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서 이항로의 삶과 사상
구한말 시대정신 이끈 시골선비 도(道)와 진리만 추구하던 화서 이항로(1796~1868)의 서재에 나랏임금에게서 벼슬에 임명했다는 교지(敎旨)가 내려왔다.
학생 이광로(李光老 : 항로의 초명)에게 장사랑(將仕郞)의 품계에 휘경원(徽慶園) 참봉(參奉)이라는 종9품에 해당되는 말단의 벼슬이 내려진 것이다. 그때가 1840년 6월22일, 화서의 나이 49세였다.
이조판서의 추천으로 초직인 참봉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벌열의 집안도 아니고 세신고가(世臣故家)의 집안도 아닌 시골 선비가 학문적 명성이 높아 참봉의 벼슬에 임명됨은 우선 가장 명예롭던 산림(山林)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어서 환호작약할 만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화서 이항로는 그런 직책에 취임하지 않고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부족한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간곡하게 밝히고 말았다. 이항로에게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에 임명하고 전라도사로 바꾸었으나 사퇴하고 벼슬에 오르지 않았으니 73세이던 3월의 일이었다. 73세의 극노인에게 하급의 벼슬을 내렸으나 24년 동안 갈고 닦은 경술(經術)의 덕택이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해 7월에는 사헌부 지평의 벼슬이 내렸으니 산림으로 대접함이 분명해졌다. 같은 해 겨울에는 사헌부 장령이 내려지고 75세인 1866년 9월8일에는 통정대부 정3품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임명되면서 천하에 이항로의 이름이 벽계산림(檗溪山林)으로 울려퍼졌다.
이 무렵은 고종3년의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때로 도하에 인심이 흉흉하고 난리가 났다고 세상이 온통 뒤집히던 때여서 이항로가 동부승지로 입궐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민간에서도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면서 국민적 기대를 안게 되었다. 둘째 아들 이박과 제자 김평묵(金平默)이 도보로 수행하였다. 나라의 큰 은혜를 입은 산림 이항로는 궁궐에 이르자 바로 사직상소와 함께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정책건의서인 상소를 올렸다. 바로 이 상소가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백년 이래의 가장 바른 목소리인 명상소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상소였다.
상소를 올린 며칠 뒤에는 그의 최종 벼슬이자 재신(宰臣)의 지위인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올랐다. 상소로 사직했으나, 그는 산림으로서의 국가적 예우는 충분하게 받은 셈이었다. 사후 34년이 지난 1902년 광무 6년에야 정2품인 자헌대부 내무대신에 증직되고, 1905년인 광무9년 황제의 칙명으로 시호를 내렸으니 문경(文敬)공이라는 영예로운 명칭이었다. 청화산(靑華山) 서쪽으로 10리 지점인 벽계수가 철철 흐르는 물가에서 태어났다. 정조 16년인 1792년 2월13일 해 뜰 무렵인 묘시(卯時)에 경기도 양평군(당시는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이란 곳이었다. 바로 그 태어난 집이 ‘청화정사’이다. 선대에는 경기도 고양군의 벽진이씨 집성촌에서 살다가 그처럼 깊은 산속으로 피난와서 살면서 고향이 된 곳이었다. 우록헌 이회장은 전답도 많지 않은 산골인 그곳에서 큰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나 화전(火田)농으로 조를 백석 이상을 수확했다니, 그런 벽지에서는 상당한 재산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화서 이항로가 태어난 ‘청화정사’는 아버지 때부터 와가로 덩실하게 세워졌고, 그곳이 바로 화서학문의 보금자리였으며, 한말 의병운동과 척양척왜의 기본논리인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시대정신이 싹텄던 곳이다.
화서의 영향을 받은 대유들로 일본을 물리치고 조선의 전통사상을 고수하자던 화서의 문하 제자들이 그곳에서 배출되었다. 중암 김평묵(1819~1891), 성재 유중교(1832~1893), 면암 최익현(1833~1906), 의암 유인석(1842~1915)은 위정척사운동의 이론가로, 실천가로서 모두 벽계리의 ‘청화정사’에서 배출된 조선의 마지막 의인들이자 당대의 학자들이었다.
필자의 증조부 박임상(朴琳相)은 젊은 시절 중암 김평묵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전남 무안군의 지도(智島)에 귀양 왔던 중암의 문하를 찾아 10대 말에 공부하였고, 30대 초반에는 경기도 포천에 계시던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화서 이항로는 바로 우리 집안의 학문연원이다. 시간만 허용하면 우리 집안 학문의 고향인 벽계리를 찾으려는 마음을 잊지 못했는데, 이번 가을에야 겨우 짬을 내서 평생 동안 찾고 싶던 계곡의 시냇물이 콸콸 흐르는 그곳, 벽계리를 찾았다.
화서의 고택인 ‘청화정사’는 우람한 고가이자 근래에 새로 보수하여 볼품이 좋은 건물이다.
