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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4. 자주적 과학기술의 정수, 세종의 시대

Gijuzzang Dream 2008. 1. 12. 01:30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④]
한국 문화유산, 전통과학의 새로운 조명

 

 

글 : 전상운(문화재위원, 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자주적 과학기술의 정수, 세종의 시대
 
천상열차분야지도(탁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나는 하늘의 뜻을 풀어내겠다. 
           태양의 길을 찾고 
           달의 통로를 찾고
           별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걸으며
           시간을 찾고 위치를 찾아내겠다.  

              그러면 바람 불어도 나의 어린 백성들 피할 수 있으리. 

           강가에 얼음 풀리는 날 일러주고
           꽃피고 열매 맺는 날 일러주고
           열매 거둬 배불리 먹는 날 일러주고.
           하늘이 움직이는 정확한 시간에 맞춰
           우리의 삶과 정신이 움직이면
           단단히 묶여 있던 하늘의 뜻이 풀리리니 
           슬픔에 빠진 자는 그 뜻에 따라 모두 행복하라.


           우주는 너희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고 있으니 
           시름에 젖지 말고 모두 행복하라.
 

 

이렇게 한국인은 중국의 전통적 거대과학(巨大科學)의 그늘에 있으면서도

여러 분야에서 그들 나름의 창조적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창조성은 조선왕조에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1395년 서울로 수도를 옮긴 조선 왕조는

왕조의 권위의 표상으로 새로운 천문도를 돌에 새겨 만들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그것이다.

 

그것은 1,465개의 별을 283개의 별자리로 그려 넣은 완벽한 별자리 그림이다.

가로 122.8cm, 세로 200.9cm 크기의 검은 대리석에 새긴 이 천문도는

14세기 조선 천문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지를 실증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조선왕조 초의 과학기술 전개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청동 활자 인쇄기술의 재발명이다. 1402년(태종 3)에 태종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계미 청동 활자의 주조를 강행했다.

그러나 계미자로 인쇄한 책들은

현존하는 몇 가지 고려 목판본들보다 조금도 좋은 인본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생산성이 떨어지는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은

다음 임금인 세종에 의하여 훌륭히 계승되어 국책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조선식 활판 인쇄기술은 크게 개량 발전되어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다.

기술혁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이태백시집 23권


15세기의 조선 금속활자본이 같은 시대 어느 지역의 인쇄본보다 뛰어나게 훌륭한 것은

세종대 기술혁신의 결과였다.

 

조선에서의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전은,

중국에서는 거의 내버려졌던 기술이 한국에서는 국가적 과제로 추진됨으로써

과학과 문명에 크게 기여한 기술이 되었다.


1402년의 계미자에 의한 인쇄기술상의 결점은

1421년에 세종과 이천 등의 과학자에 의하여 국가적 프로젝트로 개량이 추진되었다.

청동활자의 완전한 규격화와 정밀한 주조 기술개량에 의한 아름다운 활자의 주조가 이루어졌다.

조판기술이 놀라우리만치 향상되었고 따라서 인쇄 능률과 인쇄효과가 크게 발전하였다.

이 기술적 발전은 1434년 갑인자의 주조로 이어졌다.

14년 동안의 발전은 비약적인 것이어서

금속활자 인쇄는 거의 완벽한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능률 또한 수십 배로 향상되었다.

조선식 청동활자 인쇄술이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발전적 업적은

한국 전통과학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세종대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우량계(雨量計)의 발명도 그 하나이다.

1441년(세종 23)에서 1442년(세종 24)에 걸쳐서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라고 명명된 강우량 측정기가 발명되어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법이 완성되었다.

이 원통형 측우기의 발명은, 강우량을 정확히 측정하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세종대의 관료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기기를 써서 수량적으로 측정하는 과학적 방법을 발명하게 되었다.

그들은 잘 제도화된 측정방법으로

전국의 강우량을 통계적으로 집계하는 일을 4백 년 이상이나 계속하였다.

또한 바람의 기상학적 측정도 병행하여

풍향기를 만들어 깃발 모양의 긴 천이 날리는 것을 보고 풍향과 풍속을 측정하였다.

15세기 전반기에 이렇게 기상관측이 양적(量的) 계측기에 의해서

전국적인 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한국에서뿐이다.

 

측우기의 발명은,

그 배경에 조선왕조의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기우(祈雨)에 대한 하늘을 향한 신앙이 있었고,

농업적 과학기술 정책을 바탕으로 한 제도적 노력 등이 복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원통형 측정기 제작의 발상은 세종대 과학자들의 독자적인 것이었다.

