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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광주이씨(칠곡) - 옛 종가를 찾아서(1)

Gijuzzang Dream 2007. 12. 14. 18:16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원정(李元禎) 종가

 

 

 

■ 광이(廣李 = 광주이씨)

 

광주이씨 족보에 보면

그 조상들이 신라 때 칠원(漆原 : 현재의 경남 함안)에 세거해온 호족의 후예로 세습해오고 있었다.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왕건에게 귀부하자,

마의태자만을 王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하여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이에 태조 왕건은 친히 칠원성을 함락시킨 뒤 이씨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그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회안(淮安: 현재의 경기도 광주)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한편 이자성은 회안 호장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그들은 칠원성백(漆原城伯)의 신분에서 본주향리(本州鄕吏)로 몰락,

향리(鄕吏)의 직임을 갖고 아전(衙前)을 세습, 회안을 본관으로 하여 그들의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고려 성종(940) 때 회안이 광주(廣州)로 개칭되므로 따라서 본관을 '광주'로 삼아 '광주이씨'라 하였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지방 노비들 중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주위에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말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광주의 향리였던 이당(李唐)이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고,

그의 둘째 아들 이원령(李元齡=李集)이 1355년(공민왕 4) 2월

지공거(知貢擧) 이공수(李公遂) · 동지공거(同知貢擧) 안보(安輔)에 의해 문과에 급제하게 되어

벼슬에 나아가면서 가문이 번성하였다.

 

이들 중에 이당(李唐)이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니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13)을 비롯하여 광주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당(李唐)의 후손들이다.

 

광주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88명, 정승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 시조 이당(李唐)

 

이당(李唐)이 주인인 원님의 딸과 혼사를 맺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말에 광주고을의 한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무 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택일을 하고 혼수준비를 하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채단 끊는 사람이 가위를 잃어버리고 쩔쩔매고 있었다. 이때 벙어리 신부가 갑자기 말문이 터져

“문틀 위에 가위가 있다”고 말을 하니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 원님에게 알렸고

원님은 용꿈의 신통함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신랑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살면서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어려서부터 주위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이 아들 다섯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13)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므로

대부분의 광주이씨 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의 우정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최원도는 고려말 사람으로 중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최원도와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집(李集)은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웃에 살고 있는 채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화를 자초하는 결과가 되어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둔촌 이집은, 아버지(李唐)까지 화가 미칠까봐

어느 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 경상도 영천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모셔놓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 이집을 향해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매우 난처해하며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가만히 숨어들어 길 옆 짚덤불에 몸을 숨기고 하루 밤을 쉬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사람들 모르게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둡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다가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 선생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남편에게 어찌된 연고인가를 묻게 되었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엄수할 것을 다짐하였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 된 노비는

몇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게 되었다.

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하였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 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묘비에

연아(燕娥)의 묘라고 세웠고 지금도 이집의 아버지 묘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

양쪽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몸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되어 이집의 아버지(李唐)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다락방 생활 4년만에 중 신돈이 맞아죽고 세상이 변하게 되어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었다.

생사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그 후손들 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

 

조선 선조 때 한음 이덕형 선생이 잠시 경상도 도체찰사를 겸직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조상을 구해준 최씨 가문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위토를 마련해주고 양가의 후손들이

대대로 두 어른의 제사를 함께 모시도록 일렀는데 이 관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최원도가 세상이 바뀌어 서울로 올라가게 된 친구 이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었다는 시 한 수.

 

“세상을 탄식하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고향 떠나서 아버지께 드린 효성 지하에까지 미치네.

한양은 멀고 먼 곳, 구름 연기만 자욱한데

나현(蘿峴, 이당(李唐)과 최씨 어머니가 묻힌 고개이름) 위에 올라보니 수풀만 우거졌네.

앞뒤로 두개의 봉분을 나란히 세웠으니 그대와 나의 마음 누군들 알겠는가.

원하건대 대대로 지금같이 지내면서

서로의 이해를 떠나 깊은 정 변함없기를.” 

 

 

**** 둔촌 이집(遁村 李集)

 

고려 말의 학자이자 정치가 이집이 이 지역에 살았는데 그의 호가 둔촌(遁村)이었다.

