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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문화)

맥아더의 진실(MacArthur’s Truth)

Gijuzzang Dream 2008. 2. 28. 23:25

 

 
2007.08.01 통권 575 호 (p635 ~ 706)

 

  맥아더의 진실(MacArthur’s Truth)

 

 

 

글 :  이윤재 한반도 영어공학연구원장 yeeeyooon@hanmail.net

 

 

필자가 강남의 한 대형 서점에 가서 맥아더 관련 서적이 있는지 묻자,

젊은 여직원은 “맥가이버요?” 하고 되물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모르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맥아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분명한 사실은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맥아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6·25전쟁의 가장 큰 전환점인 인천상륙작전의 중심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가 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전후좌우가 연결되지 않는 토막지식이 널려 있고,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화석화하는 경우도 많다.

 

짜깁기한 역사는 역사를 잘 모르는 세대에게 얼마든지 왜곡 전달될 수 있으며,

젊은이들이 우리 현대사를 반신반의하는 태도는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필자는 맥아더 자신은 물론 맥아더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의 구미에 관계없이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를 모으는 데 주력했다.

더욱이 명 연설가였던 맥아더의 어록과 연설문, 그리고 그에 대한 여러 기록을 원문으로 보는 것은,

진실을 확인하는 데서 더 나아가 녹슨 영어 실력에 기름칠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거나, 부모가 먼저 읽고 자녀에게 권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1. 역사학자의 평가

 

‘역사 서술의 거장(master of the art of narrative history)’으로 알려진

미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매컬로(David Gaub McCullough)는 맥아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You couldn´t shrug your shoulders at Douglas MacArthur. There was nothing bland about him, nothing passive about him, nothing dull about him. There´s no question about his patriotism, there´s no question about his courage, and there´s no question, it seems to me, about his importance as one of the protagonists of the 20th century.

(누구나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해 확신한다. 그에게 흥미 없는 데라곤 전혀 없다.

소극적인 면도 전혀 없고, 어리석은 데도 전혀 없다. 그의 애국심과 용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나는 20세기 주역의 한 사람이라는 그의 중요성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2. 전쟁에 관한 철학

 

헨리 하이드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이 맥아더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을 방문했다. (2006년)

맥아더를 ‘전쟁광(warmonger)’이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렇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 그의 여러 연설에서

‘정신(the spirit)’을 강조한 대목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1945년 9월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때 맥아더가 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이 대목은 6년 뒤인 1951년 4월19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설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Men since the beginning of time have sought peace. Various methods through the ages have been attempted to devise an international process to prevent or settle disputes between nations.

(인간은 태초부터 평화를 추구해왔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국가간 분쟁을 예방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인 절차를 모색하려고 여러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From the very start, workable methods were found insofar as individual citizens were concerned, but the mechanics of an instrumentality of larger international scope have never been successful. Military alliances, balances of power, leagues of nations, all in turn failed, leaving the only path to be by way of the crucible of war.

(애초부터 개개인 간엔 여러 실행 가능한 방법이 모색됐으나,

국가간 커다란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역학은 결코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군사동맹, 세력균형 그리고 국제연맹 모두 실패했으며, 전쟁이라는 참혹한 방법만을 남겨두었습니다.)

 

The utter destructiveness of war now blots out this alternative. We have had our last chance. If we will not devise some greater and more equitable system, Armageddon will be at our door.

(전쟁의 철저한 파괴력은 이제 이러한 대안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한 번밖에 없습니다.

보다 탁월하고 보다 공정한 제도를 궁리해내지 않으면 우리는 최후의 대결전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The problem basically is theological and involves a spiritual recrudescence and improvement of human character that will synchronize with our almost matchless advances in science, art, literature, and all material and cultural developments of the past 2000 years. It must be of the spirit if we are to save the flesh.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적인 것이라 정신적인 개조와 인간 품성의 향상이 수반돼야 합니다.

그래야 지난 2000년 동안의 과학, 예술, 문학, 그리고 모든 물질적 문화적 영역에서의 비약적 발전과

보조를 맞출 것입니다. 육체를 구하는 것은 정신의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다음과 같이 긍정적인 정서가 묻어나는 명언들도 남겼다.

 

Only those are fit to live who are not afraid to die.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에 적합한 사람이다.)

 

It is fatal to enter any war without the will to win it.

(이기겠다는 의지 없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We are not retreating. We are advancing in another direction.

(우리는 후퇴하는 게 아니다.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이다.)

 

No man is entitled to the blessings of freedom unless he be vigilant in its preservation.

(자유를 지키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The soldier above all others prays for peace,

for it is the soldier who must suffer and bear the deepest wounds and scars of war.

(군인은 그 누구보다 평화를 기원한다.

전쟁으로 인해 가장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군인이기 때문이다.)

 

I promise to keep on living as though I expected to live forever. Nobody grows old by merely living a number of years. People grow old only by desertting their ideas. Years may wrinkle the skin, but to give up interest wrinkles the soul.

(나는 영원히 살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계속 재미나게 살겠다고 약속한다.

사람은 단지 여러 햇수를 살았다고 늙지 않는다. 자신의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감흥을 포기하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3. 웨스트포인트 우등생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전경.

맥아더는 육군 중장 아서 맥아더 2세(Arthur MacArthur Jr)의 아들로 태어났다.

 

맥아더는 자신의 회고록(Reminiscences)에 이렇게 적었다.

 

My first memory was the sound of the bugle, and I had learned to ride and shoot even before I could read or write - indeed, almost before I could walk and talk.

(내 첫 번째 기억은 군대 나팔 소리다.

나는 읽고 쓸 수 있기 전에-사실 걷고 말하기도 전에

말 타고 총 쏘는 법을 배웠다.)

 

맥아더는 1899년 뉴욕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the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생도가 됐다.

이듬해 상급생도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시련도 겪었지만,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스포츠와 군사훈련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제1생도대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1903년, 93명의 졸업 생도 중 1등으로 졸업했는데,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맥아더의 졸업 성적을 능가한 사람은 둘뿐이다.

 

 

4.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8월5일 대령으로 진급한 맥아더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부임해 제42 보병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이 사단을 ‘무지개 사단(the Rainbow Division)’이라고 명명했으며,

1918년 프랑스로 파견돼 제42 무지개 사단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프랑스에 복무하는 동안 준장으로 진급, 제84 보병여단 사령관이 된다.

 

그는 최전선에서 병사를 지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때로는 개인 화기도 없이 부대를 지휘하는 용맹을 발휘했다.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스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돼 독가스에 중독되기도 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호흡기에 문제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훈장(12개)을 받은 장교였으며

언젠가 그 스스로 육군 ‘최고의 전투원(the greatest fighting man)’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5. 45명 장군 중 38등

 

1919년 5월 전쟁 영웅으로 귀국한 그는 곧바로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된다.

여러 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졌던 육군사관학교를 과감히 개혁,

교양과목과 경제학을 커리큘럼에 추가했다. 1920년, 상비군 종신계급 준장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계급을 그대로 유지한 몇 안 되는 장교 중 한 사람이다.

 

6·25전쟁 당시 한국전선 시찰을 나온

미 국방장관 마셜(앞).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퍼싱은

맥아더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퍼싱 참모총장은 그를 45명 장군 중 38번째로 평가했다.

 

그의 인사고과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MacArthur has an exalted view of himself and should remain in his present grade for several years.”

(맥아더는 자신을 과대평가한다.

몇 해 동안 진급시키면 안 된다.)

 

맥아더는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25년 상비군 종신계급 최연소 소장이 된다.

1928년엔 미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선수단을 암스테르담으로 인도한다.

1930년 후버(Herbert Clark Hoover) 대통령은 맥아더를 일시계급 대장(full general)으로 진급시키고,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다.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은

임기를 마친 맥아더를 참모총장에 재임명한다.

맥아더는 재임 중

마셜(George C. Marshall)과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같은 유능한 인물을 여럿 육성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행정부의 여러 인사와 시시때때로 충돌했다.

그의 논쟁적 성격과 강한 자기주장 때문이다.

 

 

6. 필리핀 육군 원수가 되다

 

맥아더는 1935년 10월 참모총장 임기를 마쳤으나 현역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를 승인해 육군 규정에 따라

종신계급(permanent rank) 소장(major general)으로 되돌아간다.

맥아더는 1937년 12월31일에 대장계급으로 예편했으며,

1937년과 1941년 사이에 필리핀의 육군 원수(the Field Marshal of the Philippine Army) 자격으로

군사 문제를 조언했다.

1935년 미국령 필리핀연방(the Commonwealth of the Philippines)이 자체 군대를 갖는

반(半)독립 지위(semi-independent status)를 얻자

퀘손(Manuel Luis Quezon) 필리핀연방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최고군사고문(the Chief Military Advisor)이 되어 군 창설을 감독해달라고 요청했던 것.

맥아더는 이 제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퀘손 대통령과 같은 수준의 봉급과 주거공간을 요구했다.

결국 그의 주거공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닐라 호텔(the Manila Hotel) 스위트로 정해졌다.

 

맥아더에게 ‘명예 총지배인(the Honorable General Manager)’이라는 직함도 따라붙었다.

이 호텔은 필리핀 정부 소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폭격으로 마닐라가 파괴됐지만 이 호텔만은 건재했다.

