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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광주이씨 - 한음 이덕형 (2)

Gijuzzang Dream 2007. 12. 21. 22:06

 

 

 

 한음 이덕형 (漢陰 李德馨) 

 

 

 

(1) 한음 이덕형

이덕형(1561-1613)은 지충추부사 민성(敏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

조선시대 최연소 대제학(홍문관의 수장)

만인의 존경대상이며 벼슬의 꽃, 홍문관 대제학(弘文館 大提學) 정 2품에 한음 이덕형이 31세때 올랐다.

 

1580(20세) 선조 1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관원이 되고 이어 정자(정9품)

1583(23세) 사가독서(賜暇讀書), 부수찬, 정언, 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종 5품)

1588(28세) 이조정랑(정 5품)

1590(30세) 동부승지, 우부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정 3품)

1591(31세) 예조참판(종 2품)이 되어 대제학을 겸함

1592(32세) 대사헌, 이어서 한성판윤(정 2품)

1593(33세) 병조판서(정 2품)

1594(34세) 이조판서로 훈련도감 당상을 겸함

1595(35세)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체찰부사

1597(37세) 우의정(정 1품)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제조를 겸함

1601(41세) 행판중추부사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체찰사를 겸함,

                대마도정벌을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602(42세) 영의정에 오름

1606(46세) 영중추부사

1608(48세) 광해군즉위,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영의정이 됨

1613(53세)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한 후 물러남,

                용진에서 병사. 시호는 문익(文翼), 포천의 용연서원과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됨

 

  

(2) 본관 - 광주이씨 / 여주 이인손의 묘와 세종대왕 영릉의 일화

한음 선생의 본관은 광주이다. 그런데 선생 자신이 호(號)를 한음으로 삼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선생 스스로도 자신의 집안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본래 강을 기준으로 음양을 논하면, 북쪽은 양(陽)이 되고 남쪽은 음(陰)이 된다.

한강의 본래 이름은 순수 우리말 ‘한가람’이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부득이 한강(漢水)이 된다.

따라서 오늘의 서울 사대문 안을 가리키는 조선의 수도 이름은

‘한강의 북쪽을 차지한 고을’이란 뜻에서 ‘한양(漢陽)’이 되었다.

거꾸로, 광주는 한강의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고을이니,

자연스럽게 ‘한음(漢陰)’이 되는 것이다.

한음 선생은 이처럼 자신의 본관을 호로 삼은 셈이다.

 

광주 이씨는 본래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咸安)의 칠원면에 해당하는 칠원성(漆原城)에서

일종의 부족사회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왕건(王建)이 삼국을 통일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신라의 마의태자(麻衣太子)를 왕으로 모셨다. 이에 화가 난 왕건이 칠원성을 함락시키고,

이 때 포로로 잡힌 이씨들을 회안(淮安, 오늘날의 경기도 광주)지방의 관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씨들은 광주 땅의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재주와 덕망을 두루 갖추고 있어 관리들의 동정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차츰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고려 말기에는 더러 벼슬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기록은 민멸되어 전하지 않고,

기록이 확실한 사람은 오늘날 시조로 모시는 이당(李唐)과 그의 아들 1대조(祖) 이집(李集)이다.

이집은 고려 말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그가 남긴『둔촌유고(遁村遺稿)』가 현전한다.

 

광주 이씨를 조선 초기 명문가로 발돋움시킨 사람은

둔촌의 손자 이인손(李仁孫, 1395-1463)과 그의 다섯 아들들이다.

 

이인손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때에는 벼슬이 우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슬하에 다섯 아들을 남기고 1463년 세상을 떴는데,

맨 처음 그가 안장된 곳은 지금의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인 영릉 자리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종의 영릉(英陵)과 연관된 흥미진진한 풍수 야화가 전해온다.

 

이인손의 묘 자리를 점지해준 지관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자리를 쓰면 자손들은 모두 고관대작이 될 것이고, 후손들 또한 연이어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여기에 절대로 제각(祭閣)을 짓지 말 것이며,

또 이곳으로 건너오는 다리를 놓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지관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래서 묘 앞에 제각을 짓고, 개울마다 징검다리를 놓았다.

 

이 무렵 조선은 예종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왕실은 왕손들의 계속되는 불행과 병약함, 단명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따져보면, 세종의 사후 그 뒤를 이은 문종은 몸이 약해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등졌다.

단종 또한 세조의 왕위 찬탈로 18세의 어린 목숨을 잃었으며,

세조의 원자 의경세자는 20세에 낮잠을 자던 중 가위에 눌려죽었다.

세조를 뒤이은 예종 또한 병약한 몸으로 당시 보위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또한 재위 1년 2개월만에 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 대두된 것이 당시 헌릉의 서쪽에 있던 세종 능침의 천장 문제였다.

이곳에 물이 들어 왕손들의 불행이 계속된다는 지관들의 건의 때문이었다.

이에 지난날의 죄과를 반성하며 불교에 귀의하고 있던 세조가 발 벗고 나서,

전국의 지관들을 시켜 명당을 찾도록 하였다. 

여주 일대를 책임진 일단의 관료들과 지관들이 여주의 북성산에 올랐을 때였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인손의 무덤 자리가 있는 방향에서 해맑은 정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에 그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산길을 내려오다 그만 비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다.

우선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매던 그들에게 어느 틈엔가 제각 한 채가 눈에 뜨였다.

제각을 향해 달리던 그들은 또 다리 몇 개를 만나 흙탕물 넘치는 개울을 여럿 건널 수가 있었다.

