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광주이씨(칠곡) - 옛 종가를 찾아서 (4)

Gijuzzang Dream 2007. 12. 21. 11:44

 

 

 

 <광주이씨 옛 종가를 찾아서> 특별전  

 2007년 12월28일-2008년 2월24일까지 

 

 

  

 

  

광주이씨 가문은 조선 초기 이래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문벌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광주이씨 종가를 방문하여

2,500여 점의 유물을 기증받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남인의 대표적인 명가 광주이씨 문익공종가(종손 : 이필주)의 기증유물을 전시주제로

5개 주제로 나누어 1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우림)에서 열린

 <광주이씨 기증유물 특별전 '광주이씨 옛 종가를 찾아서'>

광주이씨 이필주 종손(왼쪽)이 전시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한편, 광주이씨 문익공 종가 종손인 이필주 선생은

“관리문제도 있지만 옛 종가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기증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전시되는 유물도 그러한 명성에 걸맞는 사료들이 주로 많다.

 

우선, 숙종대 이조판서를 지낸 이원정이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받는 과정을 보여주는 문서

신중을 기했던 당시 엄정한 행정절차를 보여주며,

그의 아들인 이담명이 경상도관찰사 부임할 때 받은 5.5m에 달하는 교서(敎書)

당시 가뭄으로 시달리던 경상도 백성들을 잘 다스리라는 국왕의 당부가 담겨져 있다.

 

또한 조부인 이원정의 신원(伸寃)을 위해 격쟁(擊錚)했던

이세원(李世瑗)의 용기를 기록한 <천감록(天鑑錄)>

명예를 생명처럼 중요시여겼던 광주이씨家 사람들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원정의 유품인 옥로, 옥관자, 갓끈 등을 비롯하여

이원정의 아버지(이도장)로부터 3대(이도장-이원정-이담명)가 받은 교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원정家에는 고문서, 전적류가 약 2,500여 점이 보관되어 왔는데

이원정 3대에 걸친 고신(告身)류 300장이 전해내려왔다. 

 

특히 실물로 처음 공개되는 현존 최대 규모의 승정원 사초(史草) 161책(冊)

이담명이 승정원과 춘추관에 재직하면서 손수 기록한 기초사료로

대개 어전에서 기록된 사초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승정원일기>와 <현종개수실록> 같은 조선 정사(正史)의 기록과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자료이다.

 

또, 157명의 노비 명단이 나오는 칠곡부 준호구(準戶口),

이도장-이원정-이담명의 3대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제작한 목판 500여 장도 실물처럼 전시된다.

 

 

 

 

그리고 광주이씨 대표적인 인물로 선조-광해군대 명신(名臣)이었던

한음 이덕형(1561-1613)의 초상화와 미공개 친필도 공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고문서의 내용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재구성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를 통해 일반관람객들과 학생들이 난해한 초서체의 고문서 속에 숨겨진 조선시대 정치사와 경제, 사회생활을

보다 재미있게 감상하고 이해하는 폭을 넓힐 수 있기를 기대한다.

 

 

5개 주제로 나누어 전시한다.

 

하나 - ‘문중의 번성’

둘 - ‘남인의 청류사대부’

셋 -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다’

넷 - ‘칠곡 대가댁의 살림살이’

다섯 - ‘칠곡 사대부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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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의 대표적인 인물 이원정 등은 현종, 숙종대 경상도 남인(南人)계를 대표하여

중앙의 서인계에 대항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숙종 초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원정은 1680년(숙종 6) 갑술옥사로 목숨을 잃었으나

그의 손자 이세원은 궁궐의 차비문(差備門 : 편전의 앞문) 밖에서 격쟁(擊錚)으로

조부 이원정의 신원(伸寃)을 위해 고하였고,

그 사연을 기록한 <천감록(天鑑錄)>은 지극한 사대부의 효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광주이씨 후손들은 그의 유품과 문화유산을 잘 보전해 오고 있었다.


 

***** <승정원일기>를 통한 '조선시대 격쟁과 언로(言路)'의 내용을 참고로 덧붙입니다. *****

 

 

 

 

 

 

 조선시대 격쟁(擊錚)과 언로(言路)  

 

  

"조상, 남편, 형, 주인의 억울함 풀어주오"

꽹과리 치며 임금에게 호소 

 

암행어사로 이름을 날렸던 박문수.