과학으로서의 농업기상학이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보다 일찍이 조선에서 성립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큰 일이다.

세종대에는 또한 새로이 천문대도 설립되었다.

대간의(大簡儀)라고 불린 경복궁의 대규모의 천문대에는

간의(簡儀), 혼천시계(渾天時計)와 혼상(渾象), 규표(圭表), 정방안(正方案, 방위지시표) 등이

설치되었고, 정밀한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天象時計)인 자격루(自擊漏)와 옥루,

그리고 각종 해시계들이 부설되었다.

서울의 중심지에는 커다란 공중 해시계도 설치되었다.

이와 더불어 휴대용 해시계들은 매우 정밀하게 제작된 것이었다.

특히 앙부일구라고 이름지어진 이 해시계는 독특한 모델로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 휴대용 모델은

지남침을 같이 넣어서 합해서 아름답고 독특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모델로 만들어졌다.

보루각 자격루(국보 제229호),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1434년에 완성된 조선 왕조의 새 표준시계인 자동물시계는

자동시보장치가 붙어있는 거대한 정밀 기계시계이다.

제작자 장영실은

물을 공급하는 항아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의해서 생기는 부력(浮力)을 동력으로 해서

몇 개의 지렛대 장치와 굴러 내리는 공으로 작동하는 자동장치를 창안해 냈다.

그가 만든 자동시보장치의 추진 방식과 격발 방식은

그때까지의 다른 자동물시계들과 뚜렷하게 다른 것이었다.


장영실의 자격루는 1536년에 개량된 모델이 다시 제작되었다.

지금 서울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는 물시계의 유물이 그 물항아리 장치들이다.

1430년에 시작하여 7년이나 걸려서 완성된 이들 천문 관측기기를 만들기 위해서

세종은 수학자, 천문학자, 기술자를 중국에 파견하여 천문 관측기기를 연구케 하였다.

그리하여 세종대 과학자들은

원(元)의 곽수경(郭守敬) 시스템을 중심으로 하는 천문의기를 모델로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선식으로 개량되었다.

이 천문대는 15세기에 있어서 가장 규모가 크고 훌륭한 시설을 갖춘 것이었다.

여기 설치된 혼천시계(渾天時計) 장치와 자동물시계 장치들은

그 시대의 첨단기술이고 고도의 정밀기계여서 문헌의 연구만으로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간의대와 그 시설들은 세종대 과학기술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종대의 천문학자들은 그들의 관측과 계산을 바탕으로 해서 자주적 역법 체계를 확립하였다.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편찬은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이 두 천문(天文) 역학서(曆學書)는 세종대의 천문 역학자들이

중국 천문학과 역법(曆法) 계산의 기본원리와 이론을 완전히 정확하게 소화하고 있었고,

이슬람 천문 역법의 이론도 도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칠정산외편』은 한문으로 엮어진 이슬람 천문 역법의 가장 훌륭한 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제 조선왕조는 자기의 역법을 바탕으로 자기 나라의 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달력의 특징은, 서울에서 관측한 자료에 기초하여 서울의 위도에 따라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달력은 1년의 길이를 365.2425일로 정하고,

1달의 길이를 29.530593일로 정해 수시력(授時曆)과 같은 상수(常數)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또 1년 또는 1개월의 평균치와 매일 매일의 실질적인 수치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도 매우 정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차의 값도 현재의 것과 같으며

그 밖의 대부분의 수치들이 유효 숫자 여섯 자리까지 현재의 값과 일치하고 있다.


세종대의 과학적 업적은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다.

고려청자는 조선 초에 특징있는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들은 조선 초부터 고려의 자기와는 형식과 성질이 전혀 다른,

이른바 조선자기로 변모하고 있다.

청화백자는 세종대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입되어

15세기 중엽부터는 조선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된 자기인데,

그릇 모양과 청화 문양의 주제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선 백자는

기술적으로는 세종대의 중기부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중국 것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군사 기술에서도 조선의 특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조선식 화포(火砲)와 거북선의 출현이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화포는 중국의 기술을 수용하여 고려 말부터 실용화되었는데,

세종대에 이르러 중국의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조선식 화포가 개발되었다.

 

그 화포들 중에서 몇 가지 중화기는 탄환뿐만 아니라

한 번에 여러 개의 불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종대의 화포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다음 왕대에 나타난 화차(火車)는

동시에 다수의 로켓트를 발사하는 이동식 로켓트 발사대로까지 발달하였다.

