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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광주이씨 - 경북 칠곡의 동산재(東山齋)를 찾아

Gijuzzang Dream 2008. 1. 12. 02:17

 

 

 

 

 

 동산재(東山齋)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石田里, 耳巖, 귀바우) 동쪽에 위치하며,

광주이씨 3대(이도장-이원정-이담명)의 재사(齋舍)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곳에는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 1603-1644)의 낙촌정(洛村亭)과

장자(長子)인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1622-1680)의 경암재(景巖齋)와

장손(長孫)인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 1646-1701)의 소암재(紹巖齋)가 한 울 안에 있으며

중앙에 위치한 낙촌정을 중심으로 左에는 경암재, 右에는 소암재가 위치하고 있는

그리 흔치않은 品자형의 재사(齋舍)이다.

 

이 동산재 담 밖에는 영의정 번암 채제공이 찬(撰)한 귀암 이원정의 신도비가 있으며,

대문(무실문, 懋實門) 앞에는 연못이 있다.

 

 

 

 

낙촌정(洛村亭)

 

이곳은 1913년 낙촌 이도장(1603-1644)의 의덕(懿德)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재사이다.

종친간 친목과 후진계도를 위한 목적으로 입춘회(立春會)를 창설하여

매년 1회 모임을 가져 여러가지 행사를 하였으며,

별세하신 후에는 자손들이 그 유지를 받들어 계승해왔으며,

낙촌정이 세워진 후에는 이 재사를 종친간 친목과 강학의 장소로 활용함과 아울러

유림제현들을 초빙하여 경서를 강(講)하기도 하고,

또는 시문(詩文)을 낭송하며 상호 인격도야와 미풍양속의 유지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낙촌 이도장은 둔촌 이집(李集)의 9대손이며 석담 이윤우(李潤雨)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차후에 종숙(從叔) 이영우(李榮雨)의 양자로 입계(入系)하였다.

한강 정구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2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에 보임되고,

사근찰방, 성균관박사로서 주서(注書)가 되었는데

마침 부친 석담선생이 돌아가시어 삼년상을 지낸 뒤 주서가 되었다.

그 해 겨울 병자호란으로 인해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였다.

그 뒤 지제교, 수찬, 합천군수를 지낸 뒤 병환으로 집에 머무르는 동안

임금이 어의와 약을 여러 번 내리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뒤에 응교와 사간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머무르는 동안

흉년으로 어려운 인동, 선산 고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으며,

또한 '잉진시폐소(仍陳時幣疏)'를 올려 백성을 위한 제왕어세지도(帝王御世之道)를 강조하였는데,

그 3개항은

(1) 중서원이정불화(重書院以靖不和) - 서원을 중시하여 선비들의 불화를 다스려야 할 일

(2) 억호가이휼소민(抑豪强以恤小閔) - 세력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백성을 구휼할 일

(3) 택교관이혁사풍(擇敎官以革士風) - 서원과 향교의 교관을 가려서 사풍을 혁신할 일이다.

 

이는 당시 서원 및 형교의 폐단과 지방관속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작폐를 근절시키고

바른 사풍진작을 위해 참신하고 덕망높은 분으로 교관을 가려 뽑아 써야한다는

절실한 실상을 건의하여 시정하도록 한 것이다.

귀암 이원정(시호: 문익공)으로 인해  의정부 좌찬성 양관 대제학으로 追爵되었다.

 

 

경암재(景巖齋)

 

이 재사는 낙촌정 좌측에 자리잡았으며

1903년에 귀암 이원정(1622-1680)의 유덕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웠으며,

이원정의 호가 '귀암(歸巖)'이라 경모(景慕)한다는 뜻에서 '景巖齋'라 하였다.  

 

 

 

 

 

 

귀암 이원정은

효종 3년(1652) 31세에 문과 갑과로 급제한 뒤

한림, 지교, 봉교, 전적, 병조좌랑, 병조정랑, 정언, 지평, 문학, 직강, 사예, 장령, 판결사, 좌우승지,

대사간 4회, 우윤 2회, 대사헌 7회, 검열, 교리를 지내고

형조참판, 병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와 판윤, 동지의금부사, 우참찬,

이조판서, 홍문관제학, 판의금부사 등을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전주판관, 장성부사, 강릉부사, 동래부사, 의주부윤, 광주부윤, 양주목사, 충청감사,

서장관, 원접사, 사은부사를 두루 지냈다.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崇政大夫 行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 成均館事)

 

그러나 숙종 6년(1680) 3월 경신환국이 발생하여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원정은 무옥(誣獄)으로 초산에 유배되었다가

소환되어 국청(鞠廳)에서 화를 입게 되었는데 이때 59세로 죽음을 맞았다.