이집의 호가 처음부터 둔촌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집의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성로(成老), 호는 묵암자(墨巖子)였다.

그런데 신돈이 득세하던 때 그를 비판했다가 자신을 죽일 것을 걱정하여 은둔(隱遁)했다가 돌아와서,

이름 원령(元齡)을 집(集)으로,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으로 고쳤다고 한다.

 

 

둔촌 이집 (遁村 李集 : 1327-1387)

둔촌 이집은 고려 충숙왕 14년(1327)에 태어나서 우왕 13년(1387)까지의 고려말 충신이다.

1347년(고려 충목왕), 그의 나이 20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깊이 사귀었으며,

합포종사(合浦從事)를 지내고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도승지와 같은 벼슬)에 이르렀다.

 

그는 당시 요승으로 나라의 국정을 어지럽힌 중 신돈의 잘못을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지적하여 그 죄를 논박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1368년 그의 나이 마흔 한 살 때

크게 화를 입게 되어 병든 채 홀로 되신 아버지(이당, 李唐)를 업고 가족들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어 대구 영천에 이르러 숨어 지냈다.

 

1371년 그가 3년 동안이나 피난살이를 하는 중에 신돈이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집은 다시 개성에 돌아오게 되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이집은 이도은(李陶隱)에게 말하기를

'지금 나는 다시 살아났는데 어찌 옛날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겠소!

이제부터 이름을 이집(李集), 호를 둔촌(遁村)으로 하겠소'라 하여 이름과 호가 새로 지어지게 되었다.

 

그 후 벼슬살이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향리에 내려와 여주 천녕강(川寧江)변에 살면서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침류정(沈流亭)과 김척약제 김용(金容)의 육우당(六友堂)과 더불어

서로 가까이서 정을 나누며 살았다.

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켜 당대 사람들이 목은(牧隱-李穡) · 포은(圃隱-鄭夢周) · 도은(陶隱-李崇仁)과 함께 꼽았고,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교우했던 그들은 조선이 개국한 후 태종의 수차례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후일에는 오촌(五村) 팔청(八淸) 구일(九逸)에 버금가는 분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삼은(三隱=목은, 포은, 도은)

오촌(五村=둔촌, 향촌, 어촌, 상촌, 양촌)

팔청(八淸=둔촌, 척약재, 원재, 야당, 석탄, 롱암, 정재, 덕곡)

구일(九逸=둔촌 이집, 석탄 이양중, 금천 서견, 야은 길재, 운곡 원천석, 만육 최양, 대은 이유,

                반암 민유, 처사 이온)

 

둔촌 이집이 타계한지 5년만에(1392) 조선왕조가 서는 등 나라가 심히 어지러운 때였다.

그가 죽고 자손들이 조선왕조에서 높은 벼슬을 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집에게 의정부 좌찬성이란 벼슬을 추증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669년 현종때에 광주 유림에서 선생의 사당으로 구암서원을 세웠다.

 

포은 정몽주의 글에

“7월 21 둔촌의 편지를 받고 몇 번이고 읽으니 세속 밖에서 초연한 이는

그 말하는 것도 능할 뿐만 아니라 깨끗하여 속된 사람은 능히 미칠 수 없음을 알겠다.”고 하였고

 

또 둔촌이 죽자 정몽주는

“헤아리니 그와 학문을 논한 지 삼십 년인 데 몇 번이나 청담(淸談)으로 등잔 앞에 마주 했던가!

백두에 이 마음 통할 벗을 잃었는데 그 누가 쓸 데 없이 눈물 흘린다 이르랴.” 하였다.

 

또 둔촌이 37세(1364년), 정몽주가 27세일 때 정몽주가 읊은 시에는

 

"둔촌은 세상을 피하는데 능한 분이니

산속에 숨어 살 필요는 없지

그가 가는 길이 곧으니 시속과는 거스리고

시를 지으면 정음에 가깝도다! " 하였다.

 

둔촌의 나라를 걱정한 내용의 시를 살펴보면,

 

"미친 사람들 어찌 대의 틀어진 줄 알리요

재상은 나라걱정 제집처럼 해야건만

강가에 노니는 아낙네들 호사롭게 치장하고

느릿느릿 거닐면서 '맥상화(陌上花)'만 부르네."

