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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박물관] 왕흥사지 발굴조사

Gijuzzang Dream 2008. 2. 3. 14:50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 사적 제427호)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14번지 일대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등에 의하면 왕흥사(王興寺)는

익산 미륵사와 더불어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법왕(法王) 2년(600)에 창건하여 무왕(武王) 35년(634)에 낙성하였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다가,

1934년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왕흥(王興)」명 기와편이 수습되어

이를 통해 발견 장소 일원을 왕흥사터로 추정하여 왔다.

1946년에는 이곳에서 고려시대 석조불좌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이전되었으며

그후 왕흥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충청남도기념물 제33호(1982. 8. 3)로 지정된 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27호(2001. 2. 5)로 승격 지정되었다.

 

  

 

  

왕흥사지발굴조사는

문헌상 기록되어 있는 백제 가람인 "王興寺"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구명하고자

백제문화권 주요유적 학술조사 · 유적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부터 현재까지 연차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2001년도에는 고려시대 건물지와 석축의 확인,

고려시대 이후의 건물지, 석축시설, 계단, 배수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평기와, 숭녕중보(1102~1106년), 고려시대 귀목문(鬼目紋) 막새,「왕흥(王興)」,「만(卍)」명(銘) 기와

등 고려시대 유물들 중심으로 출토되어 왕흥사(王興寺)로 불리어진 사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2002년도에는 백제시대 건물지 3동과 추정 목탑지가 조사 되었으며,

백제시대 석축, 동서회랑지, 와적기단 건물지 등 4동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이 건물지 남편으로 저습지가 형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2003년도에는 사역 남동편 일대에 대한 조사를 통해

서회랑지로 추정되는 건물지 2동과 동서방향의 백제시대 석축이 발견되었다.

2004년도에는 새로이 서회랑지 서편에 위치한 소형 건물지를 추가로 확인하였으며

석축 서편범위의 조사를 통해 석축이 계속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4년까지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고려시대 석축유구와 함께 백제시대 사찰가람인 목탑·회랑 · 부속건물지 · 석축 등을 확인하였다.

 

   

  

  

   

  

  

 

2005년 제6차 조사에서는 사찰의 규모를 확인하고자 사역 외곽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백제 및 고려시대 기와 가마터 6기를 확인하였으며,

2006년 제7차 조사에도 기와 가마터에 대한 추가조사 및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모두 11기의 기와 가마터가 확인되었다.

 

  

 

 가마터 남쪽 - 1호, 3호 가마

 

2007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8차 조사에서는

사역중심부에 해당하는 목탑지와 그 남쪽에 위치한 석축에 대한 조사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목탑지의 규모 및 구조와 심초석이 확인되었고

동서석축 전면부에서는 동서석축과 이어지는 남북석축 조사되었다.

또한 남북석축 남쪽 끝에서는 우물지 및 도수시설이 확인되었다.

 
- 발굴조사 내용 -

연차
조사기간
조사지역
면적 조사내용 출토유물
1차 2000.9.8~11.2

사역의 북동편

1,000평 사역 외곽으로 사찰 관련 유구 미확인 연화문수막새 등
2차 2001.10.5~12.11 사역 북편 산지 경사면 500평 고려시대 이후 사찰터 확인 귀면문암막새 등
3차 2002.3.28~7.17 2001년도 조사지역 및 그 남편 700평 고려시대 석축, 백제시대 와전기단 건물지

‘王興寺’명 명문와,

‘崇寧重寶’ 등

4차 2003.10.14~12.2 배수로 서편 대지 303형 서회랑지 등 백제건물지와 동서석축 확인

연목와, 연화문수막새,

치미 등

5차 2004.4.16~6.15 사역 서남편 일대 600평 서회랑지 동편 내부조사와 동서석축 범위 확인

연화문수막새, 연목와,

전돌 등

6차 2005.10.10~11.30 사역 동편 외곽지연 1,200평 백제~고려시대 와요지 6기 연목와 및 수막새편 등
7차 2006.4.4~10.31 사역 동편 외곽지역 1,200평 와요지 11기 정밀 발굴조사 연화문 수막새 등
8차 2007.3.28~2007. 8월

사역중심부 및

남편 일대

300평 목탑지 및 남편 동서석축 발굴조사

연화문수막새, 연목와,

치미 등


   

 

2007년도에 실시한 부여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

 

 

전성기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 · 은 · 동 사리기 발견

- 백마강변 왕흥사터 목탑지 심초석 사리공에서 발굴

- 백제 금동대향로 이래 최대의 발굴성과

- 곡옥·오색 옥구슬·금실·동전 등 다양한 진단구 동시 발견

- 백제 창왕대(577년) 조성기를 밝혀주는 명문 확인

 

이번 발굴조사의 중요한 성과로는

최초로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확인되었다는 것과

더불어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과 관련된 명문기록이 확인되었다는 것,

그리고 사리기의 봉안수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되었고

사리구를 포함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의 다량의 진단구가 출토되어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목탑지는 동서 회랑지에서 19m, 동서석축에서 북쪽으로 18m 떨어져 위치한다.

심초석은 목탑지 정중앙에 위치하며 그 크기는 100㎝×110㎝의 장방형으로

잔존기단토 상면에서 약 50㎝에 아래에 위치한다.