그 후 기사환국(1688) 때 은전을 받아 증(贈) 영의정에 사제문(賜祭文)이 내려지고

시호(諡號) 문익(文翼)이 내려졌으며 지금 귀암종택에서 불천위(不遷位)로 봉사되고 있다.

 

시호 문익(文翼)은 "勤學好問 曰 文 / 慮事深遠 曰 翼" 이다.

  

 

 

동산재 담장 밖에는 1796년(정조 20) 번암 채제공이 찬(撰)한 귀암 이원정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귀암공 신도비명(歸巖公 神道碑銘)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행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지 경연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귀암 이공 신도비명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行崇政大夫 行吏曹判書 兼 判義禁府事知 經筵事 弘文館提學 同知春秋館 成均館事 歸巖 李公 神道碑銘)

 

제공(濟恭)이 돌아가신 총재(冢宰) 귀암 이공(李公)의 행장(行狀)을 읽고 여러 번 울었고

깊이 탄식하면서 더욱 편당(偏黨)의 화(禍)가 사람의 집과 나라에 미치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도다.

무릇 숙종대왕은 밝으신 임금이오, 公은 충성된 신하라.

충성된 신하로서 밝으신 임금을 섬기면 마땅히 그 이로운 혜택이 백성에게 베풀어지고

그 예우가 종신토록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것이 척신(戚臣)들이 남몰래 권도를 잡고 화강(禍綱)을 터틀여

곤강(崑岡)에 열염(烈焰)으로 우리의 양옥(良玉)을 녹여버리려 하였는가?

이것이 하늘이냐 귀신이냐 슬프도다. 당화(黨禍)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속이지 못하는 것이요. 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므로 一紀(12년)가 못 되어

임금님의 깊은 마음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가엾게 생각하는 교지(敎旨)가 여러 번 내리고,

그 단서(丹書)를 시켜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贈職)을 내리니 이에 하늘이 또한 사람을 이겼도다.

군자(君子)에게는 권(勸)할 줄을 알고 소인(小人)에게는 두려움을 알게 하니

비록 당인(黨人)인들 하늘이 하는 일에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公의 휘(諱)는 원정(元禎)이오, 자(字)는 사징(士徴)이오, 귀암(歸巖)은 호(號)이다.

그 先代는 광릉인(廣陵人)이니 고려말기에 있어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이시고

호(號)는 둔촌(遁村)이시며 문학과 기개와 절조(節操)로 유명하신 분이었으니 그 분이 집(集)이시다.

 

조선조에 들어와 형조참의가 되시고 증직(贈職)으로 영의정을 받으신 분이니

그 분이 지직(之直)이시고,

 

3세를 지나 영남의 성산(星山)에서 장가들고 그곳에 사신 분이 계시니 이 분이 지(摯)이신데

자손들이 드디어 영남인이 되었다.

 

또 그 후 3세에 희복(熙復)께서는 증(贈) 좌승지요,

윤우(潤雨)께서는 호(號) 석담(石潭)이오, 빛나는 벼슬을 역임하시고 참의(參議)로서

이조참판의 증직(贈職)을 받으시니 이 분이 公의 증대부(曾大父)와 대부(大父)이시다.

석담(石潭)께서는 정한강(鄭寒岡)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돌아가신 뒤에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배향하였다.

 

아드님은 도장(道長)이신데 호(號)는 낙촌(洛村)이시다.

한원(翰苑)을 거쳐 천조랑(天曹郞)이 되시었으며 벼슬은 홍문관응교이었고 좌찬성의 증직을 받았으며,

당숙부(堂叔父)되시는 군자주부(軍資主簿)로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으신 영우(榮雨)의 후사(後嗣)로

출계(出系)하였다. 배(配)에는 정경부인 안동 김씨이신데 판중추부사 하담김공(荷潭金公) 시양(時讓)의

따님이니 公의 고비(考妣)이시다.

公은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보통사람에 지나침으로 어렸을 때부터 하루에 수만 글귀를 외우더니

자라서는 글을 읽는데 입행(入行)을 한꺼번에 내려읽으니 그 훌륭한 소문이 크게 떠들썩했다.

 

인조 때 무자년(戊子年)에 국자생원(國子生員)에 합격했고,

효종 때 . . . . . . (중략) . . .

 

어찌 그리 준엄(峻嚴)한고 그 포부는 은혜 뿐을

성균관에 장(長)이 되고 모든 관청 다 돌았네.

천관(天官)이며 총재(冢宰)로서 청탁이란 받지 않아

누가 했나 척분(戚分) 끼고 피이빨로 물 것 같아

얼킨 그물 하늘 가득 公이신들 명(免)할 손가.

귀양갔다 다시 잡혀 귀신조차 슬퍼하네.

