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후의 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사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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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객들이 첫손 꼽은 강화학파 효장 그 땅 어디에 조선의 사상과 혼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모든 곳 중에서도 강화도는 특별하다. 고려시대에는 몇 대에 걸쳐 왕도(王都)로서 역사의 한복판이기도 했으나 고려인의 넋을 지키고 국가를 지켜내려던 항몽정신의 본거지였고 삼별초의 피나는 항쟁정신이 그대로 간직된 역사의 땅이다.
민족혼이 거세게 고동치기도 했지만 병자호란의 국가적 비극에는 얼마나 많은 충신열사들이 몸을 던지고 목숨을 끊으며 조선의 혼을 발휘했던 곳이던가. 의기가 펄펄 넘치던 투쟁의 혼만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정통의 유학사상에서는 크게 대접받지 못하던 소수파의 학문이면서도, 끝내는 크게 학문적 성과를 이룩해낸 ‘양명학’이라는 큰 학맥이 생성, 발전돼 우리 학술사에 얼마나 큰 빛을 발해주었던 곳인가. 포은 정몽주의 후손이자 정승 정유성의 손자로 효종의 부마 정제현(鄭齋賢)의 아우였던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가 강화도의 하일리에 숨어살면서 제자들을 모아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유로 양명학, 즉 ‘강화학파’라는 독특한 학파가 이룩되기에 이르렀다. 대대로 이름난 벼슬아치나 학자들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재(寧齋) 이건창은 字가 봉조(鳳藻:鳳朝)요,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이었다. 영재의 할아버지 사기 이시원(沙磯 李是遠: 1790~1866)은 그의 아우 이지원(李止遠)과 함께 외국의 군대에 함락된 병인양요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 형제가 나란히 목숨을 끊어 자결했던 당대의 의인이다.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른 고관대작으로 나라를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린 할아버지의 의혼을 이어서 영재도 나라를 위해서는 의로운 벼슬아치로 살았지만 끝내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명성을 얻어 의리와 문장이 함께 빛나는 역사의 땅으로 강화도를 자리매김해주었다.
정종의 별자(別子)에 후생(厚生)이라는 분이 덕천군(德泉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들은 왕통을 이은 집안을 제외한 전주이씨 집안에서는 크게 현달한 사람이 많은 유명한 집안이었다. 인조 때의 판서에 오른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 영의정에 오른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형제가 대표적으로 유명한 분들인데 석문의 후손에는 높은 벼슬의 후손도 많았지만 특별히 뛰어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 학술사에 큰 공헌을 남긴 분들이 많았다. 이광사 · 이광여 · 이광명 등이 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실학자로서 크게 알려진 이긍익 · 이충익 · 이영익 등도 모두 그 집안 출신들이다.
연려실 이긍익은 이광사의 아들로 ‘연려실기술’이라는 대저를 남긴 분이었고, 이충익-이면백-이시원-이상학-이건창-이건승(李建升: 1858~1924)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계통은 바로 이건창의 집안이 어떤 가문인가를 그냥 짐작하게 해준다.
강화도 초봉산(椒峯山) 아래에 살면서 초원(椒園)이라는 호로 불리던 이충익은 벼슬보다는 학자로 높은 이름을 얻었고, 그 아들 대연 이면백(垈淵 李勉伯)은 진사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고 다산 정약용 등과 교류가 있었던 당대의 학자였다. 그 아들이 이시원 판서, 판서의 아들이 이상학(李象學)으로 양산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이 이건창 · 이건승이고 그의 당질이 난곡 이건방(蘭谷 李建芳)으로 위당 정인보의 스승이었다. 모두 양명학을 계승한 강화학파의 주요 멤버들이었다. 가장 어렸던 이건방은 1861년생으로 193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찾은 강화도의 의리와 학문은 크게 보이지 않고 매우 쓸쓸하기만 했다.
