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 시인 · 풍류객 · 직신 · 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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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절의에 깃든 섬세한 詩心 조선의 땅 끝 벽지인 해남 땅에 유학(儒學)과 절의정신을 꽃피게 했던 결정적 단서를 마련해준다. ‘표해록’의 저자로, 나주 출신이면서 처가 고을인 해남에서 활동하며 살았던 이유로 그곳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해남에 어느 곳보다 뛰어난 유교문화를 전파하고 진리와 정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높은 절의정신의 전통을 세워주었다.
호남 명문 집안인 해남 윤씨 가문에 혁혁한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이다. 갑자사화와 을사사화에 절의와 정도를 지키다 효수 당했던 스승인 금남의 정신을 이은 윤효정은 진사과에 합격한 뒤로 패악한 정치에 발을 끊고 고기 잡고 풀 베는 일에 숨어버리고 세상과 단절하는 의리를 지켰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尹衢)는 호가 귤정(橘亭)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의 당당한 문신이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더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고 절의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다. 윤구의 증손자가 바로 고산 윤선도(1587~1671)다. 미암도 사화에 연루되어 20년 넘게 귀양살이로 젊음을 바쳤다. 문인·학자에 절의정신이 높던 미암도 해남 출신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윤선도는 정의감과 절의정신이 몸에 배었고, 나라가 바르게 가지 못하거나 나라의 예(禮)에 어긋남이 있으면 곧바로 상소하고 항의하는 직신(直臣)의 정신을 올곧게 지켰다. 그래서 전후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尹毅中)은 좌참찬이라는 고관을 역임하고 그 아들 윤유기(尹惟幾)는 강원도 관찰사이니 바로 고산의 백부이자 양아버지였다.
어머니 순흥 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字가 약이(約而), 호는 고산, 해옹(海翁)으로 많이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했던 윤선도는 10여 세의 나이에 경사(經史)는 물론 의약 · 복서 · 음양 · 지리 등의 서적을 두루 공부하여 문장과 식견이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17세에 남원 윤씨와 결혼하고 그해에 진사초시에 합격한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그 해에 생부의 상을 당하기도 했다. 태어나기는 서울의 동부 연화방이었지만 그의 생활 근거지는 선대의 고향인 해남이어서 서울과 해남을 오고가면서 일생을 보냈다.
왕비의 오빠 유희분, 척신 박승종 등의 권력 남용이 도를 벗어나자 30세의 젊고 당당한 윤선도는 비록 진사로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으나 비분강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들 모두를 비판하는 이른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세상을 발칵 뒤집고 말았다. 이이첨은 죽여야 하고 나머지도 합당한 죄를 물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상소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 다음해에 윤선도는 서울에서 2000리가 넘는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 가 안치되었다. 거기서 3년을 보내다가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옮겨 귀양 살다가 8년째인 해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마침내 해배되어 도사(都事) 벼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의기가 뛰어난 그를 조정에서는 그냥 두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바로 사직하고 응하지 않았으나, 인조 6년 42세이던 고산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두 왕자를 가르치는 사부에 임명되어 성실한 왕가의 스승으로 충실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인조의 신임이 크고 대군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 다른 벼슬을 겸직하면서까지 5년의 세월을 사부로 보냈다.
기왕에 벼슬을 하려면 문과급제를 통해서 출사해야 한다는 뜻에서 47세의 나이인 인조 10년 1632년에야 증광시험에 장원급제의 명예를 안게 된다. 그래서 시강원의 문학(文學)이라는 벼슬에 제수된다. 48세에는 경상도 성산(星山)고을의 원님이 되어 목민관 생활을 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있던 인조 14년은 1636년으로 고산의 나이 50세, 전대미문의 큰 난리인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온통 전운에 휩싸이고 만다. 의분에 못 견디던 고산은 의병과 노비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남한산성은 임금이 계시지만 통로가 막혀 접근할 수가 없자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런 소식을 접한 고산은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러워, 제주도로 건너가 일생을 마칠 계획으로 해남에서 제주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가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보길도를 발견하자 거기에 짐을 풀고 살아가려고 정착한다.
