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코리안루트 탐사취재단’ 1만km 대장정

Gijuzzang Dream 2008. 2. 18. 01:11

 

 

 

 ‘코리안루트 탐사취재단’ 1만km 대장정

 

우리는 바이칼에서 왔는가

 

바이칼호 주변은 우리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수많은 소수민족이 태어나 터 잡고 살았던 곳이다.

호수 주변에 서식하는 3500여종의 동·식물 가운데 자생종만 87%일 정도로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어 ‘러시아의 갈라파고스’ 라고도 불린다.

리를 비롯해 일본, 아메리카 인디언 등 많은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아득히 먼 조상들의 ‘유전자’ 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온다. <사진 김문석 기자>



내몽골 고조선의 성채가 …?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赤峰市) 서쪽 삼좌점(三座店)에서 치(雉)가 촘촘하게 배치된 거대한 석성이 3년전 댐 공사중에 발견됐다.

기원전 24~1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성은 국가 단위의 조직이 아니면 쌓을 수 없는 규모와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축성법과 닮은 이 석성을 쌓을 만한 국가조직은 고조선 말고는 찾기 어렵다.

경향신문 탐사단이 국내 언론사상 처음으로 아직 국내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이 석성의 생생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김문석 기자>


 


 

1. 한국사 다시 써야 한다


경향신문 ‘코리안루트 탐사취재단’ 1만km 대장정 ‘우리역사 바로보기’
동아시아 고대문명 건설 주역인 우리민족사 새로운 시각과 접근 시도


 


중국을 여행할 때 도시와 시골 곳곳에서 ‘문명성시건설(文明城市建設)’이라는 표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년 올림픽을 앞두고 길에 침을 뱉는다든가 아파트 베란다에 빨래를 너는 등 ‘비문명적’인 요소를 척결하자는 뜻이다.

고대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황하(黃河) 문명의 주인공이었고 역사시대에는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이제 와서 “문명도시 건설에 매진하자”고 외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치더라도 지독한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중국은 지금 경제뿐 아니라 역사, 민족사, 심지어 문명사까지 ‘문명적으로’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여 우리와 마찰을 빚고 있는 동북공정은 그 한 단면에 불과할 뿐이다.

부신 사해 유적 입구에 세워진 여신상.

중국 최초 용 형상의 돌무더기가 발견돼 ‘중화제일촌’ 으로 부르고 있다.

<김문석 기자>

 


동이족의 ‘요하문명’ 중국사 새로 써

1980년대 이후 중국 고고학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동이족(東夷族)의 영역이었던 요하(遙河)·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황하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질과 양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의 증거들이 무더기로 나왔기 때문이다. 1982년 사해(査海), 1983년 흥륭와(興隆窪)에서 발견한 주거 유적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집단 취락지로서 각각 ‘중화(中華) 제일촌’, ‘화하(華夏) 제일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취락이 조성된 시기인 8200~7600년 전 이곳은 화하족의 중심지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출토된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옥장식(귀고리) 등도 동이족, 나아가서 한반도 문화 유형과 더 가까웠다.

뒤에 이어지는 이른바 홍산(紅山) 문화(6500~5000년 전)와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4000~3500년 전)도 돌무덤, 석성, 제단 등과 같은 우리 고대 문화의 특징적인 모습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하·대릉하 유역 일대에는 이런 정체불명의 고국(古國) 문명 유적이 확인된 것만도 수천 개가 될 정도로 쏟아지듯이 나오고 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이제 중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제외시킨 주나라 공화 원년(BC 841) 이전의 왕조사 연대를 확정하는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를 통해 2000년 중국사의 상한선을 BC 2070년(하나라 건국 연도)으로 연대를 끌어올렸다. 올해부터는 전설상의 오제(五帝) 시대까지 1000년을 더 끌어올리기 위한 ‘중화문명 탐험공정’에 들어갔다.

그 중심에는 우리 동이족의 문화인 요하·대릉하 유적이 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이를 ‘요하 문명’이라고 명명하고 황하 문명과 더불어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즉 황하 문명에 기초한 중화주의를 폐기하고 “동이의 요하 문명과 한족의 황하 문명, 그리고 남방·서북 문화가 중원으로 모여 완성된 문명”으로 거의 정리한 상태다.

심양(瀋陽) 요녕성박물관에서 열리는 요하문명 특별전에서는 요하 유역에서 출토된 28만 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 금우산인(金牛山人)의 유골 화석을 전시하고 있다. 이를 두고 중국 언론은 모든 인류가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여성, 이른바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후손이라는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은 문명과 역사, 심지어 인류의 기원 문제까지 ‘중화’라는 용광로 속에 녹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었는가. 또는 어디에서 왔는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제껏 어떻게 접근해왔는가. 분단과 일제가 심은 식민사관에 알게 모르게 젖어 반도의 좁은 시야에서 민족을 생각하고 스스로 ‘반도사관’에 함몰돼 있지는 않았는가.

최근 ‘주몽’ ‘대조영’ ‘태왕사신기’ 등 북방 대륙을 무대로 한 역사 드라마의 붐과 더불어 우리 고대사와 민족사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재야뿐 아니라 강단 사학계에서도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 민족사, 민족문제에 대한 폭넓은 시야와 다각적인 접근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우리 문화의 콘텐츠를 깊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초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트로이’ 풍납토성을 발견한 선문대 이형구 교수(고고학)는 중국의 ‘요하문명론’에 대응해 ‘발해문명론’을 주창하고 있다. 동아시아 고대 문명을 요하 유역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황하, 대릉하, 요하, 압록강, 유역을 포함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대 문명은 모두 강과 바다를 끼고 발달했고, 이 강들은 모두 발해만으로 흐르며, 이 일대의 문화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사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황하·요하 문명을 발해 문명의 틀에서 본다면 동이족은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주역 가운데 하나다. 황제와 치우천왕의 충돌, 동이족의 나라인 상(은)나라와 기자조선 문제 등 우리 고대사의 많은 미스터리가 이 틀에서 실마리가 풀리고, 그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 교수는 20년 전 발해문명론을 주창한 이래 그 지역을 수시로 답사하며 많은 논문을 발표해왔다.

코리안 루트 탐사 과정에서 만난 우리와 비슷한 소수 민족들.

 


‘반도사관’ 버리고 ‘해륙사관’ 필요

동아시아 해양사에 정통한 동국대 윤명철 교수(고구려사)는 이 교수의 발해문명론과 궤를 같이하면서 그 범위를 해양으로까지 확장한 ‘동아지중해론’을 펴고 있다. 유럽의 지중해처럼 발해만뿐 아니라 서해까지 포괄하는 지역을 하나의 문화권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해양과 대륙 부분을 배제하고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일본이 만든 반도사관”이라며 “서해와 한반도, 북만주 일대를 포함한 대륙을 연결시켜 바라보는 ‘해륙(海陸)사관’만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역사관”이라고 말했다.

언어학자인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는 윤 교수와 같은 맥락에서 ‘동아지중해’의 범위를 남해, 동중국해, 동해, 타타르해까지 확대한 일본 사학계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고구려어와 일본어 어원을 추적해 많은 유사성을 발견해낸 시미즈 교수는 “언어학적으로 고구려와 일본열도는 한 계통”이라며 동해를 사이에 두고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삼양 요녕성박물관 요하문명전 전시실의 금우산인 유골과 복원 모형.

연대 측정 결과 28만 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로 나타났다. <김문석 기자>

수년 동안 연해주 유적을 발굴해온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고고학)는 북만주뿐 아니라 연해주 북쪽 아무르강 유역까지 우리 민족사의 범위를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정 교수는 “아무르강 중류지역에서 한반도 동해안지역이나 남해안, 그리고 제주도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평저융기문토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만주를 중심으로 요하 유역과 연해주까지 포괄하는 지역을 우리 선조들의 중심 활동 공간으로 보고, 이를 가칭 ‘환(環)만주 문화권’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우리가 역사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보다 시대가 올라갈수록 아무르강 유역, 초원지대, 시베리아와 더 많은 관련성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세종대 주채혁 교수(몽골사)는 우리의 고대사를 초원유목사의 틀에서 파악하고 있다. ‘주어+목적어+동사’형인 우리말의 구문 구조, 나라나 종족 이름, 생태 생업을 반영하는 수조(獸祖) 전설 등으로 볼 때 초원유목사를 제외하고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 교수는 스키토-시베리안 언어로 고조선의 국호인 조선은 순록치기, 고구려 또는 고려는 순록을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했다.

당뇨병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의대 이홍규 교수(내과)는 질병 인자를 연구하다 유전인류학의 전문가가 됐다. 이 교수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한국인의 구성이 70%는 북방계, 25%는 남방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국인의 원형이 4만 년부터 1만5000년 전 사이에 바이칼호 밑 동굴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학설을 내놓기도 했다. 최근에는 러시아 학자와 공동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 여성의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은 남방, Y염색체는 중앙아시아-시베리아에서 온 것이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우리 신화와 비슷한 이야기 많아

알타이-시베리아의 무속, 신화, 설화를 채록·연구해온 부산대 양민종 교수(러시아문학)는 문화인류학적 입장에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새롭게 구명하고 있다. 나무꾼과 선녀, 콩쥐팥쥐, 흥부와 놀부, 심청 이야기 등 우리 설화가 지닌 코드들이 이 지역들의 설화 속에 담겨 있음을 발견했다. 양 교수는 특히 우리의 단군신화와 알타이-바이칼 지역의 게세르 신화를 비교 분석, 우리 문화가 북방에서 전래됐을 것이라는 고정된 사고를 깨고 오히려 역류했을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우리의 정체성과 역사,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고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유전학, 언어학 등 다각도의 접근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역사 이전 시대에 국경이 없었듯이 21세기는 나라와 민족을 초월한 글로벌 마인드가 필요하다. 우리도 이제는 한반도에서 벗어나 열린 눈으로 우리의 현실과 역사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에 대한 개념과 역사도 새롭게 써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은 눈을 크게 열고 2007년 7월 9일부터 8월 1일까지 23박24일간의 1만㎞ 대장정에 나섰다.



코리안루트 탐사 취재단
신동호<경향신문 NIE연구소장·단장>
이기환<경향신문 선임기자>
김문석<경향신문 사진부 기자>
이다일<경향닷컴 기획사업팀 과장>
김기연<다큐멘터리 작가>
정재승<봉우사상연구소장>
이형구<선문대 역사학과 교수·고고학>
주채혁<세종대 사학과 교수·몽골사>
윤명철<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동아시아사>
양민종<부산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신화학>
시미즈 키요시<순천향대 초빙교수·언어학>

뉴스메이커는 본 기획과 후속 연재기사에서 중국 지명을 표기하는 데 있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한자 발음대로 적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査海는 차하이가 아닌 사해로, 興隆窪는 싱륭와가 아닌 흥륭와가 됩니다.

<후원: 대순진리회>


- 신동호<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 단장> hudy@kyunghyang.com

  

 

 

 

2. 주몽의 도주로를 찾아서



동몽골 훌룬-부이르 호수 주변은 물과 풀이 풍부한 대초원 지대다.

많은 유목민이 이곳에서 양과 말을 살찌워 중원까지 진출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몸 속에 기마 유목인의 피가 흐른다면 이 초원길 역시 우리 조상들이 수없이 오갔던 ‘코리안 루트’였음이 틀림없다.

고리국의 왕자 주몽이 부여에서 도망쳐 남쪽으로 질주한 길일지도 모른다.

<사진·김문석 기자>


 

  

3. 종족의 이동으로 문화 · 민족 재탄생



동아시아 문명의 총괄적 이해, 북방·중화·동방문명 세 단위로 구분

산림, 초지, 강 등 다양한 자연 조건이 혼재된 대흥안령 지역.

과거 자연 환경의 변화는 정치적 격변과 종족이 이동으로 이어졌다. <김문석 기자>


근래에 들어서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흐름이 생기면서 갈등을 겪고 있다.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촉발된 우리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새로운 사관의 해석들, 주체사관의 영향으로 힘을 얻은 좌파민족주의, 이러한 흐름들을 한통속으로 묶어 평가하는 부류가 주장하는 ‘국사해체론’과 ‘탈민족주의’ 등이 그것이다. 최근에는 외국인 거주와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 우리가 원래 단일민족이 아니었다면서 순혈-혼혈 논쟁마저 불러일으키려 한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의 근간이 된 원류에 대해서는 논란만 무성할 뿐 역사학계에서마저 공통된 함의가 없다.