지관의 경고처럼 바로 이 제각과 다리는 이인손의 묘소를 잃게 하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날이 개자, 정신을 차린 일행은 자신들이 비를 피한 곳이

충희공(忠僖公) 이인손의 묘역임을 알았다. 이에 재미삼아 묘역을 둘러보던 그들은 깜짝 놀랐다.

이곳이야말로 그들이 목메이게 찾던 제왕을 위한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예종은 고심 끝에

평안관찰사를 지내는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를 내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이극배를 만날 때마다 용상에서 걸어 내려와 선친을 좋은 자리에 잘 모신 것을 경하한다는

말만을 거듭하였다. 이러기를 수차례 반복하자, 마침내 이극배는 예종의 의중을 알아채고

선친의 묘역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인손의 묘를 이장하던 날이다. 광중을 파내려 가던 사람들은 일설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미리 써서 묻어 두었다고 하는 두 편의 글귀를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는 "三年 權操之地 短足大王 永窆之地(삼년 권조지지 단족대왕 영폄지지)"란 글귀와 

또 하나는 여기에서 연을 높이 날려 연줄을 끊은 다음

연이 날아 내리는 곳을 찾아 이장하라는 글귀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글귀대로 연을 날렸는데,

연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착지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인손을 그곳으로 옮겨 모셨는데,

지금의 여주군 신지리에는 이인손의 묘소가 전설과 함께 남아있다.

신지리는 연이 떨어졌다고 해서 연하리로도 불린다.

 

아무튼 이 묘소의 발복으로, 이인손이 타계한 뒤 그의 다섯 아들은

모두가 관운이 트여 높은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큰아들 극배(克培)는 예종 때 영의정을,

둘째 극감(克堪)와 셋째 극증(克增)은 성종 때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넷째 극돈(克暾)과 다섯째 극균(克均)은 연산군때 좌찬성과 좌의정을 지내,

‘오극자손(五克子孫)’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또 이들 오형제가 살던 지금의 서울 정동과 신문로 일대를 ‘오군(五君)고을’이라고 불렀다는데,

다섯 대감이 사시는 동네라는 뜻이다.

 

그런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이인손의 묘자리를 영릉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광주 이씨 일문의 영화는 뒷날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과 한음 선생으로 그치고 말았다고 한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세종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조선의 국운이 백년가량 더 연장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형편이다.

 

실제 조선 시대의 광주이씨의 영화는 한음으로 화려하게 마감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씨 일문은 조선 후기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가장 열세였던 남인(南人)의 계보에 적을 두어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서지 못했다.

다만 영조의 탕평책(蕩平策) 이후 몇 명의 당상관을 배출한 정도라는 것이다.

 

 

(3)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의 일화  

오성이 활달하고 호기가 있었다면 한음은 차분함과 위엄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사람은 조선 최고의 공직자며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중국 고사를 능가하는 오한지교(鰲漢之交)를 맺어

후대에 우도(友道)란 이런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들의 우도는 단순한 친목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를 통해 난세에 ‘중흥의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박수를 받고 있다.

 

5년 선배인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시기에 병조판서를 5번, 원수 1번, 체찰사를 2번 지냈고

한음 이덕형은 병조판서 2번, 체찰사 2번, 훈련도감 제조 2번을 지냈다.

이들은 문장가로서도 나라에 기여했고,

아울러 어떠한 업무를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했다.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를 ‘통재(通才)’라 한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인물이 이들 백사와 한음과 서애 류성룡이다.

 

백사와 한음의 장인 역시 유명하다.

백사의 장인이 권율이고 한음은 북인의 영수 아계 이산해다.

절친한 친구인 한음이 세상을 떠난 해에 백사는 북인 정권 인사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그 몇 해 후 유배돼 쓸쓸히 세상을 마친 것은 얄궂은 운명을 곱씹게 한다.

 

한음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이때 이항복(24세)과 계은(溪隱) 이정립(李廷立, 1556-1595, 24세)이 동방이었다.

후대에 이들을 ‘경진삼리(庚辰三李)’라 하여 경진년에 급제한 세 사람이라 칭송했다.

벼슬길 역시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음은 31세에 양관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대제학 최연소 기록이다.

 

병조판서는 백사가 한음보다 1년 앞선 37세 때였고, 그 이듬해에 33세로 한음이 그 직을 맡았다.

당시는 임진왜란이 발발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우의정은 한음이 6개월 빨랐고 영의정은 백사가 2년 빨랐다.

이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이들의 관계는 1613년 한음이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난다.

당시 백사는 58세로 북인 정권이 일으킨 계축옥사의 참담한 희생양이 되었다.

 

 

(4) 바둑이야기

이덕형(李德馨)은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시킨 인물이다.

그의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이며 본관은 광주로서 영의정 이극균(李克均)의 5대손이다.

한음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학문에 통달했고 서예와 바둑에도 능했다.

그가 14세 되던 해 포천에서 글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

당시의 풍류시인이며 명필이었고 바둑의 고수였던 봉래 양사언이

한음을 만나 여러 가지 시험을 해보고는 "그대는 나의 스승이다"고 탄복하면서

40년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교우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한음은 20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고

그해에 다섯살 위인 백사(百沙) 이항복(李恒福)도 과거에 급제했다.

그 후 한음의 벼슬은 수찬, 교리,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에 승진했다.

