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2. 매소성 대첩 上

Gijuzzang Dream 2007. 12. 9. 13:56

 

 

 

 

 

 

 (12) 매소성 대첩 현장에서 (上)

 

 

“이미 (양주)대모산성이 조사중이고, 대통령(박정희)에게 보고까지 한 상황이니….”
1979년 어느 날.

연천 대전리산성을 몇차례 답사했던

최영희 당시 국사편찬위원장과 김철준 서울대 교수는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대전리산성이

매소성(買肖城 · 매초성이라고도 한다)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1년전 매소성으로 비정된 양주 대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중이었고,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대전리 산성에서 바라본 연천군 전곡읍내.


대전리산성 조사는 뒤로 미루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일개’ 성 발굴과 대통령이 무슨 관계인가.

전적지를 찾아라

바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다.

장기집권을 획책한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표방하면서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에따라 국수주의라 할 만큼 지나친 민족주의가 성행하였으며, 그 영향이 학계까지 미쳤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다는 명목으로 고대의 전적지를 찾은 것이다.

신라가 크게 부각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승전보로 꼽힌 것이 매소성 전투였다.

 

매소성 전투라.
“문무왕 15년(675년) 가을 9월29일

당나라 장군 이근행이 군사 20만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했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만380필을 얻었으며 노획한 병기도 이만큼이었다.”(삼국사기)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낸 결정적인 승부처가 바로 매소성이었던 것이다.

왜 신라는 이 매소성에서 혈맹이었던 당나라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을까.

두 나라는 연합하여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하지만 동상이몽.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에 5도독부를 설치했으며, 백제의 부흥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다 알다시피 고구려 멸망 후에는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이에 대해 신라는 669년부터 옛 백제의 땅을 점령하였고,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당나라와 맞서게 된다. ‘신라-당나라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설인귀와 문무왕의 서신

671년 신라가 가림성을 공격하여 백성(부여 임천)에서 당군 5300명의 목을 벤다.

 

그러자 그 유명한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을 능멸하고 겁박하는 편지를 보낸다.
“(문무왕이) 음흉한 생각을 품고 거짓으로 예절을 나타내 사욕을 이루려 하고

천자 앞에서는 은혜를 바라고 뒤에서는 반역을 도모한다면….”
설인귀는 “미혹에 빠져 날뛰지 마라”면서

“제사를 제 때 받고 사직이 바뀌지 않으려면 조심하라”고 일국의 왕을 협박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문장으로만 보면 너무도 굴욕적인 답신을 보낸다.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해바라기와 콩심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합니다.
저희는 너무도 억울하며...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지닌 (설)총관은

황제의 책벌을 집행하면서 죄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구구절절 충성의 낯을 절대 바꾸지 않았음을 다짐하는 문무왕의 답신을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양국간 불화의 원인은 바로 오만불손한 당나라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신라는) 남으로 웅진으로 식량을 나르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였습니다.

조그만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보급품을 대느라 피로감이 극에 달했고,

소와 말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 때를 놓쳐 곡식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을 다 써버려 신라 백성들은 풀뿌리도 부족했는데

웅진(백제 땅에 장기 주둔한)의 중국군사들은 양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1만 중국군사는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중국의 은혜가 끝이 없다지만 신라의 충성도 가엽게 여길 만합니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으리라.

점령군이 된 당나라의 착취에 신라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린 것이다.

경원선 철도와 3번국도가 지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대전리 산성.

당나라군 20만명을 격퇴한 매소성 대첩의 후보지로 거론되지만 방치된채 허물어지고 있다. 연천 대전리/이상훈기자

당나라의 배신과 착취

원래 당나라는 “백제 ·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땅을 모두 신라에게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파기했다.

신라군을 평양성까지 오라가라 해서 계속 허탕을 치게 만들어 힘을 빼더니

668년에는 “신라가 군대의 동원기일을 어겼으니 신라의 공은 아무 것도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67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이 백제 · 고구려 멸망 이후 강역을 나눈 지도를 가져왔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백제의 옛 땅을 백제부흥군에 모두 다 돌려주도록 돼있었다.