북방지역은 우리 문화와 연관

정체성의 탐구 작업은 사회갈등과 집단의 위기를 야기하고 이러한 혼란들을 정리하며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우리 근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발전의 동력과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우리 민족과 핵심 문화는 자생 문화를 토대로 외부에서 7~8개 루트를 통해서 진입해 들어온 결과물이다. 그 가운데에서 3개 루트 이상을 포괄한 지역이 흔히 말하는 북방지역이다. 이 지역은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이주뿐 아니라 정치력·군사력을 동반한 채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흔적이 강하며 국가의 흥망 및 민족의 운명과도 직결되었다.

북방지역이란 현재 한반도 이북의 넓은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 이 지역들은 세석기 문화, 신석기 문화, 청동기 문화 등에서 우리 문화와 어떠한 형식으로든 연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토기, 암각화, 석관묘, 청동기, 고인돌 등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역사시대에 들어와 조선, 부여, 고구려, 옥저 등 고대국가들의 건국과 발전 과정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조선(고조선)의 건국 지역과 흥망 과정,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집단의 성격과 발원지 등 주제 면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늘 성격을 정확하게 규명하기 쉽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매장 습속, 단군신화·주몽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 등의 신화, ‘나무꾼과 선녀’ 같은 설화들, 음식문화와 의복문화, 주거문화 등은 우리와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종족들 간에도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고구려의 기마문화, 활 숭배, 하늘과 태양 숭배신앙 등과 유사하고, 은나라·부여·고구려·동예의 점복풍습 등은 문화의 원류뿐 아니라 역사시대에 이르러 추가된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절대적이었다. 언어와 혈연관계에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고구려와 부여, 부여와 거란, 거란과 선비, 고구려와 백제·동예·옥저 등은 언어가 대동소이했다. 이런 부분들은 종족의 친연성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고구려의 출발과 선비는 관련이 깊고, 거란과 고구려, 부여와 실위 또한 그리 먼 관계는 아니다. 말갈은 고구려와 발해에 속했으나 결국은 독자적인 길을 걷다가 민족과 국가를 건설했다. 그 외에도 역사상에, 또는 현재에도 잔존하는 정체불명의 종족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의 문화뿐 아니라 혈연과 언어상으로 관련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과 복합성 때문에 답사단에 참여한 학자들 사이에는 논리적임에도 상반된 학설들이 주장될 정도였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와 사료 유물들을 바탕으로 각 분야의 전문 학자들이 학제간의 통합 답사를 실행하면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다양한 자연환경이 교차하는 북방

가장 필수적인 것은 자연환경의 이해와 변화된 사실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전근대에는 자연환경에 따라서 생활양식을 비롯한 문화가 영향받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종족의 대규모 이동이 발생했고, 때로는 동아시아 전반의 정치적인 격변으로 이어졌다. 또한 소규모의 종족 탄생과 이동도 자연환경과 연관이 깊었다.

대흥안령 지역에 거주하는

에벤키족의 사냥 도구. <윤명철 교수>

동쪽 아시아 지역은 다양한 자연환경이 만나고 교차하는 지구 상에서도 독특한 지역이다. 흑룡강 하구 유역 일대는 연해주 지역은 강들과 삼림이 울창한 대삼림지대이면서 바깥 쪽으로는 타타르해와 마주치는 지역이다. 대흥안령 산맥은 이름처럼 험준한 산악지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과 가축들이 쉽게 넘나들 정도의 평원은 아니었다. 큰 나무들이 거의 사라진 구릉지대나 초원을 전제로 평가하고 해석한다면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

바이칼 주변 지역은 타이가지대로서 삼림과 이끼가 무성하며 순록·담비·곰 등의 짐승들이 서식하던 곳이다. 남쪽으로 내려와 훌룬부이르 초원과 동몽골 초원은 우수한 목초지대로서 소·양 등의 가축을 사육하기에 적합하고, 특히 말을 군사력으로 활용하는 유목민족들의 탄생지다. 이 지역은 동부여의 터전으로 알려진 눈강 하류와 북류송화강이 만나는 지역과 이어져 남만주와 관련이 깊다.

내몽골 북부지역은 건조한 초원지대로서 서쪽의 몽골초원을 지나 고비 사막과 이어진다. 무수한 종족의 집단이주와 각축전이 벌어지고, 기마군단의 발흥과 이로 인한 중국 북부지역의 혼란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근래에 실체가 밝혀지면서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 핵지대로 부상하고 있는 요동과 요서지방은 구릉조차 보기 힘든 대평원지대로서 수량이 풍부한 강들이 흘러가고 발해만의 해양과 만나는 지역이다. 농사에 적합할 뿐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교차로에 있으므로 다수 종족이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인 곳이었다.

우리 문화, 우리 민족의 형성과 관련된 북방은 원래 다양한 자연 환경들이 교차한 복잡한 지역일 뿐 아니라, 이 또한 기후의 변동, 해수면의 변화, 인간들의 정치·경제적인 이익에 따라 몇 차례 변화되었음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이러한 기본 사실을 통해서 종족들의 이동과 습합 과정, 문화와 민족의 재탄생이라는 이 지역 고유의 ‘역사 메커니즘’을 찾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국부적·미시적·각론적인 접근을 기본으로 하면서 통시적이고 범공간적, 그리고 총론적으로 큰 틀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다. 예를 들면 공질성이 강한 부분을 모아 큰 원을 만들어 ‘동아시아 문명체’를 설정하고, 그 안 지연환경과 종족, 문화를 고려하여 북방문명, 중화문명, 동방문명의 세 단위로 구분한다.

이렇게 하면 길고 광활한 동아시아의 역사뿐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다양성 및 복합적인 성격을 이해하면서 정체성을 찾는 일에 한걸음 더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동방문명의 핵심이면서 북방과 깊은 연관을 맺었고, 소위 중화문명과도 일정부분 중복된다.
<윤명철 / 동국대 교수·고구려사 및 동아시아사>
 

 



  

 

4. ‘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 민족

 

넓은 의미 발해 연안 문화·출토유물… 한반도 고대문화와 밀접한 관계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 우하량 유적의 원형적석유구.

중국 요녕성 조양시 건평현에 있다. <신동호 기자>


인류의 문화는 구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신석기시대로 이어지지만 인류의 문명을 말할 때는 신석기시대부터를 가리킨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발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창조적 발명을 한 시기다. 그것은 바로 토기의 발명이다. 토기의 발명은 인간 최초의 발명이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는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에 인류가 어디론가 밀려 가버리고, 시베리아·몽골 지역의 빗살무늬토기 제작인들이 들어와 신석기 시대가 시작하였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발해 연안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발해 연안은 넓은 의미로 발해를 중심으로 남부의 중국 산동반도, 서부의 하북성 일대, 북부의 요녕성 지방, 북동부의 요동반도와 동부의 길림성, 남부의 한반도를 포함해서 일컫는다. 발해 연안은 우리나라 고조선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끊임없이 활동해오던 지역으로서 우리나라 고대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발해 연안 북부의 요서 지방과 요동반도에서는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다. 요동반도 영구(營口) 금우산(金牛山) 동굴유적, 본계(本溪) 묘후산(廟後山) 동굴유적에서는 북경원인과 비교되는 곧선사람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대릉하(大凌河) 유역을 비롯하여 요하(遼河)·압록강·두만강 등지에서 계속 구석기시대의 인류 화석이 출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이후 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평양의 용곡 동굴 유적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그 윗층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인류 화석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고대 인류의 계승·발전 과정을 잘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귀고리 일종 옥결 한반도서도 출토

또한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의 중국 요녕성 부신(阜新) 사해(査海)문화, 내몽골 흥륭와(興隆窪)문화와 홍산(紅山)문화가 있다. 발해 연안 북부의 심양(瀋陽) 신락(新樂)문화, 요동반도 남단의 광록도(廣錄島)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와 압록강 하류 후와문화가 있다. 이들 문화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옥결이 출토되고 있다. 옥결은 귀고리의 일종으로 한반도에서는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옥기문화는 빗살무늬토기 문화와 함께 발해 연안의 대표적인 문화다. 이들 신석기시대 문화는 기원전 6000년 또는 3000년께 유행했던 동북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다. 이 시기는 시베리아나 몽고의 신석기 문화보다 훨씬 빠른 연대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해문명’의 여명을 맞이하게 된다.

발해 연안에서는 대릉하 유역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적석총과 석관묘가 출현한다. 이와 같은 돌무덤(石墓)-적석총·석곽묘·석관묘·지석묘 등-은 발해 연안에서 흔히 보이는데 특히 대릉하 유역 요녕성 능원현(凌源縣) 우하량(牛河梁)의 적석총과 석관묘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돌무덤은 청동기시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요동반도와 한반도에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적석총,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무덤(支石墓)이 유행하고 있다. 홍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3500~3000년쯤으로 이 시기는 시베리아의 가장 이른 돌무덤의 연대보다 무려 1000년 이상이나 빠르다.

발해 연안에서는 옥룡(玉龍)이 발견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옥룡은 발해 연안 서쪽으로 내려가 은(殷)나라에서 계승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은민족은 우리 민족과 같은 동이(東夷) 민족이다. 우리나라의 곡옥(曲玉)은 이와 같은 옥룡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남 진주 남강유역 청동기시대 옥방 5지구 원형적석유구.

   선문대 박물관 진주남강유적 전시실에 있다.  <이형구 교수>

고대 갑골문화도 발해 연안 북부에서 발생하여 서쪽으로 내려가 은나라에서 유행하면서 갑골문자가 완성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두만강유역 무산(茂山) 호곡동(虎谷洞), 남해안 일대의 변한 지구, 영산강·금강 유역의 마한 지구 등 철기시대나 삼한시대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청동기의 발명은 매우 중요하여 토기의 발명 이래 인류의 가장 큰 문화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 연안에서 청동기가 발견된 유적으로는 발해 연안 북부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과 내몽골 적봉(赤峯)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이 있다. 대성산 유적에서는 순동으로 만든 장식품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는 기원전 2000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하량 적석총에서 홍산문화 시기의 청동을 제련할 때 쓰는 도가니와 청동 찌꺼기(slag) 그리고 청동기 조각이 수습되어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제련된 청동 덩어리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900년쯤으로 측정된다. 그리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를 반출하는 우가촌(于家村) 적석총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500~1300년으로 측정된다. 한반도에서도 요동반도와 같이 적어도 기원전 15세기쯤에 이미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 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시베리아 카라스크 문화와 연결시키고 청동기시대의 인류도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 연안의 초기 청동기시대의 연대가 기원전 2000년쯤이고, 요동반도에서 청동기가 반출된 유적의 연대도 기원전 1500년쯤이기 때문에 기원전 12~8세기의 카라스크 문화의 연대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

 


대릉하지역 · 한반도 청동기문화 유사

대릉하 유역과 요하 이서(以西) 지역에서 발견되는 은말주초(殷末周初)의 청동기는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기자(箕子)가 은이 망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자의 동주(東走) 노선과도 부합한다. 이는 고조선을 연구하는 데 주목할 만한 점이다.

발해 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 하가점 하층문화와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이른바 하가점 상층문화-필자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라고 칭한다-를 만들어낸다. 남산근문화의 내용은 하가점 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청동기 문화가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비파형청동단검이라고 하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이 석곽묘나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돌무덤들은 어떤 집단의 상당한 신분을 가진 수장(首長) 급의 무덤으로 추측되는데, 그 무덤의 주인공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례용으로 발해 연안식 청동단검을 부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릉하의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우하량 여신묘에서 소조 여신상이 출토되고 동산취(東山嘴) 제단 유적에서는 소조 임부상이 출토되었는데 여신상과 임부상은 지모신(地母神)을 숭상하는 농경사회의 대표적인 신앙의 대상이다. 고대 사회에서 대형 적석총, 제단, 신전 그리고 신상과 옥기가 문명의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발해문명’의 탄생을 보았다.

이번 대탐사에서 우리 민족과 문화가 북방에서 온 게 아니라 발해 연안에서 우리가 ‘발해문명’을 창조한 주인공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형구 / 선문대 교수·고고학>

 

 

 

 

 

5. 우리가 ‘환만주 문화권’ 중심이었다


청동기시대 고조선~발해 2000년… 장구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

다이내믹한 묘제가 나타난 체르냐치노 5유적의 발굴 당시 모습. 


선사시대와 초기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는 크게 3개의 문화권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북방 유목 문화권, 중국의 중원 문화권 그리고 동북 3성과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한반도를 포괄하는 가칭 ‘환(環)만주 문화권’이 그것이다.

