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거중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

Gijuzzang Dream 2008. 2. 18. 19:34

 

 

 

 

 

 

 

"화성성역의궤"에 실려 있는 거중기 설계도


 

어린 학생들에게 실학적 지식을 상징하는 과학이 무엇이 있는가 물으면

가장 많이 거중기를 그 예로 든다.

아마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을 착실하게 공부한 탓일 터이다.

실제로 초·중등 교과서에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과학지식과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18세기 말 정조대 화성을 건설하는 과정에

정약용이 발명해서 활용했다는 거중기가 매우 비중 있게 서술되어 있다.

그야말로 거중기는 조선후기 서양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연구한 결과 얻은

실학자들의 과학적 지식과 실용적 태도를 잘 보여주는 예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화성과 정약용 관련 문화 유적지를 가면 어렵지 않게 거중기 복원품을 볼 수 있다.

 

수원 행궁, 경기도 박물관, 그리고 능내에 있는 다산유적지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앞으로도 거중기 복원품은 더 만들어져 여기저기에 전시될 추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거중기에서 얼마나 대단한 과학적 지식을 살펴볼 수 있을까?

또한 거중기가 화성 건설 과정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을까?

 

그 역사적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약간 다른 것 같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정약용은 "기기도설"이라는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의 기계에 대한 서적을 보고 수록된 도르래를 이용해 거중기를 개발했다.

물론 거중기는 '움직도르래'를 이용, 역학적으로 작은 힘을 이용해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조선 최초의 기구였지만 그 원리는 아주 간단했다.

기초적인 역학적 원리를 간단하게 응용한 것 일뿐

당시의 과학지식을 상징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거중기는 실용성의 측면에서 유용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실제 화성 건설과정에서 1개만 만들어졌을 뿐 별로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거중기의 구조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게만 되어 있을 뿐,

작업 과정에 옮겨 다니며 사용할 수 없는 구조였다.

결국 과학적 지식과 실용성 두 가지 차원에서

모두 거중기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중기가 조선후기 사회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본다.

지식인 사회의 실용적 기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에서 실용적이고 인위적인 기구는

유가 지식인들에게 전통적으로 지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사대부들은 그러한 기구에 대해서 오히려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원시적인 거중기인 '길고'를 자공이 농부에게 가르치려 하자

자연의 도를 거스르는 인위적인 기구는 잔꾀에 불과하다며

배움을 거부했던 "장자"에 나오는 농부의 태도와 조선 사대부들의 태도는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18세기 말 정조대까지도 조선의 다수 사대부들은

실용적 양수기였던 '수차' 사용에 대해서 "장자"의 농부처럼 물이란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러한 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수차'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다고 인식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18세기 말 일부 실학자들에게서

인위적이고 실용적인 기구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대다수 사대부들이 '수차'에 대해서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실용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일부 지식인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전통 수차와 서양식 수차를 깊이 있게 연구해 '자동식 수차'를 발명한 이도 있었다.

실용적 차원에서만 그 중요성을 인식한 것 뿐 아니라

학문적 차원에서 그 원리를 추구해볼만 하다는 인식이 형성될 정도였다.

 

이제 18세기 말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소위 '명물도수지학'이라는

실용적이고 인위적인 기술적 지식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가 "기기도설"이라는 기술 서적을 연구하라고 정약용에게 주었던 일,

정약용이 그 책에 담긴 기계의 원리를 연구해

'거중기'라는 인위적인 실용적 기구를 개발한 일,

그러한 '거중기'를 화성건설이라는 범국가적 사업에 활용하려던 시도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거중기는 도르래 원리를 단순하게 응용한 간단한 기구에 불과했고,

화성 건설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지는 못했지만,

18세기 말 조선 지식인 사회의 지적인 대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 유산인 것이다.

 

화성 행궁, 경기도 박물관, 능내의 다산 유적지 등에서 거중기 복원품을 만나면

그것에 얼마나 대단한 과학적인 이론이 담겨있는가만 보지 말고,

이제부터는 그것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곱씹어 보길 바란다.  

-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