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미켈란젤로 作 - 최후의 심판

Gijuzzang Dream 2008. 1. 2. 19:39

 

 

 

 

[명화이야기] 잘 생긴 근육질의 젊은 남자, 그리스도
 

 

유럽은 일찍이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종교화를 발전시켜 왔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성경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종교화야말로

문맹인 대중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최고의 도구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화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의 ‘최후의 심판’이다.

1536년 시스티나 천장화 ‘창세기’를 완성한 지 25년이 지난 후에 이 작품을 제작했다.

‘최후의 심판’, 1537~1541, 13×12m,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의 죄를 가려 선한 자는 천국으로 악한 자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내용을 그린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천국을 상징한 전통적인 소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인물 중심으로 천국을 표현해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공간과 시간적 배경을 무시한 채 동일한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인물들을 그리면서 영웅적인 모습보다 인간적인 모습에 치중했다.

거대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서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그 작품에 매달린다.

특히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선반에서 일을 하면서 잠을 자야 했다.

프레스코 기법이란

젖은 석회 위에 물감을 입혀 그리는 기법으로, 화가는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

 

프레스코화의 가장 큰 어려움은 한 번 그린 그림은 수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제작할 때 사람들에게 “나는 좋은 곳에 있지도 않고 화가도 아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작품에는 400여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성인과 사도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이 작품의 구심점이다.

여기서 황금빛 후광이 비추는 옥좌에 앉은 그리스도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오른손을 들고 있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성모는 왼쪽에 앉아 있다.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전형적인 그리스도의 포즈다.

 

이 작품에서 수염도 없이 잘생긴 근육질의 젊은 남자로 묘사된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미켈란젤로 이전에 그린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아래 일곱 명의 천사들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나팔을 불며 알리고 있다.

다른 천사들은 묵시록을 읽고 있다.

화면 맨 오른쪽 하단에 큰 뱀이 몸을 감고 있는 인물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신 하네스의 재판관 중 하나인 마노스고,

배 위에서 노를 잡고 있는 사람이 카론이다.

‘최후의 심판’이 완성됐을 때

인물들의 나체상을 본 사람들은 목욕탕에나 어울리는 그림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의 비난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지만

성스러운 성당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철거를 요구하는 비난의 소리가 거세지자

교황 파울루스 4세는 비난을 불식시키기 위해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라에게 이 그림 속 나체의 인물들에게 옷을 입히는 작업을 맡겼다.

그 이후 요하네스 파울루스 2세가 이 작품을 복원했다.
- 2007 08/21   뉴스메이커 738호
- 박재현 / 작가 · 아트 칼럼니스트

 

 

 

 

 

 

 

 

 

  

 

 

자기 자신의 껍질을 들고 있는 <성 바르톨로메오>
그 껍질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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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네제家의 교황 바오로 3세(PaoloⅢ: 즉위 1534-49)는 교황이 되자마자

메디치 예배실에 전념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여 <최후의 심판>을 주문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켈란젤로는 주문 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운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 바티칸, 시스틴 예배실 

우선 무엇보다도 수많은 누드의 인물들이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이 충격적이다.

천당과 지옥이 좌 · 우로 나뉘던 중세의 도상은 연옥을 사이에 둔 상 · 하 구조로 바뀌었다.

연옥의 인물들마저도 구원의 상승보다는 추락의 가혹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르네상스 원근법의 화면 구성과는 반대로

화면 위의 인물들이 더 크고, 아래 인물들이 더 작기 때문이다.

마치 중세의 인물비례처럼 예수와 주요 성인 몇몇은 거인 같고,

지옥의 인물들은 마치 벌레와도 같은 미물로 그려졌다.

 

자비와 보호의 역할을 하던 마리아는 예수에게 몸을 움츠려 기대어 있고,

심판자는 단호하며, 공중에 떠있는 듯한 연옥의 인물은 공포에 떨고 있다. 

 

 

 미켈란젤로, 로마 바티칸 시스틴 예배당 천장화(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 

1508-1512년, 프레스코

 

 

  

 

 

 

 

 신이 내려준 예술가, 미켈란젤로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 모든 길은 바티칸으로 통하고…

바티칸 모든 길은 시스티나 ‘최후의 심판’에 이른다 

  

최초의 미술사 서적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쓴 ‘미술가 열전’ 1550쪽을 보면

미켈란젤로에 대한 이런 찬사가 나온다.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들이 본받아야 할 전형적인 모범으로 신이 세상에 내려준 자이다.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의 행동으로부터 삶의 방법을 배우고,

그의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훌륭한 장인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런 극찬을 받은 그의 작품은 지금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다.

옛말에 “세상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로마의 모든 길은 그 가운데 중심인 바티칸으로 통한다.

그리고 바티칸의 모든 길은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통한다.

‘라파엘로의 방’과 ‘바티칸 박물관’의 여러 개의 방들을 지나면 결국 시스티나 예배당에 이르게 된다.

 

이곳은 새로운 교황을 선출할 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를 하는 장소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몇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다.