우리의 활동공간이 ‘환만주 문화권’의 중심지인 만주였던 때는 청동기시대 고조선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근 20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었다. 아마도 청동기시대 이전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에도 ‘환만주 문화권’ 지역은 우리 선조들의 중심 활동공간이었을 것이다. 아직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할 뿐이다. 우리의 중심 활동공간이 한반도로 축소된 것은 장구한 역사에서 본다면 불과 1000년 남짓할 뿐이다. 아니, 이 시기에도 간간히 우리의 선조들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 동북 3성과 연해주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은 역사·문화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활동공간 그 자체였다.
역사시대에 한반도는 중국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시대가 올라갈수록 우리 문화는 서쪽의 초원지대와 시베리아 그리고 아무르강 유역과 훨씬 더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한국의 청동기시대에는 요녕지역과 중국을 포함하여 유공부라는 도끼가 있다. 날이 있고, 등 쪽에 날과 일직선상으로 소켓 모양으로 자루 구멍이 뚫려 있는 도끼다. 이 도끼는 알타이지역에서 발원한 세이마-투르비노 문화에서 기원한다. 기원전 17~15세기에 심을 넣어 대롱 모양의 창과 도끼를 주조할 수 있는 복잡한 모양의 거푸집을 발명한 세이마-투르비노인들은 전사 집단으로서 나중에 서쪽으로 핀란드지역까지 이동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은허에도 유공부가 다수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은 동쪽지역으로도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 무인들의 투구에 쇠뿔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시베리아 하카시아-미누신스크 분지의 신석기시대 후기 타스민 문화 석상에 보면 사람 얼굴에 쇠뿔 모양의 뿔이 머리에 양쪽으로 달려 있는 표현이 많다. 신라의 금관에 보이는 출(出)자 모양의 문양 모티브는 시베리아와 몽골의 동기시대 유물에서도 적지 않게 보인다.

 


마제석검의 수수께끼적 현상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한반도, 중국 동북 3성 그리고 연해주지역에는 한 가지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 있다. 마제석검이 그것인데, 이 마제석검은 중국 중원지역에는 보이지 않고, 유목 문화권에도 보이지 않는다. 환만주 문화권에만 특징적인 현상이다.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마제석검이 초원 유목민 문화의 청동단검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마제석검은 비파형 동검과 함께 출토된다. 부여 송국리 석관묘에서 함께 출토된 비파형 동검과 마제석검이 그 좋은 예다. 청동 단검과 마제석검을 제작한 집단은 두 종류의 단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청동으로 주조해서 비파형 동검만 만들고, 돌을 갈아서 아카나크 식의 마제석검만 만들었을까.

   체르냐치노 2유적에서 발굴한 옥저 쪽구들 아궁이.

   <정석배 교수>

아키나크식 마제석검 이전에는 검신이 세장한 삼각형 모양인 마제석검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시베리아 카라수크 문화의 동검과 형태가 흡사하다. 두 가지 계통의 주민들이 한 곳에 거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 종류의 단검은 실용적인 기능을, 다른 한 종류의 단검은 의례적인 역할 혹은 상징적인 기능만 가졌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이 외에도 북방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한반도 및 ‘환만주 문화권’은 초원 유목 문화권 및 시베리아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유사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화들은 항상 서쪽에서 동쪽, 북쪽에서 남쪽으로만 전파되었을까.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나 백제의 건국신화를 보면 건국의 주체들이 모두 북쪽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첨저 혹은 원저의 토기를 보이는 시베리아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 후기 세로보 문화는 한반도의 첨저 빗살무늬토기보다 연대가 오히려 더 늦다. 두만강 가까이에 자리 잡은 연해주 보이스만 문화 인골은 형질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신석기시대 전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북쪽으로 주민들의 이동이 있었고, 지금의 에스키모인들은 바로 두만강 유역에서 이주한 보이스만 문화인들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몽골의 거란성터 주인공은 발해 유민

최근 조사하고 있는 몽골의 거란 성터도 마찬가지다. 발해 멸망 후에 몽골로 잡혀간 발해 유민들이 몽골지역에 발해 계통의 성터를 쌓고, 선진 발해문화를 퍼트렸음은 자명한 일이다. 유사성이 반드시 문화의 전파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문화집단 간의 관련성 혹은 친연성은 입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또한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전파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사실 중국은 우리의 역사뿐 아니라 중국 북방과 서방 그리고 동방의 모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 등 당연한 우리의 북방역사가,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정치적인 이유로 왜곡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역사상 흔적을 보이는 고조선, 부여, 옥저, 고구려, 발해에 대해서는 아직은 적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도 러시아 연해주에서 올해까지 5년 동안 매년 여름에 발해 유적을 조사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발해 체르냐치노 5 고분군에서는 발해의 고분을 120여 기 조사했고, 체르냐치노 2 주거유적에서는 발해와 옥저의 쪽구들을 조사했다. 발해의 유적을 조사하고, 답사를 거듭할수록 발해와 고구려와의 관련성, 계승성은 더욱 드러나고 있다. 특히 쪽구들은 옥저에서 기원하여 고구려로, 발해로 그리고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문헌에 등장하는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고 지키는 데도 힘이 부치지만, 점차 문헌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정석배 /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 문화유적>

 

 

 

 

 

6. 조선인은 순록치기, 고(구)려는 순록



우리 옛 국가명이 스키토·시베리안 언어로… 순록과 유관한 토막이말 이름

대흥안령 입구에 방목 중인 말이 풀을 뜯고 있다.

우리 민족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초원 유목사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김문석 기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예의편 첫머리에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우리말의 구문구조가 한어의 ‘주어+동사+목적어’형과 달리 ‘주어+목적어+동사’형이라는 점을 적시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인지 체계가 한족과 달라’라는 말이며 이는 곧 한국인들의 그것을 만들어온 ‘생태생업사 태반이 한족과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세종의 본질 차원의 문제의식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한마디로 한민족 유목 태반사만 제대로 복원해내면 중국 동북 프로젝트는 저절로 극복할 수 있다는 세종대왕의 메시아적 예언이 이미 560여년 전에 만천하에 천명된 터라 하겠다.

지금은 무정견하게 목표와 방향과 방안이 불투명한 채로 대증요법처럼 백화점식 나열로만 일관해 산만하게 연구판을 차리고 제 사람 심기 경합이나 벌일 안이한 시국이 결코 아니다. 이 점을 대오각성해야 한민족사의 살길이 보이고 그것이 살아야 그 역사 과정에서 설계돼온 결과체인 우리의 자기 인식의 숨통이 제대로 트인다.

중국의 동북 프로젝트에 대한 대응방식은 당연히 우리의 서북유목 태반사 복원 프로젝트다. 이것이 중국의 그것보다 과학성이나 공생 차원의 양심 문제에서 더 나아야 문제를 풀어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대체로 한국어 구문구조류의 언어는 조직된 ‘광역소수(廣域少數)’의 기동력을 특징으로 하는 유목생업 태반사의 소산이다. 중국어나 영어류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협역다수’의 집약력을 특징으로 하는 농경생업 태반사의 소산이라 하겠다. 또 세계 최대의 스텝-타이가-툰드라 지대를 무대로 형성된 북유라시아 여러 유목 종족이 거의 예외없이 그 종족 사상의 생존생태와 유관한 어떤 짐승을 조상으로 삼는 ‘수조(獸祖)전설’을 공유함은 이상할 것이 없다.

 


순록유목 · 기마양유목으로 세분화

백두산 호랑이가 시베리아 호랑이와 생태유전학적으로 접맥되는 것이 고원에서 고원으로 이동해가며 사는 짐승의 생태적 특성 때문이라면, 백두산 조선족이 가까운 중원의 한족들이 아닌 더 머나먼 한랭고원 건조지대인 우랄·알타이 원주민들과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주로 접맥되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중원은 험한 산악과 사막으로 서북지대가 인류생산문화의 시원지인 서아시아와 차단돼 오랜 유라시아의 거대한 문화적 고도로 존재했다. 이와 달리 한민족 태반사는 주로 동서축으로 등온대(等溫帶)를 이루며 유목적 기동력이 이에 가세한 시베리아-백두대간 루트를 배경으로 생산문화의 세례를 아주 빨리 받았다.

한랭고원 건조지대라는 목축의 악조건 속에서 특수 목축으로 발전해온 유목이 순록유목·기마(騎馬)양(羊)유목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자각하느냐 아니냐가 한민족 유목 태반사 복원의 핵심 열쇠다.

광역 생태 배경인 유목사 연구는 오늘날의 정보기술(IT)·바이오기술(BT) 시대에 들어서야 때를 만났다. 툰드라-타이가-스텝이라는 바다를 기승용 짐승 없이 오가며 살아남을 수는 없고 자동차가 주유소가 있는 광야라야 달릴 수 있듯이 순록·양도 각각 꼴밭이 있어야 유목할 수 있다. 순록의 목초인 선(鮮)의 이끼(蘚, Lichen: 다구르말 Niokq)는 북극해쪽 툰드라-수림툰드라에 주로 자생하고 양초(羊草)는 남시베리아-태평양 쪽 몽골권에서 잘 자란다. 물론 지금의 한반도에는 이끼도 양초도 없고 유목도 없다. 15세기 이전 미국의 앵글로색슨처럼 유목권에서 이주해온 지배집단이 주도적으로 역사를 꾸려왔기 때문이다. 순록은 순해서 석기시대부터 이미 유목가축화가 가능했지만 말을 타고 스텝에서나 할 수 있는 양유목은 철기시대에 들어 사나운 말에 금속제 재갈을 물려 대규모로 경영할 수 있었다.

    중국 하일라얼에 있는 한 동물원의 순록.

조선, 고구려는 순록 유목과 관련된 국호일 가능성이 있다. <신동호 기자>

‘조선(朝鮮)’도 ‘고구려(高<句>麗)’도 모두 스키토·시베리안 언어로 순록이나 순록 초지(草地, 꼴밭)와 유관한 토박이말 이름이다. 고도로 순록을 가축화한 고리(槁離)-순록(馴鹿)족이 서래한 철기문화와 결합되면서 기마 양 유목으로 도약해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을 자궁으로 삼아 목농을 아우르는 동북아 고대 유목제국을 창업해낸다. 그래서 한민족 태반사의 투구와 관모는 한족 농경권과 차별돼 주로 뿔과 깃털로 치장된다.

12~13세기 칸발릭(大都-燕京) 유적지를 먼 뒷날에 발굴하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과 문헌사료의 양과 질에 현혹돼서 이것이 농경제국의 유적이라고 사료해석을 해낸다면 한 편의 희극이 될 것이다. 몽골-원제국은, 유물도 문자기록도 아주 적게만 남기는 특성을 가진 유목무력이 주도해 목농(목축농업)을 아우르며 창업해낸 엄연한 유목제국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목농을 아우르는 유목제국의 수도는 스텝과 농경지의 접점에 두되 접점 스텝의 요지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북경(北京)도 아성(阿城, 황금성)도 셀주크투르크 제국의 수도 페르시아고원의 바그다드도 그러하고 분명히 몽골 스텝에 엄연히 자리 잡고 있는 적봉(赤峰)의 홍산(紅山)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홍산문화를 읽는 독법은 유물과 문자를 넘어 유목사안(遊牧史眼)으로 그 유물과 문자를 드려다봐야 한다고 본다.

 


유목제국은 유물 · 기록 적게 남겨

나는 바이칼호 북극해권의 순록유목부족 문화권과 목농을 아우르는 홍산의 순록유목제국 문화권, 그리고 첨단 순록유목 문화가 철기와 어우러지면서 이룩한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의 기마 양유목제국문화권으로 유목문화권을 시대별·지역별로 우선 크게 나누어 보고자 한다. 정착 농경사안으로 유적과 유물을 일색화하는 해석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려 함에서다. 조선-고(구)려-발해(渤海, 늑대의 토템어)-솔롱고스(누렁 족제비)라는 종족 또는 나라 이름이 이미 한민족 스키토·시베리안 기원을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실로 이에 관련된 모든 연구는 조선과 고(구)려의 순록유목·기마 양유목 태반사 복원으로 소급되는 화약으로 장전되고 이의 성취라는 과녁만을 정조준해 발사돼야 한다.