 

그의 문장은 이론 정연하고 맑고 깨끗하였으며 특히 시를 좋아하였다.

모든 문물에 밝았던 적암(適庵) 조신(曺伸)이 동방의 명시를 꼽는 중 이집의 시에 이르러서는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

오늘날 그의 글들이 단편으로만 남아있을 뿐 다 없어졌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둔촌 이집이 자녀들을 가르친 두 편의 훈계가 남아있는데

나라를 사랑하고 염려한 것뿐만 아니라 어버이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한 일면을 볼 수 있다.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되느니

머리맡 세월은 괴롭도록 빠르기만 하구나!

 

자식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한 권 가르치니만 못하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해 간곡히 일러둔다."

   

 

***** 광주이씨와 동이름(洞名) 유래

 

(1) 둔촌동(遁村洞)

원래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로서

고려말의 절신이요 문장도학이 높은 둔촌 이집(遁村 李集)이 살았던 집이 있어

그의 號인 遁村을 따서 ‘둔촌(遁村)고을’ 이라 했다.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획정에 따라「약수터」「굴바위」「안둔굴」「밖둔굴」을 병합하여

‘遁村’이라 하다가,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둔촌동’이 됨.

 

(2) 고덕동(高德洞, 고더기, 고덕리)

 

원래는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로서

고려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과

그의 동생 암탄(岩灘) 이양몽(李養蒙) 형제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태조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하자 절의를 지키며 이곳에 은거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이 두 형제(이양중, 이양몽)의 높은 德을 기리는 뜻으로 ‘고덕리(高德里)’라 명명하여

지금의 ‘고덕동’ 유래가 되었다.

한편, 고덕리(高德里) 음이 전화(轉化)하여 ‘고더기’라고도 하다가

1914년 경기도 구성 획정에 따라 ‘고덕리’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고덕동(高德洞)’이 되었다.

 

하일, 상일동을 지나 한강에 유입하는 '고덕천(高德川)',

원래 한강가에 있는 산으로 후미진 곳에 있다하여 ‘후미께’라 불렸는데

이양중이 이 산에 은거하였으므로 불렸던 '고지봉(高志峰)',

또 해발 88m의 응봉(鷹峰)이 한강과 접해 있으면서 고덕동과 암사동을 분계하고 있는 산줄기를

'고덕산(高德山)'으로 부르는 등 '고덕(高德)' 이라는 명칭은 이 근처 지명에 아직도 많이 남아 전하고 있다.

 

(3) 왕숙탄(王宿灘) 
고려말 공민왕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우참의에 올랐던 강직한 충절로 이름이 높았던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조선 태종의 사이에 일화가 전한다.

 

태종이 왕이 되기 전

친구의 의리로 석탄 이양중과 암탄(岩灘) 이양몽(李養蒙)이 은거한 광주땅 수리골로 찾아갔다.

그런데 이양중의 동생인 이양몽은 태종이 온다고 하자

태종이 도착하기 전에 광주 실촌면 원적산(元積山) 아래 만선동으로 피하여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양중이 홀로 평복차림으로 왕(태종)을 접대하는데, 탁주를 따라 권하고 자기는 거문고를 타니,

왕과 신하의 예는 전혀 없고 한낱 필부들의 모습 그대로인지라

수행했던 신하들이 대노하여 왕을 능멸하는 역신이니 죽여야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제지하고

“이는 진정 나의 벗이다”하면서 한성판윤을 제수하고 출사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지만

그의 굳은 의지를 돌리지 못하고 그의 아들 우생에게 대신 벼슬을 주어 격려하고 환궁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왕(태종)이 옛벗인 석탄과 암탄을 찾았다가 하룻밤 유숙하고 돌아갔다고 하여

그곳을 '왕숙탄(王宿灘)'이라 한다.

 

 

한편, 암탄 이양몽은 자손들에게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과거를 보게 되면 나의 지조를 짓밟는 행위가 되는 것이니 명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주의 위엄을 나타내고 아침저녁으로 향배를 하여 신하의 지켜야 할 도리를 다 하였다.