소론계열이었던 그는 한때 정적 홍계희의 탄핵으로 위기에 직면한 적이 있다.

박문수 아들 박구영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창덕궁 금호문 경비를 뚫고 임금님 계신 차비문(差備門) 밖에까지 들어가 꽹과리를 쳐댔다.

그러자 궁문이 뚫렸다는 이유로

금호문 수문장 윤동구와 함께 박구영을 하옥하여 치죄케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승정원일기> 영조 19년 2월19일 기사에 그 내용이 잘 소개되어 있다.


금호문은 창덕궁 서쪽 출입문인데,

궁궐 법식에 따르면 서쪽에 궐내각사를 두는지라 신하들이 항상 드나들어 복작거린다.

그러니 자연히 임금 가까이서 자신의 뜻을 알리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곳이 금호문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입구가 아니라 출구로 사용되고 있어 오히려 조용한 편이다.


영조 19년 2월5일 기사에는 홍계희가 박문수를 탄핵한 상소 전문이 실려 있는데,

함경감사로 있던 박문수의 여러 가지 실정을 지적한 것이었다.

경신년에 일어난 대흉년 상황을 부풀려 곡식을 타내 관내 백성들에게 인심을 썼고,

수만냥을 따로 서울로 보내 횡령했으며,

감영소속 기생 이매(二梅)에 빠져 관곡을 낭비하고 아이를 갖게 하고자

명산에 기도다니면서 수백 민(緡)이나 되는 돈을 썼다는 내용 등이었다.

그러나 곧 박문수의 혐의는 풀렸고,

탄핵을 했던 홍계희가 역풍을 맞아 오히려 삭직당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신문고를 두드리거나

임금이 들릴만한 곳에서 꽹과리를 치는 격쟁(擊錚)이 자주 이용되던 수단 중에 하나였다.

오늘날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역할을 수행하던 기능이다.

신문고가 태종 때 설치되었다고는 하나, 얼마 후 기능을 상실하였고,

그 대체수단으로 허용되던 것이 격쟁이었다.

이는 영조 때 편찬된 <속대전>에서 정식으로 법제화되었다.

 

형벌이 자기 신상에 미칠 경우, 부자 형제간의 분간(分揀), 처첩 분간, 양천 분간 등

신문고가 네 가지 사건에 허용되었던 데 비해,

 

격쟁은

자손이 조상을 위해, 처가 남편을 위해, 동생이 형을 위해, 종이 주인을 위한 것 등

네 가지였다.

가족윤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로 진전하였음을 보여준다.

함부로 격쟁하는 것을 금지하긴 했으나,

그 외에도 민폐에 관계된 것이면 외람률(猥濫律)의 적용을 받지는 않았다.


인조부터 영조까지 153년의 치세 동안‘격쟁(擊錚)’이란 단어를 온라인으로 검색해 보면,

승정원일기에서는 무려 3,535개가 나타나는데 비해,

실록에서는 128개만이 보인다.

그만큼 <승정원일기> 내용이 자세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도 언로(言路)만은 예전이 낫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사간원 간원들은 군주 잘못을 지적하는 간쟁이 주 임무였고,

면전에서 직간하다 화를 당한 인물 또한 부지기수였다.

관직을 그만 둔 자나 지방 유생들은 상소를 통해 의견을 전달했다.

왕의 일과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잠자리 들기 전에 상소문을 읽는 것이었다.


상소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부상소다.

도끼를 짊어지고 대궐밖에 꿇어앉아 상소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차라리 도끼로 목을 쳐달라는 극약처방이었다.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앞두고 올린 면암 최익현의 ‘병자지부상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를 요구하자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했던 조헌의 ‘지부상소’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결국 목숨마저 기꺼이 국가를 위해 바쳤다.

대마도로 끌려간 최익현은 왜놈이 주는 음식마저 거절하며 절개를 지키다 순국했고,

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700의병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했다.

 

유생 1만여 명이 동원된 만인소,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의 신원을 위해 41번이나 올려 선조 동의를 얻어 낸 율곡의 상소 등도

인구에 자주 회자되는 것 중 하나이다.

옛 시절로 회귀하고픈 생각이 든다.

- 경향, 2006년 11월20일,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스톰프 뮤직의 명상 음악 "바람이 흐르는 곳으로 가다" / ' Feel Ea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