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더듬어보고(전시)

[서울역사박물관] 광주이씨 이담명의 <승정원일기 사초>

Gijuzzang Dream 2007. 12. 15. 00:43

 

 

 

 

 

 

 

 

 

 

 

 주서(注書) 이담명의 <승정원사초>에 대하여

 

 

- 김경수(청운대 교양학부 교수)

 

 

 

1. 머리말

 

<승정원일기>는 국정의 입안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참석한 승정원의 주서가 작성한 것으로,

실록 편찬시 사관의 사초와 함께 기본 자료로 이용되는 사료이다.

왕명출납 기관인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의 기록을 말한다.

 

한 달에 한 권씩 기록되는 것이 원칙이나, 사건이 많을 때는 2권 이상으로 편성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규례에 따라 조선왕조 전 기간의 일기가 남아있다면, 3년에 한 번씩 윤달을 더할 경우 6,400여 권이 될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 이전의 일기는 여러 차례의 병화로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인조 원년(1623)-융희 4년(1910)까지 약 288년간의 일기가 남아있는데, 그 역시 몇 차례의 화재로 많이 인멸되었다.

 

내용은 월별로 작성되어 있고, 각 권 서두에 월별권강(月別勸講), 소대(召對), 개정(開政) 및 내전(內殿)의 동정을 기록하고, 이어 참석한 승지 및 주서의 명단, 그 중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 실태,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왕의 경연, 승정원의 인사관계, 각 분방(分房)을 통한 품계(稟啓)와 전지(傳旨) 등이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승정원에서 매일 취급한 역대 국왕들의 하루 일과, 지시, 명령, 각 부처의 보고, 각종 회의 및 상소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정3품의 관서이지만, 상위 관서였던 의정부, 비변사, 육조, 대간, 홍문관 등에 대한 왕명의 출납도 승정원을 통해야 할 정도로 비중이 있었다.

고관 중심의 입대(入對)에도 승사(承史)가 배석하였으며, 조보(朝報)의 작성과 궁궐문의 개폐도 담당하였다. 이와 함께 경연과 입시에 참석하고 추국(推鞫)에 관여하였으며, 관리의 임명과 상벌 및 과시(科試), 병무(兵務)까지 관여하였다. 이와 함께 의례적인 일, 즉 국가와 궁중의 제향, 국왕의 둥가(動駕)와 대외적 사대, 교린에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본 <승정원 사초>는 승정원 내에서 작성된 일기의 하나로 일체의 국정사항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즉 조선 후기의 기본사료로서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이 있으나 국정 일반의 광범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는 점과 또 매일의 기록으로서 일차적 사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2. 승정원과 주서, 철저한 기록정신의 현장

 

승정원은 국가의 모든 기밀사항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로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과 동일한 기능 및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이다.

정원(政院) 또는 은대(銀臺)라고 하며, 당상관인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명의 승지와 주서(注書) 2명,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명 및 사무에 종사하는 아전으로 서리(書吏) 25명, 조예(皂隸, 使令) 20명, 잡역에 종사하는 차비노(差備奴) 12명, 근수노(跟隨奴) 15명으로 편성되어있다.

 

승지의 경우 무관도 임명될 수 있었으나, 주서는 반드시 글 잘하는 문신으로 임명하였다. 직제상 승지는 경연 참찬관을, 주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도록 하였는데, 특히 주서는 승정원을 거친 사건과 문서 일체와 국내의 모든 국정 시행사실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승지와 주서는 당시의 국정 운영사항을 모두 알았으며 국정의 전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조선시기 가장 중요한 기밀사항 중의 하나였다.

 

특히 실무관인 2명의 주서는 세조 3년(1457)부터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하면서 겸임사관의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전임사관과 동일하게 인식될 정도로 당대 역사 사실의 기록에 철저하였다.

<당후일기(堂後日記)=注書日記=承旨日記=承宣日記> 를 비롯하여 각종의 국정 운영사항을 중심으로 일기를 기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종의 관보인 조보를 기재 배포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의 직업은 매우 중요하여 서관(庶官)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반드시 인망이 있는 사람을 선임하였고, ‘기주(記註)’를 관장하여 군주의 행동과 국가의 정사를 직접 기록하는 등 사관(史官)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즉 주서는 당대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권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던 사관과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승정원은 정종 2년(1400) 독립기구가 되었고, 중추원의 기능 중 왕명출납만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제도적 장치가 완비된 것은 세종 15년(1433)의 일이었다.

