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39)-(40) 면암 최익현

Gijuzzang Dream 2008. 4. 13. 18:49

 

 

 

 

 의병장 최익현의 기개와 애국심  

 

 

서슬퍼런 권력에 들이댄 비판의 날

도학자(道學者) 이항로(李恒老)에게 수학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은 조선이 망해가던 무렵,

가장 투철하게 충의(忠義)의 유학정신을 발현하여 뛰어난 애국심으로 나라에 목숨을 바친

대표적 충신 중 한 사람이었다. 최익현이 순국한 4년 뒤에 나라는 끝내 망했지만

그가 나라를 위해 바친 열혈의 애국심은

우리의 조국이 이어지는 한, 영원한 민족의 사표로 길이 추앙받기에 넉넉한 투혼이었다.

면암 유택의 안채(위)와 화서 이항로 선생의 친필인 ‘면암’(아래).

뒤에 최익현의 호가 되었다. (사진작가 황헌만)


 

최익현은 본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경주 최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순조 33년인 1833년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비범하고 눈빛은 별처럼 빛났으며,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에 제비꼬리 같은 턱을 지녀서 어린이 때의 이름이 기남(奇男)이었다고 한다.

 

여섯 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한 면암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경기도 양근(지금의 양평군)의 벽계리에 은거하며

당대의 도학자로 큰 명성을 날리던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유교경전에 대한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소년이었지만 비범함을 알아차린 화서는

면암(勉菴)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기증했고, 그 ‘면암’은 평생 동안의 호가 되었다.

23세인 1855년은 철종 6년인데, 그해에 면암은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니 14세에서 23세에 이르는 10여 년간은

화서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과거공부에 열중했던 수학기였다.

영특한 면암은 이때 이미 높은 수준의 학문에 이르렀고 벼슬길에 올랐지만

여가에는 언제나 독서와 궁리(窮理)에 게으르지 않아 연령이 높아질수록 학문도 넓고 깊어졌다.

 

특히 도학자 화서의 학문과 인격에 깊은 존경심을 지녔던 면암은

 ‘힘쓰는 사람’이라는 호를 잊지 않았고,

15세에 화서가 직접 글씨를 써서 내려준 ‘낙경민직(洛敬민直)’이라는 네 글자를 평생토록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중국의 송나라 때, ‘경(敬)’을 크게 강조한 정자(程子)의 사상과

‘직(直)’을 주장한 주자의 사상을 지키며 살았다는 뜻이다.

‘탐적전말(耽謫顚末)’이라는 면암의 글을 읽어보면,

스승 화서의 영향이 면암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면암이 41세이던 1873년 대원군의 정치관여를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리고 탄핵 받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때에 지은 것으로,

왜 자신이 그런 무서운 상소를 올릴 수밖에 없었나를 설명한 내용이다.

‘탐라도에 귀양 오게 된 전말’을 기록한 내용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 면암은 23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스승 화서를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자,

화서가 두 가지 교훈을 주셨다는 것이다.

 

“첫째, 이제 포의에서 나라의 벼슬아치가 되었으니 운명이 바뀌었다.

순조롭게 벼슬하면 당연히 재상의 지위에 오르게 될 텐데,

책읽기에 부지런하여 뒷날 큰 벼슬살이의 밑거름이 되게 하라.

남의 유혹에 끌려 가볍게 논박하는 일은 절대로 삼가라.

 

둘째, 임금의 신하가 되어 마땅히 상소를 해야 할 사건이 있게 마련인데,

입을 꼭 다물고 묵살하며 그냥 국록이나 타먹는 일은 매우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다”

라는 교훈이었다고 한다.

면암은 일생 동안 화서의 이 교훈을 잊지 않고 몸소 행하고 실천했던 착실한 제자였음이 분명하다.


대원군을 하야시키다

12세의 어린 임금 고종이 등극하자 천하의 권력은 모두 한때 파락호이던 대원군에게 넘어갔다.