태종이 이 일을 듣고 그 충절을 탄복하면서 특히 하교하기를

"이양몽의 자손들에게는 영세토록 천역(賤役)을 시키지 말라.

오직 공의 충절만이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는구나" 하였다.

 

세조 때 이르러 일찍이 조회하는 자리에서 절의(節義)에 대한 말이 나왔는데,  

세조가 이양몽 후손들의 거처를 물으니

이웃에 살던 재상이  “이양몽의 현손(玄孫)되는 李明仁이 臣의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자리에서 정릉참봉(靖陵參奉)을 제수하시며 벼슬자리에 나오라 하였다.

“조상의 遺命을 어기고 내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下命에 응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명인이 일가권속을 거느리고 두역(斗驛)이란 곳으로 피해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그 후부터 자손들이 과거를 보기 시작하여

5대손 이몽설(夢說)이 무과에 급제,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종했다.

 

-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 묘비문 中

. . . 태종이 임금이 되자 평시 때의 우정으로 이양중을 보려고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궁중 선물을 보내면 이양중은 받아서 서재 뒤 송림 사이에 묻어 버렸다.

태종은 이양중을 불러도 병을 핑계삼아 안 올 것을 알고 친히 남한산 아래로 와서 이양중을 만나보고

말과 웃음을 평시와 같이 하며 무릎을 맞대고 종일토록 수작하여 가로되

"그대가 어찌 옛날 우정을 잊었는가? 옛적에 광무황제와 엄자릉의 우의를 보라.

엄자릉이 아니면 어찌 광무황제의 이름이 높았으며

광무황제가 아니면 어찌 엄자릉의 굳은 뜻을 알았으리요.

한나라 왕도 정치는 모두 우정에 있지 않은가? "하니

 

이양중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옛날 우정이 아니면 어찌 오늘의 대작이 있으리요" 하고

因하여 길재(吉再)가 황화(黃花)로 백이(伯夷)를 제사(祭祀)지낸 일을 말하니

태종이 이양중의 굳은 뜻을 알고 작별하고 환궁하니, 대신들이 이양중을 탄핵하되,

"이양중은 일개 필부로 군주를 무시하고 감히 사복으로 군주와 같이 무릎을 맞대었으니 그 죄 가장 크다"

하니 태종이 가로되 "무릎을 대고 앉음은 우정이 두터움을 의미함이라,

경들은 어찌 옛날 광무황제 배 위에 엄자릉이 발을 얹은 일을 모르는가?

자고로 왕자에게 신하 노릇 안하는 친구가 있느니라" 하니

이로부터 대신들은 감히 이양중을 헐뜯지 못하더라.

 

태종이 또 거문고를 만들어 거문고 등 위에 친필로 시를 써서 이양중에게 보내니 그 글 뜻은

"술 석 잔과 거문고 한 곡조를 타니 부춘산 천년에 엄자릉 같은 굳은 지조를 굴복 시키지 못하리로다" 였다.

즉시 석탄 이양중의 큰 아들 이우생(李遇生)에게 사온주부를 특배하였다.

 

- 암탄(巖灘) 이양몽(李養蒙) 묘비문 中

. . . 석탄 이양중의 동생 이양몽(養蒙)은 공민왕조에서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대광보국숭록대부행(大匡輔國崇祿大夫行) 판도사판서(判圖司判書)시고

호부를 수임하시어 재화를 잘 다스리시고 나라가 부하고 병력이 강하게 될 계책에 힘썼다.

 

고려의 국운이 다 됨을 알고 남한산장으로 도피하여 농부가 되었다가

조선의 개국 후에 '왕촉전(王蜀傳)' 을 지어 석탄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형은 정몽주와 같이 고려조를 섬기다가,

정몽주는 나라를 위해 죽고 형은 아직 생명을 보존하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하니

석탄 이양중이 이날부터 만 권 서책을 다 한강에 던지고 의관을 벗어 불사르고

형과 동생이 더불어 광주 남한산성 아래 동부면 덕풍리로 퇴거하였다.

