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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임준원 - 빈자 도와준 호걸

Gijuzzang Dream 2008. 3. 17. 20:17

 

 

(10) 빈자 도와준 호걸 임준원

 
중인들은 서울의 북쪽 인왕산 일대와 남쪽 청계천 일대에 주로 모여 살았다.
지역에 따라 직업과 재산, 관심사가 달랐다.
 
서당 훈장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위항시인 정내교(鄭來僑·1681∼1757)는
스승 홍세태의 친구 임준원(林俊元)의 전기를 지으면서,
이 두 지역의 민속을 이렇게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서울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종로 남쪽부터 남산까지가 남부이다.
장사꾼과 부자들이 많이 산다.
이익을 좋아하고 인색하면서도, 수레와 집은 서로 사치를 다툰다.
 
백련봉 서쪽부터 필운대까지가 북부이다. 대체로 가난하고 얻어먹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의협스러운 무리들이 자주 있어, 의기로 사귀어 노닐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다. 흔쾌히 허락하고 남의 어려움을 잘 도왔으며 근심을 함께 하였다.
시인 문장가들이 계절을 따라 노닐며 자연속의 즐거움을 맘껏 누렸다.
마음이 내키면 시를 읊었는데, 많이 짓는 것을 자랑하고 곱게 짓기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
 

 

 

북촌은 고관들이 주로 사는 가회동, 안국동, 재동 일대를 가리키지만,

북부는 중인과 경아전들이 주로 살던 인왕산과 백악이 이어진 산자락을 가리킨다.

 

 

‘물좋은´ 내수사 경아전 자리 스스로 물러나

 

임준원은 대대로 서울 북부에 살았던 경아전이다.

신선 같은 모습에다 말솜씨까지 좋았는데,

젊었을 때 최기남(崔奇男·1586∼1669)의 서당에서 시를 배웠다.

최기남은 집이 너무 가난해 선조의 셋째 사위인 신익성(申翊聖)의 궁노(宮奴)가 되었다가

한문을 배워 서당 훈장으로 이름이 났던 위항시인이다.

 

임준원 역시 시를 잘 짓는다고 칭찬들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한데다 늙은 어버이를 모셔야 했기 때문에,

실용성 없는 한시만 계속 배울 수는 없었다.

 

정내교는 그가 큰 돈을 번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임준원은) 드디어 뜻을 굽히고 내수사(內需司)의 서리가 되었다.

임용되어 부(富)를 일으키니, 재산이 수천냥이나 모아졌다.

그러자 ‘내겐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탄식하더니,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 집에서 지냈다.”

 

 

내수사(內需司)는 조선시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사용하는 쌀·베·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개국 초에 함흥지역을 중심으로 한 태조 이성계 집안의 사유재산과

고려왕실에서 물려받은 왕실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했으므로,

본궁(本宮)이라 불리기도 했던 관청이다.

 

본래 면세특권을 부여받은 내수사전(內需司田)과

각 지방에 흩어져 일하는 수많은 노비 · 염전 등을 보유한데다,

왕실의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계속 확대했다.

 

그 폐단이 커지자 “군주는 사재(私財)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명분론을 내세워

내수사를 없애자고 건의했지만, 자신의 사유재산을 내어놓으려는 왕은 하나도 없었다.

 

신익성의 아버지 신흠(申欽)은 영의정까지 지내 국가재정에 훤했는데,

‘휘언(彙言)’이라는 글에서 

“내수사는 수입이 국가의 일반재정과 맞먹었다.

그곳의 형세가 안전해 양민(良民)과 사천(私賤)이 많이 도망해 들어갔으며,

(그 재정은 內需가 아니라) 태반이 내수(內竪)의 개인적 용도로 허비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방대한 재정을 왕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수사에 관련된 개인들이 사취한다는 뜻이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내수사 노비들이 나라 안에 돌아다니며 거둬들인 돈과 베를 내시들이 주관한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막연히 알지 못해, 임금의 사치심만 날로 더하게 한다.”고

폐단을 논했다.

 

내수사는 왕실 재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그곳의 관원 10명은 모두 왕의 심복인 내시였다.

그러다보니 서리 8명이 방대한 재정을 자기 집안의 살림처럼 운용하며

많은 재물을 빼어돌린 것이다.

내수사에 관련된 죄인을 잡아가두는 감옥인 내사옥(內司獄)이 따로 있을 정도로 비리가 많았는데,

그나마 1711년에 폐지되었다.

 

서리도 전문직이기 때문에 한문을 잘 알아야 했고, 선발시험도 보았다.

‘광해군일기’ 즉위년(1608) 9월3일 기록에

“전에는 서리를 임명하기 위해 고강(考講) · 제술(製述) · 서산(書算)을 시험한 뒤에

후보자로 참여시켰는데, 지금은 해이해졌다.”는 구절이 있다.