선조 21년(1588) 왜국의 사신 겐소(玄蘇) 일행이 조선의 조정을 정탐하기 위해 왔을 때

한음이 그들을 접대했는데 겐소는 한음의 높은 학문과 인격에 감복하여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장이 충주에 이르러서

"이덕형을 만나 강화하기를 원한다" 하므로 한음은 단기로써 달려갔으나

이미 왜군은 용인까지 진격해와 할 수 없이 되돌아서 한강을 건넜다.

그때 선조는 서쪽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다.

그후 왜군은 평양까지 쳐들어와서 또 다시 "이덕형을 만나 강화하고 싶다"고 요청해왔다.

이에 한음은 단독으로 왜장과 대동강 한가운데서 만나 선상회담을 가졌는데

그 회담에서 한음은 대의로써 왜군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꾸짖으며 당장 철군할 것을 요청했지만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선조가 정주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한음 이덕형을 사신으로 보냈다.

한음이 길을 떠날 때 이항복에게 "한시가 급한데 빨리 달리는 말이 없어서 한이다"라고 말하자

이항복은 자기가 타고 다니던 말을 내주며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올 것을 기원했고,

한음은 "만약 명나라에서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나는 압록강을 두 번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음은 중국에 들어가 안찰사 학걸을 설득해서

명나라 장군 조승훈(趙承訓)이 이끄는 5만 원군이 이듬해 의주에 도착했고

그해 12월에는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2차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당시 한음은 접반사로서 명나라 원군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인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을 수복하니 조정에서는 한음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했다.

 

이여송이 평양성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서울로 진격할 때의 일이다.

이여송은 벽제관에서 뜻밖에 왜군의 복병을 만나 참패를 당한 뒤부터는 겁이 나서 진군을 하지 않았다.

조선의 장수들이 모두 진군하기를 요청했지만 이여송은 듣지 않고 화친을 핑계삼아

세월만 허송하고 있었다. 그 무렵 어느날 한음이 이여송을 만났더니

이여송은 자신이 갖고 있는 적벽도(赤壁圖) 한 폭을 꺼내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적벽도란 중국 양자강 하류의 명승지로서

중국의 삼국시대에 오(吳)나라 장수 주유(周瑜)가 조조(曺操)를 격파한 곳이다.

 

한음은 적벽도를 구경한 후 즉석에서 시 한수를 지어 이여송에게 보여주었다.

 

勝負分明一局棋(승부분명일국기)  승부는 분명 한판의 바둑과 같은 것

兵家最忌是遲疑(병가최기시지의)  병가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지연시키고 의심하는 것이라네.

須知赤壁無前績(수지적벽무전적)  적벽강에서의 싸움에 승리한 것도 알고 보면

只在將軍折案時(지재장군절안시)  장군이 책상을 칼로 찍으며 결단을 내린데 있었다네.

 

한음의 이 시는 바둑을 좋아하는 이여송에게

바둑의 승부에서는 머뭇거리고 의심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적벽강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오나라가 승리한 것도 알고 보면 오나라 왕 손권(孫權)이 칼을 빼어

책상을 찍으며 단호한 결정을 내린데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이여송에게 머뭇거리지 말고 진격의 결단을 내리라고 일깨워 준 내용이었다.

이여송이 한음의 시를 보고는 드디어 결정을 내려 그해 4월에 한양을 수복했던 것이다.

 

정유재란 때 한음은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득하여 서울의 함락 위기를 막은 적이 있으며

군사를 따라 울산까지 내려가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고

이항복의 진언으로 명나라의 수군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합동작전을 펼쳐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사를 대파하고 승리를 이끌었다.

한음 이덕형은 1601년 체찰사(體察使)로 남쪽지방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의 활약으로

이항복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본인의 사양과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했다.

 

 

(5)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의 묘

한음선생의 묘소는 청계산의 서쪽으로 뻗은 형제봉줄기의 하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1985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비는 대리석재로서 전면에

“영의정문익공한음이선생덕형지묘 증정경부인한산이씨부좌

(領議政文翼公漢陰李先生德馨之墓 贈貞敬夫人韓山李氏祔左)”라는 명문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 약 300m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장방형의 화강암 비좌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린 것으로 이수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다.

이덕형이 세상을 떠난 40년 후인 효종 4년(1653)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조경이 찬하고, 정규상이 전액을 썼다.

비의 규모는 높이 360㎝, 폭 110㎝, 두께 42㎝이다. 비각은 근래에 건립하였다.

   

한음(漢陰) 선생의 묘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지장사(地藏寺) 바로 아래에 서 있고,

개울을 건너기 위해 세운 아치형 철제 다리가 하늘색으로 누워있다.

 

한음 선생은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임진과 병자의 양란을 겪으면서

풍전등화 같은 국운을 지켜낸 겨레의 인물이다.

선생은 노년에 양수리에서 북으로 2㎞가량 떨어진 용진(龍津) 나루 인근의 사저에서

1613년 53세의 아까운 일기로 타계하셨다.

 

선생의 명민함은 어린 시절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특히 당대의 기인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선생은 어린 한음을 보고

그가 장차 나라를 지탱할 큰 재목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7세의 나이에 네 살 연하의 한산(韓山) 이씨(李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는데,

그 결혼의 배경에 토정 선생의 입김이 배어있다.

일찍이 한음의 인물됨을 알아본 토정이 당대의 세력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에게 딸을 주라고

간곡히 권했기 때문이었다. 토정과 이산해는 처남과 매부의 사이였다.

 

부인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2년 28세의 나이로

둘째와 막내인 여덟살짜리 여벽(如璧)과 세살짜리 여황(如黃)을 데리고

시아버지가 계신 강원도 안협(安峽)으로 피난을 갔다가 순절을 하였다.