대원군 10년의 권력 앞에 누가 감히 잘못과 부당함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30세에 신창(충남 아산시)현감의 외직으로 나갔으나 충청감사의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벼슬을 던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면암은 또 화서 선생을 찾아뵙고

“주자서를 읽은 사람의 기개를 지켰다”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34세에 언관(言官)의 지위인 지평(持平)이 되자 바로 6개 조항의 상소를 올리고,

36세에는 사헌부 장령이라는 중책을 맡자 바로 대원군의 정책에 비판을 가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른바 ‘무진소(戊辰疏)’인데, 토목공사 중지 · 수탈정책 중지 · 당백전 철폐 · 사문세(四門稅) 폐지를  주장하여 천하에 최익현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조야에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은 상소가 그것이니, 당상관 돈령부도정이라는 정3품의 벼슬에 오른다.

 

이 상소 5년 뒤 1873년은 면암 41세이자 고종 10년, 대원군 집권 10년 차로,

조야에 원성이 자자하여 누군가가 한 차례 소리를 내야 할 때였다.

바로 면암은 불속으로 섶을 들고 들어가듯,

대원군은 임금의 아버지로 대접이나 크게 받아야 할 처지인데 국정에 관여하여

나라가 어지럽기 그지없다면서 대원군의 권력남용을 통렬히 비판하는 ‘계유소(癸酉疏)’를 올렸다.
마침내 화약고를 터트린 것이다.

 

22세에 이른 고종, 친정을 담당하기를 원하던 때와 맞물리고,

그것을 극히 바라던 민비가 학수고대하던 때여서 면암의 입장은 한편으로 위대했지만

한편으로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6월에 상소가 올라가고 8월에 면암은 우부승지와 동부승지로 제수되었고,

바로 이어 재신의 지위인 호조참판에 올랐다.

 

물론 면암은 모두 사직소를 올리고 벼슬에 임하지 않았으나,

끝내 대원군은 양주 땅으로 하야해 권력을 잃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해 11월8일 면암은 반대파들의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천륜(天倫)을 이간시켰다는 죄목으로

머나먼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정조 시절 영의정이던 채제공 이후, 남인은 몰락하여 대관(大官)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대원군의 집권으로 몇 사람의 남인 정승이 나오고 비교적 세력이 확대되던 때였는데,

면암의 상소와 이에 따른 대원군의 하야로 남인세력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아야 했다.

 

대원군 탄핵상소 직후 호조참판의 높은 지위까지 제수받자,

남인들은 면암은 ‘민노(閔奴)’, 즉 민비 측의 종이라는 악명으로 숱한 비판을 가하게 된다.

이 문제는 면암과 동시대를 살았던 22년 후배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어준다.

 


‘매천야록’에 면암의 입장 해명

무섭게 역사적 필봉을 휘둘렀던 황현은 그의 붓 아래 완전한 사람이 없었지만,

유독 면암에 대해서는 극히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905년은 면암이 73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망했다고

고관대작들은 물론 애국지사들이 경향에서 울분을 토하며 자결을 감행했다.

충정공 민영환, 정승 조병세, 판서 홍만식 등 저명한 고관들이 자결하자

황현은 그들을 애도하는 5애시(五哀詩)를 지었다.

두보의 8애시를 모방한 시로 자결한 세 분 이외에 살아 있는 최익현과,

이미 세상을 떠난 영재 이건창을 합한 다섯 분을 애도했다.

 

5명을 맞춰야 하는데, 세 분 이외에 죽은 이건창은 포함시킬 만한 인물이고,

면암은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나라를 위해 죽을 사람임이 명백하기 때문에 포함한다는

기막힌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면암에 대한 황현의 기대와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호조참판에 오른 3년 뒤인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면암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앉아 조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다섯 가지 내용을 상소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도끼로 목을 베어달라는 무서운 기개의 상소였다.

매천 황현은 이 대목에서 고종과 민비 일파들이 주도한 병자수호조약에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린 사실로, ‘계유상소’가 민씨들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말았다.



도끼 들고 상소(持斧上疏)

고려시대의 우탁(禹卓), 조선시대의 중봉 조헌(趙憲)이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서 죽여달라며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면암은 바로 이 두 분의 옛일을 본받아 자신도 죽음을 각오한 조약반대 상소를 올린다면서

광화문 앞에 꿇어앉았다. 대단한 기개다.

