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태평2년명(977) 마애약사여래좌상 / 태평 흥국명(981) 마애보살좌상

Gijuzzang Dream 2007. 12. 17. 18:34

 

 

 

 

 

 

 

“곡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자식 많은 자는 배고파 걱정이네

 높은 벼슬아치는 반드시 멍청하며  영리한 자는 써먹을 곳이 없지

 온갖 복을 다 갖춘 집 적고  최고의 길은 늘 쇠퇴하기 마련이야

 아비가 인색하면 자식은 방탕하기 쉽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사내는 꼭 어리석으며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이 망쳐놓지

 세상일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  혼자 웃는 까닭을 아는 사람이 없네.”

다산 정약용의 ‘홀로 웃다(獨笑)’ 라는 시이다.

 

그의 말대로 세상일이란 모두 그렇고 그런 것인가.

비 맞고 계신 부처님 모습 마주하려고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서면 그치기 일쑤이고

볕이 쨍하여 길을 나서면 이내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렸으니

내 어찌 다산과 같이 홀로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 탓에 아예 해낭(奚囊)을 챙기지도 않고 책상에 앉았는데

창으로 볕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장마철에 찬란한 한 줄기 볕이려니 부랴부랴 공부방을 나서

경기도 이천의 마장면 장암리로 향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태평흥국명(981)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좌상

 

유난히 작게 표현된 손엔 연꽃이…

마을 ‘향도들’ 조성 주민과 동고동락한 부처님

불상근처 사찰 흔적 없고 민간신앙 반영 추측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은 보물 제982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에 있다.

높이 407cm, 아래 너비 512cm의 삼각형의 바위에 새겨진 보살상은

얼굴이나 몸에 비해 유난히 작게 표현된 손을 지니고 있다.

그 중 내장한 오른손은 가슴께에 새겼으며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가지는 귀 아래 부분에서 두 갈래 나뉘어 한쪽 가지에는 만개한 연꽃을

선각으로 다른 가지에는 꽃봉오리가 부조로 표현되었다.

 

왼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놓았으며 왼손은 발 위에 포개어 외장했다.

손목에는 두 가닥의 팔찌를 조각했으며

왼발 아래로 땅바닥 가까이에 연화족좌에 올린 오른발이 있지만

흙에 묻혀 형태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 왼쪽 약간 위로 왼발을 위한 족좌가 새겨져 있다.

보살상 앞에 놓인 바위 중 가운데 방형의 홈이 파인 것은

보살상의 보개로 쓰였던 것이라 짐작되며 명문은 바위 뒷면에 있다.

 

모두 3행이 세로로 새겨졌으나 육안으로는 첫 행 정도만 읽을 수 있다.

 

명문은 “太平興國六年辛巳二月十三日 / 元紙▨道俗香徒十▨人 / 上首▨人二▨▨”이며

내용은 “태평흥국 신사년 2월 13일에……출가와 재가 향도 등 20인이…… …상수(上首)…”이다.

 

 

여름으로 달려가는 볕은 날카로웠고 끝없이 넓은 들판에 부는 바람은 무지근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 땡볕을 피할 나무그늘 하나 변변치 않았다.

그토록 후텁지근한 더위를 고스란히 겪으며 들판에서 미동도 않은 채 계신 분, 그는 관음보살이었다.

발길 끊어진 순례자들을 대신이라도 하는 것인가.

하얀 개망초 꽃이 땅이 비좁기라도 한 듯 알기살기 몸을 맞댄 채 보살상을 외호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황량함은 가셨다.

 

그 자리에서 1000여 년, 아직 그가 들고 있는 연꽃은 시들지 않아 잎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며

또 다른 한 송이는 봉오리만 맺혔을 뿐 피어나지도 않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경상도 땅을 떠돌다가 불현듯 이곳으로 온 까닭은

그가 들고 있는 두 송이의 연꽃 향기에 젖으려 함은 아니었다.

이곳 또한 지난 번 다녀왔던 김천 은기리의 보살상처럼 반가(半跏)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더러

발을 올려놓은 족좌(足座)의 모습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은기리의 보살상은 왼발을 연화 족좌 위에 올려놓았으며

광덕리의 보살입상은 마치 연꽃으로 만든 꽃신을 신은 것처럼

두 발을 모두 연화 족좌 위에 올려놓지 않았던가.