당상관인 여섯 명의 승지는 국정에 관한 의견을 상달(上達)하고, 직접 왕명을 봉행(奉行)하고 때로는 왕을 배행(陪行)하며 행정 및 사무적인 일과 단순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임무도 수행하는 등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승정원의 직제를 살펴보면,

조선 초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정3품 당상관으로 6승지(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와 정7품 실무관으로 2명의 주서, 그리고 28명의 서리로 편성되어 있었다.

6명의 승지는 정3품의 품계이지만 종2품이 수행하기도 하였으며 고유 업무인 왕명출납 외에 경연 참찬관, 춘추관의 수찬관 임무를 겸하였다. 6조(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의 업무를 각각 분할하였는데, 왕명에 의해 융통성 있게 변경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대 편찬되었던 <속대전>에 의하면

사변가주서 1인이 증원되었고, 서리는 25인으로 정해졌다.

 

이후 고종대 편찬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의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조선 초기 <경국대전> 권1, 吏典 승정원條에 마련된 직제와 비슷하지만

사변가주서와 사령이 추가되었고, 서리가 3명 감소된 점이 다르다.

 

- 조선 전기 승정원의 직제 -   

품계

인원

승지(承旨) - 정3품

6

주서(注書) - 정7품

2

서리(書吏)

28

관료(官僚)=8

서리(胥吏)=28

 

- 조선 후기 승정원의 직제 -

품계

인원

승지(承旨)

6

주서(注書)

사변 가주서(事變 假注書)

2

1

서리(書吏)

25

사령(使令)

35

驅從 (6)

手工 (3)

加出 (3)

待漏院軍士 (2)

관료(官僚)=9

이서(吏胥)=74

 

주서가 사고로 결근하게 되면 임시로 가주서를 임명하여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는데, 임진왜란 중에는 전쟁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사변가주서를 설치하는 것으로 변하였다.

선조 29년(1596) 11월 별전(別殿)의 인견시(引見時) 우승지, 사변가주서, 검열 등이 입시하였다는 기사는 사변가주서를 관찬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처음의 기사이다.

 

즉 조선후기 주서 2명만으로 승정원의 기사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선조 25년(1592)에 사변가주서를 별도로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이 한참 진행 중이었던 시대상항을 직시하고 역사 사실이 인멸될 것을 우려한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사변가주서의 임무는 전관군무(專管軍務), 칙사(勅使), 국안(鞠案) 등에 대한 문서를 담당하였고 주서 결원시 임무를 대신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승정원에서의 실무 기록행위는 주서로부터 비롯되었고, 주서에 의해 종결되었다. 즉 당상관 승지들의 감독과 그 결과에 따른 책임소재를 묻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기의 기록과 관리 시스템은 주서의 몫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 <승정원사초>의 작성과 관리 역시 주서 이담명의 역할에 따른 결과물인 것이다.

 

 

3. 철저한 기록정신의 실체, 이담명의 <승정원사초>

 

현종 13년(1672) 6월 18일부터 숙종 1년(1675) 윤5월 8일까지의 정치사가 정리되어 있는 <승정원사초>는, 승정원의 주서(혹은 가주서나 기사관) 역임시 작성된 것으로, 매우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 역시 당대 정치 현장의 생생함이 녹아 있다.

 

사초가 작성된 전후 시기의 정국은 매우 복잡하였다.

조선중기 당파의 분열과 권력을 향한 당쟁의 심화는 안개 정국을 연출하였다. 특히 현종 15년(1674) 갑인예송의 결과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4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숙종 6년(1680) 경신환국 전까지 남인 주도하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은 현종대의 역사적 사실을 <현종실록>으로 편찬하였고, 숙종 6년(1680) 이후 집권에 성공한 서인은 이의 수정을 시도하였다.

정치사의 전개과정에서 새롭게 주도권을 잡은 세력에 의해 이전 집권세력의 비판이 전개되고, 이의 정당화를 도모할 방편으로 사서편찬 작업이 모색되었는데, 남인과 서인의 교체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집권세력의 의도에 의해 편찬과 개수가 진행된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의 편찬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현종실록>은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던 숙종 3년(1677) 23책 22권으로 편찬되었다.

