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35)-(36) 성호 이익

Gijuzzang Dream 2008. 4. 13. 18:48

 

 

 

 

 재야 학자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

 

 

실학을 세워 변화의 논리를 개척하다

‘시대가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렵다. 독특한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환경이 위대한 인간을 배출해내기도 하지만,

뛰어난 학식과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한 인간의 역할 때문에 새로운 물꼬가 터지면서

시대와 사회는 변혁의 기틀을 이루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성호선생의 사당인 첨성사. 위는 성호 선생 문집.

<사진작가 황헌만>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실학의 비조는

당연히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73)이다.

반계의 체계적인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받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실학사상을 정립하고 새로운 변화의 논리를 개척했던

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분은 바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광대무변한 실학의 집대성자는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었기에,

위당 정인보는 오래 전에 조선 후기의 3대 학자로 반계 · 성호 · 다산을 꼽고,

일조(一祖)는 반계, 이조(二祖)는 성호, 삼조(三祖)는 다산이라 하여

실학사상의 계승과 발전에 관한 주장을 폈었다.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은 40여 년의 사이를 두고 일어난 조선 최대의 병란이자

국가와 민족의 참혹한 비극의 역사였다. 어떻게 보면 나라가 망한 정도의 생지옥 속에서

인민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야 했던 고난의 연속이자 질곡의 세월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몸소 병자호란의 참상을 목격하며 어려운 삶을 이어온 반계는

오래지 않아 세상을 등지고 저 멀고 먼 전라도 땅, 부안(扶安)에 은거하면서

‘이러하고는 나라가 망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나라와 백성을 건질 계책에 온 생애를 바치며

‘반계수록’이라는 대저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나라나 세상은 ‘반계수록’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갈수록 세상은 더욱 부패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반계가 세상을 떠난 8년 뒤에 태어난 성호,

자신의 당내(堂內)집안의 외손이어서 척의까지 있던 때문에 일찍부터 반계의 학문에 주목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과, 침몰해가는 나라를 구제할 우국충정에 불탔었다.

그는 반계학문을 해석하며 자신의 논리를 세웠다.

그러나 성호도 ‘이러다가는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던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못했다.

성호의 학문과 사상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배태된다.

 

성호는 ‘반계수록’에 서문을 짓고, ‘반계선생유집’에도 서문을 썼으며,

‘반계선생전(磻溪先生傳)’을 지어 반계의 학문과 사상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삶에 대한 전모를 밝히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해놓기도 했다.

반계의 시대 못지않게 성호의 시대도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으며,

성호가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에 태어난 다산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해석한 분이 바로 위당 정인보였다.

그러한 시대와 사회적 환경 아래서 반계·성호·다산의 학문이 이룩되었다는 것이다.


찾을 길 없는 유적지

성호는 여흥 이씨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이상의(李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의 고관을 지낸 학자였고,

조부 이지안(李志安)도 지평(持平)의 벼슬에 학자로 이름이 컸으며,

아버지 매산 이하진(梅山 李夏鎭)은 대사헌(大司憲)의 고관에 명성이 높은 남인으로 당쟁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운산(雲山)으로 귀양 갔으며, 귀양 간 다음 해에 성호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성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할 생각은 버리고 재야에 숨어서 큰 학문적인 업적을 이룩하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83세의 장수를 누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뒤이어 성호의 중형(仲兄) 이잠(李潛) 또한 당쟁의 여파로

젊은 시절에 장살(杖殺)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으니 가정적으로는 매우 비참하였다.

 

외동아들이자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이던 이맹휴(李孟休)가 일찍 세상을 뜨고

며느리까지 성호 앞에서 세상을 떠나

만년은 참으로 곤궁함과 슬픔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운에도 좌절하지 않고 천수를 다 누리고 큰 학파를 이루는 학자로 자리했다.

본디 성호 집안은 정릉 이씨라는 호칭을 들었듯이, 지금의 서울 정동(貞洞)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나 성호는 그곳을 뒷날에도 가끔 찾아다니기는 했어도 거주한 적은 없다.

