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프리다 칼로 作 - 상처입은 사슴 / 자화상

Gijuzzang Dream 2008. 2. 23. 01:59

 

 

 

 

 

<프리다 칼로-상처 입은 사슴> 상처받은 영혼, 그림으로 치유

 

 
 

- 프리다 칼로(1938) : 니콜라스 머레이 촬영 -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

20세기의 서막을 알리는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에

멕시코시티 교외의 작은 시골,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서 태어났다.

사진사였던 유대계 독일인인 아버지와 멕시코 원주민 메스티조인 어머니 사이에서

여섯 명의 딸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는데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리다는 일곱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 쪽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이후 유난히 가는 그녀의 다리는

평생 기다란 스커트만을 입고 다니게 되는 외적인 열등감의 원인이 되었다.

명문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던 그녀는 문학에도 소질이 있었고

방과 후 아버지의 사진관에서 일을 도우며 사진기술을 배우는 등 예술적인 소양도 길렀다.

 
그러나 그녀가 한창 꿈 많은 소녀시절인 열여덟 살 때 하교 길에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로 인하여
그녀의 삶은 이후 평생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정신적 · 육체적 고통의 연속이 되었다.
그 후유증과 고통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승객용 손잡이가 달려 있던 쇠파이프가 그녀의 몸 전체를 관통했다.
파이프는 가슴과 척추, 골반, 자궁을 관통했고 어깨와 다리, 발 등의 뼈들이 으스러졌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침대에 누워 석고틀 속에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내야 했다.
 
이때 가족들이 무료한 그녀를 위해 천장에 거울을 달아 주고, 침대에 이젤을 부착해 주어
하루 종일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첫 번째 자화상을 완성하게 된다.


이후 프리다는 외출을 하기보다는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고
강철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살아갔지만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멕시코 혁명 이후 낡은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새롭게 모든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대중을 위한 벽화예술운동이 멕시코에서 유행을 했다.

이때 공산주의 활동에도 참가한 그녀는

‘멕시코 르네상스’를 이끈 벽화예술운동의 선구자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혹자는 프리다의 평생에 걸친 시련 중 가장 큰 것이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이라고 하기도 한다.
스물 두 살의 프리다가 많은 나이차, 화려한 여성편력, 방탕한 생활로 유명한 마흔 세 살의 디에고와

운명적인 사랑으로 결혼하게 된다.

 

 

  Portrait of Diego Rivera. 1937. Oil on wood. 461 x 31.7 cm. Private collection.

 

 

 

이미 거장이었던 디에고와의 결합은

스승, 선배, 동료 예술가로서의 존경과 사랑, 그의 배신으로 인한 고통이 함께 하였지만
더욱 치열한 삶 속에서 그녀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인정받았는데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이 아닌 멕시코의 정체성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멕시코 전통의상과 장신구를 고집하였다.

멕시코의 정체성 확립에 힘썼음에도 사회적 관습을 거부하여
공산주의자, 자유연애주의자, 양성애자로 살면서 세간의 이목을 받았던 그녀는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여겨졌다.

〈상처입은 사슴〉은 그녀가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의 그녀는 상처받은 영혼을 암시하듯 여러 개의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으며
그녀의 고통스런 현실은 부러진 나뭇가지가 땅에 쓰러져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만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내뿜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것을 암시하듯 그녀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상처 입은 사슴〉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46년, 섬유판에 유채, 22.4x30㎝, 개인 소장

 

이후 그녀의 말년은 오른발이 썩어가 발가락과 오른쪽 다리 무릎아래를 절단하고

그녀의 개인전 개막식에는 침대에 실려 참석하는 등 더욱 힘들어져 갔다.
고통 속에서 자실을 시도하기도 했던 그녀는 마흔 일곱 살에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일기장에 ‘행복한 퇴장이 되기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적어 놓았던 프리다.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던 그녀는

다수의 미완성 작품이 말해 주듯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였다.

- 2007.03.07  조선 [명화로 보는 논술]

- 최혜원 블루로터스 아트디렉터, 경희대 강사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의 인생과 예술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나 많은 기록과 책, 영화 등이 그 내용을 다루고 있어

마치 오늘날에도 그녀의 삶이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칼데온이라는 긴 이름 대신 ‘프리다’라는 애칭으로 불려지는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의 쿄요아칸에서 태어났다.


집 외벽이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어 ‘쿄요아칸의 푸른집’이라고 표현되곤 하는 이 집에서

프리다 칼로는 태어나고 성장했으며

그녀의 영원한 연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75)와의 결혼과 이별을 거듭했고

종국에는 이 곳에서 사망했다. 이 집은 리베라에 의해 1958년 국가에 헌정되었다.

