규장각 검교제학을 지낸 채제공에게 문숙공(文肅公)이라는 시호를 증한다는 내용이다. 영의정에 문숙공, 그만하면 최고 정치인·문신에 맞는 시호임에 분명하다 참으로 더운 복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던 번암대감의 묘소에 올랐다. 그만한 학식·국량·인품으로 조선 500년의 대표적 재상의 묘소에 참배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바라던 소망이었다. 그래도 볼품 있고 소박하게 꾸며진 묘역이나 묘소, 그렇게 서운한 생각은 없었다. 입구에 비각으로 단청된 건물 앞에 ‘어사뇌문(御賜뢰文)’이라는 제목 아래, 480여 글자에 이르는 장문의 애도문이 있었다. 장례일에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매장하기 전에 낭독하고 뒤에 묘소 앞에 비로 세우도록 명령하였기에 지금은 ‘뇌문비(뢰文碑)’라고 알려진 세상에 드문 빗돌이다. 번암의 죽음이 얼마나 애통했기에 일국의 제왕이 직접 애도문을 짓고 글씨까지 썼다는 것인가.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채제공은 크고 높았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도 ‘문숙공 채제공의 장례일에 치제한 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규장각 신하를 보내어 그 영전에 대신 영결을 고하게 하노라” 라고 풀어쓰고는 네 자로 된 120줄의 애도시이니 480자로, 500여 글자에 이른다는 정조의 말에 부합하고 있다. 세손시절부터 재위 24년 동안 가장 가깝게 믿고 의지하며 함께 30년의 정치역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우뚝 홀로 서서 어떤 세속의 일에도 흔들림 없던 군자(君子)라고 추앙하는 글을 썼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한 ‘홍재전서’에 온전하게 실려 있으니 채제공의 일생은 뛰어난 학자군주 정조의 글솜씨에서 그대로 살아있게 되었다. 인쇄에 부쳐/ 장차 오래 전하게 하려네 친히 뇌문(뢰文)을 지으니/ 오백여 말일세 평소의 일을 두루 서술하니/ 나의 글에 부끄러움은 없네 아들 홍원(弘遠)에게 이르노니/ 선친 욕되게 말고 그대로 따르라.” 신도비도 웅장한 꾸밈도 없는 단조롭고 아담한 번암의 묘소, 정조대왕의 뇌문 속에 그의 일생이 살아있고, 문집과 왕조실록, 홍재전서에 시와 문이 전해지고 있는 한, 그는 조선의 탁월하고 뛰어난 명재상으로 길이 빛나리라. |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경향, 2008년 08월22일/ 08월29일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41, 42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45)-(46) 하서 김인후 (0) | 2008.04.13 |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43)-(44) 영재 이건창 (0) | 2008.04.13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39)-(40) 면암 최익현 (0) | 2008.04.13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37)-(38) 고산 윤선도 (0) | 2008.04.13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35)-(36) 성호 이익 (0) | 2008.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