 

죽음을 각오한 면암은 관원들의 힘에 못 이겨 떼밀려 저 머나먼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외딴 섬에서 4년, 그는 독서를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긴긴 세월을 보낸다.

자신을 하야시킨 면암, 대원군으로서는 무척 미운 사람이었지만,

병자수호조약에 반대하는 곧은 기개에 탄복한 대원군은 면암의 유배가 풀리자

바로 자헌대부 공조판서라는 높은 벼슬로 면암을 위로했다.

물론 면암이 그런 벼슬에 응하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국권은 점점 상실되고

뜻 있는 선비로서 차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세상의 변화가 계속되자,

면암은 연일 상소를 올리면서 옛 제도의 복원을 위한 보수적 논리를 거듭 폈다.

지금의 잣대로야 참으로 답답하고 보수적으로 평가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지키려던 면암의 애국심이야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단발령에 반대하여 “내 목은 잘라도 되지만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유명한 상소를 올리면서

의복이나 두발의 옛 제도 복원을 끝없이 주장했다.

 

의정부 찬정(贊政)이라는 고관이 내려도 전혀 응하지 않던 면암.

마침 새로운 도모를 위해 정든 고향땅 포천의 가채리를 떠나 온 가족을 이끌고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속칭 장구동)라는 마을로 이사한다. 68세 고령의 노인이었다.

 

호서와 호남의 선비들과 교유하면서 망해가는 나라를 붙들 어떤 계책을 세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곳에 안채와 사랑채인 ‘구동정사(龜洞精舍)’를 짓고

팔도의 선비들이 모여앉아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며

나라 지킬 큰 계획을 세우면서 날을 보냈다.

 

 

 “쌀 한톨 물 한모금도 왜놈 것은 먹을 수 없다”

대마도에서 숨을 거두다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절대로 조약의 체결은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조약을 체결하려면 우선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던 놀라운 기개.

그런 무서운 의인도 숨을 거둘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1902년 70세의 노인에게 궁내부 특진관이라는 고위 직책을 내렸으나

면암은 쳐다보지도 않고 거절하였고, 의정부 찬정도 거절했다.

권력이 면암을 회유하려고 경기도관찰사에 임명했으나 단호히 거절하면서

그는 죽어야 할 때와 장소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많은 유림과 학자들이 모여

의병 궐기를 모의하고 춘추대의를 강론했던 구동정사. 


마침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조인되고 경향에서 여러 계층의 애국자들이 자결을 택했다.

면암은 그냥 죽기는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나라를 건지기 위해 싸우다가 죽자는 뜻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때를 기다렸다. ‘구동정사’에 모여든 선비들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몇 차례 다짐하고,

제자들이 많기도 하지만 투쟁정신이 강하고 의병의 전통이 뚜렷한 호남으로 거사 장소를 정하고

남으로 내려왔다.

 

1906년 2월, 마침내 집안의 사당에 절하며 선조들에게 하직을 고하고,

집에서 멀지 않은 논산의 노성면 ‘권리사’(공자 사당)에 전국의 선비들이 모여 대집회를 열고

4개 조항의 격문을 짓고 8도의 국민에게 거의를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일로 남행, 모든 선비들과 함께

정읍시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 최익현의 선조 고운 최치원의 사당)에서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왜 의병을 일으켜야 하는가의 이유를 밝히는 창의소(倡義疏)를 올리고

일본 정부가 의리를 배반한 16개 조항의 편지를 보내 일본의 잘못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조선민족으로서의 높은 기개를 보이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성토하는 빈틈없는 논리가

그 편지에 상세하다. 의병들을 모으며 순창으로 이동했지만

황제의 선유로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74세의 고령인 면암은 끝내 체포되는 신세가 되어

일본 헌병의 이송으로 저 일본 땅, 대마도의 감옥에 갇히는 비극을 맞아야 했다.

74세의 고령 의병장

젊어서야 혈기로라도 의를 위해 소리칠 수 있다.

그러나 고령에는 어떤 장사도 기력이 쇠하여 혈기의 용기를 부리기 어렵다.

그러나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의 ‘기남(奇男)’이라는 면암은 예의 사람과는 달랐다.

