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산수, 낙원을 지향하다”
국립중앙박물관 문동수 학예사의 ‘조선회화 깊이보기’
- 어초문답도 ⓒ국립중앙박물관
청록산수는 천연광물성 안료인 남동광의 청색과 공작석(말라카이트)의 녹색을 이용해 산수자연을 그린 것을 말한다. 중국 당나라 때 크게 유행했으며, 국내에는 조선시대 숙종 때에 성행했다. 처음 청록산수가 대두된 것은 동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화가였던 고개지(344~405)가 “그림을 그릴 때 산수의 빈 공간을 청록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하며
‘청록공백론(靑綠空白論)’을 제기했다.
이후 남제말기의 화가 사혁(약 490~530 활동)은 화육법 중에 ‘수류부채(隨類賦彩)’를 내세워
자연은 각각의 형태에 따라서 적절하게 알맞은 색을 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들이 청록산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에 근무하는 문동수 학예사는 ‘청록산수, 낙원을 그리다’를 기획하고
소책자를 발간해 전통 청록산수의 기품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는 정교하고 은은하며 고상한 기품이 서린 청록산수화를 통해
파라다이스(이상향)를 꿈꾸는 선인들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공민왕(1330~1374년)의 <위기도(圍碁圖)>와
조선시대 <일월오봉도>가 유명하다.
청록산수를 하나의 회화 장르로 이끌어낸 국립중앙박물관의 이번 전시는 한국 역사상 최초다.
대만에서 일찍이 10여 년 전에 기획한 바 있으나 청록산수의 개괄적인 내용을 정리한 글은 전무하다.
그래서 그는 준비하는 과정에 다소 어려움이 따랐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를 통해 청록산수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을 수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일월오봉도> 왕실의 위엄과 권위 상징
왕의 신성한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는 오행관념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중앙봉우리는 임금을 뜻하며, 양 옆의 붉은 소나무는 국운과 수복을 상징한다.
천년만년 뿌리와 가지가 뻗어나가라는 뜻으로 변함없는 건승을 기념하는 의미다.
그리고 하늘의 일월은 우주의 질서를 말한다.
우주의 중심에 임금의 옥좌가 있어 천지 간 가장 신령스러운 존재로 이상 정치를 구현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일월오봉도>는 궁중회화의 대표적 작품이다.
먼 산을 청색, 가까운 산을 녹색으로 칠해 강약을 조절했을 뿐 아니라
산 사이 포개진 부분을 금니(金泥)로 칠해 왕권의 위험을 살렸다.
때문에 왕실 치세에 적절한 표장이란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청록산수는 금벽산수라고도 부른다.
청록산수는 당대를 지나 송대, 온대를 거쳐 새로운 준법이 고안됐다.
조맹부, 정선은 청록산수화를 그리면서 산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산등성이와 토파에 석록의 미점을 찍고, 원산을 묽은 청색으로 선염한 방식을 취했다.
또한 거기에 반두와 탯점, 소부벽준(붓 터치) 효과를 주어 평면적인 회화를 극복하고자 했다.
준법은 조선 초기 작품에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중기에 가서야 준법이 사용됐다.
그러나 전통적인 청록산수화의 고식적 특징은 역시 청록으로 채색을 하고, 준법을 사용하지 않은 데 있다.
또한 청록산수란 용어는 후대 추사 김정희의 문헌에 겨우 드러날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는 당시 조선사회가 문인과객의 수묵화를 중시한 반면,
궁중 전문화원의 청록산수를 천시 여긴 데 있다.
더욱 청록산수의 치명적인 평가는 중국 명대 말 동기창(1555~1636)의 글로 인해서다.
- 일월오봉도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시대, 채색작업 시작되다
청록산수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은 없으나
그 정황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에 채색작업이 시작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당시는 중국과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
그리고 통일신라 이전인 진덕여왕 5년(651년)에 이미 채전(彩典)이라는 화가들의 활동기구가 있었다.
‘채(彩)’자가 채색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록산수의 기틀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 화가들(승려) 역시 채색작업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국가 소속 승려는 주로 사찰을 장식하는 단청작업이나 벽화작업을 했다.
그중 유명한 사람은 통일신라시대 솔거다. 그에 관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찍이 황룡사의 벽에 소나무를 그렸는데 동체와 굵은 가지의 껍질, 잔가지와 잎의 구부러진 모습 등을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이따금 보고 날아들다가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빛이 바랬기 때문에 절의 중이 색칠을 하였더니
까마귀와 새들이 이때부터 다시 오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당시 솔거가 그린 그림은 전대보다 사실적인 재현에 더욱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 청록산수_탯점과 반두준법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의 아이콘은 동진시대 도연명(도잠, 365~427)의 시에서 유래한다.
