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지 사리기, 百濟史를 다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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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지난 2007년 10월 공개하여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부여 왕흥사 목탑터와 사리기에 대하여 국내외 관련학자들이 심도 있게 토론하는 학술대회 (주제: 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의 意味)를 마련하였다.
- 주 제 : “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의 意味” (2008. 1. 29)
학술대회는 이기동 동국대교수의 기조강연을 필두로 발굴조사 성과에 대해 보고한 후 사리기, 사리공양품에 대하여 분석하고, 백제사, 건축사적 의미를 살펴본 후, 복원 정비 문제까지도 다루게 된다.
가장 주목되는 사리용기(원통형 청동제사리합-은제사리호-금제사리병) 중 청동제사리함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삼아 6세기경 백제에서 특별히 제작되었으며, 금제사리병이 사용된 것은 국내에서 처음 확인되었는데 중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아 주목되는 것으로 아직 유리용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 금제용기가 내사리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보고 있다.
심초석 사리공 주변에서 출토된 일괄유물에 대해서는 진단구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번 발표에서는 사리장엄구와 공통되는 공양품으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이한상 대전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이 공양품은 절대연대를 가진 일괄 유물로 사비시기 백제문물의 편년작업에 중요한 기준자료가 될 것이며 아울러 제작지 논란이 있었던 부여 능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등이 백제 장인들이 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금속공예기술의 지속성과 우수성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목탑과 사리기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왕흥사 목탑 기단의 구축 기술 및 사리용기, 장엄구 안치 형식을 살핀 일본 동북학원대학의 사가와 마사토시(佐川政敏) 교수는 중국 남북조 및 일본과 밀접한 관련을 지적하였다.
6세기말-7세기대의 일본 목탑과는 심초석이 지하에 위치하는 점과 사리장엄구로서의 기능이 중시된 공양품의 구성에서 매우 유사한데 이런 장엄구는 중국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중국 남북조의 영향도 살필 수 있는데 심초석에 사리공을 마련하고 지붕모양의 돌 뚜껑을 덮은 것은 북조-수시대에 보이는 사리석함이 이미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보았다.
심초석을 파고 마련한 구멍에 사리용기를 봉안하는 것에 대해서는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양홍(楊泓) 연구원이나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과장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원통형 청동제사리합 외면의 명문은 새긴 것이 아니라 도자를 사용하여 쓴 것이고 명문 서체는 중국 남북조의 서사문화가 혼합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손환일 경기대학교 교수의 지적도 왕흥사 사리기의 이러한 국제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사리안치시설을 마련한 석재를 심초석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별도로 지상에 심초석이 마련되었는지 등 목탑기단부의 구축과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원통형 청동제사리합의 명문과 관련하여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왕흥사지 사리기 명문’ 분석을 통해 본 백제 위덕왕대 정치와 불교」라는 발표문에서 ‘亡王子’가 아니라 ‘三王子’를 위해서, 절이 아니라 ‘위덕왕 발원탑’ 혹은 ‘위덕왕 3왕자 추복탑’이라고 할 만한 탑만을 먼저 세워 목탑과 왕흥사 창건은 당초 연계성 있는 가람 배치 구도 속에서 비롯된 게 아님을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왕흥사지에 대한 추가 조사로 논의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기동 동국대학교 교수는 왕흥사지 사리장엄구는 위덕왕이 부왕(성왕)과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짓고 목탑 밑에 사리를 봉안하는 장치를 만드는 등 불사리신앙을 고취함으로써 불교적 신성 왕권의 상징적 효과를 기대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 있는 자료로 이 시대의 정치와 제의를 살피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이도학 교수는 위덕왕계 왕실은 불사리에 대한 독점적 지배와 분여(分與)를 통해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고취시킴으로써 국왕의 위상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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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 사리함 명문은 刀子로 쓴 것"
손환일 박사 "새긴 것 아니다" 주장
부여 왕흥사지의 목탑 심초석 사리공에서 출토된 백제 위덕왕(=창왕) 시대 청동 사리외함 명문(銘文)은
새긴 것이 아니라 도자(刀子)라는 필기 도구를 사용해 "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서예사 전공인 손환일 박사는
왕흥사지 조사단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왕흥사지 사리기 발견을 기념해
국립부여박물관과 함께 마련하는 특별전 개막(28일)에 맞춰
1월29일 박물관에서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 발표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주최측이 미리 배포한 발표문에서 손 박사는
"서체는 북조(北朝)체가 주류이나 남조(南朝)체 필법을 가미한
무령왕릉 묘지(墓誌)와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런 현상은 당시 백제문화가 중국 남조보다는 북조의 서사(書寫) 문화에 익숙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또 명문은 "붓 대신 도자를 사용해 쓴 것이며 도자 모양은 경남 다호리 유적 출토품과 같다"면서
"반면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의봉'(奉義)이란 문구가 들어간 백제시대 목간이 칼로 글자를 새긴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부여박물관에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의 의미'를 주제로 열릴 이번 학술대회에는
이 외에도 모두 7편에 이르는 주제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불교미술사 전공인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원통형 청동제 사리외합과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의 3중 구조로 된 사리기 중 청동 사리합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6세기 무렵 백제에서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면서,
국내 처음 확인된 금제 사리병은
당시까지 유리용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 그 대신 등장한 사리용기라고 추정했다.