스키타이 유목제국과 맞서 싸운 아키메네스조 페르시아라는 광역정착제국의 중추를 이루었던 페르시아인 집단 그 자체는 10개의 분족(分族)으로 된 아리아계의 유목민 집단이었는데, 이것이 이후의 유라시아 유목제국의 원형을 이루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주채혁/  세종대 교수·사학>

 

 

 

 

 

7. 북방계 남자가 남방계 여자를 차지



동아시아 인류의 유전학적 특징, 한국·중국 북부·일본 유전자 구성 같아

바이칼 호수는 유라시아 유목민들의 발상지이자 인류의 중요한 이동경로 가운데 하나였다.

<신동호 기자>


경향신문이 주관하여 진행한 동북아시아 장정에서 우리는 알타이 산맥부터 몽골 초원을 거쳐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우리와 닮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말도 비슷하고 풍습이나 믿는 것도 비슷하다.
사실 모든 인류는 한 분의 아버지, 한 분의 어머니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들이다. 우리의 최고 오래된 할아버지는 약 6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면 2000세대 전 할아버지다. 어머니는 더 이전인 약 16만 년 전에 역시 아프리카에 처음 나타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우연히 좀 더 강해지는 돌연변이를 가지고 태어나서, 이 할아버지, 이 할머니의 후손들만 살아남은 것이다.

이 이론은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인데, 지금은 정설이 되었다. 전에는 소위 ‘다지역 기원설’을 믿어왔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 살던 구석기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이고, 중국인은 중국 구석기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식이다. 지금 이 구석기 문화를 만든 곧선사람은 현생 인류와 다른 멸종된 하나의 ‘인류’로 간주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서쪽부터 유럽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중기 구석기의 무스테리안 문화를 만든 주인공인데, 역시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사해의 인류가 모두 형제라면 왜 그렇게 다른가? 흑인, 백인은 실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가? 답은 과거 6만 년 동안 살아온 환경이 서로 달랐고,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 살다보니 가장 잘 적응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태양빛이 강하게 내려쬐는 아프리카에서 살아남으려면 피부가 검어야 하고, 햇빛이 약한 온대지방에서는 좀 희어야 건강에 좋다(가령 비타민 D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다).


추위에 잘 적응한 동북아 인류

한편 우리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특징은 추위에 적응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가령 골프 선수 최경주의 눈처럼, 좌우로 가늘고 긴 모양은 하나의 특징인데 눈을 혹독한 추위로부터 보호해준다. 이 체질이 만들어진 곳은 어디였을까? 필자는 바이칼 호 주변이라고 주장해왔다. 언제 이 체질이 형성되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4만 년 전에서 1만8000년 전까지 이어진 마지막 빙하기 기간이어야 말이 된다. 상당히 오랜 기간 추운 곳에서 살아야 그 추운 환경에 맞는 체질을 가진 사람들만 살아남는다. 실제 이 시기, 이 바이칼 지역에 사람들이 계속 살아남았던 증거도 많다.

유전자 검사를 하면 친아버지·어머니를 알아낼 수 있고, 친할아버지·할머니도 알 수 있다. 범죄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DNA 검사가 이것이다. 아버지(남자) 쪽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염색체 Y의 유전자를 검사한다. Y 염색체는 아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모계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다. 이 유전자는 어머니에서 딸에게만 전해진다.

많은 학자가 세계 각처 사람들의 이런 유전자를 조사해서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6만 년 전 200여 명의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반도 남부 해안으로 건너갔고, 이들의 후손이 해안을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는 것이다(남방 해안 루트). 약 5만 년 전에는 지중해와 중앙아시아로 들어가고, 유럽 대륙과 북아프리카로도 퍼져 사는데, 그 일부가 시베리아를 거쳐(북방 루트), 빙하기가 끝나는 1만5000년 전 미 대륙으로 건너간다.

Y염색체 유전형을 보면 북방 루트를 통해 온 사람(특히 남성)이 동아시아인의 주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동아사이의 거의 모든 사람은 O형의 Y염색체형을 가지고 있는데, 이 O형은 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 많은 N*의 후손 유전형으로,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의 여러 섬, 일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태평양 해안 사람에 많은 C, D형과는 촌수가 상당히 멀다. 특히 말레이 반도에 사는 안다만 섬 사람(초기에 아프리카를 떠난 사람들로 간주됨)이 D형인 것은 이 형들이 남방 루트로 이동한 형이라는 것에 확신을 준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Q형도 O형의 사촌쯤 되고, 중앙아시아가 그 기원지인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인의 약 4분의 1은 남방형의 C, D를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4분의 3은 북방계라는 말이 나온다.

    최근 유전인류학의 발달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향토박물관에 전시된 유골.  <김문석 기자>

여자들의 족보를 알려주는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의 분포는 아주 복잡하지만, 최근 러시아 유전학 연구소와 필자 등이 공동연구에서 아시아 지역의 미토콘드리아 유전형들이 거의 전부 남방 루트로 이동한 여성들의 것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 알타이 산맥 이서의 중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부까지 거의 모든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은 N*인데,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인들은 M*와 N*형을 가지고 있다. 모든 아프리카 흑인은 L*을 가지고 있다(*가 붙은 것은 후손이 되는 유전형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N*에는 A, B, F, H, I 등이 있다). 그런데 이 N* 중에서 동아시아에 있는 A, B, F는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요약하면 동아시아 여성들이 가진 미토콘드리아 유전형은 거의 전부 남방 해안 루트를 거쳐 이동해온 사람들 것이고, Y 염색체는 중앙아시아-시베리아를 거쳐 내려온 남자들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북방계 남자가 남방계 남자를 몰아내고 남방계 여자들을 취하여 후손을 불려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그 유전자 구성에서 한국, 중국 북부, 일본인이 모두 같다.

흑해에서 중앙아시아, 알타이 지역을 거쳐 바이칼 호 부근에 이르는 지역은 중기구석기 문화에 이어 세형몸돌, 세형돌날로 대표되는 후기 구석기 문화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이다. 필자는 이 후기 구석기 문화를 추운 지방에 정착하여 적응한 체질을 가진 북방계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생각한다.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들은 약 1만5000년 전에 시작된 지구 온난화로 주변의 빙하가 녹으면서 주변으로 이동하여 일부는 미 대륙으로 들어가고(미국 원주민이 된다), 일부는 남하하여 동아시아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이때 동아시아에 신석기 문화가 등장하는 것이다. 북방계 사람들과 남방계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동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주역

답사팀은 발해 문화의 중심지 연해주부터 바이칼 지역, 몽골, 만주를 거쳐 고조선 문화의 중심지(?) 내몽골 요하 유역의 홍산 문화를 돌아보았다. 연해주 아무르강 지역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1만3000년 전 토기 문화는 바이칼에서 동북아시아 전역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내몽골 황하지역에 이루어진 오르도스 문화를 포함하여 동북아 문명이 이렇게 남북계 사람들의 만남으로 형성되지 않았을까?

“아득한 옛날, 천상 세계를 다스리는 상제(환인)에겐 환웅이란 아들이 있었다. 그는 매양 지상을 내려다보며 인간의 세계를 다스려보려는 욕망을 품어오곤 했다. 환인은 그 아들의 뜻을 알아챘다. 그러곤 아래로 지상의 세계를 굽어보았다. 아름답게 펼쳐진 산과 강과 들, 그 가운데서 삼위태백이란 산, 그곳이 널리 인간을 다스려 이롭게 할 만한 근거지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 환웅에게 직권을 부여하는 천부인 세 개와 부하들을 주어 지상에 내려가 다스리게 했다.” 이 단군신화는 바이칼에 살았던 북방계 통치자가 남쪽으로 길이 열리자 아들을 보내 남방계 원주민을 다스리게 한 역사가 아닐까?
<이홍규 / 서울대 의대 교수·내과>

 

 

 

 

 

8. 이야기 속 동아시아 문명의 새벽



시베리아 곳곳의 이야기와 우리 이야기의 유사성을 찾아서

러시아 부리야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 인근 셀렝게 강변의 게세르 1000년 기념비. <신동호 기자>


나는 이야기 사냥꾼이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고, 신화에 관한 글을 쓰면서 먹고산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시베리아 오지를 싸돌아다닌다. 여름과 겨울방학 중에 봇짐을 싸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않으면 온몸이 쑤시고, 긴 연휴가 겹치면 북쪽으로 날아가서 ‘구라’를 풀어놓는 사람들을 보고 싶어 안달을 한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다. 그러니 천상 프로필을 대라고 하면 사냥꾼이라 할 때가 가장 마음 편하다.


민족 · 국가 · 이데올로기는 배제

이야기는 내 입에서도 나오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딸의 입에도 붙어다닌다. 열 살 안팎의 어린이가 친구들에게서 듣거나 인터넷에서 알게 된 이야기를 줄줄 입에 꿰고 다니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조금 발품을 팔면 내가 사는 곳을 넘어서서, 반도 내의 이야기꾼들을 찾아뵙고 그들만의 세상을 확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서 무심코 지나치고 말지만, 사람이 사는 공간은 말함으로써 드러난 이야기와 말하지 않음으로써 숨겨진 이야기로 가득해서 길을 가다보면 이야기가 발에 툭 차이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이야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천에 널려 있는 이야기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시베리아를 사냥터로 택했냐고 질문하면 그럴싸한 답을 하기 어렵다.

왠지 모르게 시베리아 지역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하랴. 남들이야 부에노스아이레스나 파리 정도는 되어야 선망할 만한 이국적인 대상으로 볼 텐데, 춥고 먹을 것 없어 보이는 느낌을 주는 시베리아에서 이국적인 낭만을 느끼는 나는 아마도 DNA 속에 시베리아와 연관된 무엇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럽이나 미국에 가거나 하다 못해 먹을거리라도 풍부한 중국에 유람을 다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어쩌다 한 번 가는 것도 아니고 매년 내 집 들락거리듯 다니는데 말이다.

그래도 10여 년 전에 비하면 상황이 아주 좋아졌다. 월급을 쪼개어 여행 경비를 마련하지 않아도 다른 데서 보조를 해준다. 세상살이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사냥꾼이 마련할 수 있는 전리품을 준비해서 후원자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도리다. 여행이 잦아지고, 그 기간도 늘어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력서의 뒷자리에 붙는 논문이나 책들의 목록이 불어났다. 이번 2007년 7월에는 경향신문사의 특별취재단과 함께 시베리아와 내몽골을 답사했다. 이번 여행의 사냥감들과 이전에 모아두었던 것들에서 제일 싱싱하고 물이 좋은 놈들로만 골라 ‘뉴스메이커’에 소개할 것이다.

연재할 이야기의 제목을 ‘이야기에 남아 있는 동아시아 문명의 새벽’으로 뽑았다. 사냥꾼의 입장에서 봐도 선정적이다. 이야기 나부랭이와 문명 그것도 새벽의 문명을 연결시키는 배짱이 웃기기도 하고, 돈키호테 같기도 하다. 그래도 정했으니 그대로 나가보자.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민족의 개념과 국가의 개념 그리고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논의에서 옆으로 한걸음 물러설 생각이다. 사실 고대의 미술품들을 관찰하면 그 어디에서고 민족이나 국가를 찾기 어렵다. 이데올로기와 주의를 찾는 것은 더 난망한 일이다. 마치 민족주의의 보루처럼 보이는 신화의 세계에서도 사실상 민족과 이야기의 내용을 연결시키는 해석은 그다지 오래된 접근법이 아니다. 그러니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우리 민족이 어디서 나왔다거나 그 문화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다는 식의 거대담론을 말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문화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동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는 것이 사냥꾼의 의도다. 여기서 문학적인 형식을 가진 이야기들만 펼치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야기를 싫어할 분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아닌 종교적인 의식이나 다양한 박물의 형태로 세상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냥꾼이 펼칠 이야기의 세계에는 기성 이야기, 다양한 박물과 세계관 그리고 그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넣을 생각이다.

바이칼 호수 서쪽 옛 부리야트자치구(지금은 이르쿠츠크 주로 편입)의 한 샤먼이 방문자를 위한 의식을 펼치고 있다. <김문석 기자>

 


첫 번째는 단군신화의 탈신화화

하지만 제일 처음 내놓는 이야기는 좀 무거운 것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단군신화와 관련된 담론이다. 민족과 결부된 단군신화가 아니라 이야기 텍스트로서의 단군이다. 미리 내용을 말해버리면 싱겁다. 하지만 조금 맛보기를 하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단군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실 단군신화의 텍스트와 상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신화를 무척 자의적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해서 신화의 내용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 첫 번째 이야기의 내용이다. 음, 좀 더 먹물답게 설명하면, 롤랑 바르트의 신화해체 개념을 덧붙여서 ‘단군신화의 탈신화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이야기로, 알타이-투바-하카스-사하 야쿠트-부리야트 등에서 캄챠트카의 코략과 이텔멘에 이르는 지역의 이야기를 대강 말하고, 우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지를 생각해볼 참이다.

