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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청동기문화는 어디서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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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루트’ 1만km 대장정
인류 역사상 최초의 발명이 신석기시대의 토기라면 최대의 발명은 청동기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청동기의 발명은 매우 중요하여 인류의 가장 큰 문화혁명으로 고대사회의 산업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는 청동기라는 금속의 발명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다. 이는 신석기시대의 씨족사회로부터 초기 국가 형태로의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기원을 논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이 많이 왜곡된 실정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동기에는 동물 무늬가 보이고 아연(Zn)이 함유되었다 하여 우리의 청동기문화를 시베리아 카라스크(Karasuk) 문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인류까지도 BC 8~7세기께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 특설강좌 교재를 비롯하여 여러 공간물에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시베리아 카라스크 문화와 연결시키고 특히 최근에 대중용으로 출판된 ‘선사 유물과 유적’(솔, 2003)에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는 BC 10세기께 중국의 동북지역을 비롯하여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문화와 서쪽에서 퍼져오는 스키타이문화 그리고 내몽골의 오르도스문화를 조합한 이른바 미누신스크-스키타이-오르도스 복합문화와도 일부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우리나라 빗살무늬토기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처음으로 발표한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다. 그리고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동경 및 청동기 동물 문양의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했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주장은 그 자체로 식민사관이나 다름없다.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광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기 위해 경향신문 창간 기념으로 지난해 여름 ‘코리안루트 대장정’에 올랐다. 우리가 우선 찾은 곳이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 있는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 유적이다.
지난호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우하량 제2지점 적석총에서 출토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관련 유물을 우하량 공작참(工作站) 진열실에서 청동기를 제련했던 여러 토기제 공구를 확인하고 발견 현장을 답사했다. 동환식(銅環飾) 1점을 수습했는데 이의 감정 결과 홍동질(紅銅質)이라고 판명되었다고 한다.
신석기시대 말기에 인간이 처음 발견한 금속은 붉은색의 순구리[홍동(紅銅), copper]였다. 자연계의 천연동광(天然銅鑛)을 채굴하여 1000도 이상의 높은 열을 가해 순구리를 제련한다.
순구리는 불그스름한 빛을 발하기 때문에 일명 순동(純銅)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구리는 비교적 연하고 무르기 때문에 생산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므로 주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이 금자탑은 홍산문화 시기(BC 4000~3000)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청동환식이나 도가니편이 북경과기대 야금연구실 한루빈 교수가 중국 최초의 청동기 유물로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아직 국제학계가 공인하기 전이라서 논의가 분분하다. 작은 청동장식을 주조했던 토기 거푸집인 도범(陶范)이 출토되어 관심이 집중된다. 길이와 폭이 5~6㎝ 합범(合范)이다. 북경과기대 한루빈 교수는 우하량에서 발견한 청동제조 도가니, 슬래그 등을 근거로 이 시대를 홍산문화 중·말기인 BC 3000~3500년으로 보았다. 기왕의 BC 2000년설보다 1000~1500년 앞선 것으로서, 동유럽이나 이집트의 청동기과 맞먹는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릉하에서 동방 최초로 청동기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다. 중국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출토한 홍동제 장식이 발해연안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물이었다. 청동기는 구리(Cu)를 주성분으로 주석(Sn)과 납(Pb)을 합금한 것이다. 요동반도 남단 양두와(羊頭窪) 유적에서도 청동제 장식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BC 15세기쯤으로 BC 15세기쯤에 이미 청동기문화가 형성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한반도에서는 평북 용천군 신암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 도자와 청동 단추가 대체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BC 11세기께 은(殷)나라가 망하자 그 유민들은 연산(燕山) 산맥을 넘어 고향인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으로 돌아온다. 그때 등짐을 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청동 예기(제기)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 예기는 씨족의 상징이다.
은나라의 예기를 발견한 대표적인 유적이 객좌현 고산(孤山) 북동 유적이다. 그런데 100년 정도 지나자 전형적인 예기가 쓰이지 않고 현지에서 제작한 토착화한 기물들이 나온다. 은나라의 전형적인 예기가 100년 정도 지나자 새로운 생활용기로 바뀐다. 은나라 유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점차 토착세력(동이)과 함께 새로운 청동기문화를 발달시킨다. 1945년 이후에는 객좌현·조양시 같은 대릉하 유역에서 많은 양의 은말 주초 청동기가 발견되고 그중에는 은나라 기자(箕子)와 관계되는 청동기도 출토되고 있어, 1970년대 후반 필자는 이를 주목하고 중국 고대 사서에 보이는 기자와 연계해서 연구한 바 있다. 대동강(大同江) 유역에서는 이 시기의 유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것은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전쟁의 시대가 500년 이상 이어진다. 제사 지낼 틈이 없을 정도로 전쟁이 계속 이어졌고 서서히 예기가 나오지 않게 된다. 중국의 이러한 변화가 발해연안에까지도 변하게 하는 가장 주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이 무렵에 예기가 무기로 바뀐 대표적인 유물이 발해연안식 청동 단검이다.
이와 같은 유물로는 BC 9세기~BC 8세기께 조양시 십이대영자, 영성현 남산근 유적에서 보이는데 예기는 토착적인 실용기로 변하고, 무구와 무기가 출현한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비하여 지척지간일 뿐 아니라 청동기문화가 극성하고 있는 발해연안을 피하고 하필이면 시베리아의 한대지방과 몽고지방의 고비사막을 지나 대흥안령을 넘어 발해연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스키토-시베리언 계통의 청동기 유물 중에서도 어떤 유형이 유사한지 구체적으로 논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해연안 청동기에 아연이 함유되었다는 보고를 본 적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청동기에 ‘아연 함유 운운’하면서 시베리아 청동기에 아연이 없기 때문에 시베리아 카라스크 청동기문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요동반도에서 청동기가 반출된 유적의 연대도 기원전 1500년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청동기문화의 연대는 BC 12~8세기의 시베리아 카라스크 청동기문화의 연대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 몽골이니 하는, 오로지 외래적(外來的)인 요소에서 찾으려는 시각은 지난 시대의 잔영과 같은 선입견으로 보인다. 이제는 이를 청산하고 발해문명(渤海文明)을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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