이씨는 왜적이 쳐들어오자 백암산(白岩山)으로 피신을 하였지만,

마침내는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바위 위에서 몸을 던진 것이다.

이씨는 이 때 산기슭에 임시로 묻혔다가 1603년 오늘의 한음 선생 자리로 이장되었다.

난이 끝난 뒤 선조는 이씨의 정절을 기려 묘 앞에 정려문을 세워주었는데,

이 정려문은 일제 때 유실되어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후손들의 아쉬운 마음은 1981년에 선생의 영정각과 정려문을 함께 세웠다.

 

부인을 이장하면서 동시에 한음은

또 1594년 임란 중 지금의 김포인 통진(通津)에서 작고한 어머니의 유해를 부인의 윗자리에 모셨다.

그 후 2년 뒤에 한음은 모친과 부인의 묘가 마주 보이는 용진 나루에 따로 사저를 마련하여,

바쁜 공무 중에도 틈틈이 이곳에 들러 두 묘소를 돌보았다고 한다.

지금도 용진 나루 인근에는 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다.

 

단구(短軀)로 알려진 한음은 덕망과 인품을 두루 갖추어,

일본과 명나라에서도 존경하고 흠모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선생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31세에 문형(文衡, 대제학)을 잡은 최연소 기록을 낳았다.

선생의 기록은 이 뿐만이 아니다. 선생은 중국에 원병을 청하러 간 최초의 외교사신이었으며,

왕실의 외척이 아닌 신분으로 37세의 나이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가장 젊은 정승이었다.

 

1613년 선생은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의 발호로

지기지우(知己之友) 오성대감이 파직을 당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용진나루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나라의 앞날을 근심하며 통곡으로 날을 지새다 한달만에 홀연히 세상을 등졌다.

한음의 부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온 나라의 백성들은 한음의 죽음을 애석해하였다고 한다.

두 차례의 전란을 수습하면서 백성들을 친부모, 형제나 자식처럼 보듬었던

그의 온화한 성품과 자애로운 행적을 잊지 못하였기에, 저절로 애도의 눈물을 뿌렸던 것이다.

 

영정각 뒤로해서 지장사 뒤편을 지나자, 가파르지만 잘 닦인 길이 나있다.

좌우로 낙엽이 곱게 물들어 운치를 보인다. 얼마쯤 오르니 선생의 묘역이 나타난다.

앞쪽에 선생 부부가 함께 잠들어 있고,

그 뒤에 부친 이민성(李民聖)과 모친 문화(文化) 유씨(柳氏)가 합장되었다.

 

문중 사람들의 얘기로는, 한음 선생의 가계는

우리나라 명문가 가운데 순수한 장자 세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몇 안 되는 가문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대가 끊어져서는 절대로 아니 되는 그런 자리를 잡아야한다는

한음 선생께서 손수 이 자리를 잡은 결과라고 한다.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1번지에 소재한 한음선생의 묘소

 

선생의 장남(如圭)이 양근(양평)군수로 몇 년 지내시는 동안

선생과 부친 지사공(民聖)이 가끔 들리셨는데

당시에 선생 부자분께서 자주 다니시던 중은사(中隱寺 또는 叉溪寺)라는 절과

선생의 조부 항렬이신 동고 이준경 선생의 묘소가 있는 목왕리의 산수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부모님 산소자리를 친히 잡아놓으셨다.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 안협의 백암산에서 왜군을 피하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하시어

현지에 모셨던 선생의 부인과 김포 통진에 모셨던 선생 모친의 묘소를 왜란이 끝난 후에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하셨다.

1613년 선생이 돌아가시자 후손들이 이곳의 부인 묘소에 합장으로 모셨다.

 

 

(6) 한음 이덕형선생 영정

한음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 입구에는 경중문(敬重門)이란 현액이 걸려있다.

선생의 영정은 전신을 그린 전신 영정으로, 호피(虎皮)로 장식한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1590년경에 당시의 궁중화가 이신흠(李信欽)에 의해 처음 그려졌다.

문헌에 따르면 1777년에 포천의 용연서원에,

1830년에는 상주의 근암서원과 백운동의 소수서원에도 모셨고

근암서원의 영정은 1869년에 도남서원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종가에 모신 영정 이외에는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한음의 9대 종손(李宜翼)이 1860년대에 당시의 궁중화가 이한철(李漢喆)에게 부탁하여

여러 본의 전신 및 반신모본을 그리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원본과 함께 그 일부가 종가에 보존되어 있다.  

 

또 일제시대에 종가의 영정 일부가 당진 일가들에 의해 모셔져

현재 충남 문화재로 지정되어 충남 당진에 보존되고 있고,

일부는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어 일본 대학박물관 등에 보존되고 있다.

 

현재의 영정각은 1986년 후손들이 건립하여 처음에는 이한철 영정을 모셨으나

보존이 어려워 경기도박물관에 위탁하고 지금은 사진으로 대체하였다.

 

전신 영정은 이신흠 원본인지 이한철 모본인지 확실하지 않고

반신영정은 이한철 모본이 확실한데 현재 모두 종손이 보관하고 있다.

전신영정은 표구 과정에서 원본을 많이 훼손하였으나 다행히 얼굴부분은 원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고

반신영정은 전체적으로 보관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매년 음력 10월 3일이면 문중에서 영정제를 올린다고 한다.

 

 # 소수서원(紹修書院) 영정봉안문(影幀奉安文)  

- 순조 32년(1832) 이인행(李仁行) 찬(撰)

 

한음문고(漢陰文庫) 卷4 附錄에 한음(漢陰)의 영정이 소수서원에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행(李仁行)은 이가환(李家煥)의 제자로 현감을 지냈다.