두어 번 글을 쓴 뒤, 독자들이 여전히 흥미를 느끼고 있으면, 본격적으로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샤먼들의 동태를 샅샅이 밝혀내는 이야기를 몇 번 더 써볼 생각이다. 샤머니즘과 샤먼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냥 민속이나 흥밋거리로 생각하면 어떠랴. 정한수를 떠놓고 떠나간 님을 그리며 행복을 비는 모습을 샤머니즘이라고 생각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샤머니즘은 과거의 역사이고, 현재의 문화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현대를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조금씩이라도 알고 있는 게 얼마나 유용한지 모른다. 휴대전화를 파는 직장인들은 시베리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소수종족들의 문화를 익히면, 판매량을 급속도로 올리는 비법을 찾을 수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문화는 인간 삶의 어디에서고 발견되며, 예술 특히 이야기 문화는 우리 삶의 전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한반도 북쪽의 오지인 시베리아 지역의 이야기 세계로 들어가자. 시베리아의 이야기 세계가 동아시아 문명의 새벽과 맺는 관계는 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찾으면 좋으리라.
<양민종 / 부산대 교수 · 러시아문학>

 

 

  

9. 고구려는 동아시아 ‘지중해 제국’



언어학적으로 주변국에 큰 영향력… 종교 · 농경 분야에 단어들 전파 증거

고구려 제국과 일본열도는 동해를 지중해 삼아 하나의 언어권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카드(card)’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기원한 것이다. 라틴어로 종이(paper)는 carta(카르타)인데, 이 단어는 지중해를 건너 로마의 북아프리카 식민지로 건너갔으며, 그 형태가 ta-carta(타-카르타)로 바뀌었다. 그것은 한 단어가 -ta로 끝날 때 여성 접두사(feminine prefix) ta-가 붙는 사하라 사막 투아레그족(Tuareg people) 사람들의 언어 형태였다.
투아레그족 카라반, 즉 대상(隊商)들은 이 로마 종이를 서아프리카로 운반했으며, 그 단어 형태는 나이지리아와 그 인근 나라들의 하우사어(Hausa language)인 ‘takardaa(타카르다)’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 라틴어 단어는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에 전하면서 ‘カルタ(카루타, 놀이딱지)’가 되었다.


일본 열도는 고대 고구려 영토

이런 식으로 대제국의 문화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들이 종종 세계의 먼 변방으로 차용되었다. 한국인의 기원을 찾는 답사 여행이 끝나갈 무렵, 우리 눈에 고조선(Ancient Korea)과 고구려의 지배 영역은 로마제국의 그것과 더욱더 흡사해보였다. 우리는 이미 답사 전에 고대 일본어가 고구려어와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이것은 특히 더 진실인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BC 400년께나 그보다 더 일찍 일본열도가 고대 고구려 영토였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로마제국이 지중해의 북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이형구 교수도 제시하려고 하는 것 같이, 우리는 대륙 고구려(continental Koguryo)와 열도 고구려(insular Koguryo) 사이에 있는 동해를 고구려의 동지중해(East Mediterranean Sea), 그리고 대륙 고구려의 서남쪽에 있는 발해만을 고구려의 서지중해(West Mediterranean Sea), 혹은 고조선의 지중해(Mediterranean Sea)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답사의 결과 우리는 고대 로마가 유럽의 지중해 제국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지중해 제국이었다고 보게 되었다.

고구려의 영향력은 당시 고대 한국인들이 주변의 만주-퉁구스족 이웃들보다 더 발전해 있었던 여러 분야 중 하나인 종교와 농경분야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 고구려 제국으로부터 차용해온 가장 명백한 단어는 불교의 핵심 단어들이다.즉‘부처puch- (Bud dha)’와‘절<뎔c r< ti r (Buddhist temple)’이다. 부처의 열도 고구려어(즉 고대 일본어) 형태는 한국어 접미사 *-ki 가 -ke로 바뀐 ‘ ほとけ hot-o-ke’이다. 대륙에서는 고대 여진어(Old Jurchen) 형태가 *puc-i-ki로 기록돼 있으며, 이것은 나중에 만주어에서 fuc-i-hi로 바뀌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어 접미사 *-ki 는 -ki와 -hi 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하와이 대학의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불교는 AD 538~552년 사이에 일본에 전해졌다. 우리는 AD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기 전에 이미 불교가 여진족 영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교가 고구려와 발해, 두 나라에서 번성했기 때문에, 일부 고대 한국어 어원들은 더욱 그럴듯하게 보인다.”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퍼져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대륙과 열도의 고구려 영역에 한국인 승려들에 의해 불교가 모든 고구려 제국에 퍼져나간 것이다.

농업분야에서는 3개의 분명한 차용어들이 있다. 첫 번째는 ‘뿌리ppur-i’다. 중기 한국어 ‘불휘pur-hui’는 만주어 ful-ehe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만주어는 고대 한국어 ‘*pul-eke(root)’에서 기원한 것이다. 두 번째는 ‘무(根菜) mu-u’다. 중기 한국어 ‘무 muzu(radish)’는 여진어 ‘niaju -z- )’보다는 오히려 고조선어 형태인 *bur-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메주 mi cu(soybean malt)’다. 만주어 형태는 같은 의미를 가진 misu-n이며, 일본어 형태는 ‘味 みそ mis-o(soybean paste)’이다. 이것은 일본인 승려 요시다 켄코우(吉田兼好, 1317~1331)가 쓴 수필 ‘투레두레구사(徒然草)’에 최초로 기록돼 있다. 만주어와 일본어 형태들은 현대 한국어 형태보다 초중기 한국어 형태인 ‘密祖 *mico’에 더 가깝다.

 

대륙 고구려인들은 동해를 건너 일본에 쌀 재배 야요이 문화를 전달했다.

한국인들은 이런 전통을 지금은 러시아의 극동에서 실천하고 있다. 연해주의 한 한인 농장.

 


한국어 흔적 만주어 · 일본어서 발견

이번에 우수리스크를 답사하면서 우리는 한 한국인 농장에 머물도록 초대받았다. 그곳에서는 쌀과 콩을 재배하여 수출하고 있었다. 대륙 고구려의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런 옛날의 좋은 농업 전통을 한국인들이 러시아의 극동에 여전히 전달하고 있다고 이해했다. 역사적으로 대륙 고구려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에 바다를 건너 일본에 쌀재배 경작의 야요이 문화를 전달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고구려의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인 일본과 더불어 오늘, 그리고 미래에 동아시아의 형제국으로서 그리고 평화의 동반자로서 남아야 할 것이다.
<시미즈 키요시 / 순천향대 초빙교수 교수, 극동대 겸임교수 · 언어학>

 

 

 

 

 

10. 좌담회 “우리 민족 정체성 찾을 단초 마련”


24일간의 대장정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의 성과와 의미를 짚어본 좌담회


일시 /  2007년 9월 17일
장소 /  경향신문 출판본부 회의실

참석자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문화유적학
양민종 부산대 교수·노문학
주채혁 세종대 교수·역사학(북방사)
이형구 선문대 교수·역사학(고고학)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비교언어학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사회) 윤명철 동국대 교수·한국사

 

윤명철

윤명철(사회) :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지난 7월 9일부터 24일까지 답사를 진행했습니다. 상당히 무리한 일정이긴 했는데요,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내몽골 깊숙한 지역뿐 아니라 그동안 한국에서 거의 접근하지 못했던 대흥안령 지역, 그리고 이번 답사의 출발지이자 종착점인 요하문명 지역을 답사했습니다. 고생도 많았지만, 그동안 사료로만 접했던 다양한 종족을 직접 만나 삶·기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이번 답사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합니다.

그동안 여러 팀이 부분적으로 답사했지만, 이번처럼 하나의 목적으로 총괄적으로 답사한 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방문한 연해주, 바이칼, 대흥안령, 요하문명의 순서로 되짚어보죠.

정재승 : 잠깐, 각론에 들어가기 전에 답사구역의 명칭 문제부터 논의해야 할 듯합니다. 요하문명이라는 이름은 아직 광범위하게 합의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중국은 그런 이름을 쓰지만, 우리가 섣부르게 쓰는 건 곤란합니다. 발해연안 문명권이나 만주라는 이름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요하문명권이라는 이름은 피했으면 합니다.

사회 : 용어 사용과 관련해서는 논쟁점이 남는 것 같습니다. 이 점을 짚어두고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정석배

정석배 : 일단 연해주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발해입니다. 발해는 연해주뿐 아니라 아무르강, 즉 흑룡강 유역까지 영향권에 두고 있었습니다. 중국이나 북한지역의 발해는 아직까지 조사할 수 없고, 연해주만 조사할 수 있습니다. 발해 성터의 경우 크라스키노 성과 같은 성은 고구려 성과 닮아 있습니다. 절터는 아브리코스 등 모두 5개가 알려져 있는데, 발해 절터에서 불교가 널리 통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고분이나 토기도 기본적으로 고구려 계통이라는 것이 확인되는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그 관련성이 더욱 드러나고 있습니다. 발해 이전 우리 역사로는 옥저가 있습니다. 단적인 것이 구들, 다시 말해 온돌문화죠. 종전에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봤는데, 지금은 크로우노브카, 즉 옥저 지역에서 온돌이 기원한 걸로 보고 있습니다. 옥저 다음은 서기 2~3세기에 형성된 ‘뽈제’ 문화인데, 역시 온돌이 발달했습니다. 숙신이나 읍루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온돌로 보면 우리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형구 : 온돌의 기원이 옥저라고 하는데, 계속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리고 일부에서 시베리아 쪽과 연결해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정석배 : 토기에서도 공통적인 것이 발견됩니다. 우선 신석기시대 후기 문화로 연해주에 자이사노브카 문화라는 것이 있는데, 번개무늬토기가 특징적입니다. 번개무늬 토기는 두만강과 압록강 유적에 신석기시대 후기에 집중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러시아에선 이 지역들을 자이사노브카 문화와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또 한반도 동해안·남해안 지역과 제주도에 신석기시대 전기의 평저 융기문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런 토기는 아무르 강 중류지역에서도 보입니다. 사실 이 평저 융기문토기의 분포권에는 일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반도의 선사와 역사시대 문화들이 연해주와 아무르강 유역은 물론, 멀리 바이칼 지역까지 깊은 관련성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주채혁

이기환 : 체르냐치노 유적의 고분을 보면 여러 형식이 나오는데, 발해와 고구려·말갈족의 신분관계라든가 더불어 살았던 증거가 되는 것인지요.

정석배 : 하나의 고분군 내에서 고분들이 일정한 구역을 이루고 있고, 각 구역에서 고분들의 종류가 다르다면, 그것은 당연히 피장자들의 위계를 반영하고, 또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함께 살았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기환 : 언어가 다를 때 과연 한 종족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텐데요.

시미즈 : 고고학자들이 과거 유적을 발굴하고 감정하듯, 우리 언어학자들도 고문서를 감정합니다. 만일 오래된 언어 형태가 발견되면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유래했는지 생각합니다. 연해주로 가기 전에 저는 거기에서 새로운 것이 발견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직접 현장을 보고 돌아오자 ‘토끼’에 대해 고대 문서에 수록된 알타이어 단어 목록이 달라 보였고, 저는 그것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어에서 ‘토끼’는 오사함(烏斯含)이라고 하는데, 일본어에서는 다시 우사기( うさぎ)라고 합니다. 한국어는 ‘토끼<톳기’의 형태인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와 일본어의 형태가 거의 똑같다는 겁니다. 대흥안령 지역의 다구르어를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형태의 단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토끼라는 언어의 형태를 놓고 본다면 만주와 일본열도 전체가 한때 고구려어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민종

사회 : 두 번째 지역, 바이칼로 넘어가겠습니다. 양민종 교수께서 정리해주시죠.