신라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3~4년 사이에 주었다 빼앗으니 신라백성들은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신라 · 백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지금 백제 상황을 보니 100년후에는 자손들이 백제에게 먹힐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니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외교적인 표현인지는 몰라도 일국의 왕이 보낸 답서에 ‘차라리 당나라 땅이 되는 게 낫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문무왕은 답서의 말미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오호라! 두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혹독한 부림을 당하더니 들에 짐승이 없어지자

요리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백제는 (옹치의) 상을 받고, 신라는 (정공의) 죽음을 당하는구나!”

문무왕은 양국관계가 이 지경이 된 모든 책임은 당나라에 있으며,

이렇게까지 굽신대는 데도 신라를 핍박하면 더는 참을 수 없음을 암시한 것이다.

신라는 672년 당군의 반격에 예성강 이북을 잃었다.

675년 2월에는 요처 중의 요처 칠중성에서 대회전을 벌인다.

매소성 대첩

칠중성 전투 후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대신 부사령관 이근행이 그 직을 인계 받는다.

문무왕은 이때 양동작전을 벌인다. 당나라에 사죄사신을 보내 조공한다.

당나라는 문무왕의 사죄를 받아들이고는 빼앗았던 왕의 관작을 회복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당나라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문무왕의 시간벌기였을 것이다.

신라는 이 틈에 야금야금 옛 백제땅을 접수했으며, 급기야 그 영역이 고구려 남쪽에 이르렀다.

이에 화가 난 당나라군은 9월 설인귀를 대장으로 침공했으나

신라군의 반격을 받아 1400명과 병선 40척, 군마 1000필을 잃었다.

설인귀가 도망가자 당군은 본때를 보여주겠다면서 20만대군을 동원한다.

그러나 신라는 매소성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여 쫓음으로써 매소성 대첩을 이룬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벌인 전투에서 18전 전승을 거두었다.

당나라는 이듬해 2월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평양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겼다.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겨난 것이다.
- 2007년 5월 25일 경향 〈이기환 선임기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사

매소성 전투는 신라 지도층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김유신과 둘째 아들 원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671년 당군 5300명을 깨고 백제고토를 회복한 신라는

이듬해 석문(황해 서흥)에서 당나라군의 반격을 받아 패퇴한다.

이때 비장(裨將 · 군사참모)이었던 원술도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우다 죽으려 했다.

하지만 보좌관 담릉이 나섰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죽을 곳을 찾아 죽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사나이는 구차롭게 살지 않아야 한다.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김유신)를 보겠느냐.”
원술이 박차를 가하려 하자,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겨 질질 끌려가면서도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원술은 끝내 되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보다 더 엄청난 고통이었다.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고, 가훈마저 저버렸으니 목을 베야 합니다.”
아버지(김유신)가 아들의 목을 벨 것을 왕에게 주청하는 것이 아닌가.

원술은 왕의 특전으로 풀려났으나 시골(田園)로 숨어 버렸다.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673년) 어머니(지소부인)를 뵙기를 청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했다.
“여자에겐 삼종지의가 있다.

지아비가 죽었으니 이젠 아들을 따라야 하나 아들이 아들 구실을 못했으니….”
원술은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화랑으로서 불충과 불효를 저지른 원술에게 675년 매소성 전투는 와신상담의 일전이었다.

원술은 수치심을 씻으려 힘껏 싸워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원술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가 무슨 상이냐”면서 끝내 벼슬길에 몸담지 않았다.

동랑 유치진은 1950년 4월 국립극장 창단 기념작(‘원술랑’)으로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는데,

무려 5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당시 서울인구가 40만명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1000만명이 훌쩍 넘는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셈.

‘매소성 전투와 원술’ 이야기는 이 순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필칭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우형 /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