 

天眷聖朝載挺元輔(천권성조재정원보) 하늘이 나라를 보살피시어 훌륭한 재상을 보내셨으니

濟川是楫緻繡惟보(제천시즙치수유보) 큰물을 건너는데 배가되었고 임금을 받드는데 기둥이 되었네

執적西塞奠鼎東土(집적서새전정동토) 전쟁터에서 말고삐를 잡아 나라를 안정시켰으니

勳紀이常慕寓丹靑(훈기이상모우단청) 그 훈공은 역사에 길이 남고 그 충성은 대궐에 가득하네

昏朝樹立尤著忠貞(혼조수립우저충정) 폭군(광해) 밑에서 충성심과 곧은 성품이 더욱 돋보였고

騎箕百載尙有典刑(기기백재상유전형) 가신지 백년이 지났건만 남기신 법도는 아직도 남아있네

顧惟雲院左海鹿洞(고유운원좌해녹동) 운원(소수서원)을 살펴보니 나라 안에 학문이 제일 높은 곳이라

尊閣聖幀諸賢影從(존각성정제현영종) 누각에 성인들 영정이 있어 많은 현자들이 그림자처럼 따르니

世紛不到山幽水控(세분부도산유수공) 산 깊고 물 막힌 세속과 먼 곳이기 때문이리라

내循與議지奉遺像(내순여의지봉유상) 이제야 여러 사람 의논에 따라 영정을 봉안하고 보니

眉찬國憂彩移星象(미찬국우채이성상) 나라 걱정에 미간을 못 펴시고 세월이 지나 색이 변했지만

梧翁眉老左几右杖(오옹미로좌궤우장) 오리(이원익)와 미수(허목)를 좌우로 모시고

衿패胥慶風猷宛昨(금패서경풍유완작) 유생들이 모여 경배 드리니 마치 옛날을 다시 보는듯하네

山河一氣永鎭宗國(산하일기영진종국) 이 산하의 정기가 나라와 종사를 영원히 지키리라

瓣香虔告卽事有恪(판향건고즉사유각) 향불을 피워놓고 고하오니 굽어 살피소서

 

   

(7) 종가기행 - 廣州 李氏 漢陰 李德馨

 

자주국방 몸 바친 덕망의 과학자

15대 종손 이시우(李時佑)씨 집안 문고 · 자료 · 종손 계보도 등도 꼼꼼하게 챙겨 보존

 

종가의 역사를 보면 어느 집이고 곡절과 애환이 없지 않다.

그중에는 절손(絶孫)의 아픔이나 지손들과의 지루한 대립으로 종가가 고사 직전에 몰린 경우도 있다.

재물이 많아도 말썽이 생기고, 없어도 문제고, 종손이 똑똑해도 탈이고, 무식해도 걱정이다.

종손이 교육을 많이 받고 똑똑하면 종사를 독선적으로 운영해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하고,

반대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종가를 잘 지키고 종사를 무리 없이 진행하기 위한 요체는 무엇보다도 덕망이다.

 

한음가(漢陰家)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이 집안의 가성(家性)인 덕(德)이다.

한음 이덕형(李德馨)이 남긴 글은 한음선생 문고에 들어 있다.

그 서문을 용주 조경(1586-1669)이 썼다.

조경은 한음선생이야말로 옛글에서 보던 ‘삼불후(三不朽)’를 실천한 분이라고 글 말미에 결론맺고 있다.

삼불후란 입언(立言), 입공(立功), 입덕(立德)을 말한다.

입언은 저술을 통해 길이 남는 것이고,

입공은 국가나 사회에 큰 공을 끼침이며,

입덕은 문자 그대로 덕을 통한 교화의 공을 일컫는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역사 인물로

입언은 다산 정약용, 입공은 충무공 이순신, 입덕은 퇴계 이황을 먼저 떠올린다.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경우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용주 조경은 이를 충족한 인물로 한음 상공을 인정했다.

 

일반인들은 한음이라고 하면 ‘오성과 한음’을 연상하고 일화 한두 가지쯤을 얘기한다.

그 다음을 물으면 그저 망연할 뿐이다.

임진왜란 극복 과정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서애 류성룡, 오성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병조판서와 정승으로 최고 지휘부를 조직했고,

그 명을 받아 충장공 권율, 충무공 이순신이 야전에서 목숨을 바쳐 막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펼친 외교의 빛난 성과다. 그 책임자가 바로 한음이다.

보통 서애와 충무공의 업적은 꿰고 있으면서도 한음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한음은 오성 이항복보다 다섯 살 아래지만

20세 때 동방으로 문과에 급제한 이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요직을 주고받아

42세부터 세 차례에 걸쳐 영의정이 되었고,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31세로 양관 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전쟁 중엔 대사헌, 한성판윤,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등 요직을 맡아서

국난 극복에 한시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광해군에 의해 유배를 당했던 그가 죽은 후

국왕(광해군)이 후회의 정을 담은 제문을 내렸고,

이후 인조(1623), 숙종(1692), 영조(1758), 고종(1864, 1892) 등의 사제문(賜祭文)이 남아 있다.   

- 아래는 동치 3년(1864, 고종 1년)  갑자년, 10월24일에 내린 사제문이다.

 

한음의 문고에는 백사에게 보낸 편지가 77편이나 들어 있는데,

대부분 국난 타개와 당파 척결에 관해 상의한 내용이다.

