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이야기] 첫 ‘인상주의 전시’는 조롱거리였다 | |
‘인상-해돋이’, 1873년, 캔버스에 유채, 48×63m,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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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용어는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 1840-1926)로부터 시작했다. 모네 한 사람이 인상주의를 이끈 것은 아니다. 19세기 급진적으로 등장한 이념에 동조한 화가들이 발전시켰고 모네는 인상주의 미술에 중심에 있는 대표적인 화가다. 풍경이나 인물들의 순간적인 모습을 포착해서 그린 인상파 화가들의 새로운 화풍은 19세기 당시에 볼 수 없는 혁신적인 그림들이었다.
지금은 미술사조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이지만 그 당시 사실주의가 휩쓸던 화단에서 인상주의는 조롱거리였다.
비평가나 대중들에겐 빛에 따라 변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효과나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주 찾은 도심의 장소에서 만나는 인물들을 그린 그림들이 익숙지 않았다. 자연을 표현한 인상주의 화가들 중에 모네가 대표적이다. 모네, 드가, 르누아르,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이 기존의 미술계에서 받아주지 않던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한 것이다. 그러나 전시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당시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항구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화면에서 배와 돛대와 연통은 짙은 안개 때문에 흐릿하지만 부드러운 붓놀림을 통해 화면이 정지되어 있지 않고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빛의 변화에 따른 자연을 묘사한 ‘인상-해돋이’를 조잡하고 성의 없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풍자 신문 ‘르 샤리바리’지에 기고한 기사의 제목을 ‘인상-해돋이’에서 따온 ‘인상주의 전시’라고 붙이고 비난을 퍼부었다. 미숙한 벽지조차 이 해안 그림보다 더 완성적일 것이다.” 처음 인상주의를 조롱하기 위해 쓴 이 말은 곧 그들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하늘과 눈과 물에 비친 구름을 그린 최초의 화가다. 그는 자연을 자신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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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17세기 과학의 혁명이후 어느 때보다도 광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윌리엄 터너(Joseph M.William Turner, 1775-1851)는 특히,
색채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주장한 괴테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어두움과 밝음, 서로 다른 색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녹아드는 형태를 통해
터너는 자연의 광폭함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
이러한 터너의 풍경화는 점차 형태를 무시하고
보이는 것의 인상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가는데
그 효과는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 1840-1926)의 인상주의와 흡사하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색채추상과 다를 바가 없다.
풍경화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자연은 영웅적인 이야기를 위한 무대여야 한다는 고전주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었으나
신고전주의식의 도덕적 윤리나 정치적인 관심이 점차 후퇴하면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의 독립된 풍경화가 점차 독자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된다.
예술가들은 다양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신성한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사실적인 아름다움 등을 그리려 애썼다.
이상적인 미의 실현을 위해서다.
근대의 서막이 열리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대부분의 화가들은
매우 정교한 기법으로 진지하게 신화화, 역사화, 종교화 등을 그렸다.
여기에 예술에 대한 엄숙주의가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1870년대 프랑스의 도전적인 젊은 화가 몇몇이
일상의 장면을 유동적이고 덜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거친 표현양식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인상주의자'라고 부르는 화가 집단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최초의 '아방가르드 운동(Avant-Garde: 전위예술, 前衛藝術).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예술운동)'을 전개했다. 교훈적이고 엄숙한 주제들을 아주 정제된 표현 기법으로 재현해냈다. 화가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사건을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애썼다.
그것이 최상의 미의 재현이었다.
인물화의 경우도 상상 속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모델을 작업실 안에 세워 두고 그렸다.
인상파화가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젤과 캔버스를 들고 작업실 밖으로 새로운 모델과 소재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햇빛 아래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빠른 붓 터치로 담아냈다.
한 순간 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연과 빛의 작용을 그리기 위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순간적인 감각을 표현하는 데 몰두해
형태를 정확히 알아 볼 수 없는 풍경화와 무수한 색점들의 집합으로 보이는 풍경화를 그렸다.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이른바 '마구잡이식 그림'이 나오게 된 것이다.
■ 새로운 예술에 대한 환대와 멸시
당시는 이른바 '아카데미즘'이라고 하는, 화가 개인의 창조성과 표현의 자유가 결여된 미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정제된 미학적 규범을 따른 작품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천박한 그림이었다.
지금은 인상주의 그림들이 매우 인기가 있지만 처음에는 몹시 냉대를 받았다.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 공식적인 전시회에서 거부당했기 때문에
스스로 전시를 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언론과 대중들은 그들을 조롱했다.
1874년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에 왔던 한 평론가는 그들을 '미치광이'라고 혹평했다.
이때 조롱조의 '인상주의'라는 운명적인 이름을 제공한 것이
바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해돋이'라는 작품이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영원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고자 했던 모네는 인상주의를 이끈 선구자였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쫓아 늘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인상-해돋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해가 뜨는 한 순간을 잡아내고자
캔버스 위에서 빠르게 춤을 추는 모네의 붓놀림이 보이는 듯 하다.
형태도 확실하지 않고 물감도 팔레트 위에서 섞이지 않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런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산업화와 과학문명의 발달이 한 몫을 했다. 당시의 유럽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갔다.
신기한 발명품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다.
자동차, 기차는 물론 철골과 유리로 만들어진 기상천외한 건물과 다리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가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풍경을 직접 확인해보고자 작업실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휴대가 간편한 튜브 물감 같은 새로운 미술도구의 발명과 사진 기술의 발명 또한 인상주의 미술이 발달하는 데 도움을 줬다. 사진은 1830년대에 발명이 돼 빠른 시간 안에 널리 보급이 됐다.
사진술의 발달로 더 이상 화가들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졌다.
실물과 똑같이 찍힌 사진이 그림을 대신하면서 화가들은 이제 더 이상 대상을 똑같이 재현해 내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현실에 눈을 돌린 최초의 화가들
인상주의화가들은 시골의 자연 풍경뿐 아니라 도시 생활의 이모저모를 화폭에 담았다. 분주한 도심거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한 낮의 모임, 화려한 도시의 밤 풍경, 카페, 공원, 기차역 등을 그렸다. 생활 주변의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지금이야 별로 주목 받을 만한 일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냉대를 받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실에 눈을 돌린 최초의 화가들이었다.
진부한 틀에서 과감히 탈피해 순수하고 즉각적이며 선입견이 없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과 삶,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본 것이다. 환상이 아니 현실을 바라본 그들의 애정어리고 진실한 시선 덕분에 무한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이 비로소 예술 작품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 2008.01.30 조선, [명화로 보는 논술]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 건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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