시원하게 뚫린 오후, 우리는 강화도로 건너가 이건창의 고향 마을 사기리를 찾았다.그곳이 어떤 곳인가. 대대로 양명학을 배워서 가르치던 곳이요, 충정공 이시원이 과거에 급제해 이조판서에 오르고 나라가 위급해지자 아우와 함께 자결했던 의향이 아닌가. 이시원의 손자 이건창 형제들이 태어나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조선의 당쟁사를 가장 정직하고 바르게 정리했다는 이건창의 저서 ‘당의통략’이라는 명저가 저술된 곳이다. 다행히 강화군 당국의 배려로 터만 남았던 그곳에 초가집으로 새롭게 복원해 영재 이건창이 살았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이야 모두 농토로 변한 곳이지만 당시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해변가 마을이었다 한다. 이곳 어디에 영기(靈氣)가 서렸기에 그만한 인물들이 태어났을까. 영재의 생가는 마을의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영재의 생가를 살피려 왔다는 것을 알아챈 탓인지 묻지 않은 말을 했다. “이 집의 앞길은 아무나 그냥 지나는 곳이 아니여. 대감님 집이기에 말이나 가마는 타고 지나가지도 못하고 반드시 내려서 걸어가서도 안 되고 기어가야만 되었어. 우리 어머님이 시집오시며 가마를 타고 오시다가 이 집 앞에서는 내려 그냥 기어서 오셨다고 들었어!” 70이 넘은 어떤 노인의 말씀이었다. 이 한마디 말에 그때 그 시절 집안의 영화가 어느 정도였나를 금방 짐작하게 해준다. 이시원이 이조판서, 아들 이상학이 양산군수, 손자 이건창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해 암행어사를 지내고 황해도 관찰사와 공조참판에 이른 집안이니 어떻게 홀대할 방법이 있었겠는가. 후손이 거처하지 않고 빈집으로 외형만 초가집이지 혼과 삶이 없는 집이어서 너무나 쓸쓸했다. 그 집에서 멀지 않은 건평리(乾坪里)의 영재 선생의 묘소를 들렀을 때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말문이 막혔다. 강화학파의 학맥을 잇고, 판서 이경직의 핏줄을 이어 할아버지 이조판서의 무릎에서 자랐고, 자신이 공조참판에 올라 조선후기 최고의 문장가이자 ‘당의통략’의 저자로 그만한 명성을 얻은 위인의 묘소가 이렇게 버려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아무리 도가 무너지고 인심이 변했다 해도 이렇게 돼도 되는 것인가. 생전에 사람 구실 못하고 거지로 살다가 죽어간 사람의 묘소라고 해도 이렇게는 버려두지 못했을 것이다. 문화재 당국이나 행정 당국은 무엇을 하는가. 아니, 영재 이건창의 묘소가 어떤 민간인의 집 뒤꼍의 풀에 가려서 묘소인 것도 알 수 없게 버려져 있어야 되느냐는 것이다.
끝내 망국의 비운을 막지 못하고 나라는 망해버렸다. 의혼으로, 학문과 문장으로, 꺼져가던 조국의 빛을 회복하려 노력했던 대단한 인물들이 영재 곁에 모여 있었다. 해학 이기,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은 영재와 함께 나라를 걱정했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그리고 영재가 강화도에서 이웃에 살던 고관 출신 두 친구를 함께 거명했다. 이계 홍양호의 후손인 홍승헌, 하곡 정제두 6대종손인 정원하는 두 분 모두 참판의 지위에 오른 분인데 이들은 세 사람이 연명해 상소를 올리며 나라를 제대로 바로잡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일 때문에 모두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런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기에 사후의 영재는 외롭지 않았다.
아우 이건승의 노력으로 영재의 문집인 ‘명미당집’ 20권이 중국에서 활자로 간행될 수 있었고, 김택영은 문집의 서문을 지어 영재의 인품과 문장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내렸고, 매천 황현은 영재의 죽음에 제문과 만사를 지어 슬픔도 표했지만 인물에 대한 평도 올바르게 내렸다. 이건승은 죽은 형의 행장을 지어 일생을 소상하게 밝혔고, 친구 이조참판을 지낸 홍승헌은 영재의 묘갈명을 지어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의 일생을 대체로 바르게 평하고 있다. 조선 500년간 당 · 송나라의 문장을 이은 조선인으로는 월사 이정귀 · 계곡 장유 · 농암 김창협· 연암 박지원 · 연천 홍석주 · 대산 김매순 등 5~6명뿐인데 이들을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과 김택영 두 사람이라고 했다. 김택영도 영재의 문집 서문에서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는 홍석주와 김매순인데 이들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이건창으로 조선 후기 3대가라고 지목했다. 조선 500년을 대표하고 조선의 끝자락을 상징할 수 있는 문장가가 바로 이건창이라는 것을 당대에 함께 글을 짓고 세상을 논했던 친구들이 사심없이 내린 평가였다면 그 이상의 어떤 평가가 필요하겠는가. 나라가 망하자 친구들과 함께 자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죽기가 쉬운 일인가. 마침내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들인 홍승헌 · 정원하 등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으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나, 이제는 종적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탐관오리 벌벌 떨게 한 암행어사, 백성의 아픔 절창하다 전라도 구례에서 살았던 매천 황현도 지기지우였으나 살아가던 곳의 거리가 서로 멀어 자주 만나거나 어울릴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서울과 강화도는 멀지 않은 곳이요, 벼슬살이에 서울 생활이 잦았던 이건창은 활동무대가 서울이던 김택영과는 자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기록에서 강화학파의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고, 또 강화학파라는 이름을 명명한 민영규 교수는 김택영이 제대로 이건창을 알지 못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도 있으나 무엇으로 판단해도 김택영은 영재의 지기지우였다.