즉 현종이 죽은 다음 해인 숙종 1년(1675) 5월 춘추관의 요청에 따라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새로 정권을 잡으면서 국사가 다난해졌고, 당상관과 낭청이 모두 경연관과 기타 중책을 겸임하였기 때문에 편찬 작업이 순조롭지 못했다.

그 뒤 숙종 3년(1677) 2월 왕의 독촉이 있자 당상과 낭청을 증원하고 묘사유파법(卯仕酉罷法 :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오후 7시에 퇴근하는 법)을 세워 서둘러 편찬해서 그해 5월 초고를 완성하고 9월에 인쇄를 완료하였다. 즉 현종 13년 동안의 역사가 21개월 만에 완성된 것이다.

 

한편,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실록개수청을 설치하고 개수에 착수하여 숙종 9년(1683)에 29책 28권으로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되었다.

즉 2년 전에 편찬된 <현종실록>이 왕의 독촉으로 불과 서너 달 만에 급히 편찬되어 기사에 착란, 소략한 부분이 많고 또 남인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문제가 제기된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종대의 시정기가 <현종실록> 편찬 당시 세초(洗草)되어 남아있지 않으므로 별도의 방(房)을 설치하지 않고 다만 도청의 당상과 낭청만을 두었을 뿐이었다. 이들은 사관의 가장사초와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추국일기(推鞫日記)> 및 기타 각사 등록 등을 참고하여 3년 만인 1683년에 완성하였다.

 

당시 편찬에 참여하였던 편찬관들의 면면을 보면 <현종실록>은 전적으로 남인 주도로 편찬되었으며, <현종개수실록>은 서인 주도로 편찬되었다.

 

<승정원사초>의 작성자인 이담명 역시 남인계였으므로 <현종실록> 편찬 시 방에서 넘어온 초초를 바탕으로 중초(中草)를 작성하는 도청의 낭청으로 참여하였으나, 개수실록의 편찬에는 제외되었다.

 

이담명 사초의 현종 13년(1672) 6월 기사와 동일시기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기사의 동이점(同異點)을 살펴보자. 이는 이담명의 사초가 실록에 어떤 모양으로 수록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선행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실록에 수록된 18일의 본문 중 이담명의 사초가 수록된 날짜는 단 4일의 기사뿐이다. 비록 실록과 동일한 날짜의 기사가 많지는 않지만, 기사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주목된다.

 

이중에서 현종 13년(1672) 6월 정유년의 기사를 근거로 실록과 사초의 기사내용을 비교해보자.

 

먼저 <현종실록>이 <현종개수실록>보다 훨씬 소략하다는 사실이다.

이담명의 사초 역시 <현종개수실록>에 수록된 내용이 더 많고 구체적이다.

<승정원일기>가 실록보다 훨씬 상세하고 국가에서 항상 참고하는 것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승정원사초>는 이담명이 주서 역임시 작성한 사초의 원본자료로서, 실록 편찬시 제출되어 자료로 이용되었다. 그것은 본문의 상당 부분이 실록의 기사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관의 사초가 실록 편찬시 제출되어 이용되었던 것과 같이 <승정원사초> 역시 일부분의 기사가 거의 전제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

즉, 실록 편찬 시 사관에 의해 작성된 사초만큼이나 중요하게 인용된 자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종실록> 편찬 후에 자료로 이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시정기 등이 세초(洗草)되어 남아있는 것이 부족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담명의 <승정원사초> 원문을 보면, 실록에 수록된 분량은 해당 날짜의 전체 사초 분량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분량일 뿐이다. 그러나 수록된 내용만을 볼 때, 일부의 기사지만 실록에 거의 그대로 전제되었다. 이는 이담명의 <승정원사초>가 실록 편찬시 중요하게 인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종개수실록>의 기사에서 보듯이 거의 전제하다시피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실록에 수록될 내용은 당파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객관적인 내용은 수록한다는 원칙이 지켜졌음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담명의 <승정원사초> 중 <현종개수실록>에 수록되지 않은 부분은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한 <현종실록>에도 수록되지 않았던 점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이렇게 이담명이 편찬관으로 참여한 <현종실록>이 아닌 <현종개수실록>의 기사를 살피는 것은 이담명 사초와 기사상으로 상당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남인 주도로 편찬된 <현종실록>에, 그것도 이담명이 직접 편찬관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차이가 보이는 것은 별도의 분석이 요구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정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은, 역사 사실을 밝히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서인 혹은 남인이라는 당파의 이해를 떠나 사초의 이용가치가 있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다른 하나는 필요로 하는 사료의 부족이 현실적인 문제로 닥쳤을 때, 해결 대안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사료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다.