격자봉이라는 산 아래에 낙서재(樂書齋)라는 서실을 짓고, 천하에 아름다운 세연정을 짓고 연못을 파 경관이 뛰어난 정원을 꾸미고 한 세월을 보냈다. 여기에서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며 풍류의 격이 높은 고산의 삶이 전개된다. 그런 아름답고 격조 높은 정원을 꾸며 선비문화의 정형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병자호란 뒤에 신하로서 임금에게 안후를 살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시골에 은거하던 고산에게 귀양살이의 명령이 내려진다. 경상도 영덕(盈德)으로 유배되어 53세의 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해남 고향의 가까운 지역인 수정동·금쇄동에 명승지를 개발하여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며 아름다운 경관을 꾸몄다. 그 뒤 보길도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편과 ‘오우가’ 등의 시조로 조선 시조의 백미를 저작하기에 이른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가 그들이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는 송강과 고산에 주목하여 수준 높은 평가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나라의 가곡으로 보록이 남아있는 것은 대개 조선시대 이후요, 그 중에서 특출한 명인을 고르면, 몇 분 속에도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 두 분은 500년을 통틀어 그를 당할 이가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서 “고산은 대체로 담아(淡雅: 담박하고 우아함)한 길로 나아가 저 강호연파(江湖煙波)와 배합되는데 좋다” 라고 고산 단가의 독특한 경지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담원국학산고’, ‘정송강과 국문학’)
또 위당은 ‘어부사시사’에 대해서도 “고산은 ‘어부사시사’에 ‘우는 것이 뻐꾸기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같은 것은 물외한인(物外閒人)의 우유(優游)하는 심경을 흔적 없이 나타냈고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리 맑게 난다’와 같은 것은 호남 산수 간의 밤경치를 귀신같이 그려냈다” 라고 평하여 신필(神筆)에 가까운 고산문학의 경지를 말해주고 있다. 포의의 신분으로 이이첨의 권력남용을 통쾌하게 비판하여 8년의 귀양살이를 했던 과격한 정의파에게 어찌하여 그런 섬세한 문학의 혼이 깃들었을까. 대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고산의 나이 64세, 인조가 붕어하고 고산의 제자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임금 보위에 오른다. 1652년 효종 3년, 66세이던 고산은 효종의 사부였다는 덕택에 성균관 사예 벼슬에 올라 임금을 인견하게 되고, 곧바로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올라 한 나라의 대부(大夫) 직위에 오른다. 그해 8월에는 그의 마지막 벼슬인 예조참의에 제수된다.
5년이나 글을 가르친 군왕의 사부로 조금만 고분고분 벼슬살이를 했다면 더 높은 고관의 벼슬도 어렵지 않게 제수 받을 수 있었건만, 직신이자 과격한 정의파 윤선도는 곧바로 ‘시무8조소’라는 상소를 올려 시급한 해결책을 열거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임금을 채찍질하였다. 강력한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인 해남으로 하향하고 말았다. 69세에는 벼슬길이 다시 열렸으나, 곧바로 ‘시무4조’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의 문제점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글 잘하고 한글 단가에 능했던 고산, 문인이자 학자로서의 훌륭한 역량이 있었지만, 그의 정책적 건의와 주장은 정치에 실현되거나 반영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휘말리면서 70이 넘은 노인에게는 더 큰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갈수록 치열해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그칠 줄 몰랐다. 시인이자 문인이고 학자이던 고산은 당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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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록 포의의 신분이나 권신의 횡포 눈감을 수 없다”
불굴의 투사, 나이 들수록 더 강해져
포의한사로 벼슬도 하지 않던 30세의 나이에
권신들의 무도한 정치를 차마 놓아둘 수 없어 독한 탄핵상소를 올렸던 곧은 선비가 윤선도이다.
“비록 포의의 신분이었으나 군부(君父)의 위태로운 처지를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라는 마음에서
충성심과 분노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후손 자격으로 상소를 올렸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은 사람도 윤선도였다.
녹우당 전경 |
윤선도는 억울하게 탄압을 받다 희생된 선배들에 대해서도 절대로 그냥 두지 않고 진실을 밝혀
그들의 억울함을 푸는 데도 언제나 앞장섰다.
이른바 ‘기축옥사’라는 정여립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호남의 선배 학자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의 신원과 문집간행에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자라 칭송하면서 정개청의 문집인 ‘우득록(愚得錄)’을 교정하고 정리하며
완전한 책으로 만들어 간행을 서둘렀으며, 그가 억울하게 죽어간 상황을 제대로 밝혀
원상으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국시(國是)에 어긋난다 하여 수천자에 이르는 장문의 ‘국시소(國是疏)’를
올려 반대파들의 혹독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힘없고 약하며 세력에 밀리는 학자들 편에 서서 진리와 정의를 두둔하던 윤선도의 정신은
나이가 더 들수록 강해지기만 하였다.