고려의 김부식 · 이제현 두 문장가에 조선의 장유 · 이식 · 김창협 · 박지원 · 홍석주 · 김매순 · 이건창 등 7인을 더해 ‘여한9가’, 즉 고려와 조선의 9대 문장가를 선정하였다.
나라가 망할 무렵 중국으로 망명해버린 김택영은 자신의 제자인 개성의 왕성순(王性淳)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라는 망했지만 역대 문장가들의 글은 없어지지 않고 세상에 영원토록 전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왕성순은 김택영의 명을 받아 그 책을 간행하였다. 자신의 스승인 김택영의 글을 뽑아 함께 넣어 ‘여한10가문’이라는 책으로 중국 양계초의 서문을 받아 1921년 중국의 남통에서 간행하였다. 이른바 ‘여한10가문’이라는 책이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김택영에 의하여 뽑힌 조선 7대 문장가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건창이 조선 7대 문장가로 뽑힘은 김택영 개인의 의견은 아니었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해학 이기도 이건창은 문장가의 반열에 오름을 말하였다. 당대의 공론에 의하여 그러한 선발이 가능했으리라 믿는다. 문장가와 시인이기 이전에 그의 마음에는 뜨거운 애국심과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라의 위급한 때를 당해 할아버지가 자결하던 때가 영재의 나이 15세였다. 이미 학문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고, 세상물정을 대부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시절이다. 그 해에 문과에 급제, 조선 500년 최연소 문과 급제자임도 그의 자랑이었다.
영재가 살아가던 시대가 어떤 때인가.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기 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쳤고, 임오군란에 갑신정변, 갑오동학운동에 갑오경장, 급변하던 시국, 마침내 을미년에는 민비시해라는 전대미문의 국란이 일어났다. 왕비가 외국인의 침입으로 살해되는 비통한 시절, 그에게 어찌 나라에 대한 아픔이 없었겠는가. ‘전가추석(田家秋夕)’이나 ‘협촌기사(峽村記事)’ 같은 절창의 시는 바로 다산의 ‘상시분속(傷時憤俗)’,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시들을 연상케 해준다. 국가나 인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병들어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인민들의 아픔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핍진하고 생동적인 현실비판시를 저작하기에 이른다. 인민의 아픔에 한없이 속상해하면서도 그가 지나거나 목격했던 조국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혼이 서린 곳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곱고 아름다운 시어로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암행어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서 탐관오리들을 한 치의 양보 없이 무섭게 징치하는 무서운 어사였다. 온갖 위계와 꼬임으로 탄핵에서 벗어나려던 수령들의 농간에도 전혀 흔들리거나 굽힘없이 참으로 통쾌한 어사 임무를 수행하였다. 오죽했으면 고종황제가 도신(道臣)이나 수령을 제수할 때 올바른 목민관 생활을 당부하면서 “만약 잘못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건창을 암행어사로 파견하겠다”고 하고, 벼슬아치들이 암행어사 이건창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겠는가. 노론계와는 대립관계였고, 그 때문에 노론계와 반대파이던 남인계와 소론계는 가까웠다. 양명학의 원조 정제두의 손서에는 이광명(李匡明)과 신대우(申大雨)가 있었다. 이광명은 이건창의 5대조였고, 고관대작이던 신대우는 다산 정약용과 가까웠던 석천 신작(石泉 申綽) 형제들의 아버지였다. 때문에 이건창의 선대는 정약용 집안과도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화학파의 이긍익 · 이충익 · 이영익 등이 독실한 실학자였고, 다산 일파도 뛰어난 실학자였음을 상기하면 이들의 교류는 너무나 당연했다. 특히 노론들과도 학문적 교류에 소홀하지 않았던 정약용의 입장에서 보면 실학자들과 교류는 정말로 당연했다. 교류의 구체적인 증거가 많지 않으나 짐작이 가는 점들은 매우 많다. 이건창도 그런 시를 많이 읊었다. 정약용이 지나거나 목격했던 강산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땅을 놓치지 않고 시를 읊었듯이 이건창도 그가 지나간 강산이나 역사적인 땅에 대한 시를 많이 지었다.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읊은 시, 암행어사로 다니면서 목격한 백성의 아픔을 노래한 시는 대체로 다산풍이다. 