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초상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Gijuzzang Dream 2008. 2. 23. 01:28

 

 

 

 

 

 윤두서의 <자화상> 

자화상에 남겨진 조선 선비의 희로애락(喜怒哀樂)

 

 

 

그의 자화상에 어린 고독, 결연한 내면의지의 표출. 진솔한 영혼의 표출,

자화상. 동서양을 통틀어 이렇게 인물의 정신세계가 표출된 그림은 없다.

 

조선시대 숙종 연간에 활약했던 선비화가인 공재(恭齊) 윤두서(尹斗緖, 1668∼1715년)의 자화상이다.

한국 회화사상 최초의 자화상인 동시에 한국 초상화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회화작품 중에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된 작품이다.

윤두서는 조선 중기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의 증손자이자

조선후기 실학의 대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외증조부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동시에 시  서 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는 당대 명문 집안인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대부호였으며,

한 나라의 재상이 될 만한 학문적 소양과 도덕적 성품을 가졌지만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1693년 25세 때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평생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했으며

낙향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선각자의 쓸쓸하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해남에 낙향하여 사는 삶이 한가로웠기 때문일까,

그는 양반이었음에도 서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는지

‘나물 캐기’ ‘짚신 삼기’ 등의 농부들의 삶을 주제로

서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담긴 풍속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선구적 지식인임 동시에 예술가였던 그가 죽기 한 3년 전에

시절 운을 좋게 타지 못했던 그의 불우했던 선비의 삶을 아쉬워했던지 이 자화상을 남겼다.

 

조선시대에는 타인을 그린 초상화는 많았어도 자화상의 예는 극히 드문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 특이하면서 묘사력이 뛰어나고

인물의 강한 정신세계를 표출해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오른쪽 귀가 안 보이게 그려진 자화상

 

 

 

 

  ‘자화상(自畵像)’ 윤두서, 국보 240호, 17세기 말,

종이에 수묵담채, 38.5X20.5㎝, 해남 윤씨 종가 소장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려진 정면상의 이 ‘자화상’은

대부분의 초상화가 ‘좌안(左顔)7푼(分)’이라고 하는

왼쪽 뺨과 귀는 보이는데 오른쪽 귀는 안 보이게 그려지는 형식을 취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특이하다.

화폭 전체에 얼굴만이 크게 부각되게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작년에 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적외선 투시분석결과로

얼굴만 그려진 미완성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그림이

원래는 양쪽 귀와 상체의 옷깃과 도포의 옷 주름선이 그려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머리 윗부분을 대담하게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의 고독한 삶과 대결하듯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살결문양)’의 세밀한 묘사와 수염과 구레나룻은

터럭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돋보이는데

마치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고 있는 듯하다.

자화상은 화가의 투철한 자의식이 없이는 그려지기 힘든 작품세계이다.

서양에서도 르네상스시대에 초상화가 등장하면서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남겼는데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윤두서의 ‘자화상’은

서양의 평생 80여 점의 자화상을 남긴 화가인 렘브란트(1606~1669)와 비슷한 시기이기에

좋은 비교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화상을 통해 그들이 평생 겪은 희로애락과 함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 2007. 01.31 조선, [명화로 보는 논술]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경희대 미술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