양민종 : 한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문화가 바이칼에서 시베리아 루트를 타고 한반도 북부를 통해 들어왔다는 것이 상식적인 주장인데, 실제 증거는 없습니다. 유의해야 할 점은 국가나 민족이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 것이 최근 몇백 년 사이라는 거죠. 민족의 이동경로나 한민족이 바이칼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기 전에 좀더 겸허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의 단군신화와 유사한 이야기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공유되는 이야기들 속에서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두 번째로 이야기의 세계관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의 개념은 서구학자가 내놓은 거예요. 이것을 시베리아 지역에 적용하기는 곤란해요. 이야기의 모티브가 바이칼·시베리아부터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샤머니즘의 영향이 ‘어디에서 어디로’ 미쳤다고 정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단군신화와 시베리아 신화의 연관성을 보죠. 시베리아의 게세르 이야기의 얼개는 단군신화와 비슷합니다. 게세르 이야기는 1716년에 채록되었죠. 반면 우리 단군신화는 13세기 일연선사(‘삼국유사’)가 정리했죠. 13세기 이전에도 단군신화가 존재했겠지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죠. 그러나 건국신화라는 부분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주어진 것은 13세기로 고정된 것입니다. 하늘신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수많은 신무기, 우사·풍백을 거느리고 내려온다는 것이거든요. 사실 곰족이니 호족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죠.

결론적으로 단군신화는 탈민족화되어야 합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은 세계 시민을 지향하는 형태예요. 역설적으로 우리는 거기에서 민족주의를 찾았지만, 단군신화의 민족적 지향성은 민족 외부로 향하는 외부 지향형입니다.

시미즈 키요시

정재승 :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획 단계부터 여러 견해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이칼포럼에서 답사나 학술 미팅을 하면서 출발을 바이칼에서 원류를 찾는다는 가정과 목표 아래 작업했습니다. 다년간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멤버도 열려 있고, 일관된 이념을 바탕으로 연구해온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일원론적 민족의 뿌리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으로 유연해지는 것을 학술적 탐사 끝에 발견했습니다.

바이칼 기원론은 제가 알고 있기론 강단 고고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최몽룡 서울대 교수의 저서 ‘한국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1993)에서 1만3000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바이칼 호수 지역에 살던 몽골리안의 일부가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서술하면서 이야기가 처음 나온 거죠. 지금으로서는 학술적으로 바이칼이다 뭐다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유전학이나 신화학 등 다방면으로 상이한 증거들이 따져보면 몇 가마니씩 나오잖아요. 섣불리 결론을 내놓기보다 계속 미완의 상태로 당분간 더 연구를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기환 : 결국 단일민족이라는 것이 닫힌 세계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됩니다. 흔히 홍익인간이나 백의민족 또는 단일민족이라고 하는데, 지금 양 교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런 단일민족을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인가요.

이형구

양민종 : 정확한 지적입니다. 단군은 단군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죠. 단군과 유사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한반도에서 채록한 것이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민족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씌인 꺼풀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다시 드러내자는 거죠. 단군을 원래의 이야기 세계로 돌려주고, 보편적 인간주의를 담고 있다는 것을 재조명하자는 거죠.

사회 : 부리야트 공화국으로 넘어가보죠. 거기서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흉노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목만이 아니라 농경문화를 띠었다는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보시죠.

이형구 : 일단 문제 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흉노와 우리는 관계 없다고 봐요. 흉노 이전에 석관묘가 있었고, 낙랑도 있었고, 우리가 훨씬 빠릅니다.

사회 : 부리야트와 우리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정재승 : 그게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러시아 쪽 자료는 아직 입수하지는 못했지만, 유전학적으론….

정재승

이기환 : 브리야트와 유전적 친연성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하다는 것은 비슷한 것이고, 기원을 이야기하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채혁 : 바르쿠진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바르’는 호랑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호랑이와 관계된 지명이 많다는 것, 그리고 1905년에 마지막 호랑이가 거기서 죽었다는 것을 이번에 가서 확인했습니다. 코리족의 ‘코리’는 순록이라는 뜻인데, 그들이 주로 있었던 곳이 북극해 쪽입니다. 이들이 예니세이강이나 레나강-옛날에는 바이칼과 연결돼 있었죠-을 따라 바이칼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북쪽에는 호랑이가 못 사니까 이들은 곰 토템이고, 곰족인 코리족 부족들의 연합장이 바르쿠진족, 즉 호랑이족과 결혼해서 (아니면 정복했을 수도 있죠) 낳은 것이 몽골족의 시조의 어머니인 알랑 고아입니다. 물론, 다 알다시피 이게 바로 단군신화죠.

이기환 : 몽골리안이라는 말은 마르코 폴로가 쓴 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게 13~14세기의 일입니다. 그래서 몽골에서 우리 뿌리를 찾는 것은 잘 모르겠고, 오히려 몽골은 발해가 망한 뒤 거란에게 쫓겨 올라간 유민들이 세웠을 가능성이 있고, 몽골의 여시조인 알랑 고아가 코리족의 후손이고, 칭기즈칸은 친아버지가 메르키트족, 즉 발해 계통의 말갈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네요. 오히려 몽골이 발해의 후예라는 설도 가능하다는 거죠?

정석배 : 지금 몽골에서 거란 유적을 발굴하는데 그곳이 성터입니다. 몽골과 러시아 학자들 모두 발해 유민들이 만든 성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주채혁 : 신화와 종교도 중요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도 빼놓을 수 없어요. 솔롱고스라고 불리는 부족이 제일 먼저 산 곳은 바이칼 동남쪽입니다. 바이칼에서는 그곳이 해가 뜨는 쪽이거든요. 아주 재미있는 게, 나중에 칭기즈칸이 부인을 빼앗기고 되찾기 위해 이곳, 즉 서북쪽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기록에는 해 뜨는 쪽의 솔롱고스를 공격해 공주를 취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서북쪽을 공격하면서 ‘해 뜨는 쪽‘이라고 한 것은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지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저는 흥안령 지역의 근하(根河)를 고리국의 주몽이 도망 나온 곳으로 나름대로 비정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가보니까 그런 생각이 더 들었어요. 목초지가 굉장하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뿔이나 깃털인데, 유목민들의 고유한 습성이지요. 머리에 깃털을 장식하고 심지어 뿔이 없는 말에도 뿔을 그려넣지 않습니까. 중국에는 뿔이나 깃털이 없어요. 그런 것은 숲이 아니면 나올 수 없죠.

이기환

사회 : 뿔이나 깃털 문제는 우리와 ‘관계가 있다’ 정도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채혁 : 제가 보기엔 관계가 아니라 기원입니다.

이형구 :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발해 연안에서도 각배 같은 게 많이 나오잖아요.

사회 : 쉽게 결론 나기 어려운 부분인 것 같습니다. 흥안령 지역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야기해보죠. 소수 민족들의 기원은 어떻게 된 걸까요.

주채혁 : 에벤키족의 ‘에벤’은 목초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룬춘족의 ‘오룬’은 순록이라는 말이고요. 오랑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구르족은 현지에서는 부정했지만, 본토 발음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골리라고 봅니다. 제가 보기엔 러시아 원정대로 나갔다가 눌러앉은 고구려 후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미즈 : 순록에 관한 매우 중요한 단어들인 ‘이끼<니끼’와 노루, 수사인 ‘일곱’, 그리고 ‘부처’와 ‘절’ 같은 일부 중요한 불교 용어들은 고조선어나 고구려어로부터 대륙의 만주-퉁그스어, 그리고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차용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고구려가 고대 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종족을 그 영향권 아래에 둔 대륙의 제국이었으며, 또한 로마가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 지역을 차지했듯, 고구려는 동해를 건너 일본열도까지 그 영역에 두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기환 : 근대의 산물인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에 중국 자료를 보니까 양견자와 양록자라고 해서, 1만5000년 전 개를 기르는 사람과 사슴을 기르는 사람들이 결혼해서 하나는 숙신이 됐고, 하나는 조선이 되었다고 해놓았습니다. 맞는 얘기가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만주벌판에서 피를 나눈 형제일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이웃사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민족’만 강조하지 말고 열린 시선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사회 : 간단히 말씀드리면 흥안령 지역에서 연해주 남부까지 이어지는 문화에 다양한 종족이 남아 있습니다. 다구르족은 17세기에 처음으로 이름이 나오는데, 언어도 거란이나 우리와 비슷합니다. 에벤키나 오룬춘, 다구르 외에도 많습니다. 실위도 있는데, ‘남실위’의 경우 우리와 마철 교역을 했습니다. 북만주 지역은 자연이든 교역 · 종족관계든 어떤 식이든 관계가 깊습니다. 과거 고구려 영역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채혁 : 중요한 부분입니다. 시베리아와 만주와 한반도를 구별 없이 서술하는데, 시베리아는 물이 북극해로 흐르는 지역에는 추워서 호랑이나 양도 못 살고, 거북이도 못 삽니다. 훌룬부이르 초원도 물이 북극해로 흐르는 데서는 부족 단계 이상은 못 갑니다. 족조 전설만 있지 칸 전설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 태평양으로 흐르는 곳으로 오면 칸이 나옵니다. 유목 제국이 성립하는 거죠. 장백산 지역은 이끼나 양초(羊草)가 없으니까 초원 지대와는 아주 다른 지역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줬으면 합니다. 이번에 놀란 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데, 풀이 손을 벨 정도로 뻣뻣하다는 거였습니다. 반대쪽은 부드럽죠. 유목지역과 비유목지역이 구분되는 겁니다.

사회 : 훌룬부이르 초원은 고구려 이전에 부여, 부여 이전에 고리국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구려 전신과 선비족 후대의 거란족이 좀 더 가까운 혈통과 거의 유사한 언어와 유사한 정치체를 이뤘다는 것이 가설입니다. AD 1세기에서 3~4세기에 동아시아 종족을 이뤘다는 가설을 이번 탐사를 통해 제기해봅니다. 다음은 ‘발해문명권’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이형구 : 신석기와 청동기시대만 말하겠습니다. 저는 중국의 요녕성과 내몽골 지역을 주로 갔는데, 이 지역을 발해연안으로 봤습니다. 넓게 봤을 때 한반도에서 산동반도, 한반도 중부를 감싸 안는 지역입니다. 시미즈 선생은 아까 동해를 지중해라고 했는데, 저는 동해는 대서양이고 발해만이야말로 동양의 지중해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는 황하문명이라고 명명됐지만, 황하는 서해가 아니라 발해만으로 들어갑니다. 유럽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동방문명이 이른바 발해문명입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우리 고대인들이 연해지구나 강하류 지구에 많이 살았습니다. 신석기 · 청동기 유적발굴로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과거 황하문명을 중국문명이라고 했습니다. 중원지방의 문명을 황하문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발해문명이라고 봅니다. 발해문명을 창조한 주인공은 중국 사람만이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동이(東夷) 문명이 고대문화를 형성한 걸로 보는데 왜냐하면 동질성의 문화, 일종의 비슷한 문화가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통적인 문화는 민족의 동질성과도 부합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빗살무늬토기인데, 과거에는 노르웨이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유럽과 시베리아를 거쳐, 한 갈래는 흑룡강과 두만강, 또 하나는 바이칼을 거쳐 몽골, 만주, 압록강으로 해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설이 있는데 제가 연구한 결과는 다릅니다.


정재승 : 북한의 빗살무늬토기는 암사동 것과 똑같더군요.

이형구 : 암사동과 북한 평양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는 시베리아의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토기는 발해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농경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석기도 다릅니다. 대표적인 것인 반월형석도인데, 산동반도나 황하 하류 등에서 다 나오지만 시베리아에는 없습니다. ‘옥결’과 같은 옥으로 만든 귀고리는 운암리에서 나온 것은 기원전 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르쿠츠크나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서도 똑같은 게 나오지만 우리보다 2000년이 늦습니다. 그렇다면 시베리아에서 온 문화란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엔 일제시대 때 교과서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 비판 없이 받아들여온 거예요. 토기의 경우 신석기와 청동기를 거쳐 빗금무늬에서 무문토기까지 계속 발전해왔다고 봅니다. 거기에 단군이라는 건국신화가 추가된 것이죠. 제가 보기엔 한반도와 요동반도·발해연안이 동일문화권입니다. 제가 아는 민족개념으로 동일민족이라는 것은 이런 공통된 문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 : 결론 내리겠습니다.

 ‘코리안루트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24일간의 대장정을 했습니다.