 

한편 이담명 <승정원사초>의 동년 동월 동일 기사 중 실록에 수록되는 과정에서 순서가 바뀐 경우를 살필 수도 있다. 이는 편찬관이 수록하는 과정에서 체제를 다듬고 기사를 가감하고 첨삭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정리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4. 맺음말 - 사초의 성격과 그 의의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이담명의 <승정원사초>는 그 성격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승정원의 주서 역임시 시행사를 기록한 주서사초이며, 실록의 편찬시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록의 본문에 거의 전제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관의 사초와 동일하게 인식될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둘째, 현종 13년(1672) - 숙종 2년(1675)까지 남인이 정국을 주도한 시기에 승정원의 실무관인 주서가 작성한 전형적인 주서사초이지만, 당대 정국 변동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서인에서 남인으로 교체되는 정국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종 말 숙종초의 정치 현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셋째, 현존하는 <승정원일기> 중 일실된 시기를 보완할 수 있는 역사자료이며, <승정원일기>의 원본, 즉 그 실체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넷째, 이담명의 <승정원사초>는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편찬시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 원본 사초라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과 함께 무엇보다도 주서의 <승정원일기> 작성의 실 예를 보여준다는 점과, 주서사초가 실록에 어느 정도 수록되었는가 하는 사실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성격과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초의 전체내용에 대한 정리와 분석, 이를 근거로 한 성격과 의미를 정치하게 살피는 것은 조선시기 관찬사료의 기록과 관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클 것으로 여겨진다.

 

- 소장유물자료집 2, <광주이씨 승정원사초Ⅰ(正書本)> pp. 15-22  / 서울역사박물관 / 2004. 12

 

 

 

 

◆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교  


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가장 전형적인 국가 기록물 

■인쇄하여 간행함

■배포의 목적이 아니다

■사고에 보관만 함

■편년체 관찬 사서인 것은 실록과  같다

■날짜별로 다달이 묶음

 

■정조 개인의 글

一日三省吾身

 (하루 세 번 나를 반성한다)

■재위(在位) 단위로 묶음

■재정리편집

■매달 자료를 묶음

■다달이 묶음

■기본 정보가 왕에게 필요한 것을 왕을 위해 만들었고 왕의 정보 독점이라는 면이 상당히 있다.

(나중에는 규장각에서 만들었으나 형식은 왕 개인의 기록이라는 형식을 취함)

■순조대 이하로 내려가면서 왕의 권한이 약해지니까 왕의 기록물이라는 기능이 약해짐.

정보의 양이 확 줄어든다.

분량과 밀도가 줄어든다.

■산삭(刪削: 옮겨쓰기 위주)

■베껴 씀

 

■외교관계 지방관계, 재정관계 등의 승정원에 잘 거치지 않는 것들이 올라옴

■나름의 독특한 가치가 있다.

■필사본

■비간행. 부본이 남아있어 그것이 전해짐

■이용도가 떨어짐

■수시로 살펴봄(이용도 높음)

■왕, 대신, 승지의 대출도 가능

 

■인쇄본

■필사본

■필사본

■배포 안되고

■열람은 극히 미미하다

■이용도 높음.

  궁궐에 두고, 수시로 봄

■대출 가능. 실록 만들 때 대출

 

■기사의 개수가 많다

■기사의 개수가 줄어드나 좌측의 내용에 없는 것이 있다

■외교 , 군사, 재정관계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올라오는 자료

■춘추관이 아닌 실록청에서 만들었다

■가치평가(입장반영) 들어감

■만들고 나서 정리한 책이 실록청의궤

 



 

 

 

 



- 김윤 / 'Snow Flow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