축조기법을 살펴보면 심초석을 안치하기 위하여

기단토 구축 후 심초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에 심초석 안치하여 고정하였다.

   

목탑지 심초석 사리공 내부에서 청동제사리함(지름 7.5㎝, 높이 8㎝)이 확인되었고

은제사리병(외병, 지름 4.4㎝, 높이 6.8㎝)과 금제사리병(내병, 지름 1.5㎝, 높이 4.6㎝)이

안에 들어있는 사리구가 확인되었다.

 

사리함(높이 10.3㎝)은 장방형 심초석(100×110㎝) 남쪽 끝단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 내부에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되어 있었는데

재질은 청동으로 원통형 동체에 보주형 손잡이가 부착된 볼록한 뚜껑을 덮었다.

함 내부에는 다시 은제사리병(외병)을 봉안하였고

이 은제 사리병 안에는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되어 있었다.

실제 사리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으로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정유년 2월 십오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이라고 적혀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 600년(법왕 2)에 축조되고 634년(무왕 35)에 낙성되었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 24)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 44)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었다.

 

명문 및 사리구의 구성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같은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567)보다 10년 뒤에 조성되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 · 사회 · 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 출토되었는데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을 비롯하여 철도자,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에서 사용되었던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이 확인되어

백제시대 장신구연구 및 귀금속 제작, 대외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백제는 성왕대부터 중국에서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아

위덕왕대에는 일본에 사리와 함께 승려와 장인(匠人)을 파견하는 등

불교문화의 일본전파에 주된 역할을 하였는데

이번 사리구와 진단구는 이러한 백제불교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리함이 봉안되었던 목탑지는 중층기단을 하고 있으며

하층기단을 기준으로 남북 · 동서 길이 14m의 정방형 규모이다.

중심부에 장방형 심초석(100×110㎝)이 안치되어 있는데

심초석을 안치하기 전에 기단토를 먼저 조성한 후 되파기를 하여 그 중앙에 심초석을 안치하였고

심초석을 안치 한 후 다시 심주를 얹기 위한 80×80㎝의 황색 점토 및 사질토로 판축된

토심적심으로 보이는 정방형시설을 마련하였는데

유실로 인하여 그 상부에 심주를 위한 별도의 초석을 사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목탑지와 관련해서 기단 특히 심초부의 조성수법은

그동안 알려졌던 심초에 심주를 바로 올리는 수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백제시대 목탑 축조방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목탑지를 관통하는 절의 중심축선 상에 동서석축에 잇대어

남북방향으로 돌을 쌓아 축조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금강 쪽으로 연결되며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이다.

동서석축과 잇대어진 부분부터 남쪽으로 20m가량은 경사지게 내려가고

그 남편부터는 거의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어

어도(御道)로써 사찰로의 진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 이 시설과 연결되는 동서석축의 약 12m 구간에는 석축이 축조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 공간에 접안시설에서 경내로 들어가기 위한 문지나 계단지 등을 시설하여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석축은 경사구간에서 최대 10단(남북석축의 동측 부분)까지 확인되고 있으며

평탄한 구간에서는 4단 정도까지 확인되었다.

 

한편 동서석축은 총 95m내외의 길이로 높이 380㎝ / 16단 정도 남아있으며

계곡부에 사찰을 축성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지조성을 위한 축대로서의 기능과 강물유입을 막기 위한

제방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단구 이외의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동서석축 전면부의 회색사질점토층과 황적갈색사질점토층에서 수습되었는데

와전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와전류는 백제시대 평기와가 대부분이나 통일신라시대 평기와 및 고려시대 평기와도 출토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 기와는 목탑지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연화문수막새, 연목와 등이 다수 확인되고 있고,

특히 석축 전면부에서는 소조 광배로 보이는 토제품이 2점 출토되기도 하였다.

- 부여문화재연구소, 2007년 10월24일

 

 

 

 

 

  

 

  왕흥사지 석제사리장치서 전통안료 ‘주칠’ 흔적 발견  



부여 왕흥사지에서 수습된

석제사리장치뚜껑 윗면에서 우리나라 전통안료인 주칠(朱漆)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4일 왕흥사지 목탑터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제자리장치뚜껑에 대한 보존처리 결과를

공개하고 이 같이 밝혔다.

 

왕흥사지 석제사리장치뚜껑 표면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한 모습(윗면 주칠 문양). 

 

문화재연구소는 “화강암으로 구성된 석제뚜껑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보존처리를 실시하는 가운데 뚜껑의 윗면에서 주칠(朱漆) 흔적이 확인됐다”

면서 “이에 대한 성분 분석을 의뢰해 확인한 결과 진사(辰砂) 또는 주(朱)로 밝혀졌고,

이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안료”라고 밝혔다.


왕흥사지 목탑터 심초석의 남쪽 끝단 중앙에서 발견된 석제뚜껑은

가로 25㎝, 세로 19㎝, 두께 8㎝로 평면은 장방형, 단면은 지붕모양을 띠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봉안 방법과 사리용기의 형태 등에서 중국 남북조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학계에 주목을 끈 바 있다.

연구소 측은 “보존처리 과정에서 확인된 주칠과 문양은

절대연대를 가진 국내 최초의 사례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 2008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