틀림없는 저 상봉(祥鳳)을 치(鴟, 솔개, 부엉이)와 악(鶚, 물수리)이 쪼았도다.

흙이 날려 비가 되니 이 세상이 캄캄해져

십년세월 흘러가니 王의 마음 슬퍼져서

네가 왔나 公의 아들 가까이 한 앞자리에

너의 아비 원통함을 내가 실로 후회한다.

王의 명령 王臣에게 천리길에 제주(祭酒)드려

시운(時運)에는 평파(平陂)있고 아츰한 말 다시 이내

王이 어찌 따를 손가. 따라서도 잠깐일세

손자께서 북을 울려 조정의논 널리 받아

나라 안의 대신들이 의논하기 밝았으니

王의 말씀 이쯤되니 나도 이제 깨달았다.

빛나도다. 은혜로운 말 하늘같이 내리셨네.

깊고 깊은 저 땅속에 태양빛이 비추이고

원수된 자 기(氣)가 죽고 모든 입이 막혀졌네.

어느 임금 신하 없고 어느 신하 임금 없나

이같이 슬픈 영광 볼만한 손 군신(君臣)이여

개쌍(蓋雙)이란 마을 안에 천기(天氣)조차 명랑(明朗)하니

검은 머리 변치않고 이 세상과 같이 하리

이 내 붓이 삼엄(森嚴)하여 너의 편당(偏黨) 벨 것이다.

 

상지(上之) 二十(1796)年 丙辰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檢校 奎章閣提學 

평강(平康) 채제공(蔡濟恭) 지음

 

 

  

 

소암재(紹巖齋)

 

낙촌 이도장의 장손이며, 귀암 이원정의 장자인 정재(靜齋) 이담명(李聃命, 1646-1701)

별사(別祠) 봉향을 위하여 세운 재사이다.

재사 뒤에는 한 칸의 묘실(廟室=別廟)이 있으며, 약 250년 전에 건립되었다.

소암재(紹巖齋)라 현판하게 된 것은

부친인 귀암 이원정의 덕업을 정재 이담명이 이어받았다 하여 유림에서 지은 재호(齋號)이다. 

 

 

 

 

 

 

정재 이담명은 미수 허목에게 사사하여 24세에 대과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하여

수찬, 교리, 도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영남관찰사,

대사헌, 대사성,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경신환국(1680)으로 부친인 귀암 이원정이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하여

부친의 피묻은 적삼을 기사환국(1688) 으로 복권될 때까지 10년동안 입고 지냈다.

 

이담명은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창성으로 6년간 유배되었는데

"생사는 두렵지않으나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멀리 떠나니 간장이 끊어지는 것 같다"고 하며

유배지에서 팔순 노모를 그리며 읊은 사노친곡(思老親曲) 12장을 한글로 짓기도 하였다. 

 

 

경오년 영남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수확기에도 거둘 곡식이 없게되자

조정에서는 긴급구조작업을 펴기로 결정하여 이담명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했다.

이담명은 경기, 충청, 함경도의 양곡 수십만석을 반입(搬入)하고

은 50냥으로 황해도의 양곡 칠천섬을 사오게 하여

수해지역을 4등분으로 차등을 두어 양곡을 골고루 배급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이 사건은 곧 조정에 보고되고

조정의 허락없이 타도의 관곡(官穀)을 사용하고 수해주민에게 세금을 면제한 것을 들어

문책해야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이담명은 "백성의 생명은 조석간에 달렸고 조정의 의논은 시일만 지체하고... (생략) ...

전하께서 나라의 백성을 살려달라고 신을 보냈는데

이제 신이 그 백성을 다 죽이고 난 뒤 무슨 면목으로 전하를 뵈올 수 있겠습니까? ..(생략) "

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는 형식과 권위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임기응변의 능력을 갖춘 합리적 행정을 실행한 목민관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때의 상황을 소상하게 적은 <진정록(賑政錄)> 2권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당시 영남도민들이 이담명의 은혜를 잊지않기 위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웠는데

지금은 칠곡군 왜관읍소재 애국공원에 이건되어 있다.

 

  

 정암공(靜巖公) 휘 담명(諱 聃命) 영은비명(永恩碑銘)

 

이 사람이 어렸을 때 故 참판 李公을 따라서 같이 놀던 일이 있어서

그의 가지고 있는 행동을 엿보았더니 모습이 온화스럽고 지식이 밝으며

몸가짐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절대로 화려하거나 들뜬 일을 하지 않고,

화이(和易)로우며 지킴이 있고 담박하면서 더럽힘이 없으며 효성스럽고 우애함이

본시 타고난 천품이며 화목함에 있어 거짓이 없이 집안일이 잘 행해지고 친척들이 다 즐거워하였다.