 

언제부턴가 읽기, 짓기, 쓰기, 셈하기 등을 시험 보아 적임자를 뽑지 않고,

청탁에 의해 뽑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아전 이윤선(李潤善·1826∼1869)이 26년 동안 호조에서 근무하며 기록한

‘공사기고(公私記攷)’를 분석하여 ‘조선후기 경아전 서리 연구’라는 논문을 쓴 원재영 선생은

호조 아전들이 임용되기 위해서 보통 1500냥 내지 1900냥을 주었다고 했다.

 

‘탁지지(度支志)’에 기록된 서리의 월급은 무명 3필, 쌀 1석5두, 보리 1두5되에 불과했다.

 

이윤선은 자신의 서리직을 정석찬에게 거금 1800냥에 팔았다가

6개월 뒤에 다시 1900냥을 주고 복직하였다.

1847년부터 1855년까지 9년 동안에만도 부동산 투자에 1000냥을 들였으며,

아들에게 공부방을 마련해주고 독선생을 모셨다.

11살 난 아들 용석(容錫)이 칠언절구의 한시를 지었다고 대견해 한 것을 보면,

아들에게는 사대부 못지않은 교양까지 갖춰주었음을 알 수 있다.

 

호조 아전들은 다양한 명목의 화폐나 현물을 수시로 받았다고 했으니, 고관 못지 않은 요직이었다.

 

내수사가 있던 마을을 내수삿골이라 불렀는데, 인왕산 밑자락인 지금의 종로구 내수동이다.

종합청사 뒷길이 내자동길인데, 내수동에서 내자동을 거쳐 사직단으로 이어진다.

내자시(內資寺) 역시 궁궐에서 사용하는 식품과 옷감을 조달하던 관청이어서 경복궁 앞에 있었다.

 

관원들은 승진하면 다른 관청으로 전근하지만 아전들은 평생 한 관청에 있었으며,

대를 이어서 그 일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경복궁 앞의 관청에 소속된 아전들은 출퇴근하기 좋은 인왕산에 많이 살았다.

 

 

가난해 경조사 못 치르는 이들도 지원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어떻게 수천금을 벌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물러났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서리직을 팔았다는 기록도 없고,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는 남부의 중인들 같이 이익을 좋아하거나 사치하지 않았으며, 인색하지도 않았다.

 

정내교는 임준원이 내수사에서 큰 돈을 벌어들인 방법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설명하였다.

 

“곧장 아전 일을 내어놓고는 집에서 지냈다. 문학과 역사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날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유찬홍 · 홍세태 · 최대립 · 최승태 · 김충렬 · 김부현 같은 시인들이 있었다.”

 

임준원은 좋은 날이나 경치가 아름다워질 때마다 여러 사람을 불러모았다.

시를 짓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며, 매우 즐겁게 놀다가 흩어졌다.

정내교가 “서울에서 재주가 좀 있다고 이름난 사람들이 그 모임에 끼이지 못하게 되면

부끄럽게 여겼다.”고 표현할 정도로 이름난 위항시인들이 모여들었다.

 

임준원의 집에 자주 모였던 시인들은 대부분 궁노(宮奴) 최기남의 제자들이다.

임준원은 물론 형조 아전 최승태는 그의 아들이고, 김부현은 그의 외손자이다.

홍세태는 역관, 김충렬은 홍문관 서리, 유찬홍은 역관이었다.

문학사에서는 이들의 모임을 낙사(洛社)라고 불렀다.

 

시인들뿐만 아니라, 친척이나 친구 가운데 가난해서 혼인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찾아왔다. 평소에도 그의 집을 드나들며 어버이처럼 모시는 자가 몇십명이나 되었다.

 

그가 육조거리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관리에게 구박받고 있었다.

불량배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가며 욕을 해대는데, 그 여자는 슬프게 울기만 했다.

그가 그 까닭을 묻고는 “그까짓 얼마 안되는 빚 때문에 여자를 이토록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불량배를 꾸짖었다. 그 자리에서 빚을 갚아 주고는, 차용증을 찢어버린 채 가버렸다.

여자가 쫓아가면서 이름과 주소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가르쳐 주지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부모가 죽은 것 같이 곡을 했다.

더 이상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되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떠나셨소?” 하고 우는 자들도 많았다.

한 늙은 과부가 와서 상복을 만들어 놓고 갔는데, 육조거리에서 구해 준 그 여자였다.

 

정내교뿐만 아니라 성해응도 임준원의 전기를 짓고, 홍문관 대제학 남유용도 지었다.

남유용은 정내교의 전기를 읽어보고 ‘요즘 보기 드문 호인(好人)’이라면서 전기를 지었다.

 

첫 줄에서 ‘호(豪)’라고 표현했는데, 부호(富豪)라는 뜻도 되지만 호걸(豪傑)이라는 뜻도 된다.

 

재산을 아끼지 않고 이웃을 도왔던 그의 이름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남유용의 ‘임준원전’을 통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서울신문, 2007-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