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석주 권필 / 허균

Gijuzzang Dream 2008. 2. 16. 12:37

 

 

 

 

 

 

 

가난과 지조와 우정 - 석주 권필

 

동몽교관(童蒙敎官)이라는 벼슬이 있다.

말 그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직책이다. 종9품이니, 조선의 벼슬 중에서는 가장 말단이다.

 

큰뜻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던 사람이 세상의 횡포에 꺾여 재야에 은거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듣기만 해도 안타깝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붉은 먼지 가득한 세속을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면서

견결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선비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똑같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해도 ‘동몽교관’ 벼슬을 받아서 가르치는 일은 조금 다른 게 아닌가 싶다.

 

석주(石洲) 권필(權?)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최고 수준의 시인이다.

열아홉 살에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서 연거푸 장원 급제를 했지만,

답안지에 글자 하나를 잘못 썼다는 이유 때문에 과거 합격이 취소된다.

그 뛰어난 인재가 글자 하나 삐끗하는 바람에 청운의 꿈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일은 권필 평생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 다시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오직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낸다.

 

권필은 20대 중반부터 약 17년 가량을 강화도에서 지낸다.

그 사이에 여러 벗들과 다른 지역을 유람하기도 하지만, 생활 근거지는 강화도였다.

임진왜란이 전국을 휩쓸었으니 생활이 넉넉했을까만,

벼슬을 마다하고 야인으로 지내는 선비로서 가족을 무사히 건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권필이 친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듯하다.

 

강화도 생활을 청산하고 한양으로 터전을 옮기려 하던 1610년 무렵,

허균은 친구인 조위한(趙緯韓)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판서를 뵈었더니 동몽교관 벼슬로 여장을 굴복시키고 싶어 하시더군요.

그가 벼슬길에 나올까요? 형께서 한 번 물어봐 주십시오.

벼슬이란 때때로 가난 때문에 하기도 하는 법입니다.

(卽見?宰公, 欲以蒙誨屈汝章, 其宜出耶? 兄試問之. 仕有時乎爲貧也 : <조위한에게 보내는 편지與趙持世>)"

 

석주(石洲) 권필(權?)이 필화 사건 때문에 귀양을 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첫날을 묵으면서 벗들이 권한 막걸리를 마신 뒤 장독(杖毒)이 도져서 억울하게 죽는다.

그 사건 이후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노라고 맹세를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허균이다.

 

그런 허균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려는 권필의 심사를 어찌 짐작하지 못했겠는가.

그 마음을 헤아리기 때문에 권필 자신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그들의 벗 조위한에게 은근히 물어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하찮은 벼슬 때문에 평생의 뜻을 버리지 않으려는 벗을 위해,

‘벼슬이란 가난 때문에 하기도 하는 법’이라며 짐짓 이유를 만들어 보이는 허균의 말투에서

둘 사이의 절절한 우정이 묻어있다.

 

벗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조위한(趙緯韓, 1567∼1649)에게 물어봐 달라고 부탁하는 마음이 여간 고운 게 아니다.

 

허균의 편지에 언급된 판서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면서 예조판서를 지내고 있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이다.

원래 동몽교관에 임명되면 아무리 낮은 관직이지만 관복을 입고 예조로 가서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권필은 약간의 곡식 때문에 허리를 굽히는 것은 내 본 뜻이 아니라면서 그 벼슬을 거부한다.

그의 명성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글을 배웠는데, 그 학생들을 먹일 만큼 권필의 집이 넉넉지 않았다.

이에 제자들이 몸소 일을 하고 나무도 하며 밥을 지어 먹었는데, 아무도 싫어하는 빛이 없었다고 한다.

윤증(尹拯)이 쓴 권필의 행장에 나오는 기록이다.

 

모든 것이 경제적인 척도로 평가되는 시대에, 권필의 삶은 우원(迂遠)한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절박한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지키려는 자세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게다가 주변의 벗들이 그 뜻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의 가난을 조금이라도 덜어줄까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우정의 도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 벗이 있어 권필의 삶이 더욱 빛나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 김풍기(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 경기문화재단, 차와 함께하는 경기도이야기 제 19호.

 

 

 

 

그 많던 허균의 장서는 어디로 갔을까?