영영 산에서 나오지 않고, 조선 대신들과는 절대 상대하지 않으니

지금 광주 사람들은 석탄 형제의 굳은 절의를 옛날 백이와 숙제에 비하고

경기도 광주 구암에 서원을 짓고 둔촌 이집선생과 석탄 이양중선생을 봉행하였다.

 

암탄 이양몽의 덕을 세상에 밝히며 명하니 贊曰,

 

천운(天運)이 수(數)가 있고 지기(地氣)가 서로 통해

수양산(首陽山) 고사리를 원적산(元積山)서 캐였도다.

백이숙제(伯夷叔齊) 맑은 절개 암탄공(巖灘公)의 어지신 뜻

광릉땅 동쪽 준령(峻嶺) 공민봉(恭愍峰)이 주봉(主峰)이라.

충심은 향일(向日)하고 절개는 의송(依松)하니

두 임금 불배(不拜)함은 만세에 엄훈(嚴訓)이라.

반천년 오래 세월 영명을 빛내노니 수만년 지나도록 무궁하게 전하소서. 

 

 

***** 광주이씨(廣州李氏)는

고려말의 생원 이당(生員 李唐)을 시조로, 그의 둔촌 이집(遁村 李集=원령, 元齡)을 1세조로 한다.
이집(李集)은 원래 이인령(李仁齡), 이원령(李元齡), 이희령(李希齡), 이백령(李白齡), 이천령(李天齡)의

5형제였는데, 그 후손들은 이 5형제를 각각 1세조로 하고 있다.


한편 광주이씨 계파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달라

이당(李唐)의 후손들과는 파(派)를 달리하여,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이익비(李益庇)의 현손(玄孫) 이록생(李祿生)을 중흥 시조로 하는 율정 이관의(栗亭 李寬義)의 후손과

이익강(李益康)을 중흥 시조로 하는 석탄 이양중(石灘 李養中)과 암탄 이양몽(巖灘 李養蒙)의 후손이

그것이다.

 

 

 

 

■ 칠곡의 입향 유래

 

광주이씨가 경북 칠곡에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게 된 것은,

둔촌 이집(李集, 1327-1387)의 증손되는 이극견(李克堅)이 한양에서 성주목사가 되어 내려갈 때

그 둘째아들 이지(李摯)를 책방도령으로 데리고 갔었는데

팔거현(八莒縣, 칠곡의 옛지명) 상지촌(上枝村)에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최하(崔河, ?-1535)의

사위가 되었다.

이극견(李克堅)이 내직(통례원좌통례, 通禮院左通禮)으로 돌아올 때,

아들 이지(李摯)는 팔거현에 남게 되었고,

그 후 곧이어 연산군 당시 갑자사화(1504)때 이극견(李克堅)은 형인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을 중심으로 종반(從班) 숙질(叔侄)들이 참화(慘禍)를 당하게 되고 이극견도 가산이 몰수되자

이극견은 처가인 전북 옥구군 임피 유촌(沃溝郡 臨陂 柳村)으로 내려가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다가

그곳에서 죽게 된다.

 

그런데 이곳 이극견의 墓所에 얽힌 일화가 있는데,

이곳 임피로 내려온지 얼마 되지않아 이극견의 부인 창녕성씨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산소자리를 정하게 되었는데 둘도 없는 명당이라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광중(壙中)에다 물을 날라다 부으니 다음날 장례를 치르려던 상제들이 이를 보고 대경실색하여

다른 곳에 묘소를 쓰고 그 곳을 다시 메워버렸다.

그런데 그 후 남편 이극견이 돌아가자 이곳에 묻게 되었는데

이극견의 후손이 오늘과 같이 대성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이극견의 아들 이지(李摯)는 팔거현에서 그대로 난세를 피하여 살게 되어

곧 칠곡에 들어온 광주이씨의 입향시조가 된 것이라 한다.

 

남으로 내려간 광주 이씨는 점차 부근의 유력가문과 혼맥을 맺으면서 재지적 기반을 다져갔다.