도연명은 405년 41세 때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를 지었다.
서문에 자기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뜻이 적혀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두미 월급을 받고 하급 관리에게 몸을 굽혀 절하는 따위의
자존심 상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속세와 단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일거사하며 지내겠다는 뜻을 <귀거래사>에 담았다.
시끄러운 속세를 떠나서 낙원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때문에 이러한 청록산수는 낙원으로 돌아가려는 염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일종의 고사 인물화로 옛날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배경에 깔고 있다.
<어초문답도(魚樵問答圖)>은 깊은 산속 시냇가에서 어부(漁)와 나무꾼(樵)이 대화를 주고받는 그림이다. 1715년에 그려진 것으로 작자미상이다.
그러나 신장(宸章, 그림에 찍은 숙종의 도장)이 찍힌 것으로 봐서 임금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성어제>라는 조선왕실 책을 보면, 숙종 때에 <어초문답>이라는 시가 나온다.
그리고 그 당시 활동했던 관속 문인화가 이명옥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그림은 송대 소옹(邵雍, 1011~1077)의 <어초대문(魚樵對問)>과
소식(1039~1101)의 <어초한화록(魚樵閑話錄)>에 근거한 것으로 조선시대 문인에게 인기가 높았다.
특히 15세기경에는 은일사락(隱逸四樂)이라 하여
낚시(魚), 땔나무하기(樵), 책읽기(讀), 농사짓기(耕)가 선풍적인 인기였다.
문인은 실제로 밭을 갈거나 낚시를 하지 않아도 자신을 초부(樵夫)로 자처했다.
속세에서 벗어나 은일자중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림 상단의 제발에는, 장(張) 씨와 이(李) 씨가 서로 노획물인 물고기와 땔나무를 교환하자는
대화를 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술에 취해 홍안이 된 얼굴로 서 있으나 매우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모습이다.
이들은 남인(인현왕후)과 서인(장희빈)의 대립으로 당쟁이 심했던 정치적 상황 속에
자유로운 세계로 떠나고픈 숙종의 마음을 반영한 듯 보인다.
일제시대, <도원행주도> 열망하다
19세기 말 활동했던 화가 안중식(1861~1919)은 <도원행주도(桃園行舟圖)>를 그렸다.
이는 어지러운 시대 상황을 벗어나 평화로운 세계로 떠나고 싶어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도화(桃花)는 복숭아꽃이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 고사에는,
옛날 동진시대 한 어부가 배를 타고 동굴 너머 이상향에 도착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어부는 도화원에서 속세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게,
늘 즐거운 얼굴로 서로 대하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사람들을 보았다.
과거 진 시황제의 난을 피해 동굴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이미 위진남북조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닭고기와 술을 대접 받으며, 속세로 돌아가거든 발설치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나 어부는 약속을 어기고 태수에게 이야기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표시해 둔 표적을 따라 도원(桃園)을 찾았으나 결코 다시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도연명은 <도화원기> 속에 그가 열망하는 파라다이스를 구현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화가 안중식도 도연명과 같이 시대의 어지러움 피해
낙원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것이 청록산수가 추구하는 낙원지향의 세계다.
때문에 청록산수는 ‘낙원을 그린다’는 특징을 안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19세기에 수입한 서양 인공안료로 인해
청록산수화의 질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이다.
당시까지 사용하던 광물성 안료는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었다.
따라서 화원들이 직접 산과 들로 안료를 채취하러 나가는 일이 많았다.
중국 사신을 따라 수입하러 가는 화원도 있었다.
결국 안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화가들은
청록산수의 기품과 운치를 현저히 삭감하는 서양 안료를 써야 했다.
이러한 청록산수는 근대 이후 노수현과 이도영 화가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통화법보다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제작방식이 바뀌면서 그 품위를 잃어갔다.
또한 현대화가 몇 명이 여러 차례 시도를 해 보았음에도 그 전통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현재 모사화로만 몇몇 작품이 창작될 뿐이다.
- 2007-01-03 / 뉴스한국, 심현희 · 자유기고가
'더듬어보고(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발우-깨달음의 벗 천하일발 (0) | 2008.03.12 |
---|---|
[서울역사박물관] 세상을 담는 그릇, 발우 展 (0) | 2008.03.12 |
[익산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금동향로 특별전 (0) | 2008.02.11 |
[국립부여박물관] 백제 왕흥사지 특별전 (0) | 2008.02.03 |
[국립부여박물관] 왕흥사지 사리기 학술대회 (0) | 2008.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