 

 

조선 중기가 되면 중국과의 서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장서가의 모습을 가진 지식인들이 출현한다.

 

허균은 그 분야의 선구자적 인물이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만 해도 수천 권을 상회하는 그의 장서는, 역모죄로 몰려서 죽은 이후 가뭇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그 많은 장서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 자료를 뒤지다가 발견한 인물이 바로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과 이필진(李必進)이다.

특히 이필진의 집안에 허균의 책이 수장되어 있었고 그것을 이현석이 열람한 기록을 보면서,

17세기 이후 장서가의 출현에서 수원 지역이 일정한 공간적 배경을 제공하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현석을 기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는 지봉(芝峯) 이수광(李?光)의 증손자로 한양에 세거한 명문 집안의 후손이다.

조부 이성구(李聖求)는 영의정을 지냈고 부친 이당규(李堂揆)는 이조참의를 지냈으니, 관직으로 보아도 명망이 있는 가문이었다.

 

이현석 역시 21세에 진사시, 29세에 문과에 오른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형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너댓 차례 좌천되거나 귀양을 간 예가 있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관료 생활을 한 셈이다.

가학(家學)의 영향으로 독서 범위도 광범위하거니와 젊은 시절 시문을 쓰던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현석의 독서 이력에서 중요한 것은 집안의 장서(藏書)들이었다.

 

문과에 급제하기 전에 그는 수원에 있던 지봉 이수광의 구거(舊居)에서 독서를 하곤 했다.

그에게 이수광은 단순히 증조부만이 아니었다. 문인학자로서의 모델이었고 따르고자 하는 어른이었다.

‘수성장(水城庄)’이라 불리는 이수광의 구거는 그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머물던 곳이었는데,

마을의 노인들은 아직도 그 맑은 풍모와 두터운 덕을 생각하면서 이야기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자신이 쓴 <수성장기(水城庄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이수광의 많은 장서를 접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독서광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의 <수성장기>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후손인 이필진과 교유하면서 이씨 집안의 장서를 열람하게 된다.

이준경의 수적(手迹)도 배견(拜見)하였으며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藁)>,

명나라 화원 고병(顧炳)의 화첩인 <고씨화보(顧氏畵譜)>도 열람한다.

특히 이필진의 집안에는 허균이 수장했던 방대한 장서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현석은 20여 일 동안 왕래하면서 상당히 많은 서적을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수원에서의 독서가 그의 일생을 통해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확인할 길이 아직은 없지만,

젊은 시절의 독서 경험에서 명대(明代) 문헌을 방대하게 접한 것은 그의 문학적 경향에 영향을 끼쳤을 터이다.

 

허균의 독서량과 수집벽은 ‘벽(癖)’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으니

당연히 다양하고 많은 책들이 수장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필진을 통해서 접한 허균의 문집과 그의 장서는 기묘하게도 그의 증조부 이수광과 연관을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허균과 이수광은 동서(同壻) 관계였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 생전에 서적을 매개로 한 교유가 있었다.

게다가 많은 책을 다양하게 읽는 것이라든지 동시대의 중국 문학에 관한 깊은 관심이라든지

중국의 책을 다량 구득하여 읽은 뒤 선집(選集)이나 유서(類書)와 같은 책을 편집하는 등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상통되는 점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필진이 허균의 장서를 이어 받았다면

이현석은 이수광의 장서를 이어서 독서의 자료로 삼은 셈이었다.


서적의 보급이나 유통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못했던 조선 중기에,

장서가에 필적할 만한 집안이 있다는 것은 주변 지식인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 지평을 넓히고 삶의 자세를 만들어 나갔던 탓에,

선비들에게 책의 수집과 보관은 하나의 꿈같은 희망이었다.

 

허균이 역모에 몰려 죽은 뒤, 그의 장서를 찾아보는 일은 중요하다.

이탁오의 <분서(焚書)>와 같은 금서도 그의 도서목록에 등장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책을 이어받아 읽은 사람들 중에 선진적인 생각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책의 유통을 통해서 지식이 유통되고,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허균의 장서가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활력소로 작용하였다면,

수원 지역은 그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  김풍기(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 경기문화재단, 차와 함께하는 경기도이야기 제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