고고학자, 신화학자, 유목사학자, 유전학자, 역사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가 참여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가 나왔는데, 중요한 것은 토론과 답사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을 단초를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탈민족주의, 국사해체론, 근대 이후 민족주의 개념 등이 나오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들은 정확한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는 사실만으로, 일부는 서구식 민족 개념으로 끼워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탐사를 통해서 이런 것을 학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경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4일간의 대장정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참석자 여러분의 건강과 건학을 기대하면서 오늘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 사진, 김세구 기자 / 정리,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11. 연해주, 2300년의 흔적



러시아 연해주의 구석진 변경 지역 체르냐치노. 땅을 파면 우리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표층에는 70년 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주거 흔적이 있고, 더 파면 1300년 전 발해인의 주거지가 나온다.

또 그 아래 기원전 3~5세기의 옥저 유적이 있다. 탐사단이 체르냐치노 2유적 발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 김문석 기자>


 

한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가 맞닿은 땅

철로 뒤의 광활한 땅은 연해주의 고려인이 개척한 ‘한마당 농장’이다.

1937년 9월 이곳 고려인들은 땀흘려 일군 곡식을 추수하지도 못하고 중앙아시아로 가는 시베리아횡단철도에 강제로 태워졌다.

이 농장은 옛 소련이 몰락하면서 버려져 있다가 최근 우리나라 연해주 영농법인이 인수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고려인 강제 이주 집결지인 라즈돌노예 역이 있다.

고려인의 땀과 한이 서린 이 농장은 연해주로 재이주를 꿈꾸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부활할 것을 꿈꾸고 있다.


 

 

 

12. 발해의 혼이 우리를 부른다

 

 

 

‘코리안 루트 탐사’ 취재기, 고대 강국의 역사 현장엔 아직도 흔적이…

대순 호를농장의 제분소.

생산품을 공장 안에서 적재해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운송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갖춰져 있다. <김문석 기자>


한마당 농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70㎞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버스로 한 시간여 달리면 왼편에 넓은 평원이 내려다보이는데,

언덕 바로 아래 차로와 나란히 달리는 철로를 만난다.

이것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 나아가 파리까지 연결되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다.

 

긴 여정을 준비하느라 잠을 설쳤지만 졸음을 떨치고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다.

‘코리안 루트’의 수많은 지점 가운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가장 극적으로 맞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선 기억하기 까다롭기만 한 러시아어 지명 속에서

‘한마당’이라는 한국식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거기에는 기구한 역사가 숨어 있다.

 

이번 탐사가 수천, 수만 년까지 넘나드는 것이지만

그 첫 시간 여행은 70년 전의 아주 가까운 과거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동승한

연해주 영농법인 아그로상생(대표 김순옥)의 안치영 전무가 우리를 70년 전으로 안내했다.

 


연해주 고려인 이주역사는 진행형

“한마당 농장은 고려인들의 땀과 눈물과 한이 서린 곳이지요.”
1937년 9월, 이곳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기근과 일제의 수탈을 피해 이주한 ‘고려인’들이

피땀 흘려 일군 1만ha(헥타르)가 넘는 광활한 황금 벌판이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먼저 떨어진 것은 날벼락이었다. 옛 소련 스탈린 정부의 이주 명령이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한마당 농장의 가장자리를 달리다가 라즈돌노예라는 작은 마을의 역에 닿는다.

70년 전 고려인들은 거의 빈 몸으로 이 역에 집결해 중앙아시아로 가는 열차에 강제로 태워졌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위협을 느낀 소련 정부가

일본과 고려인이 내통하지 못하게 이런 강압책을 썼다.

이주 전 고려인 지식인 2500여 명이 총살형을 당했고,

이주인 17만여 명 가운데 5분의 1이 이주 및 정착 과정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고 한다.

라즈돌노예에서 바이칼 호수 입구인 이르쿠츠크까지 1만 리(약 4000㎞)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철도는

가장 최근에,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진 한인들의 집단 이주로인 셈이다.

가장 선명하고, 가장 가슴 아픈 ‘코리안 루트’라고 할 수 있다.

거기서 중앙아시아까지는 약 2000㎞를 더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대장정의 첫 경유지를 연해주로 잡은 데는

보이지 않는 역사적 필연의 끈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었다.

연해주 고려인의 이주 역사는 과거형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형이자 앞으로도 계속될 미래형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도 북한을 거쳐 서울, 부산까지 이어야 할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

1991년 소련 연방이 해체되자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고려인 후손들은 또 다른 설움을 겪어야 했다.

독립한 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

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차별 대우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연해주로 다시 이주하기를 원하지만

사정이 녹록치 않다.

까다로워진 국적법 통과는 물론 정착지 확보 문제에다 환율 격차 때문에

되돌아올 기차표를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가 된 것이다.
“2005년 아그로상생이 한마당 농장의 일부를 인수했습니다.”

안치영 전무의 말에 70년 전에서 순식간에 현재로 돌아왔다.

버스는 이미 라즈돌노예 역을 지나 우수리크로 내달리고 있었다.

연해주 발해·옥저 유적을 발굴 중인 정석배 교수와

우수리스크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그로상생, 고려인 재이주 지원

아그로상생의 한마당 농장 인수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 코리안 루트의 개척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아그로상생은 민족종단 대순진리회(종무원장 이유종, 이하 대순)가 연해주에 설립한 영농법인이다.

‘아그로’는 러시아어로 농장을 뜻하고,

‘상생’은 대순의 종지(宗旨) 가운데 하나인 해원상생(解寃相生)에서 따온 말이다.

대순은 2000년부터 연해주 영농사업에 뛰어들어

2002년 젬추쥐느 농장 인수(49년 임대계약)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9개 농장을 확보한 상태다.

연해주에서는 농장 한 단위가 보통 7000ha(2100만 평)라고 한다.

대순의 연해주 농장 총면적은 현재 16만㏊(5억 평)에 육박하고 있다.

이번 탐사의 연해주 일정에 참여한 대순 김진원 총무부장에 따르면

러시아 측에서 농장 인수를 계속 권유하는 상황이다.

대순 측도 항카호 동편의 몇 개 농장을 추가로 인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 부장은 “인수가 완료되면 모두 26만㏊(8억 평)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순이 연해주 영농사업에 뛰어든 이유 중에는

70년 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재이주와 정착을 돕는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러시아 당국은 1990년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재이주한 고려인을

3만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아그로상생은 이들의 고용과 정착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순이 수십 년 동안 버려진 땅이었던 한마당 농장을 인수한 데는

고려인 강제이주의 아픈 역사를 ‘해원’하고 고려인과 한국인

그리고 연해주 러시아인를 아울러 ‘상생’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오후 4시 40분쯤 우수리스크 호텔에 도착하자 얼굴이 새까맣게 탄 정석배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탐사단을 두 팀으로 나눠야 했다.

2박3일로 짜인 빡빡한 연해주 일정상 함께 움직였다가는 계획한 취재를 다 마칠 수 없어서다.
이번 탐사단에는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장, 윤명철 동국대 교수, 양민종 부산대 교수, 주채혁 세종대 교수,

시미즈 키요시 순천향대 초빙교수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나중에 심양에서 합류했다).

취재단은 필자(단장) 외에

이기환 선임기자, 김문석 기자(사진), 이다일·김기연씨(동영상) 등으로 구성됐고,

윤석원 뉴스메이커 편집장과 김진원 대순 총무부장 등은 연해주 일정에만 참여했다.

유전인류학 분야에서 많은 연구 성과를 올린 이홍규 서울의대 교수는

다른 일정 때문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광활한 연해주에서 영농사업은 기계농을 할 수밖에 없다. 대순 농장의 수확 장면. <대순 진리회>

 


연해주인 “일본은 만만찮고 중국은 싫다”

이번 탐사의 애초 목적은 우리 민족의 시원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 차례의 사전 세미나와 한 차례의 예비답사 등을 거치면서

‘민족’과 ‘시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문제 제기가 있어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우리 민족 문화와 역사를 바라보자는 뜻에서

‘코리안 루트 탐사’로 개념을 재설정했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좁은 한반도에서 단일민족이니 배달민족이니 하며 갇힌 눈으로만 볼 게 아니라

과거 우리의 활동무대였거나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살았던 넓은 대륙에서

여러 분야의 폭넓고 열린 눈으로 바라보자는 쪽으로 취재단의 내부 합의가 이루어졌고,

자문한 관계자들의 조언이 있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찾는다는 식의 목적의식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반도사관, 식민사관도 버려야 하겠지만

지나친 민족주의적 사관도 경계해야 한다는 데도 모두 공감했다.

그래서 유전학·민속학적으로 우리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바이칼 지역과 역사 전개 과정에서

고조선 · 부여 · 옥저 · 고구려 · 발해 등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요하·대릉하 유역, 동몽골 대초원 지대, 대흥안령 산맥 지대, 북만주, 연해주 등을

탐사 지역으로 정했다.

이 모든 지역이 지금의 한반도에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한 우리와 무관할 수 없다.

그곳에서 한반도로 내려오기도 했고, 한반도에서 그곳으로 올라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웃과 서로 싸우기도 하고 사이좋게 살기도 했을 것이다.

초원지대, 타이가 지대, 만주지역의 우리 또는 우리와 비슷한 많은 종족의 이동로를

취재단은 ‘코리안 루트’로 명명했다.

 

‘코리안루트탐사 취재단’이라는 이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정해졌다.

우수리스크에서 팀을 나눈 뒤 우리는 곧바로 각자 목적지로 향했다.

이기환 기자가 디지털카메라를 챙겨 동영상을 담당한 이다일씨와 함께 정석배 교수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옥저시대의 크로우노브카 유적을 탐사한 뒤

정 교수의 발굴 현장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나머지 취재단과 합류하기로 했다.

이들을 떨궈놓은 버스는 우수리스크 인근 ‘우정마을’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가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산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가끔씩 평지에 돌출된 것도 산이라기보다 낮고 완만한 구릉지였다.

이 넓은 땅의 대부분이 개간이나 개발이 안 된 채 방치된 상태였다.

연해주는 한반도의 3분의 2가 넘는 면적(16만5900㎢)이지만 인구는 200만 명을 조금 웃도는 규모다.

이마저 대부분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도시에 집중돼 있다.

소련 해체 후 연해주의 지역공동체는 러시아인의 이농과 이주로 공동화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 자리를 메운 것이 대순과 같은 외국의 투자였다.

연해주 러시아인에게는 ‘일본은 만만하지 않고 중국은 싫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고 한다.

특히 가까운 중국인들이 연해주에 유입하는 것을 꺼려해서

대순과 같은 한국의 투자를 반기고 있다고 김진원 부장이 귀띔했다.

러시아인은 중국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거란의 러시아식 발음으로, 요나라 시기에 쓰던 이름이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캐세이퍼시픽항공의 ‘캐세이(Cathay)’도 거란의 영어식 발음에서 유래됐다.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거저 먹다시피 한 러시아로서는

빈 땅이지만 ‘키타이’가 들어와서 사는 것만큼은 싫을 법하다.

버스는 우수리스크에서 북쪽으로 100㎞를 더 달려 아그로상생의 본부 격인 호롤 농장에 도착했다.

취재단은 농장에서 제공한 빵과 음료로 허기를 달랜 뒤 제분소를 방문했다.

연해주에서 농장을 인수하면 농지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정미소, 제분소, 관개시설 등의 부대 설비도 자동적으로 딸려온다고 한다.

소연방 시절에 지어진 호롤 제분소에는

생산품을 그 자리에서 실어나를 화물열차가 공장 안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철로는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된다.

 

연해주 영농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민족종단 대순진리회 이유종 종무원장이

콩 농장을 둘러보고 있다.

 


옛 소련의 연해주 농업인프라 우수

옛 소련 공산체제가 구축한 연해주 농업 인프라는 감탄이 나올 만했다.

취재단은 호롤 농장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 항카호 남단의 관개시설을 방문했다.

연방 수자원공사 소유의 ‘아스타라항카야 양수장’이다.

항카호는 우리나라 전라북도 정도 크기의 호수로서, 북쪽은 중국 땅이다.

중국에서는 싱카이호, 한자로 흥개호(興凱湖)라고 부른다.

호수의 물이 나가는 강이 중국 쪽에 있어

연해주에서는 항카호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려면 물을 끌어올려야 한다.

아스타라항카야 양수장은 1초에 5t의 물을 펌핑할 수 있는 양수 시스템을 7개 갖추고 있는데,

현재 6500ha의 관개수로에 물을 대고 있다.

그런데 보수를 하면 10만ha의 농지에 관개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벼농사 면적의 약 10분의 1 규모다.