그중에는 한음이 손위인 백사에게,

'술을 조금 줄이시고 더욱 학문에 매진할 것을 당부한 내용(惟望 節酒愼攝 進學萬重)'까지 들어 있다.

 

삼불후의 공을 세웠던 한음의 종택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15대 종손 이시우(李時佑, 1943년생) 씨와 부인 한양 조씨(1948년생)가 살고 있다.

종택이 자리잡은 목왕리 일대는 한음의 유촉지로,

조선왕조 때 정승을 지낸 아홉 명의 묘소가 있다고 해서 '9정승골'이라 불려지고 있다.

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2km쯤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면

남양주군 조안면 진중리가 나오는데, 예전에 긴 제방이 있어서 ‘사제(莎堤)’라 했다.

한음이 벼슬에서 물러나 작은 정자를 짓고 자연과 벗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땅은 사람으로 인해 이름난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한음의 유촉지이기에 널리 알려졌지만 관직상의 현격한 격을 넘어선

한음의 오랜 벗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사제곡(莎堤曲)이 탄생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제곡은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것이면서 한음의 요청으로 지어진 국문 가사인데,

한음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리고 졸한 몸 영총(榮寵)이 이극(已極)하니/ 국궁진췌하여 죽어야 말려 여겨

숙야(夙夜)비해하여 밤을 잊고 사탁한들/ 관솔에 켠 불로 일월명을 도울는가

시위반식을 몇 이나 지내연고/ 늙고 병이 들어 해골을 빌리실새

한수동 땅으로 방수 심산하여/ 용진강 지내 올라 사제 안 돌아드니

제일강산이 임자 없이 바려나니/ 평생 몽상이 오래하여 그렇던지

수광 산색이 옛 낯을 다시 본 듯/ 무정한 산수도 유정하여 보이나니

백사정반에 낙하를 비끼 끼고/ 삼삼오오 섞이 노는 저 백구야

너 다려 말 묻자 놀래지 말라사라. … (후략) …”

 

한음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611년(광해군 3) 봄에 지어진 이 작품은

단순한 서경 묘사를 넘어 임금을 그리는 정과 어버이를 받들고자 하는 지극한 효심을 담고 있다.

적절히 고사를 인용하고 경기체가가 지닌 멜로디를 조화롭게 장치해

오페라 아리아로 삼더라도 손색이 없을 듯한 작품이다.

 

종손을 만나보니 한음의 삶의 방식을 배워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종손은 단중(端重)했고 종부인 한양 조씨는 온자(溫慈)한 모습이었다.

종손은 미리 한음 선생의 영정각 문을 열고 그 앞에 초석자리를 깔아두고 있었다.

1992년 국역 발간한 한음선생 문고 2권 한 질과 종가 관련 자료 여러 점,

한음 친필 복제본 여러 장도 따로 준비해 두었다.

조상을 현양하기 위한 안내나 간단한 유인물은 받아보았지만

이렇게 자세한 자료를 준비한 경우는 드물었다.

 

더욱 감명 깊은 바는 ‘한음 종손 계보도’라는 두 장의 문건인데,

시조로부터 종손의 손자 영훈(泳勳, 2004년생)까지 26대의 계보를 정리해두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한음 자신이 이미 광주 이씨 ‘팔극가(八克家)’의 한 집인

이극균(李克均)의 5대 종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시우씨는 선대인 이극균의 20대 종손이다.

종손의 선고 이세환(李世煥, 1915-1979)씨는 청주고보를 나와

청주, 수원, 의정부, 양주, 강경 등지에서 경찰서장을 역임했고,

퇴직 후 한음의 현양 사업과 종회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을 특히 존경했다고 한다.

 

종손은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초등학교를 다녔고 강경중학교,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한국화약에 입사했다가 1972년 국방과학연구소가 창립되면서

차출되어 연구에 종사했다. 78년에 미국으로 출장간 후 80년에 귀국하려다 국내 정세가 요동치자

그대로 미국에 머물렀다. 18년 뒤인 98년에야 귀국했다.

 

“우리의 연구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실을 통해 직접 챙기던 것이었어요.

예산도 청와대 비서실 담당자가 직접 관장했죠. 월급도 당시 최고였던 삼성보다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장군들은 우리를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우리가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월급은 많이 받았기 때문이죠. 미국에서 하지 말라고 한 사업이었어요.

그렇지만 박 대통령은 그대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런데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미국에서 싫어하는 건 하지 말라고 해서 대부분의 과학자와 요원들이 그만두게 됐어요.

일부 기관에선 노학자를 불러 모욕도 주었고요. 저도 그래서 미국에 주저앉았습니다.”

말로만 떠돌던 프로젝트 연구의 중심에 있었던 이로부터 증언을 들은 셈이다.

 

한음의 문집을 읽다보니 임진왜란 와중에 무기 개발에 부심했던 장면이 있어 묘한 대비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의 애국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 중요한 역할을 한음의 15대 종손이 맡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종손은 애국 과학자다. 종손이 근자에 하는 일은 한음 선생 배우기와 알리기다.

인터넷에 이미 상당한 분량의 관련 사진 자료와 글을 제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차종손 이승진(李丞鎭, 1971년생) 씨는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로스쿨에 들어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미국에 있는 아들 이야기를 하던 중에 시종 잔잔한 미소만 머금고 있던 종부가 가만히 거든다.

“열 살 때 미국으로 데려갔던 큰아이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저희 집이 좀 다르잖아요. 한국에 들어와 선을 보았는데, 정말 좋은 규수가 며느리로 들어왔어요.