   

이곳의 보살상 또한 반가의 자세로 앉아

왼발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리고 오른발을 아래로 늘어뜨려 연꽃으로 만든 족좌 위에 올려놓으셨다.

그것까지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양식이지만

궁금한 것은 아래로 내려놓을 발이 없음에도 왼쪽에 까지 족좌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왼발은 언제나 오른쪽 무릎위에 있을 텐데도 각각의 발을 위한 족좌를 따로 만들었으니

오른발의 족좌에는 발이 놓였지만 왼발의 족좌는 텅 비어 있다.

아직 견문이 좁은 탓인가. 나라 안 마애불에서 이와 같은 양식을 본 적이 없으니 궁금증이 동했다.

 

그러나 중국 송대(宋代)에 만들어진 불상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었으니

시기적으로 이곳 보살상과의 친연성(親緣性)을 개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천성 중경시 북동쪽의 대족석굴(大足石窟)

그리고 운남성 검천(劍川)의 석종산석굴(石鐘山石窟)에서

더러 그와 같은 모습의 족좌를 볼 수 있다.

대족석굴은 당말(唐末) 5대에서 송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석종산석굴은 대리국(大理國) 전기(前期, 937~1253)에 시작 원대(元代)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석굴이다.

 

이곳 장암리의 보살상 또한 바위 뒷면에 음각된 명문에 따르면

태평흥국 6년(太平興國六年), 곧 고려 경종 6년인 981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 정치, 외교관계를 고려해 볼 때

서로간의 문화적 교류 또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겠는가.

 

또한 삼국시대에 유행했던 도상인 반가상이

고려시대의 마애불에 불쑥 나타난다는 것도 의아한 일이다.

나라 안 마애불 중 반가상을 한 것은

서산마애삼존불의 좌협시보살, 충주 봉황리마애조상군의 반가상,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반가상,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상

그리고 문경 관음리의 마애반가상과 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의 반가상 정도 일 것이다.

 

이들의 조성 시기는 대개 삼국시대이며 문경과 증평의 그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번 다녀 온 은기리와 이곳 장암리의 보살상들이 반가상을 취하고 있으니

그때로부터 다시 나타난 세월의 간극이 긴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다분히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송나라와의 영향이지 싶은 것이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보살상이 마을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큰 길 곁에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마애불들이 산 속의 바위에 새겨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흔치 않은 것이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미륵바위, 보살상을 미륵보살로 부르고 있다.

더구나 명문에 따르면 마애불의 조성을 지원한 세력은 이 지역의 향도(香徒)들이다.

아직 마애불 인근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근처에서 사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뿐 더러

촌로들을 통해서도 사찰의 존재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며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복을 비는 미륵이라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반가사유상들이 대개 미륵보살로 조성되었으며

지역민들이 힘을 합해 보살상을 새겼지만 사찰의 존재는 찾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산이 아닌 평지의 마을을 지나는 큰 길 곁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마애보살상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혼재되어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눈으로 확인되는 도상에서는 민간신앙의 그것은 찾을 수 없다.

머리에 쓴 보관의 가운데에 작은 여래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어

존명이 관음보살상으로 규정되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알 리 없었으니 미륵으로 섬겼던 것이리라.  

 

 

그러나 숭엄한 모습을 한 지극한 경배의 대상이면 어떻고

마을 사람들이 오가며 마을과 자신들의 복을 빌고 지켜 달라며 섬기는 미륵이면 어떨까.

불보살이 잠시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머문들 그가 아름다운 법향(法香)을 머금지 않은 것은 아닐 터

 

 

 

 

 

 

 태평2년명(977) 하남 마애약사여래좌상

 

 

천년 넘는 세월 묵묵히 변치 않고 ‘홀로 웃네’

997년 ‘고석불’ 중수 … 고려 경종 만세 기원

여래좌상 조각 손을 댄 흔적 찾기 쉽지 않아

 

  

  

 

 

   

불어오는 한줄기 긴 바람과 함께 머리 조아려 절을 하고 돌아서서 다다른 곳은

경기도 하남시 객산(客山) 기슭의 마애약사여래좌상 앞이었다.

 

좀 전과는 달리 나무 그늘이 짙었으며 한줄기 폭포가 시원스레 쏟아지는가 하면

 옆에는 물맛 좋은 약수까지 철철 흘러넘쳤다.  