조선식 화포의 전면적 개주(改鑄)사업은 1455년에 끝났는데,

이 때 완성된 모든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 사용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그림으로 표시하고 정확한 규격을 기입한 화약 병기의 기술서(技術書)가 편찬 간행되었다.

그것이 『총통등록(銃筒謄錄)』(1448)이다.

이 책은 15세기 최고의 화약병기에 관한 기술서이다.


조선 초기의 전함으로 유명한 거북선은

왜구, 즉 일본인 해적 집단의 백병전술에 대비하여 개발한 돌격 전함이다.

거북선은 한마디로 여러 개의 중화기로 무장한 중장갑의 연해용 돌격전선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설계된 특이한 전선의 모델에다가

그 뛰어난 화력과 기동력이 매우 탁월한 과학적 성과였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_일본 류코구 대학 도서관 소장


지리학의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업적이 있었다.

1402년에 조선 지리학자들이 완성한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중국에서 작성된 몇 가지 중국 중심의 지도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들이 생략한 서쪽 세계와 조선과 일본을 제대로 나타낸, 보다 앞선 세계지도이다.


1402년의 세계지도에 나타나 있는 한반도의 지형은 상당히 정확하여

고려의 한국지도가 이미 제대로 그려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대에는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실지 측량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져서

거의 완전한 한국지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정척(鄭陟), 양성지(梁誠之) 등이 제작한 『동국지도(東國地圖)』가 그것이다.

 

이 지도는 세종 때의 천문학적 관측 성과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그 정확성이 뛰어났다.


지금 일본에 남아 있는 15세기 전반의 조선지도는

15세기에 제작된 세계의 어느 지도보다도 훌륭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세종실록』에 들어 있는 「지리지(地理志)」는

그때에 편찬된 지리지의 체제와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거의 완벽한 조선 지리지로서 학문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5세기 지리지 중에서 이렇게 훌륭한 책이 간행된 것은

보기 드문 지리학적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종대의 지리지와 조선지도의 제작 수법에서도

조선 학자들의 뚜렷한 창조적 성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의학의 분야에서는 조선 의약학의 체계화와 동양 의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 초에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 향약의 연구는

한국산 의약에 관한 의학적·본초학적 지식으로 정리되었고,

독자적 의약처방으로 체계화 되었다. 그것이 1433년에 완성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다.

거기에는 703종의 한국산 의약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의약학의 중국 의존에서의 탈피로서 획기적인 일보 진전이었다.

이들 연구와 병행하여 이룩한 것이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이다.

1445년에 완성된 266권이나 되는 이 의학대백과사전은

한국과 중국의 의서 153종을 집대성한 것으로 15세기 최대 의서의 하나였다.

이 의약학서는 중국과 일본의 의약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세종대의 의학 발전은 조선 의학의 기틀을 완전히 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것은 이미 중국 의학인 한의학(漢醫學)이 아니고 조선 의학인 동의학(東醫學)이었다.

16세기 말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은

조선 실증 의학적 지식을 집대성한 조선 의학의 결산이었다.

1429년에 완성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은 각 지방의 농법을 널리 조사하여

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발전된 기술을 요약한 것이다.

이 농서는 조선 농업기술의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농작물의 종류는 다양해지고 논농사 기술과 농작물을 기르는 기술이 향상되고

집약 재배 농법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이 농서는 조선 농업의 기본 텍스트로서 중국 농서에 우선하게 되었다.
면직물의 보급, 농산물의 생산증대, 의약학의 발달에 의한 질병에 대한 효과적 대응은

세종대의 한국인의 생활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의 과학과 기술은 이제 더 이상 귀족이나 양반 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민중을 위한 지식으로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에 빛날 과학과 기술의 창조적 업적


이렇게 15세기 전반기인 조선 초에 이룩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그 질과 양에서 한국의 역사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동아시아에서 더 나아가 세계사적인 시야에서 볼 때에도 유례가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5세기 전반기의 과학사는 조선왕조 세종대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정상으로까지 끌어 올려졌다.

그 시기는 ‘세종의 시대’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세계 과학기술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15세기의 가장 뛰어난 지적(知的) 성과는 조선에서 나왔다.

이 학문적 성과들이 제대로 정리된

『과학사 기술사 사전(科學史技術史事典)』(伊東山田, 東京, 1983)은

세계 과학기술사 속의 세종 시대의 창조적 성과가 부각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계량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작성한 연표에 의하면, 1400년에서 1450년까지 주요 업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29건, 중국 5건, 일본이 0건이며,

동아시아 이외의 전 지역이 28건으로 정리되어 있다.