서강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교편을 잡고 있었죠. 제사도 지내고 시부모를 잘 받들고 있어요.”

 

‘정말 좋은 규수가 들어왔어요’ 라는 표현은

사람 됨됨이가 된 규수를 며느리로 맞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며느리를 이렇게 소개하는 시어머니도 드물다는 생각에서, 오랫동안 감동의 여운을 남겼다.

어찌보면 그것이 한음 종가를 면면이 이어가게 한 힘일는지 모른다.

 

△ 이덕형 1561년(명종 16)-1613년(광해군 5)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山人),

시호는 문익(文翼) 조선시대 최연소 대제학… 中·日 넘나든 외교戰으로 임란 극복

 

‘덕망과 문장을 갖추었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능력을 지녔던 인물,

당파에 기울어지지 않고 공명정대한 처사로 일관해

동서남북지인(東西南北之人)이란 평을 받았던 이가 한음 이덕형이다.’

문묘에 배향된 대학자 사계 김장생의 사계어록(沙溪語錄)에 나온 말이다.

 

조선왕조 최연소 대제학, 3차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빛나는 외교를 펼쳤던 인물이다.

그 밑바탕에 학문과 덕망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한음이 임진왜란 때 보여준 활약상 가운데 백미는 외교 분야다.

1592년 4월 13일(선조 25년), 일본의 장수 36명과 20만 왜적 주력군이 새까맣게 부산앞바다를 뒤덮었다.

 

한음은 이미 4년 전 일본 장수들이 부산에 와서 조선과 통상을 요구할 때

선위사 자격으로 그들과 협상을 벌인 경험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4월 29일에서야 서울에 도착한 조선 통역관이

그보다 하루 전인 4월 28일 충주에서 한음을 만나겠다는 뜻을 전했다는 것이다.

이는 저들이 이전의 만남에서 한음의 인품과 학문 그리고 문장에 모두 감복한 때문이었다.

한음은 학문과 위의(威儀)로써 저들을 감복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한음은 날짜가 지났지만 전쟁을 막기 위한 일념으로 단신으로 충주로 향했으나

이미 왜군은 용인을 함락한 뒤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왜군과 만난 한음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경응순을 보내 만나볼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기세가 오른 저들은 역관의 목을 베고 한음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만약 조선의 협상 대표로 한음이 유키나가와 담판을 벌였더라면

임진왜란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파죽지세로 내달리는 적을 막을 방도가 조선에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의주로 몽진한 조선의 입장이 얼마나 화급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많다.

그 가운데 백사 이항복이 쓴 서애 류성룡의 유사(遺事)가 있다.

 

한양을 버리고 떠나면서 대책을 세우는 장면이다.

“주상께서 손으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괴롭게 차례대로 이름을 부르며,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각자 아무 거리낌 없이 모두 말해보라.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때 대신들은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주상께서 ‘승지의 견해는 어떠한가?’ 해서 즉시 내가 대답하기를,

‘의주로 몽진했다가 만약 그 형세가 궁해지고 힘이 다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되어

한 치의 땅도 남지 않게 되면 하는 수 없이 중국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주상께서 ‘공은 승지의 이 견해가 어떠하오?’ 라 하니 공께서는 ‘이는 옳지 않습니다.

주상께서 타신 수레가 우리나라 땅을 한 걸음이라도 떠난다면 이미 조선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大駕離東土一步地, 朝鮮非我有也)’라 하였다.”

 

여기에서 승지는 오성 이항복이며, 공(公)은 서애 류성룡이다.

서애의 명분론과 오성의 상황론이 목적은 같으면서도 애처롭게 부딪치고 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이었다.

백사는 이내 돌아서서 자신의 평생지기인 한음과 사태 수습에 나선다.

이때 내린 결론이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것이며 백사는 이 일의 적임자로 한음을 추천했다.

 

이보다 먼저 적장 겐소(玄蘇) 등은 대동강에서 조선의 대표자와 만나 강화를 협상하자고 제의했고,

한음은 이에 응했다. 그러나 저들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왔으며 길을 내어달라고 강변해

한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협상이 결렬되었다.

다만 기세등등한 저들도 평소 한음을 존경한 때문인지 절하며 장수를 맞는 예를 갖추었다.

후일 이것이 빌미가 되어

왜적들이 한음을 추대해 조선의 국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중국 명나라는 이때 조선과 일본이 간계를 써서 자신들을 협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후일 정응태라는 명나라 외교관이 이를 악용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달았고,

천신만고 끝에 한음이 사신으로 가 원만히 해결했다.

 

중국이 파병 결론을 내지 못하고 관망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6월 18일 한음을 청원사로 파견했다.

조선의 운명은 한음의 구원병 요청 결과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병조판서 직을 맡은 오성은 한음이 사신으로 떠나던 날 새벽

변방인 정주 고을 남문에서 통곡하며 작별했다. 이때 오성은 자신이 타던 말을 주면서

서로의 신후사(身後事, 자신이 죽은 후의 제반 일처리)를 부탁했다.

한음은 중국으로 가 비통한 마음으로 섬돌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범벅이 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간절하게 구원병을 요청했고 정연한 논리와 정성에 감동한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원병 파견을 결정했다. 우선 7월 중순에 조선의 조정을 호위할 별동군 선봉대를 보냈고

12월 25일 대장 이여송 휘하의 5만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국왕은 한음을 접반사로 임명해 맞게 했다.

이로부터 명나라 군대 막사에서 침식을 함께하며 전략이나 군량 등을 챙기며 불철주야 노력했다.