선산(善山) 지방의 신천강씨(信川康씨), 선산김씨(善山金氏), 성주(星州) 지방의 벽진이씨(碧珍李氏),

대구의 인천최씨(仁川崔氏) 등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나아가 후손들이 매원(梅院), 석전(石田), 지천, 심천  등지로 널리 퍼져 대를 이어

문명이 높은 많은 인물을 배출(문과급제 20인)하였고, 현재 약 1500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재지적 기반을 굳게 다진 광주이씨 칠곡파는

17세기 들어 석전파에서 3명의 과거합격자가 배출됨으로써 명문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도장(李道長), 이원정(李元禎, 1622-1680), 이담명(李聃命, 1646-1701) 3대에 걸쳐

과거합격자를 배출했던 것이다.

 

이지(李摯)의 玄孫(손자의 손자, 즉 高孫)인 이윤우(李潤雨, 1569-1634)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에게 사사하여 문명이 높았으며 인조 때 공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성주 회연서원, 칠곡 사양서원, 회령 오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윤우(李潤雨)의 子 이도장(李道長)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에게 사사하여

문명이 높았으며 인조 때 부응교 사간원사책을 역임하였고 좌찬성에 양관대제학이 증직되었고,

이도장의 장남 이원정(李元禎)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는데 증영의정(贈領議政)에 시호 문익공이고,

차남 이원록(李元祿)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이원정의 장남 이담명(李聃命)은 이조참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차남 이한명(李漢命)은 홍문관교리를 역임하여 사대사림을 거친 명문을 이루었다.

 

 

 

한편 이원정, 이담명 부자는 당색상으로는 남인(南人)이었다.

두 사람은 남인과 노론(老論)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숙종 전반기에

남인공론(南人公論)을 주도하던 위치에 섰다.

그 결과 18세기 이후 남인계열 내에서 칠곡 광주이씨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원정은 숙종 전반기에 이조판서를 지냈고,

이담명은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으로 재등용되어 경상감사까지 지냈다.

 

그러나 머지않아 화려했던 석전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줄게 된다.

이원정이 경신출척(1680)때 희생되고

나아가 갑술환국(1694) 이후에는 일문의 사환(仕宦)이 거의 끊어졌던 것이다.

갑술환국 이후 석전파는 중앙정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내게 된다.

 

 

  ***** 이당(李唐)에서 석전파 이담명(李聃命) 까지의 광주이씨 계보

 

 

 이당(李唐) - 子 둔촌 이집(李集) - 둔촌의 증손(曾孫) 이극견(李克堅) - 子 이지(李摯)

 - 이지(李摯)의 玄孫(손자의 손자, 즉 高孫) 이영우(李榮雨), 이윤우(李潤雨) 

 - 이윤우(李潤雨)의 2子 이도장(李道長) 出系 / 이영우(李榮雨)에게 入系 

 - 子 이원정(李元禎) - 子 이담명(李聃命)과 이한명(李漢命)

 

 

 

■ 팔극조정(八克朝廷)

 

조선 세조에서 예종을 거쳐 성종 대에 이르는 기간에 ‘팔극조정(八克朝廷)’이란 말이 한때 떠돌았었다.

조정 회의에 무려 8명의 ‘극(克)’자 들어가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집안 형제들이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장 · 차관 자리를 광주이씨 형제들이 거의 차지했다는 뜻이다.

 

‘극’자는 집안 항렬이었다.

제일 큰형인 이극배(李克培)는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이극감(李克堪)은 형조판서,

셋째인 이극증(李克增)은 병조판서,

넷째인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은 병조 · 호조판서,

다섯째인 이극균(李克均)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여기까지가 ‘오극(五克)’이고,

나머지 삼극(三克)은 사촌형제들이 차지하였다.

 

사촌형제인 이극규(李克圭)는 이조참판,

이극기(李克基)는 공조참판,

이극견(李克堅)은 좌통례를 지내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렇게 해서 8명이다.

 

이 ‘팔극조정’은 보학(譜學)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광주이씨들의 성세(盛世)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집안은 이후에 벌어지는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나온 인물이 둘째인 이극감의 후손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572)이다.

흔히 ‘동고 대감’으로 불리는 이준경은

인재를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발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수원대 이사장인 이종욱씨가 동고 대감의 후손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냈고,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왔던 이수성씨는 이극견의 후손이다.

