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기행 ⑬] 광주이씨 - 廣城君 李克堪
광주이씨 광성군 이극감: 1427년(세종 9)-1465년(세조 11), 자는 덕여(德輿), 호는 이봉(二峯) 광성군(廣城君), 시호는 문경(文景) | ||||||||
이극감은 광주인(廣州人)으로 한양 교동(校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에 들어갔다. 문과 중시(重試)에 합격해 부수찬이 되었고 세자시강원에 들어가 세자를 가르쳤다.
세조 6년에 국왕은 "내가 세자를 너에게 부탁하니 네가 잘 보필하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고 했고 이듬해에는 "경은 세자의 스승이라 내가 믿고 중시하는 바이다"라 했을 정로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도승지, 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부모 상을 번갈아 당한 뒤 1465년(세조 11)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2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좌익공신 3등으로 광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총명함이 남달라 한 번 본 내용은 모두 기억했고 깨끗한 처세로 명성이 높았는데 한 번도 술을 가지고 손님을 접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에서 술을 담그지도 않았다.
이극감보다 열 살이 많았던 세조는 경우에 따라서는 군신 관계를 떠나 친구처럼 그를 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자신의 아들인 후일의 예종을 그에게 맡겼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이나 즐거운 일이 있을 때면 그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기쁨을 함께 했다.
그는 국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 38세에 형조판서에 임명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에 왕위에 오른 예종은 이극감에게 보은하지 못했다. 만약 이극감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승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학문이 높고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문장에 있어서는 주목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극감은 명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한다. 다만 그의 문집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학적 소양을 가늠할 기초적 자료가 거의 없어 안타깝다.
다행히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시 몇 수가 올라 있어 어렴풋이나마 명문장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그중 한 수를 소개한다.
밤 들자 수심가 소리 들려오네 夜來聞唱竹枝歌 님과 이별한 슬픔 어찌 다하랴 與君一別思何盡 애절한 마음 저 물에 실어보내네 千里春心送碧波 고려의 대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생각나게 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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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 2006/ 7/ 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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