맥아더는 필리핀을 다시 탈환할 때

미군 조종사에게 ‘마닐라 호텔은 폭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총지배인 역할을 충실히 한 셈이다.

‘맥아더 스위트(the MacArthur´s Suite)’ 또한 지금도 남아 있다.

 

 

7.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앞줄 가운데).

1941년 6월26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를 현역 소장으로 소환하고,

다음날 중장으로 진급시키면서 미국동군(USAFF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the Far East) 사령관에 임명한다.

1941년 12월18일에 다시 대장으로 진급시킨다.

1941년 12월은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하는 등

태평양 전역에서 공격을 퍼부을 때다.

결국 이듬해 1월에 연합군이 바탄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the Corregidor Island)으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3월, 일본군이 필리핀을 압박해오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필리핀을 떠나

호주에 기지를 새로 구축하라고 명령한다.

 

맥아더는 곧장

‘말라깽이(Skinny)’라는 별명을 가진 웨인라이트(Jonathan Mayhew Wainwright IV) 중장에게

필리핀을 맡기고, 부인과 네 살 난 아이, 그리고 보좌진과 함께 필리핀을 떠났다.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성공적으로 탈출해 도착한 곳은

민다나오 섬(the Mindanao Island). 필리핀 제도 남부에 있는 섬이다.

그는 일행을 이끌고 다시 7일

‘공중요새 폭격기(the Flying Fortress Bomber)’라 부르는 B-17에 몸을 실었다.

 

일본 점령지역 상공을 비행한 직후 맥아더는 서더랜드(Richard Sutherland) 장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It was close; but that´s the way it is in war. You win or lose, live or die - and the difference is just an eyelash.

(위기일발이었어. 전쟁이란 이런 거지.

이기느냐 지느냐, 사느냐 죽느냐의 차이가 속눈썹 하나 차이에 불과해.)

 

호주에 도착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I said, to the people of the Philippines whence I came, I shall return. Tonight, I repeat those words: I shall return!

(떠나올 때 필리핀 사람들에게 ‘돌아오겠다’고 말했지.

오늘밤 난 그 말을 되풀이하겠네. ‘난 돌아갈 것이다’라고.)

 

1942년 3월30일 미 합동참모부(JCS: the Joint Chiefs of Staff)는

태평양 작전지역(PTO: the Pacific Theater of Operations)을

남서태평양지역(SWPA: the Southwest Pacific Area)과 태평양지역(the Pacific Ocean Areas)으로

나누고, 맥아더를 SWPA 연합군사령관(the Supreme Commander of Allied Forces)에 임명한다.

 

존 커틴(John Curtin) 호주 총리는

맥아더의 미군보다 숫자가 많은 호주군 통제권마저 맥아더에게 넘겼다.

이렇게 하여 맥아더는 뉴기니 전투(the New Guinea campaign)를 시작한다.

 

한편 필리핀 연합군 사령관(the Allied commander in the Philippines)이라는 달갑지 않은 자리를

물려받은 웨인라이트는 1942년 5월6일 일본군에 항복하고 만다.

 

반격작전에 성공한 맥아더는

1944년 10월17일 필리핀 레이테 섬(the Leyte Island)에 상륙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I have returned. By the grace of Almighty God, our forces stand again on Philippine soil.

(나는 돌아왔습니다. 전능하신 신의 은총으로 우리 군대는 다시 필리핀 땅에 섰습니다.)

 

1944년 12월, 맥아더는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로 진급한다.

 

1945년 3월, 필리핀 마닐라(Manila)만 어귀의 코레히도르 섬을 탈환한

제503 낙하산 보병연대 연대장 존스(George M. Jones) 대령에게 이렇게 말한다.

 

I see that the flag-pole still stands. Have your troops hoist the colors to its peak, and let no enemy ever haul them down.

(깃대가 그대로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부하들에게 깃대 꼭대기에 국기를 게양하도록 해라.

적이 국기를 내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맥아더는 같은 해 7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고 사령부를 마닐라로 옮겼다.

그는 ‘10월에 일본을 침공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8월6일 히로시마(Hiroshima), 8월9일 나가사키(Nagasaki)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곧 전쟁이 종식된다.

어리벙벙한 맥아더는 “This apparatus will make men like me obsolete(이 기구(원자 폭탄)는

나 같은 사람을 폐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8월30일에 일본에 진주한다.

 

 

8. 일본 항복 조인식

 

일본 항복 조인식.

1945년 9월2일

일본점령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는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전함 미주리호(the Battleship Missouri) 선상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을 주재한다.

 

맥아더는 일본 대표에게

항복문서(the Instrument of Surrender)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기 전에 간단한 연설을 했다.

 

We are gathered here, representatives of the major warring powers, to conclude a solemn agreement whereby peace may be restored. The issues involving divergent ideals and ideologies, have been determined on the battlefields of the world and hence are not for our discussion or debate.

(우리 주요 교전국 대표들은 엄숙한 협정을 맺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협정으로 평화가 회복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목표와 이념을 수반하는 문제들은

전세계의 싸움터에서 종결됐으므로 우리가 토론하고 논쟁할 사항이 아닙니다.)

 

Nor is it for us here to meet, representing as we do a majority of the people of the earth, in a spirit of distrust, malice or hatred. But rather it is for us, both victors and vanquished, to rise to that higher dignity which alone befits the sacred purposes we are about to serve, committing all our people unreservedly to faithful compliance with the obligation they are here formally to assume.

(또한 우리는 세계의 대다수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불신이나 악의나 증오하는 마음을 갖고 만나서는 안 됩니다. 승자든 패자든 간에

우리는 이제 곧 이루고자 하는 숭고한 목적에 어울리는 높은 수준의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의식에서 부여된 책임을 충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It is my earnest hope and indeed the hope of all mankind that from this solemn occasion a better world shall emerge out of the blood and carnage of the past - a world founded upon faith and understanding - a world dedicated to the dignity of man and the fulfillment of his most cherished wish - for freedom, tolerance and justice.

(이 엄숙한 의식으로 인해 과거의 피와 대학살로부터 벗어나 더 좋은 세상-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세상-인류의 존엄과 인류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온, 자유와 관용과 정의에 대한 소망을 성취하는 데 전념하는 세상-이 출현하길 바라는 것이 나의 열렬한 소망이며 진실로 모든 인류의 소망입니다.)

 

The terms and conditions upon which the surrender of the Japanese Imperial Forces is here to be given and accepted are contained in the Instrument of Surrender now before you.

(항복한 일본제국군이 수용해야 할 조항들이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항복문서에 들어 있습니다.)

 

As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 announce it my firm purpose, in the tradition of the countries I represent, to proceed in the discharge of my responsibilities with justice and tolerance, while taking all necessary dispositions to insure that the terms of surrender are fully, promptly and faithfully complied with.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저는,

제가 대표하는 국가의 관례에 따라, 항복 조항이 완전히, 즉각적으로, 충실하게 이행되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면서, 정의와 관용으로 책임을 수행해 나갈 것임을 확실히 밝혀둡니다.)

 

연설이 끝나자 일본대표 외무대신과 육군참모총장이 문서에 서명했다.

이어서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서명한 뒤,

“The representativ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ill now sign(이제 미국대표 서명해주십시오)”

이라고 말한다.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대만 정부), 영국, 소련 등 연합국 대표들이 차례로 서명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문서가 조인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9. 미국민을 향한 메시지

 

Let us pray that peace be now restored to the world and that God will preserve it always. These proceedings are closed.

(전세계에 평화가 회복되도록 그리고 신께서 평화를 영원히 지켜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연합국 대표들이 모두 서명하자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방송을 통해 미국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Today the guns are silent. A great tragedy has ended. A great victory has been won. The skies no longer rain death - the seas bear only commerce - men everywhere walk upright in the sunlight. The entire world is quietly at peace. The holy mission has been completed.

(오늘 총성이 멎었습니다. 참극이 끝났습니다. 큰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하늘에는 더 이상 죽음의 비가 내리지 않으며, 바다에는 통상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서든 햇빛을 받으며 똑바로 서서 걷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성스러운 임무가 완수됐습니다.)

 

And in reporting this to you, the people, I speak for the thousands of silent lips forever stilled among the jungles and the beaches and in the deep waters of the Pacific which marked the way. I speak for the unnamed brave millions homeward bound to take up the challenge of that future which they did so much to salvage from the brink of disaster.

(이러한 사실을 국민 여러분에게 전함에 있어 저는, 정글과 해변에서 그리고 태평양의 심해에서 향도의 역할을 하다 영원히 잠들어버린 수많은 말없는 입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참변의 아슬아슬한 순간에 미래를 지켜내려고 수많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제 그 미래의 새로운 도전을 수행하기 위해 본국으로 향하는 이름 없는 용감한 병사들을 대신해 말합니다.)

 

As I look back on the long, tortuous trail from those grim days of Bataan and Corregidor, when an entire world lived in fear, when democracy was on the defensive everywhere, when modern civilization trembled in the balance, I thank a merciful God that He has given us the faith, the courage and the power from which to mold victory.

(바탄과 코레히도르의 암울한 시절을 비롯해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 민주주의가 도처에서 도전을 받고,

근대문명이 위기에 처했던 지난한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비로운 신께서 우리가 승리하도록 신념과 용기와 힘을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We have known the bitterness of defeat and the exultation of triumph, and from both we have learned there can be no turning back. We must go forward to preserve in peace what we won in war.