현재 사법부의 수장인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도 ‘팔극’가운데 한 명인 이극돈의 16대 후손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고향인 전남 보성군 득량면 강골(江洞)마을은

16세기 후반부터 광주이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광주고검장을 지낸 이용식(李容植) 검사도 같은 ‘용(容)’자 항렬이다.

민주당 5선 의원을 지낸 이중재(李重載) 의원은 용자 다음의 ‘재(載)’자 항렬로서 강골 출신이다.

이중재의 장남인 이종구(李鍾九)는 현재 한나라당 서울 강남갑구 국회의원이고,

둘째인 이종욱(李鍾旭)은 외국어대 학장을 지냈고, 셋째인 이종호(李鍾鎬)는 광주지법 부장판사로 있다.

 

보학을 연구하다 보면 이처럼 ‘왕대밭에서 왕대 나오고 쑥대밭에서 쑥대 나오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 조용헌 살롱, 조선일보

 

 

 

■ 사양서원(泗陽書院)

 

 

지   정 - 문화재자료 117호

명   칭 - 사양서당 강당(泗陽書院 講堂) 경회당(景晦堂)

소재지 -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 43-1

소유자 - 광주이씨 석담공 종중

 

 

 

지천면사무소에서 낙화담쪽으로 가다 보면

낙화담 제방 좌측 아래 입구에 사양서원((泗陽書院)이 위치해 있는데,

한강 정구(寒崗 鄭逑, 1543∼1620), 석담 이윤우(石潭 李潤雨, 1569∼1634),

송암 이원경(松巖 李遠慶, 1525∼1571)을 배향하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 효종 2년(1651)에 한강 정구가 일생동안 학업을 닦았던

칠곡면(漆谷面) 사수동(泗水洞, 현 대구직할시 편입)에 향인들이 한강 정구 선생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문인인 석담 이윤우를 배향하여 건립하였다.

한강 정구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거치고 만년에는 후진 양성에 전념한 학자이다.

다방면에 학식이 깊었는데 특히 예학에 밝았다.

 

숙종 20년(1694)에 현 위치인 신동 상지, 발암 아래로 이건(移建)하면서

한강 정구를 ‘고결하고 덕망 높은 선비'라고 강조했던 송암 이원경도 추가 배향하였다.

 

당시에는 묘우(廟宇)와 강당(講堂), 폄우재(貶遇齊), 정완재(訂頑齋), 봉하문(鳳下門), 양현청(養賢廳), 

주고(廚庫) 등이 있었으나,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강당(講堂)인 경회당(景晦堂)만이 남아있다.

경회당(景晦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어간(御間)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로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다.

 

 

○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조선 중기 때의 문신. 학자로서 자는 도가, 호는 한강, 시호는 문목, 본관은 청주이다.

오건에게 수학하고 조식,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573년(선조 6년) 31세 때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삼가, 의흥, 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38세 때인 1580년에야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까지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43세 때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 간행에 참여하고

 그 후 통천군수.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성천부사. 충주목사.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66세(1608년: 광해군 즉위년)때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자고 상소하고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 1612년(광해군 4) 성주에서 칠곡의 노곡으로 이거하였다가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상소, 영창대군을 구하려 하였고

향리에 백매원을 만들어 유생들을 가르쳤으며,

1614년 다시 칠곡 사수동으로 옮겨 후진교육에 진력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 병진, 의약,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로 추증, 또 1657년(효종 8)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성주의 회연. 천곡서원, 충주의 운곡서원, 창녕의 관산서원 등과 통천의 경덕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한강집>, <태극문변>, <와룡지>, <역대기년>, <관의>, <혼의>, <장의>, <계의>, <갱장록> 등이 있다.

 

○ 이윤우(石潭 李潤雨, 1569-1634)

조선 중기 때의 문인으로 자는 무백, 호는 석담, 본관은 광주이며

23세 때인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 초 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검열로서 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의 비위사실을 직필했다가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

그 뒤 예문관의 대교. 봉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 찰방을 거쳐 1613년 경성판관을 역임,

대북의 전횡이 심해지자 사직했다. 인조반정 뒤 이조정랑에 이어 교리. 응교. 사성 등을 거쳐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석담집>을 남겼다.