기해 예송의 한 복판에 자리하다
고산 73세, 1659년이던 기해년에 10년 재위의 효종이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장사를 치르며 산릉(山陵)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자의대비의 복제(服制) 문제가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격화되면서
예학자(禮學者)로서 윤선도의 학설은 남인계열의 중심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송시열 · 송준길 등의 서인들이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가 죽어서 자의대비가 3년 복을 입었으니
효종은 인조의 차자로 기년의 복을 입으면 된다고 결정했다.
이에 윤선도는 종통(宗統)을 부인했다고 송시열을 비난하며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린다.
윤선도 주장의 핵심은 서인들이 ‘비주이종(卑主二宗)’의 잘못을 저질러
나라의 예(禮)를 완전히 무너지게 했다는 지적이었다. 임금에 오른 효종이 종통을 잇는 것이므로
효종의 상사에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지 기년(朞年)의 복을 입음은 종통을 두 개로 갈리게 하는
죄를 짓고 만다는 것이었다.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이게’ 했다는 윤선도의 주장은
송시열 계열과 대립하던 미수 허목 등의 중심논리를 제공한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윤선도의 주장은 그가 평안도 끝의 삼수(三水)로 귀양가는 불행을 안아야 했다.
효종이 붕어하자 풍수에 밝았던 윤선도에게 간산(看山: 묘자리 선정)의 일이 맡겨졌다.
윤선도는 수원(지금의 사도세자 묘소)에 길지가 있음을 말하고 그곳으로 장지를 정하자고 했으나
송시열 일파는 그것도 반대하며 다른 곳으로 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윤선도의 상소문 불태우다
서인들의 권력남용은 극도에 이른다. 역사에 없는 악한 일이 벌어졌으니,
윤선도의 복제설(服制說)에 대한 상소문을 정원에서 임금께 올리지도 않고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상소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고,
그에게 벌을 내리면 되지, 그것을 불태우는 일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패악한 권력에 맞서 윤선도는 싸우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현종 1년 74세의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 가 안치되고
그 다음 해에는 함경도 북청으로 이배되려 했으나 취소되고
더 무겁게 가시울타리를 씌우는 형편에 이른다.
그 이유는 남인으로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올랐던 용주 조경(趙絅 : 1586~1669)이
윤선도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려 삭탈관작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서다.
남인 4선생의 활약
서인과 남인이 복제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에,
송시열 일파와 맞서 탁월한 예론(禮論)으로 그들을 압박했던 남인의 네 학자가 있었으니,
‘비주이종’의 이론을 세운 고산 윤선도, 용주 조경, 미수 허목(1595~1682), 남파 홍우원(南坡 洪宇遠 : 1605~1687)이 그들이었다.
조경은 윤선도를 비호하다 삭탈관작을 당했으나 언제나 윤선도가 옳다고 주장한 학자였고,
미수 허목은 우의정에 오른 학자였으나 뒷날 윤선도의 ‘신도비명’을 지어 그의 일생을 찬양하였다.
77세의 노학자 윤선도가 삼수에서 귀양 살던 현종 3년에 홍우원은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금고(禁固)를 당하는 화를 맞는다.
남인 4선생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살았던 홍우원은 뒤에 윤선도의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용주 조경이 윤선도를 평했다는 말이 허목의 신도비에 전해진다.
“예로부터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선 시기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인물을 내려 보내
목숨을 걸고 예의(禮義)를 지키게 하여 한 세상에 경종을 울려주고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바로 윤선도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윤선도의 일생은 바로 조경의 이 한 마디에 모두 정리되었다.
현종 6년 79세의 윤선도는 평안도의 삼수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거기서 3년을 보낸 뒤, 81세의 노직신 윤선도는 임금의 특명으로 마침내 귀양살이가 풀렸다.
80의 노령으로 무려 8년에 이르는 긴긴 유배생활이었다.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의장(義庄)을 설치하다
81세의 늙은이로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다시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들어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우국충정을 달래며 살았다.
가곡을 지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으며 노년의 안온한 삶을 보냈다.