(우리는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았으며 승리의 환희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둘로부터 뒤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전쟁에서 성취한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선 전진해야 합니다.)

 

A new era is upon us. Even the lesson of victory itself brings with it profound concern, both for our future security and the survival of civilization. The destructiveness of the war potential, through progressive advances in scientific discovery, has in fact now reached a point which revises the traditional concepts of war.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미래의 안전과 문명의 지속, 이 두 가지에 대한 심각한 우려 또한 승리의 교훈입니다. 과학 발전의 점진적 진보를 통한 전쟁의 파괴력은 사실상 과거의 전쟁 개념을 수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We stand in Tokyo today reminiscent of our countryman, Commodore Perry, ninety-two years ago. His purpose was to bring to Japan an era of enlightenment and progress, by lifting the veil of isolation to the friendship, trade, and commerce of the world.

(우리는 오늘 92년 전 우리의 페리 제독을 회상하면서 일본에 서 있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고립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친선과 교역 그리고 세계 통상으로써 일본에 개화와 진보의 시대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But alas the knowledge thereby gained of western science was forged into an instrument of oppression and human enslavement. Freedom of expression, freedom of action, even freedom of thought were denied through appeal to superstition, and through the application of force.

(그러나 아! 슬프게도 서구과학에서 얻은 지식은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도구로 악용되었습니다. 표현의 자유, 행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조차 미신적 습관에 호소하고,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부정했습니다.)

 

We are committed by the Potsdam Declaration of principles to see that the Japanese people are liberated from this condition of slavery. It is my purpose to implement this commitment just as rapidly as the armed forces are demobilized and other essential steps taken to neutralize the war potential.

(우리는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 국민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군대를 해산하고, 그밖에 다른 본질적인 조치를 신속하게 실행하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The energy of the Japanese race, if properly directed, will enable expansion vertically rather than horizontally. If the talents of the race are turned into constructive channels, the county can lift itself from its present deplorable state into a position of dignity.

(일본민족의 에너지는, 적절하게 방향 전환할 경우 수평적이기보다 수직적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일본민족의 재능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전환되면 현재의 비참한 처지에서 존엄한 지위로 올라설 것입니다.)

 

To the Pacific basin has come the vista of a new emancipated world. Today, freedom is on the offensive, democracy is on the march. Today, in Asia as well as in Europe, unshackled peoples are tasting the full sweetness of liberty, the relief from fear.

(태평양 유역에 해방된 신세계의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오늘, 자유가 전진하고 있으며, 민주주의가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속박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넉넉한 자유의 달콤함을, 다시 말해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맛보고 있습니다.)

 

In the Philippines, America has evolved a model for this new free world of Asia. In the Philippines, America has demonstrated that peoples of the East and peoples of the West may walk side by side in mutual respect and with mutual benefit. The history of our sovereignty there has now the full confidence of the East.

(미국은 필리핀에서 아시아의 이러한 자유세계 모델을 발전시켰습니다. 미국은, 동양 사람과 서양 사람이 서로 존경하고 상호이익을 도모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필리핀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필리핀 통치 역사는 현재 동양의 완전한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And so, my fellow countrymen, today I report to you that your sons and daughters have served you well and faithfully with the calm, deliberated determined fighting spirit of the American soldier, based upon a tradition of historical truth as against the fanaticism of an enemy supported only by mythological fiction. Their spiritual strength and power has brought us through to victory. They are homeward bound - take care of them.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하여 오늘 저는 여러분의 아들과 딸들이 여러분을 위해 미국 군인의 냉정하고 신중하고 단호한 전투정신으로 훌륭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봉사했다는 점을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이들의 전투정신은 오직 신화적 허구로 뒷받침된 적의 광신주의와 구별되는 역사적 전통에 기초한 것으로 이러한 정신적 힘으로 인해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이들이 본국으로 향했습니다. 따뜻하게 맞아주십시오.)

 

 

10. 맥아더와 일본 국왕

 

미국 정부는 일본 처리의 한 방안으로

일본을 미국의 한 주(州)로 편입시키는 것을 포함한 갖가지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일본어를 구사하는 미국인이 최소 50만명이 필요했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1945년 8월29일, 맥아더는

워싱턴으로부터 ‘국왕을 포함한 일본 정부 조직을 통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일본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1945년 12월15일 신도(神道)의 종식을 명하고,

이듬해 국왕을 상징적 인물로 약화시키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일본인은 그때까지 국왕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숭배했는데,

맥아더가 국왕을 인간으로 규정함으로써 현인신 숭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훤칠한 키의 맥아더가 작고 구부정한 국왕과 나란히 찍은 사진은 상징적이다.

 

맥아더는 진주만 침략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당시 내각 총리이던 도조 히데키에게 지우고,

국왕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이런 이유로 국왕은 태평양 침략전쟁의 제1전범임에도 살아남았다.

맥아더는 혼란을 줄이면서 일본인을 변화시키는 데 국왕을 활용했다.

또한 그는 생물무기 생체실험관련 연구결과를 넘겨받은 대가로 731부대 의사들에게도 면죄부를 줬다.

 

매사추세츠 페리 가문의 후예요 페리 제독의 사촌인 맥아더는

자신을 일본 정복자(Japan´s conqueror)로 생각하기보다

또 한 명의 일본 문호 개방자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1949년, 새로 구성된 일본 정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11. 트루먼의 일기

 

미주리주 트루먼 도서관(the Truman Library)에서 발견된 트루먼 대통령의 1947년 일기가

2003년에 워싱턴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에서 공개됐다.

 

다음은 1947년 7월25일에 쓴 트루먼 대통령의 일기 내용이다.

 

Ike · I think MacArthur expects to make a Roman Triumphal return to the US a short time before the Republican Convention meets in Philadelphia. I told Ike that if he(MacArthur) did that then he(Ike) should announce for the nomination for President on the Democratic ticket and that I´d be glad to be in second place, or Vice President. I like the Senate anyway. Ike · I could be elected and my family · myself would be happy outside this great white jail, known as the White House.

(맥아더는 필라델피아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로마의 개선(凱旋)을 연출할 것이라는 게 아이젠하워와 나의 생각이다. 나는 아이젠하워에게 만일 맥아더가 그렇게 한다면 아이젠하워는 민주당 대통령후보지명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표명해야 하며 나는 기꺼이 2인자, 즉 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나는 상원의원이 좋다. 아이젠하워와 나는 당선될 수 있을 것이며, 나와 내 가족은 남들이 백악관이라고 알고 있는 이 커다란 하얀 감옥 밖에서 행복해질 것이다.)

 

이 일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트루먼은 맥아더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둘째, 트루먼은 맥아더를 견제하기 위해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을 지낸 아이젠하워(당시 육군참모총장)를 내세우는 카드를 검토했다.

그러나 1948년 대선에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는 출마하지 않았으며,

트루먼은 재선에 성공하고, 1951년에 맥아더를 해임했다.

 

 

12. 6·25전쟁

 

1950년 9월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수복식.

이승만 대통령 뒤로 맥아더 장군이 앉아 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했을 때

맥아더의 나이 일흔이었다.

그는 6·25전쟁 발발을

“Mars´ last gift to an old warrior(전쟁의 신 마르스가 노령의 전사(戰士)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맥아더는 1950년 7월8일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리고 같은 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그의 철저한 분석능력이 인천상륙작전 때 빛을 발했다.

당초 미군 합참본부가 인천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군산상륙을 권했지만 그는 인천상륙 주장을 꺾지 않았다.

적군도 미군이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고 예상치 못할 것으로 판단,

양동작전(陽動作戰, feint operation)을 폈다.

1950년 9월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터치다운,

9월26일 정오엔 중앙청에 한국 국기가 게양됐다.

 

맥아더가 38선을 돌파하자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한 트루먼은 맥아더와 면담하기를 원했다.

1950년 10월9일 트루먼 대통령은 미 극동군 총사령관겸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10월14일이나 16일에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간접화법으로 된 메시지 내용을 보자.

 

The President suggested Honolulu as the place for the meeting. The President added that he realized the difficulty that faced General MacArthur with a new campaign starting, or in progress, and that if he felt his presence in Japan or Korea was of critical importance, he, the President, would consider meeting him on Saturday morning, October 14th at Wake Island.

(대통령은 미팅 장소로 호놀룰루를 제안했다.

대통령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으로 맥아더 장군이 직면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으며, 장군이 일본이나 한국을 비우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10월14일 토요일 아침 웨이크 섬에서 만나는 것도 고려해보겠다고 덧붙였다.)

 

역시 간접화법으로 쓴 맥아더의 답신을 보자.

 

General MacArthur stated that if agreeable to the President, he would report to him at Wake Island on Saturday morning, October 14th (West Longitude time).

(맥아더 장군은 대통령께서 괜찮으시다면, 10월14일 토요일 아침(서부시간) 웨이크 섬에 출두하겠다고 말했다.)

 

웨이크 섬은 트루먼의 자존심과 맥아더의 오만함이 팽팽하게 맞선 격전장이었다.

맥아더는 대통령을 영접하기 싫어 고의로 비행장에 나가지 않았고,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는 비행장 상공을 수차 선회했다.