 

세종시대 과학기술이

15세기에 이루어진 다른 모든 나라의 성과를 능가한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 이렇게 자랑스런 시대가 있었다는 기념비적인 사실에

우리 모두의 새로운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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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실에서 발간한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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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7-10-19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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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조선의 합작품?

 

 

국립고궁박물관 <고궁문화> 잡지 창간

조선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평양성
근처 대동강에서 출현했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는

과연 고구려인이 남긴 것을 토대로 조선 왕조가 새롭게 제작한 천문지도일까?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단을 보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대표적 학자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쓴 발문이 있어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발견되고 그것이 다시금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경위가 적혀 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원래의 천문도가 고구려 시대 유산이라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

권근 발문에는 이 천문도의

"석본(石本)이 옛날에 평양성에 있었으나 병란으로 말미암아 강에 빠져 분실된 지 오래되었고

그 인본(印本)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을 뿐이지, 그것이 고구려시대 유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이
왕실문화유산의 심도 있는 학술연구 기반구축과

활성화를 표방하며 창간한 학술잡지 <고궁문화> 제1호에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실체 재조명'이란 논문을 실은 한영호 건국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여러 가지 성도(星圖)와 비교 검토한 결과 이 각석(刻石)이

고구려와 조선시대 두 시기의 천상(天象)을 한 곳에 새겨놓은 것임을 구명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한 교수는 권근의 발문을 비롯해 조선 태조 시대에 평양에서 발견된 옛 천문도 기사를
그대로

옮겨적었다고 밝힌 문장을 분석한 결과 그 대부분이

서기 648년에 완성된 진서(晉書) 중 천문지(天文志)와 율력지(律曆志)를 인용하는 점으로 보아

천상열차분야지도 원판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다스리던 때(642-668년)"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 교수는 천상열차분야지도에 표시된 282좌, 1천467개 별자리가 중국에서 등장하는 시점이

수나라 때 개황(開皇) 연간(581-600)이라는 사실도

이 석각 원판이 완성된 시점을 "7세기 중반 이후의 고구려 말로 추정하는 데 중요한 증빙자료가 된다"면서

"이런 바탕 위에서 고구려 보장왕 때 평양 석본이 새겨졌다고 좀 더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권근은 발문에서 태조 때 발견된 천상열차분야지도 원판은

"묘수(昴宿)가 입춘의 혼중성이었으나 지금은 위수(胃宿)이며, 24절기마다 차례로 차이가 있으므로

이에 옛 별자리 그림의 중성을 고쳐 돌에 새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별자리에 관한 각종 전문용어가 들어가 있어 이해가 어렵기는 하지만,
권근의 이 말은

"이번에 발견된 천문도가 오래 전에 작성된 까닭에 지금의 별자리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많은 천문학자가 이런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정말로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고(古) 천문도가 평양에서 새롭게 발견되어,

그것을 토대로 조선왕조가 새로운 천문도를 제작했다고 주장하며

이번 한 교수 논문 또한 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석각천문도를 둘러싼 적지 않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무엇보다 신왕조 개창에 즈음해 그 주체 세력들이

천문도 출현과 같은 각종 신비로운 현상을 조작해 내면서

하늘도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선전한 일이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늘 발견되고,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권근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본(사본) 하나를 바친 자가 있었다"고 한 점은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번 창간호에는 이 외에도 왕실 상여 일종인 대여(大輿)와 견여(肩輿)의 변화양상을 추적한

박종민 온양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글과

그동안 장식병풍으로만 인식되던 모란병풍이 왕실의례용이었음을 주장한

이종숙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원의 논문도 같이 수록됐다.

- 2008.01.21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별똥에서 소리가 났다는 기록이 있다? 

천문현상을 중요시한 우리나라에는 2000년에 걸친
천문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이 속에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천문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숨어 있다.

 

지난 4월 1일 오전 8시 무렵 전주 일대에 “꽝”하는 정체불명의 굉음이 발생해

사람들이 놀란 일이 있다. 당시 천둥이나 지진은 없었고 가스폭발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전라북도는 뒤늦게 굉음의 실체가 주한미군 훈련 중 조종사가 실수로

낮은 고도에서 음속비행을 해 일어난 일이라고 발표했지만

한때 그 원인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미국 세티연구소 피터 제니스켄스 박사의 저서

‘유성우와 그 모혜성’에도 인용된 고려와 송나라의 유성 관측 기록을 분석한 안상현 박사의 자료(아래).

현대 관측장비에서 얻은 그래프(위)와 비슷하다.