노쇠한 몸에 어디에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74세의 노구로 총을 든 무서운 왜병 앞에 맨주먹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것인가.

 

‘성충사’라는 영당에 부릅뜬 눈으로 천하를 노려보는 면암의 영정을 보면서

섬뜩한 무서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화서 이항로에게 배운 ‘경(敬)’과 ‘직(直)’이 힘을 발휘해 주었고

‘춘추대의’라는 전통적 유학정신이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는 힘을 솟아나게 하였으리라.

대마도의 엄원 위수령 경비대에 수감된 면암은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어서

일본 헌병들도 감히 말을 걸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노인 의병장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쌀 한 톨, 물 한 모금인들 왜놈의 것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했다.

정신은 살았어도 허약한 육체가 견딜 수 없어 끝내 11월17일 해가 뜰 무렵에 눈을 감아

나라를 위해 순국하는 거룩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채산사(채山祠)와 모덕사(慕德祠)

충남 예산군 관음리의 면암 최익현 묘소.

몸은 묻혔으나 혼은 살아

지금도 일본을 꾸짖고 있을 것이다.

 

경기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嘉채里)는

면암의 태생지이자 한평생을 근거지로 살아갔던

고향 마을이다.

채계(채溪), 채산(채山)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으니 면암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마을이다.

 

화서 이항로의 문하를 출입하던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 의암 유린석, 용서 유기일 등 당대의 학자들이 출입하던 마을이요, 한말 위정척사파의 큰 의혼이 배태되었던 역사적인 마을이다.

 

68세에 그곳을 떠나 충청도 청양의 장구동으로 이사했기에,

우리가 찾은 가채리에는 초라하게 ‘채산사’라는 면암의 영정을 모신 영당 하나가 서 있었다.

그곳은 필자의 증조부 민재 박임상(敏齋 朴淋相: 1864~1944)공이 33세의 한창 나이에

64세의 노학자 면암을 찾아뵈었던 곳이다.

1896년 갑오경장, 갑오동학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전라도 무안에서

명성 높은 스승의 제자가 되려는 욕심으로 괴나리 봇짐을 지고 찾아갔던 곳이다.

 

110년이 넘은 지난해, 우리 일행이 찾은 채산사는 너무나 외로웠다.

면암이 1897년 음력 8월이라는 날짜가 명기된 친필로 필자의 증조부에게 내린 증서(贈書) 한 통은

그때의 세태와 면암의 높은 뜻을 지금도 읽게 해준다.

그러나 68세에서 74세,
6년의 세월을 살다가 집안 사당을 고별할 때까지 살았던

청양군 장구동의 ‘모덕사’는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

거처했던 유택과 사랑채인 ‘구동정사’, 영정을 모신 ‘성충사’, 위패를 모신 ‘모덕사’, 장서각인 ‘춘추각’,

유물을 온전하게 보관한 ‘대의관’이라는 유물관이 덩실하게 서있는 데다

청양군청에서 공무원이 파견되어 관리하는 관리사까지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은

그런 대로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더구나 경내에서 가까운 뜨락 앞에 커다란 저수지까지 축조되어 경관도 더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그만한 의인, 그만한 학자, 그만한 충신의 사당과 유택이 이 정도로는 관리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필자는 구동정사, 즉 면암이 거처하며
수많은 유림과 학자들이 모여 의병 궐기를 모의하고

춘추대의를 강론했던 사랑채 마루에 앉아 온갖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가 된 민재공이 1900년 68세의 면암선생을 모시고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이 강론할 때에

함께 참석했던 기록이 있어서다. 그 뒤 논산 노성의 궐리사의 대집회에도 민재공은 동참했으니,

108년 전의 증조할아버지가 앉아계셨던 곳에 증손자(필자)가 앉아 있는 감회는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면암이 세상을 뜬 뒤, 그곳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에도 제문을 바치러 민재공은

먼 길을 찾아와 유림장(儒林葬)에 참석한 기록이 있다. 제문도 문집에 온전하게 실려 있다.