맥아더는 군 최고사령관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경례를 하지 않고 악수만 건넸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맥아더는

대학 교육을 2년만 받은 트루먼에게 우월감을 가졌던 것이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모순적이었다.

그의 오만함과 자존심, 독단과 과시 때문에 그는 종종 고압적이고 도도한 사람으로 비친다.

그러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엔 다정하며 가식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부하들의 충성심을 유발하는 데 탁월한 지휘자였다.

 

두 사람이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당시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토니 레비에로(Tony Leviero)의 이야기로

짐작할 수 있다.

 

MacArthur told the President at Wake Island that he thought neither Red China nor Soviet Russia would intervene in Korea. The Chinese could get no more than 50000 to 60000 troops across the Yalu, MacArthur reported, and if those troops moved on to Pyongyang, they would be slaughtered.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는 대통령에게 ‘중공도 소련도 한국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압록강을 넘을 수 있는 중공의 군대가 5만 내지 6만 병력밖에 안되며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한다 해도 전멸할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MacArthur expected victory over the North Koreans by Thanksgiving and planned to have the Eighth Army back in Japan by Christmas. He said that he would be able to release the seasoned 2nd Division for transfer to Europe by January.

(맥아더는 추수감사절까지 북한을 제패할 것으로 기대하고, 크리스마스까지는 미 8군을 일본에 돌려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잘 훈련된 2사단을 빼내서 2월까지는 유럽으로 이동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13. 중공군의 개입

 

예상과 달리 1950년 11월19일, 수백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맥아더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an entirely new war)”이라고 말하면서,

핵무기를 포함하지 않은 재래식 무기로 만주에 있는 군대, 병참기지, 비행기지를 공격할 것과

위협 목적으로 북한에 핵무기(nuclear weapons)를 전략 배치할 것을 주장했다.

지금은 북한이 핵으로 한국과 미국을 위협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본국 정부는 전역(戰域)을 한반도로 국한시키는 소위 국지전(limited war)을 명했다.

이는 만주에 있는 중공군 기지는커녕

중공군과 군수물자의 이동 통로인 압록강 다리조차 폭격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맥아더는 이렇게 분노를 표현했다.

The order not to bomb the Yalu bridges was the most indefensible and ill-conceived decision ever forced on a field commander in our nation´s history.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지 말라는 명령은 우리나라 역사상 야전군사령관에게 내려진 가장 졸렬한 결정이다.)

 

트루먼 행정부는 만주를 폭격하면 소련이 개입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51년 3월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장군이 38선까지 반격해 전쟁 이전 상태가 되자

트루먼은 휴전(cease-fire)할 의사가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힐 결심을 했다.

휴전은 중공과의 전면전(all-out war · full-scale war)을 구상했던 맥아더의 계획을 수포로 만들었다.

 

 

14. 맥아더의 독자적인 행동

 

1951년 3월20일, 합동참모부는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를 환기시키며

정전회담(cease-fire talks) 가능성을 시사했다.

 

United Nations now prepared to discuss conditions of settlement in Korea. Strong UN feeling persists that further diplomatic effort towards settlement should be made before any advance with major forces north of the 38th parallel.

(유엔은 지금 한국 문제를 해결할 조건들에 대해 검토 준비를 하고 있다. 유엔은 38선 이북의 주요 병력이 북진하기 전에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진척돼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이때부터 일이 꼬였다.

맥아더는 미국이 휴전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연합국의 견해를 탐색했다.

미국 대통령은 중공에 평화와 화해를 제안하는 메시지를 방송하려고 준비했으나

1951년 3월24일(극동 시간), 맥아더가 독자적으로 중공을 향해 성명을 발표했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이 성명은 상관의 지시와 국가정책을 공공연하게 깔아뭉갠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행위로 기록됐다.

 

맥아더의 메시지 내용은 이렇다.

 

…even under inhibitions which now restrict the activity of the United Nations forces and the corresponding military advantages which accrue to Red China, it has shown its complete inability to accomplish by force of arms the conquest of Korea. …the fundamental questions continue to be political in nature and must find their answer in the diplomatic sphere.

(…지금 금지 명령이 유엔군의 활동을 제한하고, 이로 인해 중공이 군사적 이익을 보고 있음에도 한국을 무력 정복하는 데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기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본질적으로 정치 문제이므로 외교영역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The enemy therefore must now be painfully aware that a decision of the United Nations to depart from its tolerant effort to contain the war to the area of Korea through expansion of our military operations to his coastal areas and interior bases would doom Red China to the risks of imminent military collapse.

(따라서 유엔이 전쟁을 한국지역으로 제한하는 관대한 노력을 철회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의 군사작전을 중공 연안과 내륙 기지로까지 확대함으로써 중공의 급속한 군사적 붕괴를 가져올 것임을 애써 인식해야 한다.)

 

Within my area of authority as military commander, however, it should be needless to say I stand ready at any time to confer in the field with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enemy forces in an earnest effort to find any military means whereby the realization of the political objectives of the United Nations in Korea, to which no nation may justly take exception, might be accomplished without further bloodshed.

(하지만 군사령관인 나의 권한 내에서, 어떠한 국가도 이의를 달지 않는 한국에 대한 유엔의 정치적 목적을 더 이상의 유혈 없이 성취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수단을 모색하기 위해, 적군 최고사령관과 언제라도 전장에서 협의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평화주도권(Truman´s peace initiative)이 끝장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상의 중공에 대한 최후통첩은

그가 트루먼의 계획을 안 지 불과 며칠 만에 나왔으니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렵다.

 

맥아더는 최후통첩에 앞서

3월20일에 하원 공화당 대표인 마틴(Joseph W. Martin, Jr.) 의원에게 편지를 보냈고,

마틴은 4월5일 하원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편지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It seems strangely difficult for some to realize (1)that here in Asia is where the Communist conspirators have elected to make their play for global conquest, and (2)that we have joined the issue thus raised on the battlefield; (3)that here we fight Europe´s war with arms while the diplomats there still fight it with words; (4)that if we lose the war to communism in Asia the fall of Europe is inevitable, win it and Europe most probably would avoid war and yet preserve freedom. As you pointed out, we must win.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

(여기 아시아는 공산주의 음모자들이 세계 정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정한 지역이라는 점, 그로 인해 이 싸움터에 제기된 문제에 우리가 대항해오고 있다는 점, 거기 외교관들은 여전히 말로 유럽과 전쟁을 하고 있는 반면 여기 우리는 무기를 들고 전쟁하고 있다는 점,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에 패하면 유럽이 무너지는 것이 불가피하므로 승리해야만 유럽이 전쟁을 피하고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로 예상 밖입니다.

귀하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승리 외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15.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한 이유

 

트루먼 대통령

1951년 4월11일,

 

트루먼 대통령은 국방장관 마셜에게

“I´m going to fire that son of a bitch right now

(그 개자식을 해임시켜야겠다)” 라고 말한다.

맥아더는 라디오 뉴스를 통해 자신의 해임 사실을 접한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한 후 이렇게 언급했다.

 

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of a bitch, although he was, but that´s not against the law for generals. If it was, half to three-quarters of them would be in jail.

(내가 그를 해임한 사유는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멍청한 개자식이긴 하지만 그 때문에 해임한 건 아닙니다.

그게 장군보호법 위반에 해당하진 않으니까요. 만일 그렇다면 장군의 4분의 3이 감옥신세를 졌겠지요.)

 

트루먼은

미 극동군 총사령관 겸 유엔군 총사령관 자리에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대장을 임명했다.

전쟁은 그 후 2년 더 계속됐다.

  

 

16. 상하 양원 합동회의 고별 연설

 

해임 통보를 받고 10여 년 만에 귀국한 맥아더는

1951년 4월19일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37분간의 극적인 연설을 했다.

군인에게 주어진 전무후무한 고별 연설 기회였으며 텔레비전 시대 초기의 기념비적 일화가 됐다.

박수 때문에 28번이나 중단된 이 연설을 ‘Old Soldiers Never Die’ Speech라고 한다.

 

Mr. President, Mr. Speaker, and distinguished Members of the Congress, I stand on this rostrum with a sense of deep humility and great pride - humility in the wake of those great American architects of our history who have stood here before me, pride in the reflection that this forum of legislative debate represents human liberty in the purest form yet devised. [Applause 1]

(상원의장, 하원의장, 그리고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저는 심히 겸허한 마음과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이 연단에 섰습니다. 저보다 앞서 이 자리에 섰던 우리 역사의 위대한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회상하는 겸허한 마음과, 입법부 토론의 장이 이제껏 가장 순수한 형태로 인간의 자유를 대변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으로 말입니다. [박수 1])

 

Here are centered the hopes, and aspirations, and faith of the entire human race. I do not stand here as advocate for any partisan cause, for the issues are fundamental and reach quite beyond the realm of partisan consideration. They must be resolved on the highest plane of national interest if our course is to prove sound and our future protected.

(전 인류의 희망과 염원과 신념이 여기에 결집돼 있습니다. 저는 특정 당을 대변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당면한 문제들이 당파적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방침이 완전한 것이 되고 우리의 미래가 보장되려면 이 문제들은 국익이라는 가장 높은 차원에서 해결돼야 합니다.)