아버지를 이별한 뒤에 어머니 권씨(權氏)를 따라 선산 아래인 경기 광주(廣州)에 속했던,

지금의 안산시 개발지역의 어디쯤에 있는 첨성리의 성호장(星湖莊)에서 일생을 보냈다.

여행이나 친척을 방문하는 때가 아니고는 그곳을 뜨지 않고 80 평생을 살았던 곳이

가장 분명한 성호의 유적지다.

 

순암 안정복, 소남 윤동규, 하빈 신후담, 녹암 권철신 등 제제다사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학문과 의리를 논했던 곳이 바로 거기다.

자신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이맹휴, 손자 이구환은 물론 조카 이병휴 · 이용휴,

종손들인 이가환 · 이삼환 등 가학을 이은 학자들이 항상 모여 글을 배우고

실학의 논리를 익혔던 곳이 또 거기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개발되어 흔적도 없고 찾을 길도 없다.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이런 것을 일러 상전벽해라고 하는가보다.

조선 후기 남인계 학파로는 가장 큰 학단이자, 사상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진보적 실학사상이 싹터서

성립된 ‘성호장’의 옛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민족의 불행이다.


묘소의 묘비명을 읽으며

조선후기 명정승의 한 분인 번암 채제공은 단 한 차례 성호장으로 성호선생을 찾아 뵈운 적이 있다.

경기도관찰사라는 고관을 역임하여 지역을 순방하다가 첨성리로 성호를 방문했노라는 기록이 있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던 돌아가시기 몇 해 전의 성호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부분도 있다.

 

성호 사후이지만 다산도 22세에 그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희대의 유적지는 더욱 빛날 곳인데 찾지 못하는 아쉬움에,

우리는 성호의 혼이라도 뵈우려고 성호의 묘소를 찾았다.

 

생전에 선공감 가감역(假監役)이라는 학자에게 내리는 벼슬이 내려졌건만

성호는 벼슬에 응하지 않았다.

세상 뜨기 바로 전에 나이 많은 노인에게 내리는 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나가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일생을 포의(布衣)로 마친 재야학자였다.

 

그래서인지 묘소는 정말로 검소하고 아담했다.

묘소 앞에는 당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던 영의정 채제공이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그걸 어떻게 초라하다고 하겠는가.

겉이야 초라해도 그 글 속에 담긴 내용은 아무리 훌륭하게 치장한 화려한 신도비라도

당해낼 수 없는 천고의 멋진 내용이 담겨있었다.

도(道)를 안고서도 혜택을 끼치지 못했으니 한세대의 불행이로다

(抱道而莫能致澤 一世之不幸)

책을 저술해 아름다운 혜택이 넉넉했으니 백세의 다행이로다

(著書而亦足嘉惠 百世之幸)

하늘의 뜻은 아마도 거기에 있었지 않을까 한 세대야 짧지만 백세는 길도다

(天之意無乃在是歟 一世短而百世永)

선생의 명문을 지으며 우리 후학들에게 권면하노니 왜 선생의 저서를 읽지 않으려 하나

(銘先生而勉吾黨 與讀先生書)

학통을 전해가는 일 자기가 해야지 남이 해줄 것인가(傳統由己而由人乎)

이런 명문의 명(銘)을 읽어가다가 아쉽고 서운함은 싹 가셨다.

묘소가 아무리 초라해도, 생전에 그렇게 오래도록 거주하면서 연구와 사색에 잠기고,

그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낸 옛집이야 흔적도 없지만,

저서를 통한 성호의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그 글 속에 모든 유적이 살아나 있기 때문이었다.

 

성호의 혜택이 크고 넓어서인지, 왕조가 망한 왜정 때에야 ‘성호문집’이 간행되었고,

이제는 ‘성호전서’가 완간되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호의 위대한 학문을 접할 수 있으니,

역시 혜택은 백세토록 영원하리라는 채제공의 높은 식견은 옳게만 여겨진다.


성호기념관을 돌아보며

근래에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명인달사들의 유물관이나 기념관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다.

성호의 묘소 앞에 도로가 있고 도로 곁에는 ‘성호기념관’이 덩실하게 서 있다.

 

성호를 만나는 기분으로 기념관으로 들어갔더니, 우선 성호의 초상이 눈에 들어온다.