그들은 바로 이 시스티나 예배당에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그린

지상 최대의 벽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보기 위해서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미켈란젤로 일생 최고의 역작,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자신은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라면서 끝까지 그림을 그리기를 싫어했던 미켈란젤로,

그를 설득하여 로마로 불러들여 서양미술사 최고 걸작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남기게 한 이가 바로 교황 율리우스2세다.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기간 1503~1513)는

특히 르네상스의 거장들에게 최고의 대작을 만들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율리우스 2세는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로마의 대규모 조영 사업을 추진해갔다.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에게 성 베드로 성당을 짓게 했고,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의 교황실, 일명 ‘서명의 방’의 벽화를 그리게 하였다.

 

1508년 율리우스 2세는

당대 최고의 거장인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조수도 없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을 해나갔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최고의 지성, 비범한 기품과 지식을 갖춘 예술가의 작품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1508~1512)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내용을 근거로 한 ‘천지창조’를 그리고 있다.

‘빛과 어둠의 창조’로부터 ‘해와 달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 ‘노아의 제물’ ‘대홍수’ ‘술 취한 노아’까지

아홉 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1512년 이 대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천재의 원숙미 넘치는 이 작품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미켈란젤로가 이 ‘천지창조’를 완성한 지 24년이 흐른 뒤에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 재위기간 1523∼1534)는 로마로 다시 그를 불러들인다.

클레멘스 7세는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거대한 벽화를 완성하기 위해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했다.

 
‘최후의 심판’은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단의 지옥, 상단의 천국에

3백여 명의 인물들이 격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죄인들은 지옥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 타있고,

그 위에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심판의 날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또, 그리스도의 옆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발아래 쪽에는 두 명의 성자가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 오른쪽은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인데,

미켈란젤로는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미켈란젤로가 필생의 역작으로 그의 나이 67세에 완성한

이 세상의 마지막 날 구세주가 심판을 내리는 이 극적인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경외감을 갖게 하는 영원한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경희대 강사 

- [명화로 보는 논술] 조선

 

 

 

 

 

 

 

 또 다른 <최후의 심판>그림들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만 그린 것이 아니고, 다른 많은 화가들도 그렸다.

 

 

 

(1) 지오토가 그린 최후의 심판.

 

그림 중앙에는 천사  들에 둘러 싸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양쪽으로 각각 6명씩 12제자가 있다.

그림 왼쪽에는 하늘나라로 오르는 사람들이 그려 있고,

오른쪽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그려 있다.

지옥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시커먼 털이 난 괴물들이 고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오토(1266 ?~1337.1.8)는 죠토라고도 하는데 

이탈리아의 화가 · 조각가 · 건축가로 치마부에의 제자이다.

1920년부터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성당, 상단에 그려진 벽화제작에 참여하였으며,

그 후에는 성 죠반니 교회회랑 벽화를 제작하였다.

 

피렌체파 회화의 창시자로서 그 명성은

동시대의 시인 단테의 《신곡》<연옥편 제11가>에서 G.치마부에와 대비, 찬양되고,

F.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 등의 저작에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초기의 미술활동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없고,

소년시절 양(羊)을 사생하고 있을 때 치마부에에게 발견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는 일화가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파도바의 산타마리아 아라 아레나성당(별칭 스크로베니예배당)의 내부를 장식한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이야기》 37도,

우의상(寓意像) 14도, 《최후의 심판》등의 벽화군(1305년경)이다.

화면의 간명한 합리적 구성, 인물상의 조형성, 극적 내용의 심리적 표현 등에서

획기적인 기법을 보였다.

 

그 직후의 걸작은 피렌체의 온니산티성당에 그린 제단화 《장엄한 성모》(우피치미술관 소장)이다.

그의 미술사적 의의는, 선배 치마부에의 비잔틴주의를 극복함과 동시에,

조각가 N.피사노나 로마화파 카발리니 등의 영향을 발전시켜,

그리스도교 교의(敎義)의 그림해석으로부터

해방, 인간성과 종교성이 융합한 예술적 표현의 세계로 높인 데 있는데,

주제로서 필요한 것만이 파악, 단순화되어 있다.

 

화면은 인물과 공간과의 합리적인 연관으로 무대적으로 구성됨과 동시에,

인물상은 조형적으로 형태화되어 각각 마음의 움직임이 개성적으로 표현되었다.

이탈리아 회화의 창시자로 불리며, 정신성과 현실성과의 종합으로 고딕회화를 완성하였다.

 

 

 

(2) 안제리코가 그린 최후의 심판 

역시 중앙엔 천사들에 둘러싸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왼쪽엔 천국이, 오른쪽엔 지옥이 그려 있다.

가운데 부분, 아래 앞쪽에는 관이 보인다.

 

 

 

(3) 1551년 네델란드 화가 포르부스(Pourbus Pieter)가 그린 최후의 심판 

왼쪽으로 천국을 오르는 사람들은 서로 끌고 밀어주는 모습이다.

 

 

 

(4) 1525년 프로보스트(Jan Provost, 1465-1529)가 그린 최후의 심판.

 

 

 

(5) 라파엘(Raphael Coxcie)이 1600년에 그린 최후의 심판.
 
 

 

  - 2008. 01.29. http://cafe.daum.net/musicgarden/2WP4/4820 에서 발췌.

 

 

 

 

 

 

 

- Glory to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