 

I trust, therefore, that you will do me the justice of receiving that which I have to say as solely expressing the considered viewpoint of a fellow American. I address you with neither rancor nor bitterness in the fading twilight of life with but one purpose in mind - to serve my country. [Applause 2]

(그러므로 제가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표명하는 견해를 여러분께서 가감 없이 받아들이시리라 믿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저는 원한이나 쓰라림 때문이 아니라 조국에 봉사하겠다는 단 한 가지 목적을 갖고 말씀드립니다. [박수 2])

 

The issues are global and so interlocked that to consider the problems of one sector, oblivious to those of another, is but to court disaster for the whole. While Asia is commonly referred to as the gateway to Europe, it is no less true that Europe is the gateway to Asia, and the broad influence of the one cannot fail to have its impact upon the other. There are those who claim our strength is inadequate to protect on both fronts-that we cannot divide our effort. I can think of no greater expression of defeatism. [Applause 3]

(이 문제들은 세계적이며,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문제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부분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총체적인 재난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흔히 아시아는 유럽의 관문이라고 말하지만, 유럽이 아시아의 관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시아의 광범위한 영향이 유럽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군사력은 양쪽 전선을 다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므로 노력을 분산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보다 더한 패배주의적 표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수 3])

 

If a potential enemy can divide his strength on two fronts, it is for us to counter his effort. The Communist threat is a global one. Its´ successful advance in one sector threatens the destruction of every other sector. You cannot appease or otherwise surrender to communism in Asia without simultaneously undermining our efforts to halt its advance in Europe. [Applause 4]

(만일 잠재 적국이 병력을 두 전선으로 분산시키면, 이에 맞서는 건 우리 몫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산국가의 진출이 한 방위구역에서 성공하면, 다른 모든 방위구역을 파괴할 우려가 있습니다. 아시아의 공산국가에 유화정책을 쓰거나 포기해버리면, 공산주의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박수 4])

 

Beyond pointing out these general truisms, I shall confine my discussion to the general areas of Asia. Before one may objectively assess the situation now existing there, he must comprehend something of Asia´s past and the revolutionary changes which have marked her course up to the present.

(이러한 일반적인 공리(公理)를 지적하기보다, 아시아에 국한해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의 아시아 정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먼저 아시아의 과거, 그리고 지금의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혁명적인 변화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Long exploited by the so-called colonial powers, with little opportunity to achieve any degree of social justice, individual dignity, or a higher standard of life such as guided our own noble administration of the Philippines, the peoples of Asia found their opportunity in the war just past to throw off the shackles of colonialism, and now see the dawn of new opportunity, a heretofore unfelt dignity and the self-respect of political freedom.

(우리의 모범적인 필리핀 식민통치 지침과 같은 어느 정도의 사회 정의, 개인의 존엄, 혹은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릴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소위 식민 세력에 의해 오랫동안 착취당한 아시아의 여러 국민은 막 끝난 전쟁에서 식민주의 족쇄를 던져버릴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기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존엄, 그리고 정치적 자유라는 자존의 여명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Mustering half of the earth´s population and 60 percent of its natural resources, these peoples are rapidly consolidating a new force, both moral and material, with which to raise the living standard and erect adaptations of the design of modern progress of their own distinct cultural environments.

(세계 인구의 절반, 세계 천연자원의 60%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 아시아 국가들은 정신과 물질 양면에서 새로운 힘을 신속하게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새로운 발전계획을 그들의 독특한 문화환경에 적응시켜가고 있습니다.)

 

Whether one adheres to the concept of colonization or not, this is the direction of Asian progress and it may not be stopped. It is a corollary to the shift of the world economic frontiers, as the whole epicenter of world affairs rotates back toward the area whence it started.

(식민지화 구상을 고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아시아는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정세의 전체 중심점이 출발점으로 회귀함에 따라 세계 경제의 최전선이 바뀐 데 따른 필연적 결과입니다.)

 

In this situation it becomes vital that our own country orient its policies in consonance with this basic evolutionary condition rather than pursue a course blind to the reality that the colonial era is now past and the Asian peoples covet the right to shape their own free destiny.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이러한 기본적인 상황 전개에 따라 정책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고, 아시아의 여러 국민이 자신의 운명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권리를 갈망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방침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What they seek now is friendly guidance, understanding, and support, not imperious direction; [applause 5] the dignity of equality, not the shame of subjugation. Their prewar standard of life, pitifully low, is infinitely lower now in the devastation left in the war´s wake.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제적인 지시가 아니라 호의적인 안내, 이해, 그리고 지원입니다; [박수 5]

종속의 수치가 아니라 평등의 존엄을 원합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전쟁 전에도 비참할 정도로 낮았지만, 지금 전쟁이 남기고 간 폐허 속에서 한없이 더 낮아졌습니다.)

 

World ideologies play little part in Asian thinking and are little understood. What the peoples strive for is the opportunity for a little more food in their stomachs, a little better clothing on their backs, a little firmer roof over their heads, and the realization of the normal nationalist urge for political freedom.

(세계의 이데올로기는 아시아인들의 사고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배를 조금이라도 더 채워줄 음식 등을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해줄 옷, 몸을 가려줄 견고한 집입니다. 그리고 민족적 갈망인 정치적 자유의 실현입니다.)

 

These political-social conditions have but an indirect bearing upon our own national security, but do form a backdrop to contemporary planning which must be thoughtfully considered if we are to avoid the pitfalls of unrealism. Of more direct and immediate bearing upon our national security are the changes wrought in the strategic potential of the Pacific Ocean in the course of the past war.

(이러한 정치·사회적 상황은 우리 안보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뿐이지만, 당면 계획을 세울 때 비현실적이라는 함정을 피하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배경 요소입니다. 우리 국가 안보에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전후(戰後)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능성을 지닌 태평양이 가져올 변화입니다.)

 

Prior thereto, the western strategic frontier of the United States lay on the littoral line of the Americas with an exposed island salient extending out through Hawaii, Midway, and Guam to the Philippines. That salient proved not an outpost of strength but an avenue of weakness along which the enemy could and did attack. The Pacific was a potential area of advance for any predatory force intent upon striking at the bordering land areas.

(거기에다 지금까진 미국의 서부 전선은 아메리카대륙 전체 해안선과 하와이, 미드웨이, 그리고 괌에서 필리핀까지 펼쳐진 섬으로 모두 공격에 노출돼 있었습니다. 이 돌출부는 병력의 전초기지가 아니라, 적이 공격해올 가능성이 있거나 실제로 공격받은 적이 있는 취약한 통로로 드러났습니다. 태평양은 인접한 육지를 공격하고자 하는 침략군이 진격해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All this was changed by our Pacific victory. Our strategic frontier then shifted to embrace the entire Pacific Ocean which became a vast moat to protect us as long as we hold it. Indeed, it acts as a protective shield for all of the Americas and all free lands of the Pacific Ocean area. We control it to the shores of Asia by a chain of islands extending in an arc from the Aleutians to the Marianas held by us and our free allies.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태평양에서 승리함으로써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전략전선은 태평양 전역을 둘러싸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지키고 있는 한 태평양은 우리를 보호해줄 거대한 해자(垓字)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아메리카대륙 전체와 태평양 지역의 모든 자유국가를 보호하는 방패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유동맹국이 장악하고 있는 알류산 열도에서 마리아나 제도까지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일련의 섬들을 매개로 아시아 해안까지 태평양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From this island chain we can dominate with sea and air power every Asiatic port from Vladivostok to Singapore and prevent any hostile movement into the Pacific.

(우리는 사슬처럼 연결된 이 섬들을 기지로 하여 해군력과 공군력을 갖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싱가포르에 이르는 아시아의 모든 항구를 지배할 수 있으며, 어떤 형태든 적의 태평양 진입도 막을 수 있습니다.)

 

Any predatory attack from Asia must be an amphibious effort. No amphibious force can be successful without control of the sea lanes and the air over those lanes in its avenue of advance. With naval and air supremacy and modest ground elements to defend bases, any major attack from continental Asia toward us or our friends of the Pacific would be doomed to failure.

(아시아의 침공은 반드시 육 · 해 · 공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떠한 육 · 해 · 공 공격도 해상과 공중의 진격 통로를 지배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제해권과 제공권, 그리고 기지를 방어할 수 있는 적당한 지상병력을 갖추고 있으면, 우리나라나 다른 태평양 우방국을 향한 아시아 대륙의 어떤 공격도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Under such conditions the Pacific no longer represents menacing avenues of approach for a prospective invader. It assumes instead the friendly aspect of a peaceful lake. Our line of defense is a natural one and can be maintained with a minimum of military effort and expense. It envisions no attack against anyone nor does it provide the bastions essential for offensive operations, but properly maintained, would be an invincible defense against aggression.

(이러한 조건에서 태평양은 더 이상 침략자가 접근해오는 위협적인 통로가 아니며, 잔잔한 호수 같은 평화적인 면모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천연의 방위선을 갖고 있으므로 최소한의 군사적 노력과 예산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태평양이 어느 누구에 대한 공격도 계획하지 않고, 공격작전에 필요한 보루를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적절하게 유지된다면 침략 불가능한 방위기지가 될 것입니다.)