 

조정(朝廷)에 서게 되어서는 공사(公事)를 먼저하고 사사(私事)를 뒤에 하며 충성을 다하는데 힘을 쓰고

또한 선비의 도(道 )를 심고 유교의 학술을 바로잡고 뚜렷하게 후진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더라.

나아가서 교남(嶠南)을 다스릴 때

너그럽게 은혜를 베풀고 잘 교화를 시키고 백성에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을 굳세고 용감하게 행하였다.

이때가 바로 경오년(庚午年) 큰 흉년(凶年)이 닥쳐서

백성들이 굶주려서 혼미하게 되어 죽어가고 아사(餓死)하는 사람들이 길에 가득 차니

公의 자상한 마음과 어진 덕으로 백성을 잘 구제하는 방법이 있어

무릇 진휼(賑恤)하는 정책에 각별한 계획을 세우고 마른 데를 때에 따라 적시어주기를

어린아이에게 젖먹이듯이 하여 모든 민생(民生)을 널리 건지는데 고루 흡족하니

한 도(道)의 전체 백성들이 거의 다 죽음에서 일어나

우러러보기를 사랑하는 어머니와 산부처같이 하니

그 덕이 전 도민에게 베풀어짐이 이같이 성(盛)하기도 하였다.

 

公이 돌아가신 후 몇해까지 칠곡(漆谷)사람들이 公의 덕(德)을 사모하고 더욱 오래토록 잊지 못하여서

큰 덕을 형용키 위하여 풍성한 비석을 길가에 세우기로 하고

마침내 서로 와서 말하기를

公의 혜택이 도민(道民)에게 흡족히 베풀어진 것은 참으로 한 두 가지 아닌데

또 돌아보건대 칠곡 一邑이 더욱 혜택을 입었으니

칠곡 땅이 궁협(窮峽)한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성(城)으로서 읍(邑)이 되었는데

산언덕과 골짜기가 높고도 좁으며 그 거리가 수리(數里)에 걸쳐서 꼬불꼬불하여

이곳을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면 마치 칼날을 딛는 것처럼 위험한데

군량으로 바치는 곡식 십분의 일을 평지(平地)의 모든 고을들과 똑같이 운반해서 바칠 때에

그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가엾이 들려서

公이 혜택을 베풀고자 걱정한 나머지 이것을 폐해야겠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사실을 上께서 들으시고 이 일을 면하여 감(減)해주시니

백성들이 좋아하며 신음소리가 변해서 노랫소리가 되고

근심걱정이 고쳐져서 악(樂)이 되어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기술함이 없어 몰세(沒世)한 뒤의 사모(思慕)의 정성을 부치지 못하거늘

내 또한 말하거늘 그 당시의 사람을 손꼽으라면 公이 당연히 첫째가 될 것이며

나가서 그가 할 일을 다해보도록 하였다면

임금을 도와서 좋은 정치와 교화가 반드시 크게 볼만한 것이 있었을 터인데

일찍이 순조롭지 못하였고 중세(中歲)에 와서 일을 한 것이 특히 그 한가지며,

만년(晩年)에 더욱 모든 일이 잘되지 않았고 결국 오래 살지도 못했으니 아깝도다.

그 덕화(德化)하는 사업을 밖에서 베풀어서 모든 백성들을 잘 살도록 한 것이 그 전체의 일단일 것이다.

여기서 소모되는 것을 감(減)해서 읍민들을 소생시키는 것을 또한 다른 정치에 비하면 적은 일이다.

그러나 公은 정사를 함에 있어 적은 일이라 해서 조금도 소홀함이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인인(仁人)의 정치란 그 이로움이 넓기도 하도다.

 

드디어 사양치 않고 명(銘)을 하게 되었으니 李公의 휘(諱)는 담명(聃命)이오, 자(字)는 이로(耳老)이니,

광릉인(廣陵人)이라 하여 여러 代 벼슬이 높고 덕이 후(厚)하여 세상 사람들의 칭송함이 되었다.

 

명(銘)에 왈(曰),

 

근본 갖춰 좋게 쓰고 덕을 쌓아 후(厚)히 쓰네.

생각건대 李公께서 학문 높고 절개 지켜

조정에서 벼슬하니 구포(九苞)에 봉(鳳)이로다.

밖에 나가 정치 펴니 부모같이 은육(恩育)했고

악세(惡歲)당해 어진정치 고목(枯木)나무 비내렸네.

내 늙은이 봉양하고 내 어린이 길러내며

소모된 것 감(減)해주고 폐단들은 혁신했네.

덕(德) 펴기를 두루함에 한 가지로 백(百)을 증명

우뚝하게 이 돌 세워 백성들의 마음 부쳐

돌은 혹시 깎일망정 생각이야 그칠소냐.

承旨 星山 裵正徽 지음

 

 

별묘(別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