생전의 모습은 아니고 뒷세상에서 상상해 그린 유상이겠지만,

우선 학자이자 선비이던 성호의 모습의 역력했다. 벼슬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은 재야학자,

그런 꼿꼿하고 총명한 모습이 성호를 회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이외의 성호 유품이나 수택(手澤)이 완연한 친필 글씨나 저술 및 서한들이

그런대로 유품으로서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저 날림공사로 체면치레의 보통 기념관이나 유물관과는 다르게

매우 정성과 뜻이 담긴 유물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만한 기념관을 만들고 유지도 제대로 해주는 안산시 당국은 칭찬받기에 마땅했다.
기념관 밖의 넓은 공간의 조경도 그럴싸하고, 정리 정돈된 모습이 매우 좋았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성호의 초상화에 찬사를 바친 글을 지었다.

그 글을 읊으며 기념관을 나오는 우리의 발길은 그런대로 가벼웠다.

…저 덕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노라면
윤기 흐르고 함치르함이여
도가 저 몸속에 가득 쌓여 있는 데다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움으로만 흠뻑 적셔 있구료
…누가 이 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억센 물결 물리치고 공자의 학문으로 돌이킬까. 슬프지고.

“가진 자의 富는 덜어내고 없는 자에게는 보태주라”

학해(學海)를 이룬 성호학문

성호 선생의 묘소와 사당 전경. 아래는 성호사설.


조선후기 18세기의 대표적 실학자는 성호 이익이다.

반계 유형원이 17세기의 학자라면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최고 학자 가운데 한 분이다.

성호가 일생 동안 반계의 학문을 천착하고 정리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했듯이,

다산은 일생 동안 성호의 학문을 천착하고 연구하면서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한우근 교수는 성호학문을 가장 넓고 깊게 연구한 학자였다.

“평생을 두문분출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던 성호의 식견은 넓고 깊었다.

천문 · 지리에서부터 일반 민속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의 학문과 덕망은 널리 알려져서 따라서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 하나의 ‘학해(學海)’를 이루었다”

라는 평가를 내렸다.

 

모든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큰 바다로 들어오듯이,

성호의 넓고 깊은 학문 때문에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학자들이 ‘성호장’으로 모여들어서

학문의 바다를 이룬 곳이 성호학파였다는 뜻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평생 국학연구에 몸 바치고 계시는 이우성 교수도

“실학의 개척자로서 실학의 가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킨 학자”라고 성호의 학문을 찬양하고 있다.

성호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근래의 학자들에게서만 나오지 않았다.

성호장에서 함께 생활하며 제자로서 성호의 학문을 익힌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학문적 업적과 덕행에 대하여 공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40년 가까이 성호를 모시고 학문을 닦은 조카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는

성호의 가장(家狀)과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성호의 삶과 사상, 학문적 업적까지 유감없이 서술하여

성호에 대한 기본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병휴가 내린 성호학문의 결론은 이렇다.


진부(陳腐)한 선비들과는 달랐다

“학문의 대요(大要)를 거론해보면,

경학(經學)은 주자의 집주(集註)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의 본뜻에 거슬러 올라갔는데

옛날의 유자들이 논하지 못했던 것을 주장한 바가 많다.

예(禮)에 대한 이론으로는, 반드시 사치는 버리고 검소함만 따랐으며,

경제정책을 논함에는 지위 높은 고관의 재산은 덜어내고

지위 낮은 서민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 라는 평가다.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면,

경전에 대한 연구는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여 선진시대의 고경(古經)을 두루 연구했는데

주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새로운 논리를 개발해냈다는 것이다.

 

주자학에 매몰되었던 당시의 일반 유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새 이론을 개발하여

새로운 학설을 첨가한 경학연구라는 것이다. 이른바 ‘번문욕례’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의 예학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웠다.

禮대로 지키고 실천하다가는 딱 망하기 십상인 세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성호는 모든 禮를 간소하고 절약하게 지켜야 한다면서

가능한 한 검소한 것만 따르고 사치스럽거나 호화로운 禮는 모두 삭제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실용적이고 실사구시적인 논리가 제대로 실행되는 부면이다.

 

경제정책의 기본도 매우 진보적이다.