 

The holding of this littoral defense line in the western Pacific is entirely dependent upon holding all segments thereof, for any major breach of that line by an unfriendly power would render vulnerable to determined attack every other major segment. This is a military estimate as to which I have yet to find a military leader who will take exception. [Applause 6]

(서태평양의 해안 방위선을 장악하는 것은 이 방위선상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는 것과 전적으로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방위선상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적의 공격에 허점을 드러내면 다른 모든 영역도 공격받을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군사적인 판단이며,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 군사 지도자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박수 6])

 

For that reason I have strongly recommended in the past as a matter of military urgency that under no circumstances must Formosa fall under Communist control. [Applause 7] Such an eventuality would at once threaten the freedom of the Philippines and the loss of Japan, and might well force our western frontier back to the coasts of California, Oregon, and Washington.

(이러한 이유로 제가 그동안 어떻게 해서든 대만이 공산주의자들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박수 7]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현실이 되면 필리핀의 자유와 일본의 상실을 위협할 것이며, 우리의 서부 경계선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그리고 워싱턴주 해안선까지 후퇴할 것입니다.)

 

To understand the changes which now appear upon the Chinese mainland, one must understand the changes in Chinese character and culture over the past 50 years. China up to 50 years ago was completely non-homogeneous, being compartmented into groups divided against each other. The war-making tendency was almost nonexistent, as they still followed the tenets of the Confucian ideal of pacifist culture.

(지금 중국 본토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이해하려면 지난 50년 동안 중국의 특성과 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50년 전만 해도 중국은 여러 그룹으로 분열돼 동질성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유교의 평화주의를 신봉했기 때문에 호전적인 성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At the turn of the century, under the regime of Chang Tso-lin, efforts toward greater homogeneity produced the start of a nationalist urge. This was further and more successfully developed under the leadership of Chiang Kai-shek, but has been brought to its greatest fruition under the present regime, to the point that it has now taken on the character of a united nationalism of increasingly dominant aggressive tendencies.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할 무렵 장쭤린(張作霖) 정권하에서 동질성을 갖고자 하는 노력이 민족주의 운동을 초래했으며, 이 운동은 장제스(蔣介石)의 영도로 더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 운동이 가장 크게 성공한 것은 지금의 공산정권 아래서이며, 통일된 민족주의는 점차 침략적인 성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Through these past 50 years, the Chinese people have thus become militarized in their concepts and in their ideals. They now constitute excellent soldiers with competent staffs and commanders. This has produced a new and dominant power in Asia which for its own purposes is allied with Soviet Russia, but which in its own concepts and methods has become aggressively imperialistic with a lust for expansion and increased power normal to this type of imperialism.

(이렇게 하여 지난 50년 동안, 중국인의 사상과 이상이 군국주의로 고취됐습니다. 그들은 현재 유능한 참모와 지휘관을 가진 훌륭한 군대를 갖추었습니다. 중국은 이로써 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세력이 됐습니다. 중국은 목적을 위해 소련과 동맹하고 있지만 사상과 방법에선 점차 침략적인 제국주의 경향을 띠며,

영토를 팽창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제국주의 전형에 걸맞은 야욕을 갖고 있습니다.)

 

There is little of the ideological concept either one way or another in the Chinese make-up. The standard of living is so low and the capital accumulation has been so thoroughly dissipated by war that the masses are desperate and avid to follow any leadership which seems to promise the alleviation of local stringencies.

(이렇든 저렇든 중공의 구성은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생활수준이 아주 낮으며 자본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실됐기에 서민은 절망한 나머지 지방의 핍박을 완화해주겠다고 약속하는 듯한 지도자라면 누구든 추종할 처지에 있습니다.)

 

I have from the beginning believed that the Chinese Communists´ support of the North Koreans was the dominant one. Their interests are at present parallel to those of the Soviet, but I believe that the aggressiveness recently displayed not only in Korea, but also in Indochina and Tibet and pointing potentially toward the south, reflects predominantly the same lust for the expansion of power which has animated every would-be conqueror since the beginning of time. [Applause 8]

(저는 처음부터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을 지원하리라고 믿었습니다. 중공의 이해관계는 소련의 그것과 같은 방향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공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와 티베트에서 최근에 보여준 침략성은 남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태초부터 정복자가 되려는 자들을 고무한 세력 팽창 야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박수 8])

 

The Japanese people since the war have undergone the greatest reformation recorded in modern history. With a commendable will, eagerness to learn, and marked capacity to understand, they have, from the ashes left in war´s wake, erected in Japan an edifice dedicated to the primacy of individual liberty and personal dignity, and in the ensuing process there has been created a truly representative government committed to the advance of political morality, freedom of economic enterprise and social justice. [Applause 9]

(태평양전쟁 이후로 일본은 근대사에 기록된 가장 훌륭한 개혁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의지와 배우려는 열망과 뛰어난 이해력으로 전쟁이 할퀴고 간 잿더미 위에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으뜸으로 하는 체계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정치 도의와 기업의 자유와 사회 정의를 담보하는 진정한 대의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박수 9])

 

Politically, economically and socially Japan is now abreast of many free nations of the earth and will not again fail the universal trust. That it may be counted upon to wield a profoundly beneficial influence over the course of events in Asia is attested by the magnificent manner in which the Japanese people have met the recent challenge, of war, unrest, and confusion surrounding them from the outside, and checked communism within their own frontiers without the slightest slackening in their forward progress.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일본은 지금 지구상의 많은 자유국가에 뒤지지 않으며

다시는 세계의 신뢰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일본 국민이 최근 외부로부터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전쟁과 불안, 혼란을 목도했음에도 자국내 공산주의를 제거함으로써 발전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I sent all four of our occupation divisions to the Korean battle front without the slightest qualms as to the effect of the resulting power vacuum upon Japan. The results fully justified my faith. [Applause 10] I know of no nation serene, orderly, and industrious, nor in which higher hopes can be entertained for future constructive service in the advance of the human race. [Applause 11]

(저는 일본점령군 4개 사단 전부를 한국 전선에 파견했지만, 이로 인해 일본에 힘의 공백이 야기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믿음은 그 뒤에 나타난 결과로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박수 10] 이렇게 평화롭고, 규율을 잘 지키며, 근면한 국민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건설적인 공헌을 할 것이라고 기대할 만한 나라도 일본밖에 없습니다. [박수 11])

 

Of our former wards, the Philippines, we can look forward in confidence that the existing unrest will be corrected and a strong and healthy nation will grow in the longer aftermath of war´s terrible destructiveness. We must be patient and understanding and never fail them, as in our hour of need they did not fail us. [Applause 12] A Christian nation, the Philippines stand as a mighty bulwark of Christianity in the Far East, and its capacity for high moral leadership in Asia is unlimited.

(우리의 보호국이었던 필리핀에 대해 말씀드리면, 전쟁의 참혹한 파괴의 여파가 장기간 계속됐지만 현재의 불안을 해소하고, 강력하고 건전한 국가를 건설하리라 확신합니다. 우리가 아쉬워했을 때 그들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듯 우리도 인내하고 이해해 그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박수 12]

기독교 국가인 필리핀은 극동지역 기독교를 위한 강력한 보루이며, 아시아에서 정신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무한합니다.)

 

On Formosa,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China has had the opportunity to refute by action much of the malicious gossip which so undermined the strength of its leadership on the Chinese mainland. [Applause 13] The Formosan people are receiving a just and enlightened administration with majority representation on the organs of government; and politically, economically and socially they appear to be advancing along sound and constructive lines.

(대만에 대해 말씀드리면, 중화민국 정부는 본토에 대한 지도력을 손상시켰던 고의적 공론(空論)의 대부분을 행동으로 논파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박수 13]

대만 사람들은 정부기관에 다수당이 참여하는 공정하고 개화된 정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건전하고 건설적인 노선에 따라 전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With this brief insight into the surrounding area, I now turn to the Korean conflict. While I was not consulted prior to the President´s decision to intervene in support of the Republic of Korea, that decision from a military standpoint, proved a sound one. As I said, it proved to be a sound one, [applause 14] as we hurled back the invader and decimated his forces. Our victory was complete, and our objectives within reach, when Red China intervened with numerically superior ground forces.

(한국 주변 지역을 간단하게나마 고찰했으므로 이제 한국전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대한민국을 돕기로 결정하기에 앞서 저와 협의한 바는 없지만, 군사적 견지에서 볼 때 대통령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결정은 옳은 것으로 증명됐습니다. [박수 14]

우리가 침략자를 몰아내고 적의 병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완벽했고, 우리는 목적을 이루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중공이 수적으로 우세한 지상군을 앞세워 개입했습니다.)