모덕사의 제향 때에는 필자의 조부나 선인께서도 참석했지만,

지금 살아계신 사백(舍伯)께서도 가끔 참석했으니 우리 집안과 모덕사의 관계는

그냥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4대 째의 끈끈한 인연이다. 그러나 각설하자.


최충신(崔忠臣)은 순국 후에 더 빛나다

어려서 책을 끼고 화서(華西)의 문을 두드렸고
총명한 열다섯에 벽계(蘗溪를 물러날 제
스승이 면암(勉菴) 두 자를 크게 써서 주니라

잃었던 그 나라를 도로 찾은 오늘이외다
이제는 웃으옵소서 님의 뜻을 이뤘소이다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살아 곕소서

18수로 된 이은상의 면암 찬양 시조의 둘째 연과 마지막 연이다.

이제는 정말로 겨레의 가슴마다에 길이 살아계신 분이 면암이다.

더구나 요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의 망언과 망발에

더더욱 항일의 투사 면암의 마음은 우리의 가슴속에서 살아나고 있다.

고종 10년, 대원군을 탄핵하다 감옥에 갇혀 목숨이 살아나기 어렵다고 여기다가

그가 살아서 서울 거리를 걸어서 제주도로 귀양가자,

서울의 모든 백성들이 ‘최충신’이 살아났다고 탄성을 올리던 그 장면에서

면암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조선왕조 최후의 역사책으로는 가장 정확하고 비판적 역사관에 의하여 서술된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은 면암이 일본 정부에 보낸 16조 죄상의 글을 그대로 실었고,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고종황제에게 유소(遺疏)로 올린 상소문을 온전하게 실었는데

그의 충성심은 말할 것 없지만 유려한 문장의 솜씨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해준다.

‘조선유학사’의 저자 현상윤도 그의 책 ‘척사위정파’의 서술에서 면암의 유소를 대부분 인용하여

마치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버금가는 글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면암의 유해가 대마도에서 부산항에 도착하자 부산시민은 완전히 철시하고 임시의 빈소를 찾아

남녀노소가 통곡하였고, 자택인 청양으로 상여꾼에 의해 운구될 때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애도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은 죽을 수 없는 위대한 혼을 세상에 남겼다.

마침내 군중의 소요를 염려한 일본당국은 강제로 기차로 운구케 하였고

본가에 도착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를 때에는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거대한 유림장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제 100년이 넘도록 면암의 혼은 묘소에 묻혀 있다.

유적지를 살펴보고 귀로에 찾아간 묘소는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의 1에 있었다.

초라한 선비의 묘소 그대로다.

몸은 땅에 묻혔으나 혼은 살아서, 지금도 면암은 일본을 꾸짖고 계시리라.

당대의 역사가이자 대시인이던 황현, 면암의 죽음에 어찌 그의 평가가 없을 것인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6수로 된 황현의 ‘곡면암선생(哭勉菴先生)’이라는 만사(輓詞)를 외우며

그의 일생을 정리해보았다.

물고기나 용도 오열하고 귀신도 슬퍼하는데
펄럭이는 붉은 명정 바다위에 두둥실
골목마다 통곡소리 삼백 고을에 이어졌으니
나라의 정화(精華)가 배 한척에 가득찼네
끓는 충의의 정신 지하에서라도 왜 사라지랴
충신의 넋은 땅 속에도 변할 리 없네
제(祭)지내느라 술 떨어지니 겨울 해가 저무는데
통곡하는 이 몸도 백발 성성하답니다.

(魚龍鳴咽鬼神愁 獵獵紅旌海上浮 巷哭相連三百郡 國華滿載一孤舟 握捲豈待還丹力

藏血번驚化碧秋 酒盡西臺寒日暮 謝參軍亦雪盈頭 : 六首의 마지막 시)

면암의 순국에 인간은 물론 모든 짐승까지 슬피 울고,

조선 300군의 골목마다에 통곡소리가 이어졌다고 읊었다.

중국의 절개 높은 충신들인 변호(卞壺) · 장홍(장弘) · 문천상(文天祥) · 사고(謝고)를 인용하여

몸과 정신은 죽어서도 썩지 않으리라고 칭송한 만사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경향, 2008년 07월25일, 08월01일[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39,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