빈익빈·부익부의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기본 목표 아래,

가진 자의 것을 덜어다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보태주는 정책,

‘손상익하(損上益下)’의 탁월한 경제논리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성호의 학문이나 사상은 일반 세상의 유자들의 진부하고 무용(無用)의 공언(空言),

즉 실현 불가능한 논리들과는 분명하게 달랐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성호의 학문이

다산 정약용의 ‘다산학’의 원류이자 바탕이라는 주장이 증명되는 것이다.

성호가 옛날의 유자들이 주장하지 못한 새로운 경학논리를 주장하여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점이, 곧 다산학이 성호학문과 주자학을 뛰어넘어

다산경학이라는 독창적인 실학적 경학사상이 정립되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가진 자의 부는 가능한 덜어내고 없는 사람에게는 보태주려는 ‘손상익하’의 경제정책이야말로

다산 경제학의 기본 요소였다. 다산의 유명한 토지제도론인 ‘전론(田論)’이나 ‘정전의(井田議)’ 등은

바로 성호의 경제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진부하고 무용한 공언이나 일삼던 성리학자들의 관념적인 유희와는 다르게

실질 · 실용 · 실사구시적 실학사상을 정립했다는 주장이 여기에서 부합되고 있다.


문인 윤동규의 행장

소남 윤동규는 성호 문하의 큰 학자로 성호의 행장을 기술했다.

성호의 일생을 차례대로 서술하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공업에 대하여도 빠짐없이 자상하게 기록했다.

자신의 말대로 이병휴의 가장에서 8~9할을 인용하여 기술했노라면서

이병휴를 포함한 많은 제자들의 선생에 대한 주장을 종합하여 적었노라고 했다.  

그러나 윤동규는 성호의 죽음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슬픔이 조선 인민의 슬픔임을 토로하였다.

“한 차례 시행해보지도 못하고 뜻만 품은 채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라고 애통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성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학자들의 사상과 철학이

부와 권력에만 집착했던 집권층이나 벼슬아치들에 의하여 천대받고 말았던가.

반계 · 성호 · 다산의 그 높은 사상과 철학이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아갈 정책으로 전혀 구현되지 못했음은

역사의 비운이자 조선인민의 불행이었다.

제자 안정복의 『동사강목』

성호학파에는 우파와 좌파로 나뉜다는 학설이 있다. 이우성 교수의 주장이다.

 

다산 정약용은 오래 전에 성호 가문의 찬란한 학문역량에 대한 찬탄을 발한 적이 있다.

 

“성호선생은 하늘에서 솟아나고 사람 중에서 빼어나며 도덕과 학문이 고금에 초월했던 분이라

자제들 중에서 직접 학문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모두 대유(大儒)로 성장했다.

조카 이병휴는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아들 맹휴는 경제와 실용학문에,

조카 이용휴는 문장학에, 족손 철환은 박식으로, 종손 삼환은 예학으로 뛰어나고,

손자 구환(九煥)도 할아버지를 이어 명성을 날렸다” 라고 했던 것처럼

집안 전체가 ‘학해’를 이루기도 했지만,

제자 중에서도 가장 크게 성호의 학문을 이은 분은 순암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이 40대에 완성한 역사책인 ‘동사강목’은 성호의 의견을 대체로 반영한 안정복의 저서다.

성호와 순암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를 분석해보면,

동사강목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서를 순암이 성호에게 보냈으며,

성호의 답변에 따라 내용에 많은 보충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성호가 가장 믿고 사랑했던 제자 안정복.

성호라는 스승을 가장 존숭하면서 광주의 경안에서 안산의 성호장까지 100여리의 먼 길을

네 차례나 직접 찾아가 학문을 물었고, 이후 수없이 많은 편지로 학문을 논했던 제자가 안정복이었다.

안정복은 성호의 우파 제자다.

그가 성호의 뜻에 따라 ‘동사강목’을 저술하고, 성호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가필하고

요령 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순암 문하에서도 제제다사들이 배출되었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도 그 문하에 출입했던 기록이 있다.

대표자는 하려 황덕길이고 하려의 제자가 성재 허전(許傳)으로

조선 최후의 성호학파의 큰 학통을 이었다.