고고학자인 대전대 이한상 교수는
심초석 사리공 주변에서 출토된 일괄유물은 땅의 동티를 막기 위한 소위 진단구(鎭壇具)가 아니라
사리장엄구와 맥락을 같이 하는 사리공양품으로 간주하면서
"이들 공양품은 매납된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비시기 백제 문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이들 공양품이나 사리기는 명백히 백제 자체 기술로 제작됐으며,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중국에서 제작된 것을 수입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부여 능산리 절터 백제금동대향로를
백제 장인들이 제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주는 명쾌한 방증자료가 된다고 덧붙였다.
일본 도후쿠대학 사가와 마사토시(佐川政敏) 교수는
왕흥사 목탑 기단을 구축한 기술과 사리용기, 그리고 사리장엄구가 안치된 형식을 고찰한 결과
중국 남북조 및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심초석이 지하에 위치하는 점 등은 6세기말-7세기 무렵 일본 목탑과 매우 유사한 형태"라 말했다.
하지만 사리 안치시설을 마련한 석재를 심초석으로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고 그 위에 별도의 심초석을 설치했다는 주장이 엇갈려 이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청동제 사리합 명문에 대해 줄곧 문제 제기를 해온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백제 창왕이 왕흥사(혹은 그 목탑)를 '亡王子'(망왕자. 죽은 왕자)를 위해 세웠다는 대목을
'三王子'(삼왕자), 즉, 세 왕자라고 해석하고자 했으나,
이에 동조하는 연구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 2008년 1월 28일, 연합뉴스, 김태식기자 taeshik@yna.co.kr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백제문화재연구원 박재우 실장은
부여 쌍북리 280-5번지 일대 발굴조사에서 수습한 백제시대 목간 6점 중에는
기존에 공개한 소위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라는 곡물 대여 문서 외에도
'외경부'라는 백제 중앙관청 이름이 적힌 목간이 포함돼 있음을
유물보존처리 과정에서 확인했다고 보고하였다.
백제 '외경부' 목간 백제 정부가 곡물을 빌려주고 그 증빙서류로 작성한 공문서 목간이 발견된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추가로 확인된 백제 목간. 중앙정부 관서인 '외경부'(外경<木+京>部)라는 글자가 적힌 목간이다. 앞면에는 '外경<木+京>部鐵'이라 쓰고, 뒷면에서는 '代綿十兩' 정도로 파악할 수 있는 묵글씨가 확인된다. |
박 실장에 의하면 이 '외경부' 목간은 가로 8.1cm, 세로 2.3cm, 두께 0.6cm 크기로
상단부에 구멍을 뚫었으며 앞면에는 '外경<木+京>部鐵',
뒷면에는 '代綿十兩' 정도로 파악할 수 있는 묵글씨가 확인된다.
박 실장은 "이로 보아 이 목간 묵서는 외경부에서 철(鐵)의 대가로 지방에서 가져와
창고로 거두어들인 면(綿) 10량을 담은 포대에 달았던 물품 꼬리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외에도 '與●'(●는 미판독)라는 묵글씨를 적은 다른 목간은
그 모양이나 묵서 분량으로 보아 두루마리 문서의 내용을 간략히 표시하는 인덱스 구실을 하는
소위 제첨축(題籤軸)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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