 

This created a new war and an entirely new situation-a situation not contemplated when our forces were committed against the North Korean invaders-a situation which called for new decisions in the diplomatic sphere to permit the realistic adjustment of military strategy. Such decisions have not been forthcoming. [Applause 15]

(이로 인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고 전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됐습니다. 우리의 군대가 북한의 침략자들과 싸울 당시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군사전략을 현실적으로 조정하는 외교적 차원의 새로운 결정이 요구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박수 15])

 

While no man in his right mind would advocate sending our ground forces into continental China and such was never given a thought, the new situation did urgently demand a drastic revision of strategic planning if our political aim was to defeat this new enemy as we had defeated the old. [Applause 16]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우리의 지상군을 중국 대륙에 보내자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전략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상황 전개로 인해 전략 구상을 과감히 수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적을 물리쳤던 것처럼, 우리의 정치적 목표가 새로운 적을 물리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박수 16])

 

Apart from the military need, as I saw it, to neutralize the sanctuary protection given the enemy north of the Yalu, I felt that military necessity in the conduct of the war made mandatory:

1. The intensification of our economic blockade against China;

2. The imposition of a naval blockade against the China coast;

3. Removal of restrictions on air reconnaissance of China´s coast areas and of Manchuria [applause 17];

4. Removal of restrictions on the forces of the Republic of China on Formosa with logistical support to contribute to their effective operations against the common enemy. [Applause 18]

(제가 보기에, 적이 압록강 북쪽에서 성역처럼 보호받고 있는 것을 무력화하는 게 군사적으로 필요함은 물론이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다음과 같은 조치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중공에 대한 경제 봉쇄의 강화; 둘째, 해군의 중공 연안 봉쇄; 셋째, 중공 연안 및 만주에 대한 공중 정찰 제한 해제 [박수 17]

넷째, 대만 자유중국군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고 그들에게 병참지원을 제공해 공동의 적에 대한 효율적 작전에 기여토록 함.[박수 18])

 

For entertaining these views, all professionally designed to support our forces committed to Korea and bring hostilities to an end with the least possible delay and at a saving of countless American and Allied lives, I have been severely criticized in lay circles, principally abroad, despite my understanding that from a military standpoint the above views have been fully shared in the past by practically every military leader concerned with the Korean campaign, including our own Joint Chiefs of Staff. [Applause 19·the Members rising]

(이러한 모든 견해는 한국에 있는 우리 군대를 지원해 가능한 한 최단 시일 내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수많은 미군과 연합군의 생명을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전문적으로 계획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저는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특히 외국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합동참모본부를 비롯해 한국전쟁과 관련한 거의 모든 군사 지도자들이 이미 이런 견해에 공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박수19·, 의원 전원 기립])

 

I called for reinforcements, but was informed that reinforcements were not available. I made clear that if not permitted to destroy the build-up bases north of the Yalu; if not permitted to utilize the friendly Chinese force to some 600,000 men on Formosa; if not permitted to blockade the China coast to prevent the Chinese Reds from getting succor from without; and if there were to be no hope of major reinforcements, the position of the command from the military standpoint forbade victory.

(제가 증원부대를 요청했습니다만, 증원은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는 사령관으로서, 압록강 북쪽에 있는 적의 기지를 파괴하지 않으면, 대만에 있는 약 60만의 우방 자유중국군을 동원하지 않으면, 중공이 외부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하도록 중국 해안을 봉쇄하지도 않으면, 그리고 대대적인 병력 강화 가능성이 없다면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We could hold in Korea by constant maneuver and at an approximate area where our supply line advantages were in balance with the supply line disadvantages of the enemy, but we could hope at best for only an indecisive campaign, with its terrible and constant attrition upon our forces if the enemy utilized his full military potential.

(우리가 끊임없이 기동작전을 전개하면, 우리에게는 유리하고 적에게는 불리한 인접지역에서는 한국의 방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라 할지라도 불확실한 전쟁이 예상되며, 적이 군사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아군에게는 격렬한 지구전이 뒤따를 것입니다.)

 

I have constantly called for the new political decisions essential to a solution. Efforts have been made to distort my position. It has been said, in effect, that I am a warmonger.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truth. I know war as few other men now living know it, and nothing to me is more revolting. I have long advocated its complete abolition as its very destructiveness on both friend and foe has rendered it useless as a means of settling international disputes.

(전 문제 해결에 필수 불가결한 새로운 정치적인 결단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제 의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저를 ‘전쟁광’이라고 하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현존하는 사람 중에 저만큼 전쟁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전 전쟁이 지긋지긋합니다. 전 오랫동안 전쟁의 종식을 주장해왔습니다. 아군과 적군 모두를 파괴하는 전쟁은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Indeed, on the 2d of September 1945, just following the surrender of the Japanese Nation on the battleship Missouri, I formally cautioned as follows:(‘맥아더의 전쟁에 관한 철학’에서 이미 인용한 부분이라 생략)[Applause 20]

(1945년 9월2일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을 가진 직후에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경고한 바 있습니다: [박수 20])

 

But once war is forced upon us, there is no other alternative than to apply every available means to bring it to a swift end. War´s very object is victory-not prolonged indecision. [Applause 21] In war, indeed, three can be no substitute for victory. [Applause 22]

(하지만 일단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조속히 종결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지, 질질 끄는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박수 21]

전쟁에선 승리 외에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박수 22])

 

There are some who for varying reasons would appease Red China. They are blind to history´s clear lesson. For history teaches with unmistakable emphasis that appeasement but begets new and bloodier war. It points to no single instance where the end has justified that means - where appeasement has led to more than a sham peace. Like blackmail, it lays the basis for new and successively greater demands, until, as in blackmail, violence becomes the only other alternative.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중공에 대해 유화정책을 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의 명백한 교훈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유화 정책은 보다 살벌한 전쟁을 초래할 뿐이라고 역사는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예 - 유화정책이 거짓 평화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발전한 예 -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역사가 가르쳐줍니다. 협박과 마찬가지로 유화정책은 상대방이 지속적으로 더 큰 요구를 하는 근거를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결국 협박처럼 폭력 외에 달리 취할 방도가 없게 됩니다.)

 

Why, my soldiers asked me, surrender military advantages to an enemy in the field? I could not answer. [Applause 23] Some may say to avoid spread of the conflict into an all-out war with China; others, to avoid Soviet intervention.

(병사들이 “왜 전장에서 군사적인 이점을 적에게 넘겨주느냐?”고 물었을 때, 전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박수 23]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 중공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소련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Neither explanation seems valid. For China is already engaging with the maximum power it can commit and the Soviet will not necessarily mesh its actions with our moves. Like a cobra, any new enemy will more likely strike whenever it feels that the relativity in military or other potential is in its favor on a world-wide basis.

(하지만 어떤 설명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중공은 이미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으로 교전하고 있으며,

소련은 반드시 우리의 움직임과 맞물려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브라처럼, 어느 적이든 군사력이나 다른 잠재력이 세계적 차원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공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The tragedy of Korea is further heightened by the fact that as military action is confined to its territorial limits, it condemns that nation, which it is our purpose to save, to suffer the devastating impact of full naval and air bombardment, while the enemy´s sanctuaries are fully protected from such attack and devastation.

(한국의 비극은 군사행동이 지역적으로 제한됐다는 사실 때문에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임에도, 이 나라는 전면적인 함포 사격과 공습으로 파괴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반면, 적의 성역은 이런 공격과 참화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Of the nations of the world, Korea alone, up to now, is the sole one which has risked its all against communism. The magnificence of the courage and fortitude of the Korean people defies description. [Applause 24] They have chosen to risk death rather than slavery. Their last words to me were “Don´t scuttle the Pacific.” [Applause 25]

(현재까지 세계의 모든 나라 중에서 한국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오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이 보여준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박수 24]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한 마지막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박수 25])

 

I have just left your fighting sons in Korea. They have met all tests there and I can report to you without reservation they are splendid in every way. [Applause 26] It was my constant effort to preserve them and end this savage conflict honorably and with the least loss of time and a minimum sacrifice of life. Its growing bloodshed has caused me the deepest anguish and anxiety. Those gallant men will remain often in my thoughts and in my prayers always. [Applause 27]

(저는 전투 중인 여러분의 아들들을 한국에 두고 막 떠나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든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고 주저 없이 말씀드립니다. [박수 26]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시간 손실과 인명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이 야만적인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점차 증가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유혈참사는 저를 깊은 고뇌와 걱정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은 문득문득 제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며 언제나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박수 27])

 

I am closing my 52 years of military service. [Applause 28] When I joined the Army even before the turn of the century, it was the fulfillment of all my boyish hopes and dreams.

(제 52년 군인 생활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박수 28] 전 20세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군에 입대했고, 그것은 제 소년 시절의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The world has turned over many times since I took the oath on the plain at West Point, and the hopes and dreams have long since vanished. But I still remember the refrain of one of the most popular barrack ballads of that day which proclaimed most proudly that -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제가 웨스트포인트 연병장에서 선서한 이래로 세계에는 수많은 변동이 일어났으며 제 희망과 꿈도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그 시절 가장 즐겨 부르던 군가 중 하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후렴은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라고 아주 당당하게 외칩니다.)

 

And like the old soldier of that ballad, I now close my military career and just fade away, an old soldier who tried to do this duty as God gave him the light to see that duty. Good-by.

(그 노래 속의 노병처럼 이제 저는 군인생활을 마감하고 사라져갑니다. 신의 은총으로 임무를 깨달았으며, 그 의무를 완수하려고 애쓴 한 노병으로 말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7. 티커 테이프 퍼레이드

 

1951년 4월22일 맥아더가 오픈카를 타고 뉴욕 브로드웨이를 지나갈 때 700만 환영인파가 몰렸다.

미처 연도에 나오지 못한 시민들은

고층빌딩 옥상과 베란다, 창가로 나와 티커 테이프(ticker-tape)를 뿌렸다.

티커 테이프는 ‘환영하기 위해 빌딩의 창에서 뿌리는 색종이’를 가리킨다.

get ticker-tape welcome은 ‘터거 테이프를 뿌리는 환영을 받다’는 의미이고,

ticker-tape parade는 미국 최대 도시 뉴욕에서 ‘색종이가 뿌려지는 행진’을 말한다.