한때 전라도 보성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면서 지났던 전라도의 명승지나 유적지에 대한 이건창의 기행시는 절창이 아닌 것이 없다. 그는 그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말 호남의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노사 기장진의 유택을 찾아가 읊었던 시, 그 유명한 면앙정 송순의 정자 면앙정에서 읊은 시들은 지금 읽어도 명작임을 금방 이해하게 된다. 대단한 시인이었다. 곧고 바른 그의 성품과 높은 기개 때문에 당로의 고관들과는 언제나 마찰을 빚어 벼슬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30년의 벼슬살이에 참판의 지위에 올랐으나 47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타계하면서 애석한 생애를 마쳤다. 대원군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권신들과도 늘 상반되는 견해로 귀양살이를 떠나거나 고향에 칩거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 불우한 시기에 그는 시로 마음을 달래고 저술로 울분을 풀었다. 그의 뛰어난 산문이나 시들의 대부분이 그런 시절에 완성되었으니, 불우한 시절이 있었기에 그의 문장과 시가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것도 사실이다. 서인과 동인으로 싸우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끝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4색당파라 일컫지만, 거기도 갈래갈래 나뉘어 누구도 제대로 가닥을 추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당쟁의 계파다.
소론 계열의 이건창도 당색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공정한 안목과 비판정신으로, 당색이나 가문의 계통에 구애받지 않은 당쟁관계 저술이 바로 ‘당의통략’이라는 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일단 조선의 당쟁사를 거론할 때 이 책을 참고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충익-이면백-이시원으로 내려오는 역사학에 대한 추적이 바로 ‘당의통략’에 간추려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건창은 자신의 조부 이시원의 행략(行略)이라는 글에서 할아버지가 보학에 뛰어났음을 언급하였다. 지나간 역사나 남의 집안 내력을 그만큼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그런 내용을 많이 듣고 알았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가학(家學)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 가정의 학문에서 이건창 같은 뛰어난 문장가 · 역사가가 나올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남한 땅에 단군의 유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 강화군 문화원 양태부 사무국장의 안내로 돌아본 강화도는 대단한 역사의 땅이다. 하곡 정제두의 묘소도 둘러보고 이건창의 유적지를 살펴보면서 또 하나의 제안이 생각났다. 형인 이건창의 유적지가 제대로 복원되고 아우 이건승의 역사적 유적이 복원되어야 한다. 그만한 애국지사, 학자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야 되겠는가. 문화재 당국은 제발 영재의 묘소를 제대로 단장하고 이건승의 유적도 제대로 찾아내 새로 꾸며야 한다고 여긴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 계명의숙을 창설하여 육영에 힘쓰고 ‘서행별곡(西行別曲)’이라는 우국개세의 국문시를 지은 그의 업적은 반드시 재조명되어야만 한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 매천 황현은 3년이 지나기 직전, 구례에서 강화도까지 천리길을 걸어서 문상을 왔다. 슬프고 애처로운 제문과 만사를 지어 가지고 와서 영위에 고해 바쳤다.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그런 나라의 슬픔까지를 영재의 죽음에 함께 담은 너무도 슬픈 제문이었다. 뒤에 매천은 ‘매천야록’이라는 뛰어난 역사책에 이건창의 졸기(卒記)를 올렸다. 먼저 죽은 뛰어난 문장가 친구를 그렇게 해서 이별하였다. 그래서 벼슬길이 순탄치 않아 급제한 30년 만에야 가선대부(참판)의 위계에 올랐다. 갑오년 6월에 통곡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 중풍으로 시골집에서 죽었으니 47세였다. 소식을 들은 모두가 애도를 표했다. 이건창은 문장이 고아하여 홍석주와 어깨를 견줄 만하였다.”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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