옛 소련이 이런 엄청난 농업 인프라를 구축한 것은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치영 전무는

“미국이 가난한 우방국에 밀가루 일색의 원조를 하자

소련은 위성국가에다 그들이 주식으로 하는 식량을 지원했다”며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쌀농사에 막대한 투자를 하게 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지금은 연해주 전체의 벼농사 면적은 4만5000ha에 불과하다.

취재단은 항카호 서쪽에 있는 루비노브카 농장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제 겨우 어스름이 깔릴 무렵인데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연해주 시간은 우리보다 1시간 빠르지만 서머타임을 실시하고 있어 2시간 차이가 났다.

우리는 농장 숙소에서 짧은 밤을 보내고 다음 일정에 들어가야 했다.

7월 10일, 발해 유적 발굴 현장으로 가는 길에 농장을 두어 군데 더 둘러보았다.

숙소에서 버스로 15분 거리의 야트막한 산악지대에 루비노브카 사슴농장이 있었다.

농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넓은 초지에 군데군데 나무 군락이 있는 풍경이었지만

농장 울타리를 지나자 울창한 자작나무 숲이 전개됐다.

아프리카 언어를 연구했던 시미즈 키요시 교수는

“아프리카 스텝과 모습이 너무 비슷하다”며 “다른 점이라면 귀코리가 없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말이 서툴러 코끼리가 ‘귀코리’로 둔갑한 것이다.

현재 사슴농장에는 약 450마리의 사슴이 방목되고 있다.

2002년 인수 당시 200마리였던 것이 4년 만에 2배 이상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과거 연해주에는 사슴농장이 발달(10만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했지만 소련 해체 후 그 수가 격감했다.

루비노브카 사슴농장만 해도 면적이 2만ha이고, 8000마리의 사슴을 방목할 수 있다.

녹용은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두 달 동안 채취한다.

취재단은 운 좋게도 녹용 채취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사슴을 채취장으로 몰아서 그 가운데 뿔이 있는 수컷만 채취 시설로 통과시키는 방식이었다.

채취한 녹용은 음지에서 1달 동안 자연 건조를 한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사슴농장에서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약 2주 동안 송이가 난다는 점이다.

눈을 씻고 봐도 주변에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아했다.

안치영 전무가 “50년 전에 이 일대에 소나무가 있었다”며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여러 농장을 둘러본 취재단은 연해주 영농사업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지를 임대하는 비용은 싸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농사를 지으려면

그 10배의 투자가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그것을 개 · 보수하고

많은 장비와 인력을 투여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연해주다.

취재단은 네스테로프카 농장에서 7억 원짜리 캐나다산 트랙터를 보았다.

하루 100㏊(30만 평)의 농지를 갈고 씨를 뿌리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장비다.

연해주 농장의 주요 생산품은 콩이다. 이곳이 콩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메밀, 우리의 주식인 쌀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대순은 멜구노브카 농장에서 3000ha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데,

앞으로 논을 더욱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안치영 전무는

 “내년부터는 최근 바이오디젤의 원료로 각광받는 유채를 재배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좁은 비포장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버스가 더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이른 것이다.

벌써 정석배 교수와 이기환 기자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과거 여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옥저, 고구려, 발해로의 시간 여행이….

연해주는 고고학 분야에서도 유서 깊은 곳이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아무르강 하류 가샤 유적에서 출토된 1만3000년 전의 토기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린 시절을 보낸 캄사몰스크와 가까운 곳이다.

이 토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로 알려져 있다.

 


발굴현장의 숲과 초지 친숙한 느낌

체르냐치노 2유적의 발해 쪽구들 앞에서 정석배 교수가

취재단에게 설명을 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하바로브스크에서 아무르강 하류 쪽으로 200㎞ 떨어진 사카치얄란 유적에서 나온 ‘아무르의 비너스’는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4000년 전의 이 토우 여인상은 이마 부분이 뒤로 누운 편두(偏頭)를 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묘사된 진한(훗날 신라)의 편두 풍속과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는 편두 유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여 주목할 만한 유물이다.

발해 이전의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연해주는 한반도와 많은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는 게 정석배 교수의 얘기다.

특히 융기문토기, 번개무늬토기, 도끼, 화살촉 등은 한반도의 것과 닮은 점이 많다.

정 교수는 “러시아 고고학계에서는 얀콥스키 문화는 읍루,

크로우노브카 문화는 옥저, 뽈제 문화는 숙신 혹은 읍루가 남긴 문화로 본다”고 설명했다.

낡은 군용 트럭을 개조한 발굴용 차량에 옮겨타고 발굴 현장인 ‘체르냐치노 2 유적’으로 향했다.

오래된 차이긴 하나 험한 산악지형을 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함께 탄 발굴단원은 나뭇가지가 환기창 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찌를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발굴 현장 주변은 초지와 숲, 평지와 구릉, 바위, 산 등이 혼재한 지형이었다.

한반도와 다르면서도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지 입구에 있는 시넬니코보 마을은 일제시대에 한인 마을이었다고 한다.

시넬니코보라는 장군이 한인들을 받아들여 그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발굴 현장 가까운 곳에 가슴 높이만큼 자란 풀밭을 가리키며

“저기에 고려인 집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시넬니코보, 체르냐치노 마을 일대에는 70년 전만 해도 고려인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체르냐치노 2유적에서 발굴한 토기편들.

  발해·말갈계 토기가 혼재해 있다. <김문석 기자>

숲길을 빠져나오니 거짓말처럼 확 트인 초지가 펼쳐졌다. 한국전통문화학교와 러시아 극동국립기술대,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가 공동 발굴하고 있는 체르냐치노 2 유적이 초지 입구의 개울가에 있었다.

 

우리는 발굴단이 제공한 점심을 먹고 곧바로 발굴현장으로 갔다. 이번 발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발해의 주거유적에서 발견한 쪽구들이다.

정 교수는 아직 다 발굴하지 않은 쪽구들의 드러난 부분으로 취재단을 안내했다. 구들이 유적의 낭떠러지 부분에 걸려 있어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아궁이 일부와 ㄷ자 모양으로 돌아가는 연도가 대부분 남아 있다는 게 정 교수의 말이었다.

구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해주, 그것도 깊숙한 변방 오지에서

1300여 년 전 발해인이 사용했던 구들을 직접 눈으로 보자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이 구들방에서 온기를 느끼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후손을 남겼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혹시 취재단 중에 그들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 일대의 표층에는 한인 이주민이 거주한 흔적이 있고, 그 아래 발해 문화층이 있습니다.

더 아래에는 옥저-크로우노브카 문화층이 있지요.”

정 교수의 설명에 흥분 상태에서 깨어났다.

70년 전, 1300년 전 그리고 2300년 전의 우리 민족의 흔적이 한 곳에서 겹겹이 쌓여 있다는 말이었다.

 

정 교수는 취재단이 떠난 뒤에 발해 쪽구들 아래층에서 옥저시대의 ㄱ자형 쪽구들도 발굴했다.

예전에 구들의 기원을 고구려로 보았는데

현재 연해주 고고학 발굴의 성과 등으로 그 연대가 옥저까지 올라가는 추세다.

정 교수는 “옥저시대의 크로우노브카 문화 연대가 적어도 기원전 3세기이고,

학자에 따라서는 기원전 5세기까지로 본다”고 말했다.

우리는 다시 체르냐치노 2 유적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체르냐치노 5유적으로 향했다.

체로냐치노 유적은 솔빈강(라즈돌라야강) 주변에 16개가 산재해 있다.

5유적은 정 교수가 러시아 극동국립기술대 Yu. G. 니키친 교수와 공동으로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4차에 걸쳐 발굴한 유적이다.

주로 고분들이 나왔는데, 160기가 발굴됐고 모두 3500여 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실묘, 부석묘(돌깐무덤), 위석묘(돌 돌림무덤), 토광묘 등 다양한 묘제가 한 곳에서 나와

발해시기의 주민 구성과 신분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즉 돌을 사용한 무덤(주로 고구려계)과 흙을 사용한 무덤(주로 말갈계)이

같은 시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계통의 종족이 함께 어울려 살았고,

이들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시넬니코보 발해 산성에서 내려다 본 솔빈강.

오른쪽에 보이는 마을이 체르냐치노이고, 그 앞의 넓은 농지가 발해의 주거지였다.

체르냐치노 유적은 강 왼쪽에 있다. <김문석 기자>

 


1300여 년 전 발해인의 구들 발굴

지난해 발굴이 끝나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5유적을 둘러본 취재단은 초지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섰다.

시넬니코보 발해 산성을 보기 위해서다.

솔빈강변에 독수리 머리처럼 돌출된 산의 정상에 구축한 성이다.

땀을 흘리며 수풀을 헤쳐 산성에 오르면서 온통 눈에 띄는 것은

검은 자작나무와 도라지 그리고 야생 마늘이었다.

웅녀가 먹은 마늘이 바로 이 야생 마늘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시넬리코보 성은 산꼭대기의 천연 암벽을 이용해 만든 석성이었다.

솔빈강 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다 돌을 쌓아 이은 형태였다.

정 교수에 따르면 연해주에는 발해 성이 30여 개 확인되고 있는데,

논쟁지까지 포함하면 50여 개가 된다고 한다. 연해주는 발해 시대의 솔빈부였다.

이런 변방에까지 이렇게 튼튼한 요새를 촘촘히 건설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절벽 위에 서니 솔빈강 건너 북쪽 멀리 체르냐치노 마을이 보였다.

마을 앞에는 농지로 이용하는 넓은 개활지가 있었는데,

정 교수는 “마을 앞 농지가 전부 발해의 주거지였다”고 말했다.

솔빈강이 빠져나가는 동쪽에도 시넬리코보 마을과의 사이에 광활한 농지가 펼쳐졌다..

정 교수에 따르면 그곳 역시 발해 시기의 주거지다.

성 안쪽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 달리 제법 넓은 평지가 형성돼 있었다.

성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상태였고, 한쪽을 절개해 조사한 흔적이 보였다.

바깥은 돌을 쌓고 안쪽은 흙으로 메운 방식이었다.

정 교수는 “발해 성이지만 고구려 성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안쪽을 메운 흙 속에는 말갈계 토기가 출토되고 성 내부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도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7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가 대기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정됐던 극동박물관 취재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아득한 과거와 현재의 질기디 질긴 인연이 배어 있는 현장을

차마 일찍 떠날 수 없는 터였다.

대조영이 세운 동방의 강국 발해,

어느 날 갑자기 미스터리처럼 사라져 우리 역사에서마저 소외됐던 발해는

그 흔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웅변할 뿐이었다.

그들이 뼈를 묻은 연해주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인터뷰 / 니키친 국립극동기술대 교수


“사방을 모두 파보고 싶다”

정석배 교수와 함께 체르냐치노 2유적을 발굴한

Yu. G. 니키친 극동국립기술대 문화인류학부 교수는

한·러 공동발굴단의 러시아 측 단장이다.

체르냐치노 유적은 그가 솔빈강을 따라 지표조사를 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 그와 즉석 인터뷰를 했다.

- 체르냐치노 발해 유적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994년부터 국경지역 지표조사 프로그램이 있었다.

전체 지역을 걸어서 조사했다. 400개 이상 유적을 발견했다.

그중 100개 정도가 발해, 말갈의 것이었다. 그때 이 유적을 발견했다.

아주 중요한 유적이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그런 중에 한국전통문화학교의 공동 발굴 제안을 받고 기뻐했다.”

- 발굴한 소감은 어떤가.

“체르냐치노 5유적에서 160개 이상의 고분을 발굴했다.

유물과 새로운 유형의 무덤 형식을 발견해서 연구할 게 많이 생겼다.

이곳의 석실분은 연해주에서 가장 북쪽의 발해 석실분이다.

이 석실분과 함께 다른 유적들이 발해 영역을 보여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분명한 국경선이 없었기 때문에 무덤, 사원, 기와 등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 러시아에서 발해는 지방사인가, 민족사인가.

“동아시아 역사의 일부다.

말갈이나 발해의 영역 일부가 연해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지금은 일반인도 발해, 말갈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옥타브리스키 군수를 만났는데 그도 이 부분에 관심이 있었고,

언젠가 현장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 앞으로의 발굴 계획은.

“사방을 다 파고 싶다. 매년 발굴할 때마다 새로운 유물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다 하고 싶다.

발굴한 자료를 연구 분석하는 것도 필요하고, 그것들을 비교하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 신동호<코리안루트탐사취재단 단장> hudy@kyunghyang,com  


 

 

 

- 2007 10/16 , 경향,  뉴스메이커 7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