 

 

○ 이원경(松巖 李遠慶, 1525-1571)

조선 중기 때의 문인으로 자는 택선, 호는 송암, 진사 덕부의 자로서 고결하고 덕망높은 선비로 추존받았다.

1694년(숙종 20) 사양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묘소는 상지(지천면 신리 웃갓)에 있다.

 

 

■ 광주이씨 집성촌(세거지)

경북 칠곡군 왜관읍과 지천면, 석전면, 매원면, 심천면 일원

경남 창녕군 계성면 신당리, 경남 울주군 일원, 경남 하동군 화개면

전북  완주군 고산면, 고창군 해리면

전남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와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무갑리,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황해도 은률군 일도면, 평북 의주군 일원,

평남 안주군 대니면, 개천군 일원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 말엽, 광주이씨(廣州李氏)의 1대조 이집(李集)은

당시에 공민왕의 총애를 받은 신돈(辛旽)의 전횡(專橫)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가 닥쳐올 화(禍)를 피해

아버지 이당(李唐)을 모시고 영천(永川)으로 피했다가 신돈이 주살당한 뒤에야 돌아와 살았다.

원래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곧 벼슬을 그만두고 여주 천녕현(驪州 川寧縣)으로 퇴거하였는데

이 무렵부터 지금의 성남시와 광주군 일원에 세거해 왔다.

 

이집(李集)의 큰아들 이지직(李之直)의 자손들은

6세 이수완(李秀莞)이 전남 보성에 사는 전주 이언정(李彦廷)의 딸과 혼인하여 그곳에 머물러 살면서

일부가 보성을 중심으로 세거했고,

일부는 5세 이지(李摯)가 성주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이극견(李克堅)을 따라 갔다가 역시 팔거현(지금의 경북 칠곡)에 사는 최하(崔河)의 딸과 혼인하여 그곳에 터를 잡은 이래로 칠곡(漆谷)에 살게 되었다.

 

이집(李集)의 둘째아들 이지강(李之剛)의 손자 이극령(李克齡)이 

재종(再從)되는 이극균(李克均)과 이세좌(李世佐) 등이 연산군 갑자사화를 당함을 보고

지금은 경북 울진에 속해 있는 평해(平海)에서 숨어 살았으므로 이후 후손들이 그곳을 세거의 터로 삼았다.

 
이집(李集)의 막내아들 이지유(李之柔)의 손자 이용호(李用浩, 克晙)가 순천군수를 지낸 뒤에

평남 개천군 사촌(价天郡 沙村)으로 가 뿌리를 내린 뒤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세거하였다.


 

 

■ 광주이씨 대표적 인물

이집(集) - 호는 둔촌(遁村), 고려 말의 학자, 구암서원(경기도 광주)에 배향

이지직(之直) - 둔촌 이집의 아들로, 호는 탄천(炭川), 형조참의를 지냈는데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

                   - 운곡서원(경남 창녕)에 배향

이준경(浚慶) -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호는 동고(東皐).

                   - 구게서원(충북 청안)과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됨

이윤우(潤雨) - 선조 때 병조판서

                   - 회연서원(檜淵書院,, 경북 성주), 사양서원(泗陽書院, 경북 칠곡),

                     오산서원(鰲山書院, 함북 회령)에 배향

이덕형(德馨) - 이극균의 현손으로 호는 한음(漢陰), 광주이씨 가문의 큰별이다.

                     선조 때 32살에 대제학,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

                   - 용연서원(경기 포천), 근암서원(경북 상주), 소수서원(경북 영주)에 배향

 

이원정(元禎) - 호는 귀암(歸岩), 효종 때 도승지 4번, 대사성 7번, 대사헌 4번, 이조판서

이담명(聃命) - 호는 정재(靜齊), 이조참판, 숙종 16년(1690) 영남 대흉년에 관찰사로 치적을 남김

 

■ 광주이씨 오늘날의 유명인물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용훈 대법원장, 이경재 국회의원, 이순재 탤런트, 이승엽(야구선수) 등

 

 

 

 

 

 

 



- 이사오 사사키 / "Place Where We Can Be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