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파주 적성 객현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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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675m 감악산 정상(파주 적성 객현리).
동행한 사진기자가 70~80도쯤 돼 보이는 가파른 경사면에서 위태롭게 사진을 찍고 있다. 곁에 권순진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가 씩 웃는다.
이번 기획을 위해 고고학자들과 문화유산 현장을 다니는 즐거움이 바로 이거다. 파닥파닥한 생선을 건져 올리듯, 바로 현장에서 생생한 유물이나 유구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군사보호지역, 그리고 민통선, 비무장지대 등으로 묶이는 바람에 사람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던 ‘덕분’이겠지. 비석은 저 멀리 개성 송악산을 바라보고 있고, 삼국시대부터 요처였던 칠중성을 품에 안고 있다. 굽이굽이 사연을 담은 임진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고…. ○○사단 정보과장인 윤일영 소령은 작전구역인 감악산 정상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정상에 나홀로 서있는 이른바 ‘몰자비(沒字碑 · 명문이 마멸된 비)’를 보고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이 비석과 비석이 있는 감악산 주변이 당나라 장군 설인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고려사 지리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사료를 종합해보자. 1011년 거란병이 장단악에 이르렀는데 감악신사에 군기와 군마가 있는 것처럼 보여 거란병이 두려워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이에…(설인귀)신에게 감사하였다. 민간에 전하길 신라사람이 당 장군 설인귀를 제사하여 산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권람이 신(神)에게 말하길 ‘감악산 신(神)은 당나라 장수(설인귀)라는데, 나는 일국의 재상이니 맞먹어도 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무당이 ‘그대가 감히 나와 서로 버티는데 돌아가면 병이 날 것’이라고 신어(神語)를 해댔다.” 속전에는 설인귀가 감악산 인근인 주월리 육계토성에서 태어나 맹훈련하여 당나라 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분명하게 당나라 강주(絳州) 용문(龍門) 출생이라고 중국사서에 돼 있는 설인귀가 신라땅 감악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니…. 하지만 감악산 정상은 신라 때부터 국가가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에 따르면 감악산은 상악(고성)·설악·부아악(북한산) 등과 함께 소사(小祀)를 지낸 곳이다.
신라는 대사(大祀)와 중사(中祀), 소사를 지냈다. 신라는 강역의 확대에 따라 제사 역시 늘려갔다. 감악산의 소사 역시 부아악(북한산)과 함께 신라가 한강 유역~임진강 유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추가한 제사일 것이다. 결국 설인귀와의 관련설은 그야말로 ‘속전’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감악산은 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윤일영씨의 회고. 누가 똑바로 세운 뒤 갓(개석)까지 새로 만들어 얹어 놓았다고 합니다. 영험하다는 소리가 있어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여인네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네요.”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곳은 한결같이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떠올랐어요.” 그렇다면 이 ‘몰자비’는 진흥왕 순수비가 아닌가? 순수비가 확인되는 곳을 곱씹어보자. 마운령비 인근의 운시산성은 청진과 함흥을 잇는 통로를, 황초령비 인근의 중령진은 강계와 함흥을 잇는 통로를 각각 통제하는 곳이다. 물론 북한산비가 있는 북한산성은 개성과 서울을 잇는 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요충지다. 감악산비는 높이 170㎝, 너비 74㎝, 두께 15㎝이다. 북한산비는 남아 있는 비신의 높이 154㎝, 너비 69㎝, 두께 15㎝다. 감악산비는 해발 675m, 북한산비는 해발 556m 비봉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석재도 화강암으로 똑같다. 나중에 얹어놓은 덮개석을 빼면 두 비의 형태와 규모는 동시대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북한산이나 감악산은 신라시대부터 제사(소사)를 지냈던 곳이다. 칠중성과 감악산의 중요도를 밝혔다. 예나 지금이나 도섭(물을 걸어서 건넘)할 수 있는 임진강의 칠중성 인근이 전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사(戰史)의 개념에서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원고는 1981년 1월30일 ‘임진강 전사 연구초’라는 책자에 소개됐고, 군내부에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황수영 동국대 총장도 1975년 이래로 감악산 고비(古碑)를 찾으려 양주군청 공보실을 자주 왕래했던 터였다. 당시만 해도 비석의 정확한 위치가 양주군 황방리로 알려져 있었다.
여하튼 당시 황수영 총장 · 이기백 서강대 교수 등이 참여한 학술조사에서 이 고비가 삼국시대의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용범 당시 동국대 박물관장이 남긴 ‘칠중성과 감악산 고비 조사’(불교미술·1983년) 특집기사를 보자. 외관과 규모가 이상하리만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흡사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2~13자의 자흔(字痕)만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 감악산비를 친견하고, 북한산비와 비교한다면 깊은 친연관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이리와 보라”고 손짓한다. |
설인귀의 전설
“지금 왕께서는 천자의 명을 어기고 이웃나라의 우호를 속이고…
오호라! 전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구나….”(설인귀)
“창고에 쌓아둔 양식을 (당나라 군사들에게) 날라주느라 다 써버려
신라의 백성들은 풀뿌리도 부족했는데, 웅진의 중국 군사들은 양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일의 사유를 묻지도 않고 곧바로 수만의 무리를 보내 저희 나라를 뒤엎으려 합니다.
(신라는) 억울하며 절대 반역하지 않았습니다.”(문무왕)
671년 당나라 행군총관 설인귀가 신라 문무왕을 협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띄운다.
이에 문무왕은 “태양은 비록 그 빛을 비춰주지 않으나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서 당나라에 충성을 다짐한다.
동맹군에서 점령군으로 변해버린 당나라군의 끊임없는 요구에 국력이 피폐해졌는데도….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으리라. 약소국의 비애인가,
외세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대가인가.
아직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낼) 때가 아니니 온갖 수모를 꾹 참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 지은 ‘답설인귀서’가 역사의 뼈저린 기록물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설인귀가 감악산 주변에서는 전설로 남아 있다니.
설인귀의 고향이라는 적성의 주월리 백옥봉,
그의 용마가 났다는 율포리, 무건리와 설마치에서 했다는 무예연습 전설,
감악산에서 미공개된 그의 수도석굴,
죽어서도 신으로 추앙되어 제사가 받들어졌던 정상부의 사당 등….
왜 수모를 안겨준 설인귀가 이토록 우리땅에서 신격화했을까.
이유는 단 하나,
설인귀가 ‘모국인’ 고구려를 정벌한 것에 자책하여
‘죽은 후에 감악산의 산신이 되어서라도 우리를 돕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연천 현감이며, 감악산 소사의 제관이었던 명문장가인 청천 신유한의 언급(감악산기, 1742년).
“설인귀는 본래 우리나라 사람으로, 아버지를 감악산에 장사지냈고,
안동도호부에 머물 적에 수차례 성묘를 했다고 한다.
설인귀의 사당 옆 ‘몰자비’는 혹시 아버지 묘 앞에 있는 비석이 아닐까?”
혹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소중화주의로 인해 더욱 심화한 상상력 때문일까?
그래서 중국의 장수 설인귀가 신격화한 것일까.
아니면 위의 전설들이 일정부분 사실과 일치되는 것일까?
그래서 감악산 정상은 늘 그렇듯이 알 수 없는 혼돈의 공간이다.
〈이우형 /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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