멕시코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을 그들의 진정한 국보로서 여기고

그녀를 멕시코 그 자체로서 추앙하고 있다.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처지, 인생관, 세계관을 표현하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기 때문에 오른쪽 다리가 휘고 바싹 여위는 장애를 갖고 있었던 프리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영민했던 듯 처음에는 의학도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8살 때의 치명적 전차 사고는 그녀를 평생 신체적 고통에 가둬두었으면서

동시에 화가로서의 자유와 영광을 가져다 준 운명적 계기가 되었다.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는 딸을 위해 프리다의 아버지는 자신이 쓰던 유화도구를 빌려 주었고

어머니는 그녀의 침대를 개조하여 전면 거울을 부착한 캐노피 지붕을 달아주었다.

병상에 누워 프리다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이후 평생에 걸쳐 자화상에 대해 깊은 천착을 보여주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때로는 멕시코풍이나 인디오풍의 전통복장

어떤 경우에는 유럽풍 귀부인 복장의 전신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원숭이나 고양이, 앵무새 등 자신이 직접 기르는 애완동물들이나

멕시코 특유의 식물과 곤충들이 함께 하는 반신상 혹은 흉상으로 나타나는 자화상을 통해

프리다는 그때마다의 자신의 처지, 인생관, 세계관을 표현했다.

 

위에서 인용한 프리다의 언급은 무척이나 솔직하면서도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태도와 역할을 성찰한

화두로서 그녀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프리다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였고

여성의 신체와 이를 둘러싼 성적 금기의 경계를 진보적으로 타파했으며,

나아가 멕시코혁명 이후 대두된 멕시코주의의 성립에 기여했다고 평가 받는다.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프리다의 강박적 사랑


멕시코 여성이 입는 전통 복장의 한가지인 테우아나를 입고 있는 이 자화상은

리베라에 대한 프리다의 강박적인 사랑을 표현한 그림이다.

테우아나는 멕시코 남서쪽의 모계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 유래한 의상이다.

백색의 꽃잎 문양으로 뒤덮인 크고 화려한 머리 장식물이

프리다의 얼굴과 어깨 거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어 안면 부분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이 그림에서

우리는 떼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운명적 사랑을 감지할 수 있다.

 

15살이던 1922년 프리다는

당시 자신이 다니던 에스쿠엘라 국립예비학교에서 벽화 작업을 하던 리베라를 처음 만났고

1928년 재회하여 격정적 사랑에 빠졌으며 1929년 결혼했다.

거듭된 유산과 리베라의 바람기 때문에 둘은 1939년 이혼했으나 1940년 재결합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리베라의 자유로운 생활방식은 계속되었고

프리다는 날로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더욱 더 깊은 고통과 고독에 빠져 들어갔다.


이 그림은 두 번째 결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1943년에 그려졌다.

프리다는 자신의 얼굴에서 서양인들이 지혜의 눈이 자리한다고 생각하는 이마 한 복판에

리베라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결국은 프리다와 리베라 두 존재가 하나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프리다가 머리에 얹고 있는 화관에서는 식물의 뿌리가 뻗어나가고 있는데

이는 언제 어디서라도 리베라를 소유하고 싶은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무엇보다 테우아나 머리장식과 의상의 순백색은 두 존재의 서로에 대한 정신적 순결성을 상징한다.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7.6-1954.7.13)

멕시코의 화가로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었고

18세 때는 교통사고로 척추,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이 고통스런 경험이 그녀의 삶과 예술을 관통한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 · 육체적 고통과

3번의 유산과 연인 디에고와의 이혼 등 자신의 절망적 현실을

 초현실주의 스타일의 강렬한 화풍으로 승화시켰다.

1984년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 최은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하루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나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들과 조화를 이루리라.

   내가 살아갈 날과 시간과 분은 내게 속한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겠지.

   나의 광기가 작업 속으로 도주할 수단이 되지 못할테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들 작품의 포로로 가둘 것이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이 오직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 이들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

   - 프리다 칼로  

 

 

****** 1926년作 자화상부터 1951년作 자화상

****** 프리다 칼로의 diary page 및 1954년 마지막 그림 外

 

 

 

 

 

 

 

 

 

 

 

 

 

 

 

 

 

 

The Broken Column. 1944. Oil on Masonite. 38.6 x 31 cm 

Dolores Olmedo Foundation, Mexico City, Mexico

 

 

 Tree of Hope. 1946 Oil on masonite. 55.8 x 40.7 cm. Private collection.

 

 

 

 

 Self-Portrait with the Portrait of Doctor Farill. 1951.

  Oil on masonite. 41.8 x 50.2 cm. Private collection.

 

 

 

 

Diary Pages:

"Bird" Diary pages: "Masked Dancers." "El horrendo 'ojosauro.' 

"Portrait of Neferunico, Founder of Madness."  / Frida Kahlo Museum, Mexico City, Mexico.

 

 

 The Bus. 1929.

 Oil on canvas. 26 x 56 cm. Dolores Olmedo Foundation, Mexico City, Mexico

 

Flower of Life. 1944.

Oil on Mesonite. 29.5 x 23 cm. Dolores Olmedo Foundation, Mexico City, Mexico

 

 Fruit of Life. 1954 Oil on masonite. 45 x 62 cm. Private collection

 

 Viva la vida. 1954.