 

한음은 공교롭게도 임란 도중에 모친상을 당했다. 3년상이 당시의 예였고 효심이 남달랐던 한음은

끊임없이 사임을 주청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병조판서 직을 맡아 조선의 병권을 쥔 책임자였다.

 

그때 선조가 한 유명한 어록이 있다.

“나는 왜적이 물러가지 않는 것보다 경이 조정에 없는 것이 더 큰 걱정이오.

경의 상소는 보는 이의 간장을 태우게 하지만 지금 나라 사정이 매우 어려운데 신하된 몸으로

어찌 사사로운 예절만을 고집하면서 나라를 외면한단 말이오.

만약 나라가 잘못되면 어찌 경인들 자식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소.

경의 모친이 혼백이 있어 이러한 사정을 안다면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경의 등을 밀어 조정으로 가라 할 것이요.

개인적인 정을 억누르고 국가를 생각하여 즉시 상경하여 판서의 직을 성실히 수행하시오.”

 

논리에 꺾인 그는 즉시 상경하여 그 직을 맡았다.

그때 올린 상소가 유명한 시무팔조(時務八條)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나라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습 방안이다.

 

대부분이 전쟁 중에 일실되어 일부만 수습해 한음문고에 실려 있지만 그 분량은 적지 않다.

그래서 전문을 정독하기란 여의치 못해 가려서 읽을 생각으로 뒤적이던 중 그 글에 눈이 멈추었다.

시사성까지 갖춰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정독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글이다.

원문을 이해해서 읽는다면 명문장이 가슴에 닿아 상쾌함도 느낄 것이다.

 

救國功臣의 삶 실천

 

독립기념관 야외에 오성 이항복의 비와 나란히 선 한음의 구국공신(救國功臣) 어록비(語錄碑)에

이 시무책 한 토막이 번역되어 있다.

 

“임금의 한 생각에 나라의 치란이 판가름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지극히 두려운 것이 백성의 마음인 것입니다.

공평하고 인자한 정사를 펴 민심을 수습하셔야 할 것이며 새로운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는 무예를 조련시켜 전 장병을 정병으로 양성하여 외침에 대비해야 하며,

지형의 요해한 곳을 살펴 방어진을 설치하여 영원한 자주국방의 대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이 문장보국(文章輔國)인지 “경의 헌책(獻策)을 보니 참으로 남다른 지혜가 있소.

비변사에 내려 의논해 처리하게 하겠다.” 국왕 선조의 결재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공사(朝鮮公事) 삼일(三日)’ 즉 조선의 조정 일이라는 것은 3일 정도 지속되다 바뀐다는

말이 있듯이 헌책(獻策) 역시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나라를 풍전등화에서 구했던 대신은 선조의 의심까지 받았다.

 

광해군 당시에는 당파를 일삼는 이들에게 몰리고 국왕의 오해에 휘말려

한음은 53세 되던 1613년(광해군 5) 9월에 삭탈관직을 당한 뒤 10월 9일 세상을 뜨고 만다.

죽기 1년 전인 광해군 4년에 익사(翼社)공신과 형난(亨難)공신이라는 두 공신에 책록되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에게 받은 작위는 삭탈되었다.

 

여기서 생각할 점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에게

유독 공신 책록이 공평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나마 뒤늦게 받은 두 공신은 공교롭게도

자신 역시 피해를 당했던 광해군 조정에서 받은 것이라는 이유로 추탈되고 말았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공신록에서 삭제된 것 때문에 부조지전을 시행하지 못하다가

1759년(영조 35) 4대 봉사가 끝나 더 이상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하게 여긴

국왕의 특명으로 인해 불천위로 모심과 아울러 사패지를 함께 받았다.

 

한음의 후손 중 모두 10명이 문과에 급제했고

7대손인 이기양(李基讓)은 성리학자이면서도 북경에서 천주학을 배워 이를 후학에게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 이총억(李寵億)이 천주교의 성인(聖人)에 서품되었다.

9대손 이의익(李宜翼)은 이조판서로 기로소에 들었고, 10대손 이병교(李炳敎)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1669년에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는 근암서원(近書院),

1692년에는 경기도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각각 배향되어 춘추로 향사를 모신다.

 

 

 

 

 

양평 한음 이덕형선생묘의 동자석 두상 훼손(절취)사건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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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명 양평 한음이덕형선생묘의 [동자석 두상]
지정종별 경기도기념물 제89호 도난일자 2008. 2. 28 이전
수      량 2점 소 유 자

광주이씨좌의정공파중중

(관리자 이시우)

도난장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
시      대 조선
규      격 두상지름 약30cm정도
    

ㅇ종   목 : 시도기념물 제89호 (양평군)
ㅇ명   칭 : 한음이덕형선생묘및신도비(漢陰李德馨先生墓및神道碑)
ㅇ지정일 : 1985.09.20
ㅇ소재지 : 경기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
ㅇ소유자 및 관리자 : 광주이씨의정공파종중
ㅇ상세문의 : 경기도 양평군 문화관광과 031-770-2473


ㅇ 일반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한음(漢陰) 이덕형(1561∼1613) 선생의 묘 및 신도비이다.
선조 13년(1580)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선조 25년(1592)에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선생은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위하였고,

명나라에 파견되어 지원군 요청에 성공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에 우의정 · 좌의정이 되어

전후의 사태를 수습하였으며, 1602년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5년(1613)에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사직하고,

그 뒤 양근(楊根)에 내려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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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래의 동자석 모습

(아래) 두상이 절단된 동자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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