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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정말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렸을까

Gijuzzang Dream 2008. 2. 29. 19:13

 

 

 

 

 백성들이 정말 신문고를 두드렸을까

 

 

 

 

조선시대의 국왕과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통로 중에 신문고(申聞鼓)가 있었다.

 

'신문고'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대궐문안 의금부 당직청에 설치한 큰북을 치게 하였던 제도로,

그 북 자체도 '신문고'라고 불렀다.

 

이러한 신문고의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정부차원에서 ‘참여정부신문고’가 인터넷 상에 개설되는 등

여러 기관에서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의사를

들어주는 통로에 ‘신문고’라는 명칭을 활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역사에서 신문고(申聞鼓)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태종대인 1401년의 일이다.

 

태종과 신하는 신문고가 하정(下情) 즉 백성들의 생각, 뜻, 주장을

국왕에게 전달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리고 태종대에 신문고를 설치한 구체적인 이유로 2가지를 제시하였다.

 

하나는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국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령들이 신문고로 백성들이 국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하여

마음을 다하여 상세히 백성의 호소를 살필 것이라는 점이었다.

 

즉 백성들에게는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길 하나를 만들어주고,

수령들에게는 백성의 호소를 상세하게 살필 의무를 북돋아주는 장치 노릇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해소되길 바라는 장치가 신문고였다.

 

신문고를 운영하는 원칙에 대하여 태종대 재상인 하륜(河崙)은 몇 가지를 지적하였다.

하륜은

백성들의 호소가 “사실이면 들어주고(實則聽之=실칙청지),

거짓이면 죄를 내린다(虛則罪之=허칙죄지)”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신문고를 치려면 일정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뛰어넘어도(越訴而擊者=월소이격자) 벌을 주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어주는 관건은 진실

 

백성들이 신문고를 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억울함, 원통함 때문이었다.

국왕이 신문고를 설치하면서 제시한 설치 이유도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있었다.

 

실제로 신문고를 친 사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사로 실린 것을 보면,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위세를 지닌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신문고를 쳐서 호소하기도 하고,

노비 소유에 관련된 소송에서 관원이 잘못 판결을 내렸다고 신문고를 두드리기도 하였다.


영조대 만들어진 『속대전(續大典)』에는 신문고를 칠 수 있는 몇 가지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부자(父子)관계를 밝히는 일, 적첩(嫡妾)을 가리는 일, 양천(良賤)을 가리는 일,

네 가지의 사건일 경우에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손이 조상을 위하여, 처가 남편을 위하여, 동생이 형을 위하여, 종이 주인을 위하여 신문고를 칠 수 있고,

기타 지극히 원통한 사정이 있는 경우도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이러한 몇 가지가 바로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이 생겨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신문고를 치기 위한 절차를 보면

먼저 한성부에 살고 있는 자는 한성부의 주무관청(主掌官)에 호소하고,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은 수령, 관찰사에게 호소하는 단계를 첫 번째로 거쳐야 했다.

 

그렇게 하여도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으면 사헌부(司憲府)에 고소하고

 

그래도 또 원통하고 억울함이 있으면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신문고를 친 사람이 호소한 내용은 의금부의 당직 관리가 잘 정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역모를 꾀하여 장차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거나

종친(宗親) 등을 모해(謀害)하여 화란(禍亂)을 일으키려는 자를 고발하는 것 이라면

곧바로 신문고 있는 곳에 와서 북을 치는 것이 가능하였다.

 


조선의 국왕은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못 본 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특히 자연재해로 인해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게 되면 국왕은 자신의 잘못으로 이런 일이 있어났다고 깊이 자책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덕(德)에 허물이 있는지, 국정(國政)에 잘못이 있는지, 인사(人事)의 막힘, 소송(訴訟)의 지체가

이런 재해를 초래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였다.

이러한 국왕의 자책은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풀어주는 통로의 하나가 신문고였다.


조선왕조의 역사에 등장하는 신문고라는 커다란 북은

결국 왕국, 민국을 막론하고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보기이다.

 

신문고는

백성과 국왕의 의사소통,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어주기,

권력과 위세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사실과 진실에 입각한 정치가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불변의 당연한 논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2008-02-28 / 월간문화재사랑
- 염정섭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일러스트 홍동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