 

어원은 이렇다.

의성어인 tick은 명사로는 ‘똑딱똑딱[재깍재깍]거리는 소리’,

동사로는 ‘똑딱똑딱[재깍재깍]거리는 소리를 내다’란 의미다.

ticker는 일반적으로 ‘똑딱똑딱[재깍재깍] 소리내는 도구[기계]’,

‘증권시세 표시기’를 지칭하며,

ticker-tape는 ticker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증권시세가 인쇄된 ‘테이프’를 뜻했다.

 

1950년대에는 외국 국가원수가 미국을 방문하면 그를 환영하는 퍼레이드가 있었으나,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로 점차 줄어들었다.

 

퍼레이드 루트였던 브로드웨이- 월스트리트 금융 지구에 이르는 길을

흔히 ‘영웅들의 대협곡(the Canyon of Heroes)’이라고 일컫는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맥아더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Following World War II several ticker tape parades were given in honor of victorious generals and admirals including Eisenhower and Nimitz. However, the largest ticker tape parade of all, given for General Douglas MacArthur was not until long after his triumphs in the Pacific, and followed his stunning victories in the Korean War.

(2차대전 이후 아이젠하워와 니미츠 같은 여러 전승 장군과 제독을 환영하는 티커 테이프 퍼레이드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대대적인 퍼레이드는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고 한참 뒤에,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기막힌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였다.)

 

 

18. 퇴역 군인의 조용한 행보

 

고국으로 돌아온 맥아더는 한동안 전쟁영웅으로서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으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이 가라앉았다.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1944년, 1948년, 그리고 1952년에 연이어

맥아더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정치적 야심이 없다(I have no political aspirations)”고 거듭 밝혔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그는 1933년부터 1939년까지 7년 동안 맥아더의 휘하에 있었다.

맥아더가 참모총장일 때 2년간 부관을 지냈고,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갈 때도 동행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사무원이다(Eisenhower is the best clerk that I have ever had)”라고

말한 바 있다.

 

맥아더는 퇴역 후

컴퓨터 회사인 레밍턴 랜드(Remington Rand Corporation) 이사회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으나,

이내 세상에서 잊혔다.

1955년 미 의회는 맥아더를 대원수(6성 장군)로 진급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맥아더는 6성 장군 진급을 사양했다.

선배인 마셜이 대원수로 추천받지 못했다는 것과 퇴직금 관련 이유를 들어 고사했다.

 

미국 육군의 장성 계급체계는

Brigadier General(준장), Major General(소장), Lieutenant General(중장), General(대장),

General of the Army(원수), General of the Armies(대원수)로 이뤄진다.

미 육군 역사상 두 명의 대원수가 배출됐다.

조지 워싱턴이 사후에 대원수 타이틀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퍼싱(John J. Pershing)이 대원수로 진급했다.

 

 

19. 웨스트포인트 고별사

 

맥아더 장군 장례식

맥아더가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난 것은

1962년 5월12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실바너스 세이어 상(Sylvanus Thayer Award)을 받을 때다.

 

그는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Duty, Honor, Country - those three hallowed words reverently dictate what you ought to be, what you can be, what you will be. They are your rallying point to build courage when courage seems to fail, to regain faith when there seems to be little cause for faith, to create hope when hope becomes forlorn.

(임무, 명예, 조국 - 이 세 개의 신성한 단어는 여러분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어떠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어떠한 인간이 될 것인지를 경건하게 규정합니다.

이 말은 용기가 시들 때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신념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없을 때 신념을 되찾아주며,

희망이 절망이 될 때 희망을 솟아오르게 함으로써 여러분을 고무시키는 요체입니다.)

 

맥아더는 1964년 4월5일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영면했다.

맥아더기념관(the MacArthur Memorial)은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시에 있다.

원래 노퍽시청청사(the Norfolk City Hall)였으나 기념관으로 봉납되었다.

메릴랜드(Maryland)주 포토맥(Potomac)강변의 그레이트 폴스 공원(Great Falls Park)에서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맥아더를 기리기 위해 맥아더대로(MacArthur Boulevard)라고 명명됐다.

 

 

20. 아버지의 기도

 

부인 진 맥아더와 함께한 모습

맥아더는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1937년 재혼한

진 페어클로스(Jean Faircloth·1898~2000)와의 사이에

외아들을 뒀다.

그의 아들 아서 맥아더 4세(Arthur MacArthur IV)는

현재 뉴욕에서 색소폰 연주가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평범하게 살기 위해 성을 바꿨다고 한다.

 

맥아더는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아빠(doting father)’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초기에

‘A Father´s Prayer(아버지의 기도)’를 썼다.

 

이 기도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지혜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모순법을 적절히 배합한 감동적인 시나 다름없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소개됐지만,

오역된 부분이 많아 이를 바로잡고 해설도 덧붙여 전재한다.

 

 

A Father´s Prayer (아버지의 기도)

 

Build me a son, O Lord,

who will be strong enough to know when he is weak,

and brave enough to face himself when he is afraid;

one who will be proud and unbending in honest defeat,

and humble and gentle in victory.

(오 주여, 이러한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약할 때 용감하게 자신을 지키고, 두려움에 대담하게 맞서며,

정직한 패배에 당당하고 꿋꿋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순한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Build me a son whose wishbone will not be

where his backbone should be;

a son who will know Thee - and that

to know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knowledge.

(소망을 실행하는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아는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Lead him, I pray, not in the path of ease and comfort,

but under the stress and spur of difficulties and challenge.

Here, let him learn to stand up in the storm;

here, let him learn compassion for those who fall.

(바라옵건대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이 아니라,

고난과 도전의 긴장과 자극 속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삶의 폭풍 속에서도 용감하게 맞서게 하시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Build me a son whose heart will be clear, whose goals will be high;

a son who will master himself before he seeks to master other men;

one who will learn to laugh, yet never forget how to weep;

one who will reach into the future, yet never forget the past.

(마음이 깨끗한, 목표가 드높은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타인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복할 줄 아는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웃음을 알되 울음도 아는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미래로 나아가되 과거를 잊지 않는 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And after all these things are his,

add, I pray, enough of a sense of humor,

so that he may always be serious,

yet never take himself too seriously.

(아무튼 이러한 모든 것을 아들에게 허락하시고,

이에 더하여 항상 진지하지만 너무 진지하여 결코 자신을 얽어매지 않도록,

넉넉한 유머감각이 있는 아들이 되도록 하여 주옵소서.)

 

Give him humility,

so that he may always remember

the simplicity of true greatness,

the open mind of true wisdom,

the meekness of true strength.

(아들에게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어,

참된 위대함은 소박함에 있음을,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음을,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Then I, his father, will dare to whisper,

“I have not lived in vain.”

(그렇게 되면 그의 아버지인 나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감히 나직하게 말하겠나이다.)

 

 

맥아더는 가족이 자신을 군인이 아니라 기도하는 아버지로 기억하기를 바랐다.

그의 또 다른 글을 보자.

 

 

A Soldier and a Father(군인과 아버지)

 

By profession I am a soldier

and take pride in that fact.

But I am prouder - infinitely prouder - to be a father.

A soldier destroys in order to build; the father only builds, never destroys.

(나의 직업이 군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갖지만, 한 아버지라는 것에

더욱 더 - 더욱 더 무한히 - 긍지를 갖는다.

군인은 파괴하는 것이 건설하는 것이지만; 아버지는 건설만 하지,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

 

The one has the potentiality of death; the other embodies creation and life.

And while the hordes of death are mighty,

the battalions of life are mightier still.

(군인은 항상 죽임과 가까이하나; 아버지는 창조와 생명을 구현한다.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힘을 상징하지만,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

 

It is my hope that my son, when I am gone,

will remember me not from the battle field

but in the home repeating with him

our simple daily prayer,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나는 소망한다, 내가 죽고 없을 때 내 아들이,

전쟁터의 내가 아니라 집에서 매일같이 아들과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도하던 나를 기억해주길.)

 

 

21. 오역이 빚은 오해

 

2005년,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이 철거 위기에 처했다.

그해 9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the U.S. House International Relations Committee)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려면 차라리 넘겨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한 바 있다.

 

이듬해 방한해서, 맥아더 동상에 헌화한 헨리 하이드(Henry Hyde)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Make new friends, but keep the old, one is silver and the other is gold(새 친구를 사귀어라. 하지만 옛 친구를 지켜라. 새 친구는 은이요, 옛 친구는 금이다)”

맥아더 장군이 금이라는 얘기다.

 

맥아더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해는 풀었으면 한다.

맥아더를 비난하는 진영에서 문제 삼는 것 중 하나가

광복 직후 남한에서 발표된 맥아더 포고문 제3조다.

 

내용인즉, “맥아더 포고문 제3조는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하에서 발표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peace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라고 돼 있는데,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포고문에는

‘조선은 자유국이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라고 돼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미국은 점령군, 소련은 해방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번역이 잘못됐다.

여기서 ‘obey’는 ‘복종하다’가 아니라 ‘준수하다’로 번역해야 옳다.

맥아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40년이 넘었지만,

그가 옳았느냐 트루먼이 옳았느냐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His Life (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