‘오우가’를 부르며 ‘어부사시사’도 읊고,
‘산중신곡’ ‘속산중신곡’을 읊조리면서 부용동 생활에 만족하였다.
조선왕조 중기에 호남에는 3대 부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주목사를 지낸 광주의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공조참의를 지낸 보성의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과 고산 윤선도가 그들이다.
특히 윤선도의 집안은 고조할아버지이던 윤효정 시대 때부터 당대의 갑부였다고 한다.
윤효정은 정씨(鄭氏) 집안으로 장가드는데 그 정씨 집안이 당대의 부호였고,
무남독녀인 윤효정의 부인은 친정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다 머리가 뛰어난 윤효정의 후손들은 대부분 문과에 급제하여
고관을 지내며 재산을 늘리지는 못했어도 줄이지는 않아 계속 부가 상속되었다.
그런 재산 때문에 윤선도는 서울에도 집이 있었고
지금의 남양주시 덕소 근처의 고산(孤山)에도 별장이 있었으며,
해남 일대와 보길도 일대에는 토지와 산을 많이 소유하게 되어 곳곳에 별장과 정자가 있었다.
그래서 윤선도는 언제나 가난한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84세 때에는 ‘의장(義庄 :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농장)’을 마련하여
의곡(義穀)을 비치해두고 극빈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선비로서의 삶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일생을 보낸 사람이 윤선도였다.
윤선도가 부자였기 때문에, 인민을 착취한 반민중적 문인이었느니,
노예들을 학대하여 부를 축적하고 풍류나 즐겼다는 등의 악의적인 뒷사람들의 평은
일고의 가치 없음을 그의 일생은 보여주고 있다.
권력에 맞서 그만큼 싸웠던 투사,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온갖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전후 16년의 유배생활을 자초했던 것만으로도 그의 평가를 달리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의인이자 시인이고 예학자였다.
녹우당을 찾아서
해남하면 녹우당이다. 윤선도의 고조할아버지 윤효정 이래로 500년이 넘는 명승지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라는 윤선도의 고향 집이다.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은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의 글씨다.
이서는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와 가까운 친구였다.
천하에 명필로 유명한 이서가 친구를 위해 써준 글씨가 지금의 현판으로 걸려있다.
본디 이 녹우당은 효종이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인데,
뒷날 바다를 통해 그대로 고향으로 옮겨서 지은 집이다.
고산과 공재를 비롯한 학자이자 문인이던 그들의 유품이 대체로 보관된 유물관도 덩실하게 서 있다.
그곳의 뒷동산에는 비자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윤효정 등 고산 선조들의 묘소가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
윤선도의 묘소에는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비면이 마멸되어 글은 읽을 수 없으나, 문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자료는 넉넉하다.
녹우당은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씨가 지키고 있다.
85세로 부용동에서 세상을 떠난 선조의 학문과 의혼, 풍류의 멋진 삶을 세상에 전하려고
종손으로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노인에 이르도록 희생한 그분의 삶도 멋지다.
사당·녹우당·묘소·종산(宗山) 등을 돌보고 보살펴서,
녹우당은 한국 최고 명승지의 하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윤선도의 수많은 가사(歌辭) 친필본이 그대로 전해지며,
예조참의 벼슬을 내린 임금 교지, ‘고산선생유고’,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등 천고에 빛나는 유품들이
그대로 보관된 유물관은 바로 우리 한국의 국보임에 분명하다.
불의에 맞서 굽히지 않고 싸웠던 직신, 여유 있는 가정이어서 언제나 가난한 이웃을 도왔던 의인,
당대의 예학이론으로 서인과 맞서 명쾌한 논리를 폈던 예학자,
고산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흠모의 정을 감출 수 없었음은 그의 삶이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묘소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남인의 거목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의 명문(銘文)을 읽으면서
이렇게 곧은 선비가 조선 땅에서 살았던 것이 자랑스러웠다.
비간은 심장을 갈라 죽었고 比干剖心
백이는 굶어 죽었네 伯夷餓死
굴원은 강물에 빠져 죽었고 屈原沈江
고산은 궁색할수록 더욱 뜻이 굳어 翁窮且益堅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으니 至死不改
의를 보고 목숨 걸기는 마찬가지였네 其見義守死一也
천하의 의인이자 직신들인 비간 · 백이 · 굴원 등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고산에 대한 평이
얼마나 지당한가.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경향, 2008년 06월 27일, 07월 04일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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