성호문하의 좌파 권철신

성호는 일찍부터 서양 학문과 사상을 접했다.
특히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전적으로 크게 찬성하면서

서양인들의 우수성에 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 사상으로 천주교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문하의 좌우파는 여기서 갈리고 있다.

서양의 과학사상에는 그런대로 수긍하지만 곧 난리를 당하고 파멸될 것이 분명한 천주교사상에는

절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부류가 우파에 속한다.

 

좌파의 효장은 성호문하에서 가장 젊은 층에 속하던 녹암 권철신이다.

성호의 비판적 주자학을 넘어 새로 경학논리를 수립한 학파다.

서양의 과학사상은 물론, 천주교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밝히지 못했던 학자들이

권철신과 함께 했던 좌파다. 정약전 · 정약용도 애초에 그 일파였으나

가장 철저한 좌파는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순암의 사위)이나 이벽이 그 학파의 효장이었다.

물론 그들은 순암 안정복의 예언대로 1801년 신유옥사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하고 말았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불꽃으로 변하듯이, 천주교로 파멸한 성호의 좌파들은

다산 정약용을 통해 실학사상으로는 큰 공업을 이룩했으나,

성호의 학통을 지키고 학문을 전파한 계승자들은 우파에 속하는 안정복 문하의 학자들이었다.

건전한 보수 우파는 그런데서 학문 계승의 큰 역할도 해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통시대의 평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성호의 큰 학파는 다산 정약용으로 집결된다.

16세에 성호의 유저를 읽어보고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던 다산.

평소에 “내 학문의 큰 틀은 성호를 따라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다”라고 했던 대로

성호가 뿌린 실학사상은 다산을 통해 제대로 집대성되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스스로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천지의 웅대함과 해와 달의 광명함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성호선생의 힘이었습니다”라고 갈파했듯이,

조선의 가장 진보적 논리이자 대표적 사유의 한 체계인 실학사상은

성호를 거쳐 다산에 이르러서야 구체적 논리로서 민족의 지혜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계 · 성호 · 다산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진보성이,

언제쯤 활짝 꽃을 피우고 제대로 열매를 맺을 것인지.

역사와 사회의 겉에 우파만이 판치는 지금 우울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2008년 05월 30일/ 6월6일, 경향,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35, 36

 

 

 

 

 

 혁명을 꿈꾸며 농사를 짓다 - 성호(星湖) 이익(李瀷)

 

아버지와 형을 당쟁으로 잃고 벼슬 대신 농사와 학문을 택한 성호 이익

서얼 · 농민 · 노비의 등용 주장하고 중화주의 거부한 조선후기 철학의 혁명

 

 

성호 이익은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지식인이 아니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의 삶을 살았다. 이익의 초상.(사진/ 권태균)

 

성호(星湖) 이익(李瀷 · 1681~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貞洞)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碧潼郡), 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 · 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역임한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配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실록> 8년(1682)조는 이하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갓난 이익에게 당쟁은 운명이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형 이잠(李潛)이 숙종 32년(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다시 당쟁에 휘말린다.

 

 

헤아릴 수 없이 형장을 맞다 죽어간 형

 

“춘궁(春宮 · 세자)을 보호하는 자는 귀양 보내어 내치고

김춘택(金春澤)에게 편드는 자는 벼슬로 상주니,

어찌 전하께서 춘궁을 사랑하는 것이 난적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시어 그렇겠습니까?

권세 있는 척신(戚臣)이 일을 농간한 것입니다.”(<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이 상소에 격분한 숙종은 일개 유학(幼學)에 지나지 않는 이잠을 친국(親鞫)하면서 분개했다.

 

“죄인이 지극히 방자하다. 내 앞에서도 도리어 이러하니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이러한 놈은 내가 참으로 처음 보았다. 각별히 엄하게 형신(刑訊)하라.”(<숙종실록> 32년 9월17일)

 

숙종은 이잠을 ‘반드시 죽여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나장(羅將)이 신장(訊杖)을 가볍게 친다는 이유로 가두라고 명할 정도였다.

이잠은 묶은 것을 풀어주면 실토하겠다고 청했지만 거부당한 채

형장(刑杖)만 열여덟 차례 맞다 장사(杖死)했다.