그곳 폭포 옆 바위에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었다.

부처님의 크기는 채 1m가 되지 않으니 작은 것 같지만 그 존재감은 짐작하기 어려울 만치 컸다.

앙증맞지만 그가 풍기는 법향은 온 숲을 채우고도 넘치며,

우러르는 눈을 통해 가슴에 차오르는 환희로움은 감당하기 버거울 지경이었다.

먼 곳에서 폭포와 함께 바라보며 세 번 절하고 가까이 다가가 향을 살랐다. 아! 정녕 아름다웠다.

사다리 놓고 그 위에 올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 마주한 그 모습은

조금 전 두루뭉술하게 마멸되었거나 마치 엇박자인양 성긴 모습을 보여주던 보살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고 섬세했다.

 

태평2년명 마애약사여래좌상은 보물 제 981호이며 하남시 교산동 선법사 경내에 있다.

불상의 높이는 93cm이며 약합은 복부에 댄 왼손으로 들었으며 법의는 통견이다.

콧날이 약간 문드러진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지극히 양호하며

중수 시기는 고려초이지만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오른쪽 어깨 부분에서부터 연화대좌 상대석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새겨진 명문은 모두 3행이며,

 

“太平二年丁丑七月九日古石 / 佛在如賜乙重脩爲今上 / 皇帝萬歲願”이다.

“태평 2년(977년) 정축년 7월 29일에 옛 석불이 있던 것을 중수하여

지금의 황제가 만세토록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곳 부처님 오른쪽 곁에 새겨진 명문의 첫 행에

태평2년정축(太平二年丁丑=977년 7월29일)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무엇인가.

태평 2년은 장암리 보살상에 비해 4년 앞 선 해인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암리의 명문은 보살상을 조성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곳의 명문은 부처님의 조성 연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첫 행의 끝에 고석(古石) 그리고 둘째 행의 첫 글자가 불(佛)이며

그 중간쯤에 중수(重脩)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977년에 오래된 석불(古石佛)을 중수했다는 말이다.

 

중수의 목적은 당시의 황제인 경종이 만세토록 사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마지막 행에 나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이에서 부처님을 살펴봐도 조각에 손을 댄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또한 약사불의 도상이나 양식이 오히려 통일신라의 그것과 닮았을 뿐

977년 당시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더구나 얼마 전 다녀 온 동화사 입구의 마애여래좌상과 비교하여 구름만 없을 뿐

3단의 연화대좌까지 갖추고 있으니 양식이 흡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다.

마애불에서 잘 표현되지 않는 3단의 연화대좌가 이곳의 그것은 뚜렷하지만

동화사의 그것은 하대석이 구름에 가려 있는 차이가 날 뿐이다.

 

물론 세부적인 표현에서 이곳은 민머리이지만 동화사는 나발을 하고 있으며

선각에 가까운 이곳 보다는 부조의 깊이가 좀 더 깊어 풍만하고

장식적인 면은 선각에 가까운 이곳의 약사불이 동화사의 그것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의 약사여래불을 바라보는데

자꾸만 동화사의 마애여래좌상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거대하지 않다는 것 때문 일 것이다.

더구나 크지 않은 그들이기에 섬세할 수 있었던 것일까.

조각의 수법은 서로 다를지언정 그들의 섬세함과 선명함은 마애불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결코 어느 것이 다른 것에 비하여 우위에 있지는 않다.

두루뭉술한 것과 또렷한 것에서 받을 수 있는 감흥은 서로 다른 것이리라.

그것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법향을 발현하느냐

아니면 그 스스로 내뿜고 있는 법향에 젖어드느냐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 모두에게서 한껏 불미(佛味)를 느끼는 것임에랴 어찌 하나만을 택하겠는가.

긴 그림자가 부처님에게 드리울 무렵 불유(佛乳)와도 같은 약수 한 잔을 들이켜고 그만 돌아섰다.

 

 

 

 

■ 가는 길

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은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나들목으로 나가 삼거리에서 우회전 한다.

1km가량 직진하면 큰길가에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으며 바로 길 아래에 있다.

 

태평 2년명 마애약사여래좌상은 하남시 교산동 선법사(031-792-2654) 경내에 있다.

도심에서 벗어나 있지만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하남시에 다다라 전화로 물어 보는 것이 좋다.

 

- 불교신문 2344호/ 7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