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1923년, 디에고는 프리다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멕시코시티 국립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를 작업하고 있었다. 훗날 디에고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으며,
프리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곱히는 그 날의 일을 다소 과장하며 회상했다.
"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15살이었다.)
이 첫만남 이후 6년이 흐른 1929년 둘은 무려 21살이라는 나이 차이
(프리다는 21살, 디에고는 42살) 에도 불구하고 결혼 하게 된다.
결혼 당시, 디에고는 이미 두 번의 결혼 전력에 한 명의 아들과 세 딸을 두고 있었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결혼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을 돌아다니며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하지만, 프리다는 고국인 멕시코를 떠난 이후 끊임없이 향수병에 시달리며 그다지
왕성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
더욱이 결혼 전 당한 끔찍한 버스 사고로 프리다는 자궁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고,
이로 인해 결혼 후 어쩔 수 없는 유산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림이 프리다의 출산을 대신 할 수는 없었지만, 모순과 저주를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문제를 외적 현실로 노출시킴으로써 마음 속의 고통으로 남지 않도록 해준 덕분이었다.
예술은 프리다에게 다른 종류의 동물성이었고, 자연적이며 즉흥적인 충동이었다.
( 이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녀의 그림에 열광하였다. )
운명이 그녀를 가차없이 몰아냈던 현실세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예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예술, 아이, 아름다움, 폭력, 사랑,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자기 주위에 늘어놓은 화려한
장치를 통해 밀접하게 뒤섞였다.
"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 "
- 앙드레 브르통
하지만, 수많은 여자들과의 염문에 휩싸이며 (아마 이런 것들이 디에고의 예술의 근원이었을
지도 모른다.) 프리다는 괴로워 하며 끊임없이 디에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가 더욱 괴로워 했던 것은 자신보다도 못한 여인들을 흠모하는 디에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프리다가 아끼던 그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에게도
손을 뻗칠 정도로 디에고의 편력은 대단하였다.)
결국 디에고와 프리다는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후에 디에고는 이렇게 고백했다.
" 우리는 십삼 년간 결혼 생활을 했고,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욕망이 이끄는 대로 다른 여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유였다. 그렇다고 프리다가
내 불성실한 태도를 비난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내가 어울리지
않는 여자들이나 그녀보다 못한 여자들을 고르는 데 있었다. 프리다는 내가 하찮은 여자들
때문에 그녀를 소홀히 대하는 것을 모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나의 자유를 빼앗기게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나는 스스로의 욕망으로
인해 종지부를 찍어줄 것이라는 맹목적인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이로 인해 그녀가 더 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
프리다는 이혼 이후 괴로워 하며 지내다가 결국 건강까지 악화되고 만다.
"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요. 당신은 내가 얼마나 디에고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니, 내 생명이 끝나야만 이 고통도 함께 끝내리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
그녀의 건강이 신경 쇠약으로 인해 심각하게 악화되자 프리다를 진찰하던 의사는 '이혼이
프리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녀의 건강상태에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라고
설득하였고, 디에고는 그녀에게 다시 청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둘은 몇 가지 조건 아래 다시 결혼하게 된다. 그 내용은 두 사람이 더 이상 성관계를
갖지 않으며,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직접 조달하겠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프리다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한 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다음과 같은 말을 일기장 마지막에 남긴 채 1954년 프리다는 결국 세상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 디에고에 의해 화장된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Love is Blind, so is hatred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 증오가 그러하듯이.
출처 - 「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 2001
Rosario Pineda
- Como Han Pasado Los Anos 앨범中Amar y Vivir (살며 사랑하며)
프리다 칼로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하였다. 독일인인 프리다 칼로의 아버지는 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다.
7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게 되었고,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의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39년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R. 피카소(Pablo Ruizy Pacasso)·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며 정체성을 강하게 지켰다.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사회 관습에는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남편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으며,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금속에 유채, 38×30.5㎝, 1932), 《나의 탄생》(캔버스에 유채, 173.5×173㎝, 1932),《프리다와 유산》(종이에 리소그래피, 31.7×23.5㎝, 1932)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친 사슴》(나무에 유채, 22.4×30㎝, 1946) 속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
2007.11.26.car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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