한 번 형신에 약 30대씩이니 이잠이 맞은 대수는 세기도 어려웠다.

 

경종 때 소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 보궐정오>는

이잠이 ‘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 춘궁(春宮)을 위하여 죽는다는 뜻에 붙였는데,

그 어머니가 힘껏 말렸으나 그만두지 않고, 드디어 극형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잠은 노론이 세자(경종)를 내쫓으려고 한다고 주장하다가 사형당한 것인데,

이 주장은 훗날 경종독살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기도 했다.

장희빈을 죽인 노론으로서는 그 아들까지 제거해야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저군(儲君)이라 불리는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것도 반역이란 점에서

이잠의 상소는 남인 당론을 뛰어넘는 우국충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스스로 노론의 정견을 가지면서 이잠은 숙종의 역적이 되어 죽어갔다.

 

이잠의 상소 사건이 일어나자 ‘이잠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혹시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손을 흔들며

피했다’고 전하는데, 스물여섯이었던 이익은 그때 선영이 있는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주했다.

성호(星湖)라는 호는 여기에서 딴 것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廣州)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서해 가까운 안산에 속한 지역이었다.

 

첨성촌으로 이주한 그는 “화난(禍難)을 당해서 곤박(困迫)한 지경에 빠져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

라고 과거 공부를 포기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집에 장서 수천 권이 있어서 때로 이를 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게 되었다”라고

공부마저 포기하지는 않았음을 전한다.

게다가 벼슬길이 막힌 채 골방에 갇혀 책만 파는 머리만 큰 지식인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그는 ‘성호 농장(星湖之莊)에서 몸소 경작(耕作)했다’는 기록처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士農)일치의 삶을 살았다.

 

“사(士)가 때를 얻지 못하면 농(農)으로 돌아가 위로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는 데 힘쓰고,

또 그 지식은 후생을 가르치면 족하다”(<향거요람서(鄕居要覽序)>) 라고

농사와 독서를 병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농포(農圃) 일무(一畝)를 가꾸어 내 손으로 남과(南瓜· 호박)를 심어 누렇게 익는 것을 기다려

수장(收藏)했다가 겨울철에 지져서 돼지국을 만들어 반찬으로 먹으면 그 맛이 달다”라는 글도 남겼다.

농경에 종사하면서 그 시대 사대부들이 천시하는 노동의 철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노동의 철학 속에서 그는 사회 개혁을 주장한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變革)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라며 개혁을 시대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인재들만이 극심하게 편중된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면서

균전제를 주장했다. 그의 균전법(均田法)은 일종의 한전법(限田法)으로서

일정 규모 이상 농토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성호사설>과 이익의 간찰

이익은 당쟁의 본질을 이해관계라 보고,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쟁의 근원은 이해관계다”

 

이익은 집권 노론의 정치 보복으로 부친과 형을 잃었으나 남인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이익은 부친과 형의 정견을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남인들의 정견은 노론보다 객관적으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익은 남인의 자리라는 현상을 뛰어넘어 부친과 형을 죽인 당쟁의 본질에 천착했다.

당쟁의 본질에 천착하다 보니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박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맹자(孟子)가 왕도를 논한 것을 보면 ‘보민’(保民) 한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보민이라는 것은 바로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모이게 하며, 싫어하는 것을 베풀지 않을 따름이요, 집에까지 가서 날마다 보태주는 것은 아니다.”

<유민환집 (流民還集)>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생각이 실천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치는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인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가족사를 뛰어넘은 그의 정치 평론은 마치 현재의 정치 상황을 말하는 듯 생생하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

(‘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말이 불손하다’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는 등의 여러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당쟁의 연원은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주위의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하지만

싸움 끝의 이익은 정치인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대개 이(利)는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당이 둘이 되고,

이는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당이 넷이 되는’ 당쟁의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 붕당(朋黨)의 화도 그 근원을 따지면 벼슬하려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혹 이로써 죄를 얻어 멀리 내쫓김을 당한다 할지라도 얼마 안 되어 그 거리의 원근을 따져서