잊혀질 세월이 흘렀으나, 양평군에서 유지관리하는 화서기념관에는 그래도 몇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후손 이록기씨의 안내로 찾은 당시 화서의 유적지는 그런대로 은은한 옛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시절 이래로 세상을 뜨던 날까지 그가 거닐고 소요하면서 이름을 짓고 시를 쓰며 표지 글씨를 남긴 명소들을 찾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정사 앞의 시냇가에 우람하게 자란 느티나무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정사 근처의 명옥정(鳴玉亭)의 터도 있고, 낙지암(樂志巖)이라는 바위는 개울 속의 커다란 바위인데, 물이 주는 때는 언제나 화서가 그 바위에 올라가 쉬고 즐기면서 마음을 달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낙지암에서 50여m를 올라가면 바위에서 내려오는 물결이 하얀 눈을 뿌리는 것 같아, 분설담(噴雪潭)이라는 조그마한 물웅덩이니 그런 이름도 모두 화서가 운치 있게 명명하여, 오늘까지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화서는 바로 그런 유적지에서 진리와 도를 찾느라 80평생을 배회하고 소요하면서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학문의 대업을 완성했다. 벽계마을 동쪽으로 머지않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오래전에 폐사가 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화서의 시집이나 연보에는 수시로 등장하는 절이자 암자인 고달산사인데 애석한 일이다.
연보 24세 조항을 보면 25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해 28세에 복을 벗자, 그해 겨울에는 고달산의 절에서 독서를 했다고 기록하고는, “선생의 평생 동안의 독서는 고달산에 있는 절에서 가장 많이 했다”라고 적고는 고달사에서 전에 지었다는 시 한수를 써놓았다. 평생토록 북한강을 넘어 서울 쪽인 서쪽으로는 발 한 번 내디디지 않을 정도로 외부의 출입을 그치고 오로지 독서와 사색으로 세월을 보내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강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들이 거닐고 놀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강했던 청화정사의 아름다운 주변은 우선 흐르는 벽계수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당시 그곳의 지형을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그때는 마을 곁의 시냇물 위에 배가 그려져 있으니, 아마도 북한강을 타고 배가 오르내리면서 교통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후손이 설명해준 이야기였다. 청화정사의 뒤쪽 등성이로 오르면 화서 이항로의 무덤을 비롯하여 벽진이씨의 세장산이 아름답게 가꿔져있다.
본디 화서의 묘소는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으나, 최근에 선산으로 옮겨서 오늘의 자리에 있다고 했다.
묘소로 오르는 입구에는 커다란 화서의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에는 면암 최익현의 도도한 문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면암은 화서의 큰 제자이자 한말의 의병장으로 의병싸움에 패하여 일본헌병대에 붙잡혀 일본의 영토 대마도에 유폐되었다가, 왜놈의 쌀은 먹을 수 없다고 단식하다가 노환이 도져 끝내 순국했던 의인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 화서와 면암, 이(理)를 높여서 왜군을 퇴치하자던 그들의 혼은 지금도 그곳에 살아 있었다. | ||||
- 理를 중심에 두고 氣로써 이끌다 -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철학 시를 짓고 노닐던 이항로, 젊은 날의 시심은 곱기만 했다.
갠 달처럼 밝고 맑은 마음을 지니자는 화서의 뜻이 담겨 있다. 이렇게 경학과 문학을 함께 익히며 깊고 넓게 사색에 잠기던 화서는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사유의 세계를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일생동안 끌고 가던 학문적 논리이자, 그곳 청화정사를 찾은 제제다사들의 제자들에게 전해준 그의 이론이었다.
“이(理)가 주가 되고 기(氣)가 객이 되어야 한다.” 그가 깨달은 지혜이자 표방한 학문의 기치였다. 원리와 원칙에 충실하여 근원적인 주체성을 끝까지 지키자면 이를 중심에 두지 않을 수 없고, 중심의 뜻과 이론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이끌어주는 힘인 기가 객의 자리를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화서의 핵심 사상이었다. 한말 3대 성리학자가 경기와 호남, 영남에서 태어나 그들은 서로의 학문적 교류나 사승(師承)의 관계도 없었건만 동일하게 주리(主理)적인 성리학 체계로 같은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기호의 화서 이항로, 호남의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 영남의 한주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지역의 대표적 학자의 위치에 올랐는데, 동일하게 주기(主氣)를 배척하고 주리적 성리학 체계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화서와 노사는 서양의 세력이 물밀듯 몰려오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혼란한 시기를 살면서 강고하게 사(邪)인 서양을 물리치고 정통의 유교논리이자 공맹(孔孟)의 논리이면서 중화주의(中華主義)에 포괄된 논리만을 굳게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확고하게 주장한 학자였다. 대원군의 뜻과 부합하여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이라는 높은 산림(山林)의 지위에 올랐고, 그런 산림의 영향 아래 수많은 제자들이 척사위정의 운동에 앞장서고 의병대장이 되어 망해가는 나라에 마지막 충성을 바치는 애국자들이 속출하였다.