“전주에서 들린 굉음은 유성(별똥)이 떨어지면서 생겼다고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국천문연구원 국제천체물리센터 안상현 박사의 말이다.

 

유성은 소행성이나 혜성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입자가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공기와 마찰돼 발광하는 현상이다.

 

안 박사는 “보통 유성은 모래알 정도 크기지만 때로는 자갈만 한 덩어리가 진입할 때도 있다”며

“이 경우 음속으로 나는 전투기에 필적하는 운동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권에 진입할 때 입자의 속도가 초속 50km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별똥은 보통 고도 50~70km에서 나타나는데,

자갈만 할 경우 1km 상공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지상에서 큰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처럼 소리가 나는 유성을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 천구성(天狗星)이라고 불렀습니다.

현대 천문학용어는 소리별똥(bolide)이죠.”

400여 년 전 망원경이 발명돼 천문학의 일대 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동양의 천문학은 서양보다 뒤지지 않았다.
천문현상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동아시아 나라들은 매일 밤 천체를 관측하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유성이나 일식은 길흉화복을 점치는 중요한 천문현상이었다.

 


외국 천문학자들도 탐내는 기록 유산

우리나라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처럼 수백 년에 걸친 자료가 남아 있다.

특히 천문현상을 세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과거의 천문현상을 밝힐 귀중한 문헌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기관인 승정원에서

나라에서 일어난 주요사건과 취급한 문서를 자세히 기록한 일기다.

유성을 설명하는 숙종 원년(1661년) 음력 9월 2일자 승정원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1. 조선 초 제작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됐다.

2. 간의를 작게 만든 소간의 모형.

현재 실제로 작동하는 소간의를 복원하고 있다.



夜二更, 流星出婁星上, 入北方天際, 狀如甁, 尾長五六尺許, 色赤, 光照地, 有聲。
밤 2경(10시 전후)에 별똥이 루성(양자리)의 위에서 나와서 북쪽 지평선으로 들어갔는데, 모양(크기)은 시루만 했고, 꼬리 길이는 5~6척 정도였다.

색깔은 붉은색이었는데, 빛이 땅을 비추고 소리가 났다.

밤하늘의 유성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는 현대인들에게 유성의 ‘소리’까지 기록한 선조들의 세심한 관찰력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안 박사는 이와 같은 유성에 대한 기록을 분석해 오늘날과 비교하는 연구를 해오고 있다.

“이런 기록이 한두 개면 별 의미가 없지만 수백 년에 걸쳐 관측한 자료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안 박사는 ‘고려사’에 실려 있는 고려시대 별똥 관측 기록을 토대로 1년 중 별똥의 출현횟수를 그래프로 그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관측장비로 측정한 그래프와 놀랄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임을 확인했다.

 

당시 사람들이 천문현상을 충실하게 기록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가로축을 날짜, 세로축을 기록된 유성 숫자로 놓고 그린 그래프를 보면 전체적으로 사인곡선 같은 굴곡을 보인다.

또 늦여름과 초겨울에 기록된 유성 수가 가장 많다.

“지구는 자전축이 23.5° 기울어진 채 공전하기 때문에 유성 숫자 분포가 1년을 주기로 변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춘분 무렵이 가장 적고 추분 때가 가장 많죠.”

고려와 송나라의 유성기록을 분석한 안 박사의 자료는 유성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세티(SETI)연구소 피터 제니스켄스 박사의 2006년 저서 ‘유성우와 그 모혜성’에도 실렸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양흑점 변화가 잘 기록돼 있어

과거 기후 변화와 흑점 변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외국의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처럼 풍부한 관측 기록뿐 아니라 천문지도나 천체관측기기에 대한 자료도 많이 남아 있다.

 

조선 초인 1395년 제작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세계에서 2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로 국보 228호다.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그룹 안영숙 박사는

“별자리에 표시된 별의 크기를 등급마다 다르게 만든 상당히 정교한 성도(星圖)”라고 말했다.

 

천체관측기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복원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관측기구인 간의나 혼천의를 복원했고

현재는 간의를 작게 만든 ‘소간의’를 복원하고 있다.

“세종 때 만든 소간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천체관측기기입니다.

낮에는 해시계로 쓰고 밤에는 혜성이나 행성의 위치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지요.”

인류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한 지 400년이 되는 올해,

현대 천문학에는 후발주자인 우리나라지만 풍부한 천문학 유산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 2009년 07월호 - 우주를 그대 품 안에

-  대전=강석기 기자 ㆍsuk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