높은 지위로 뽑아올리니, 마치 자벌레가 제 몸을 한 번 굽혀서 한 번 펴기를 구하는 것처럼

죽을 경우를 겪어도 꺼리지 않는 이가 있다.”(‘귀향’, <성호사설> 제23권)

 

당쟁이 치열하다 보니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지고

오직 자당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비판은 격렬하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고 서학도 수용

 

“당파의 폐습이 고질화되면서

굳이 자기 당이면 어리석고 못난 자도 관중(管仲)이나 제갈량(諸葛亮)처럼 여기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도 공수 · 황패(?遂 · 黃覇 · 중국 한나라 때 명 목민관들)처럼 여기지만

자기의 당이 아니면 모두 이와 반대로 한다.”(‘당습소란’(黨習召亂), <성호사설> 제8권)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이익 사당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이익이 세운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당쟁의 구조를 간파한 이익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편당심이다.

이익은 ‘편당 속에서 성장하면 비단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당론’(黨論))며 편당심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쟁의 문제점에 대한 이익의 해결책은 신선하다.

‘이(利)가 나올 구멍을 막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벼슬아치의 사익을 창출하는 정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이를 탐해 ‘벼슬을 하려는 자가 적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들어서 시대의 요구와는 거꾸로 소수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익은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오늘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종당(宗黨 · 친척당)과 사돈붙이가 아님이 없어서…

서로 결탁하여 대를 이어가면서 벼슬을 독차지’하는 직업 정치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공경(公卿)들에게 미천한 사람들의 농사일을 알게 하려면

반드시 벌열이란 칼자루 하나를 깨뜨려 없애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 있는 인재를 가려 높여서 등용해야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꾼 중에 인재를 발탁하자’(薦拔?畝), <성호사설> 제10권)

 

이익은 사대부만이 아니라 서얼 · 농민, 나아가 노비까지도 등용하자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는다.

세습적 직업 정치가인 소수 벌열에게 집중된 정치구조를 깨트리고,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이익은 천거제를 주장한다.

‘전형(銓衡 · 인사)을 맡은 자로서 시골 인재를 추천하지 않은 자는 벌을 주자’고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익의 이런 주장들이 그 시대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처럼 그의 사상 역시 주자학을 뛰어넘었다.

다산 정약용은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

(‘둘째형님께 답합니다’(答仲氏))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또 이익의 옛집을 방문하고,

‘(이익이)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으며, 주석은 마융 · 정현을 헤아렸다’라는 시구를 남겨

이익이 주희를 거치지 않고 공맹에게 직접 다가가고,

주희 이전 고대 한(漢)나라 학자들의 주석으로 유학을 해석했다고 평가했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던 이익은 사신들을 통해 들어온 서학(西學)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만년에 흉년 계속되며 어려움에 처해

 

그는 이탈리아 신부 로드리게즈(중국명 · 陸若漢)가 정두원(鄭斗源)에게 준

각종 과학서적과 망원경 등을 예로 들면서 “그가 우리에게 준 물건들은 모두 없앨 수 없는 것들이다.

나도 천문(天問)과 직방(職方)은 읽어보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서양 학문에 개방적이었다.

밖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 속에서 안으로는 우리 것을 찾자고 주장했다.

 

이익은 안정복(安鼎福)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인(東人 · 조선인)이 동사(東史 · 조선사)를 읽지 않고,

거친 상태로 내버려두어 자고(自古)로 이에 유의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동국(東國)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 그 규제(規制)와 체세(體勢)는 스스로 중국사와는 다르다” 말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두 버리고 중국인이 되기 위해 광분하던 소중화 시대에

‘동국은 다름 아닌 동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사상의 주체성은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때 열심히 농사지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만년에 흉년이 계속되면서

“1년 중 친척 중에 20세가 된 자로 죽은 사람이 열두 명인데,

그 태반이 기병(飢病 · 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게다가 외아들 맹휴(孟休)의 와병 때, “늙은 몸으로 일찍부터 밤까지 간호하여 근력도 다하고

가산도 탕진”할 정도로 노력했으나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조 39년(1763) 83살의 고령이 된 이익에게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의 직이 내려졌으나

그해 12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세웠던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2007.02.16 한겨레21 제6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