화서의 제자로 척사운동의 효장은 중암 김평묵이며 의병대장은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린석이었다. 노사의 제자로는 손자 송사 기우만과 집안의 조카인 성재 기삼연이 호남의 의병장으로 스승의 뜻을 계승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에 정암 조광조가 억울한 누명으로 사약을 받고 유배지 호남의 능주에서 죽으면서 지은 유시(遺詩)에, “아버지처럼 임금을 사랑했고, 집안 걱정하듯 나라를 걱정했다”(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라고 읊었는데, 화서 이항로는 언제나 그 시를 외우면서 나라의 신민(臣民)이라면 언제나 아버지처럼 임금을 섬기고, 집안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지녔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청화정사의 주변에 맴돌고 있었기에, 화서의 문하에서 최익현이나 유인석 같은 뛰어난 의병장이자 탁월한 애국자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맹자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捨生取義)라고 했는데, 화서는 생활철학에서 언제나 그런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가 병인양요 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올린 상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당시의 긴급한 대책을 말하고 백성의 질곡을 제대로 올려 바쳐, 100년 이래의 최고 명상소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어떤 고관대작도 나라의 문제점을 전혀 지적할 수 없을 때에, 73세 고령의 벽계산림은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백성의 아픔을 당당하게 상소로 말했으니, 그의 용기와 실천력이 어느 정도였나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화서는 이기(理氣)는 단정적으로 이물(二物), 즉 두 존재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화서의 이기이물(理氣二物)은 이기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 반드시 차등이 있다고 하여, 이는 높고 기는 낮다는 이존기비(理尊氣卑)이고, 이는 명령하고 기는 명령을 받는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가 주(主)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이는 순수해지고 기는 올바르게 되어 만 가지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고 온 세상은 편안해진다” (理爲主 氣爲役 則理純氣正 萬事治而天下安矣)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중화주의와 반대되는 왜양, 즉 서양이나 일본은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와 결합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척사위정의 논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외세의 침입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급한 시기에 유교적 조선의 정통을 고수하는 논리가 주리(主理)와 연결되고 그러기 위한 행동강령은 왜와 양을 배척하는 주전론(主戰論)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화이론(和夷論)을 배척하며 싸움을 독려했던 이유가 거기서 나왔다. 반세계화의 퇴영적인 논리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부터 150년 전의 유교주의 국가로서의 대응은 그런 점을 정통의 논리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일 수 있었다.
만약 그 무렵 척사위정의 논리조차 없었다면, 개항과 교역의 준비가 전혀 없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척사위정의 논리와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이 한다는 논리가 합해져 의병운동과 직접투쟁의 실천이 가능하여 애국운동과 구국운동이 망해가는 나라의 민족혼을 불태우는 역사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않을까.
화서의 제자들이 이끈 의병운동은 그래서 한말의 마지막 역사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송나라의 주자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경영했다. 퇴계는 도산구곡(陶山九曲), 율곡은 고산구곡(高山九曲), 우암 송시열은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경영했듯이, 화서는 벽계구곡을 경영하였다. 현인군자가 세상을 잊고 학문연마에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도록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선중기의 시인이자 학자이며 영의정이던 사암 박순이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이제신(李濟臣), 남언경(南彦經), 김창흡(金昌翕) 등 당대의 명인들이 또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백계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는 어진 이들이 살아갈 흥취를 일게 했던 곳이다. 수천년을 흐르는 물에도 한 치의 변화 없이 화서가 뜻을 즐기면서 노닐었던 ‘낙지암’은 오늘도 그대로 있었다. 흐르는 물속에 솟아 있는 바위를 ‘뜻을 즐기는 바위’라고 이름하고 때때로 올라가 시를 짓고 마음을 맑게 하는 수양의 장소로 삼았다. 지금도 물은 흐르지만 바위는 굳게 버티면서 화서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고산 임헌회(鼓山 任憲晦)-간재 전우(艮齋 田愚)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맥이 있었고,
화서-중암 김평묵-성재 유중교-의암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같은 노론에서 대립하였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 학맥이다.
전우 일파가 나라가 망해가도 선비는 도(道)만 지키면 된다고 은둔의 생활로 일생을 마칠 때, 화서학맥의 많은 제자들은 의병운동과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역사는 누구 편을 들어줄 것인지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는 화서의 행장(行狀)을 지어 선생의 일생을 유감없이 기록했고 화서어록(華西語錄)을 저술하여 그의 철학사상을 소상하게 밝혔다. 성재 유중교도 선생의 사상을 남김없이 추출하여 어록으로 정리했으니 부족함이 없는 기록이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의 신도비명을 저작하여 화서의 삶과 사상을 넉넉하게 서술해놓았다. 그 이외의 수많은 제자들이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정리하고 기록하여 문하의 번성함으로는 화서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일생은 ‘연보’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화서가 세상을 떠난 30년 뒤인 1899년에 문집은 간행되었는데, 후학들의 연구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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