 Oil on masonite. 59 x 50.7 cm. Frida Kahlo Museum, Mexico City, Mexico

 

 

 

 - 위의 모든 그림은 기주짱이 추가 .... Gijuzzang Deram.

 

 

 

 

 

 

 

 

 

 

 

 

 

 

 

 영화 ‘프리다’로 보는 프리다 칼로

 

 

삶에서 나온 그녀의 작품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자기 고백적이고 자의식적인 작품 많아…초기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적 역할

 

서울시립미술관에 가면, 우리는 늘 천경자 화백의 작품 10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작품을 자식들에게 상속하지 않겠다고 했던 천 화백이 자신의 작품들과 저작권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고, 서울시립미술관은 천 화백의 작품들을 위한 독립적인 전시실을 상설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천 화백과 작품의 성격이나 삶의 질곡이라는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은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삶과 그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천 화백과 프리다 칼로는 모두 자신의 삶의 경험과 상상으로부터 유래한 소재들을 가지고 작업을 했으며,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라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프리다 칼로(1907-1954)는 초현실주의 화풍의 멕시코 여성화가입니다.

생전에 그녀는 멕시코에서 벽화운동을 주도했던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아내로 더 유명했습니다. 프리다는 1939년 파리 <멕시코전>에 18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격찬을 받기도 했지만, 당대에는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시대를 앞서 간 예술가였기 때문이었지요. 40년대 그려진 프리다 작품의 가치는 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84년에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독일계 사진사였던 칼로의 아버지는 자식들 중 그녀를 특별히 아꼈고 그녀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47년간 그녀의 삶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의사가 되려는 꿈을 가진 명문 예비학교 학생 시절, 그녀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1년 동안이나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여러 번의 수술을 하고 모르핀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했던 그녀는 의사의 꿈을 접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작품에는 그녀의 경험, 고통, 상처가 담겨 있죠.

비평가들이 그녀 작품을 ‘초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작품은 철저히 ‘현실’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던 또 한 가지는 남편 리베라의 막을 수 없는 바람기였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21살로, 결혼 당시 프리다는 21살, 리베라는 42살이었는데요. 디에고는 전부인과 이혼하고 프리다와 재혼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가져서 프리다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녀가 다루었던 작품의 주제는 출산, 유산, 낙태, 월경 같은 서구 미술계에서 거의 다루어진 적이 없는 것들이었는데, 이러한 주제는 이후 페미니즘에서 매우 중요시 되는 것들입니다.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이 그동안 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기 고백적이고 자의식적인 작품들이 많은데, 프리다의 작품들은 이러한 초기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됩니다.

 

 

프리다 필생의 예술적 주제는 오로지 자기 자신

 

프리다 작품은 초현실주의나 페미니즘이라는 수식어보다는 대다수의 작품들이 자화상이라는 점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사실 자화상을 평생의 주제로 삼고 끈질기게 그린 화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영혼의 깊이를 드러내는 걸작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렘브란트나 고호도 다른 주제의 작품을 하는 틈틈이 자화상을 그렸던 것이지, 프리다와 같이 전적으로 자화상에 집중하지는 않았지요.

프리다의 필생의 예술적 주제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었고 평생 자신을 그리는데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인생의 고비가 올 때마다 자화상을 그려 자신을 돌아보면서 위로와 힘을 얻었겠지요.

 

프리다가 작은 규모의 작품을 통해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여성의 고통을 표현한 반면, 디에고는 벽화라는 대규모 작품을 통해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작품 양식이나 경향은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멕시코 미술의 전통인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부부의 예술 세계가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지요.

 

리베라는 11살부터 미술공부를 시작하여, 20대에는 유럽 거장들의 화풍을 익혔습니다. 멕시코에도 수많은 벽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인기가 있어서 샌프란시스코의 증권거래소 등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영화 <프리다>는 뮤지컬 <라이온 킹> 연출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줄리 테이머의 두 번째 영화입니다. 얼핏 보기에 영화는 프리다의 예술적인 측면보다 삶과 사랑에만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자전적인 것임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작품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 되는 것이죠.

이 영화에는 칼로 작품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흥미로운 방식이 눈에 띕니다. 프리다 그림이 화면에 등장하고, 그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등장인물이 움직입니다. 혹은 반대로 등장인물이 움직이다가 어느새 그것은 프리다의 그림으로 바뀌기도 하죠. 그녀의 작품을 화면 구성에 이용하는 영화의 기법은 그녀 작품이 철저히 그녀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영화의 형식적인 기법이 영화의 중심적인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 이 무더운 여름, 한평생을 뜨겁게 살다간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요?

강렬한 태양의 나라 멕시코의 전형적인 색채로 이루어진 영화 <프리다>의 화면 역시 여름에 어울리는 볼거리이지요. 우리가 프리다의 삶 속으로 빠져든다면, 그녀의 그림은 설명 없이도 보이게 될 것입니다.

 

- 최정은(서울시립미술관 '찾아가는 미술감상교실' 강사, 서울대 미학과 강사)

       - 2010-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