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매소성 대첩 현장에서 (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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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양주)대모산성이 조사중이고, 대통령(박정희)에게 보고까지 한 상황이니….” 연천 대전리산성을 몇차례 답사했던 최영희 당시 국사편찬위원장과 김철준 서울대 교수는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대전리산성이 매소성(買肖城 · 매초성이라고도 한다)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1년전 매소성으로 비정된 양주 대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중이었고,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개’ 성 발굴과 대통령이 무슨 관계인가. 장기집권을 획책한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표방하면서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에따라 국수주의라 할 만큼 지나친 민족주의가 성행하였으며, 그 영향이 학계까지 미쳤다. 신라가 크게 부각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승전보로 꼽힌 것이 매소성 전투였다.
매소성 전투라. 당나라 장군 이근행이 군사 20만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했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만380필을 얻었으며 노획한 병기도 이만큼이었다.”(삼국사기) 왜 신라는 이 매소성에서 혈맹이었던 당나라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을까. 두 나라는 연합하여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하지만 동상이몽. 다 알다시피 고구려 멸망 후에는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이에 대해 신라는 669년부터 옛 백제의 땅을 점령하였고,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면서 당나라와 맞서게 된다. ‘신라-당나라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그 유명한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을 능멸하고 겁박하는 편지를 보낸다. 천자 앞에서는 은혜를 바라고 뒤에서는 반역을 도모한다면….” “제사를 제 때 받고 사직이 바뀌지 않으려면 조심하라”고 일국의 왕을 협박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문장으로만 보면 너무도 굴욕적인 답신을 보낸다.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지닌 (설)총관은 황제의 책벌을 집행하면서 죄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양국간 불화의 원인은 바로 오만불손한 당나라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조그만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보급품을 대느라 피로감이 극에 달했고, 소와 말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 때를 놓쳐 곡식도 자라지 못했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을 다 써버려 신라 백성들은 풀뿌리도 부족했는데 웅진(백제 땅에 장기 주둔한)의 중국군사들은 양식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1만 중국군사는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중국의 은혜가 끝이 없다지만 신라의 충성도 가엽게 여길 만합니다.” 점령군이 된 당나라의 착취에 신라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린 것이다.
당나라의 배신과 착취 하지만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파기했다. 신라군을 평양성까지 오라가라 해서 계속 허탕을 치게 만들어 힘을 빼더니 668년에는 “신라가 군대의 동원기일을 어겼으니 신라의 공은 아무 것도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67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이 백제 · 고구려 멸망 이후 강역을 나눈 지도를 가져왔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백제의 옛 땅을 백제부흥군에 모두 다 돌려주도록 돼있었다. 신라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문무왕은 답서의 말미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요리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백제는 (옹치의) 상을 받고, 신라는 (정공의) 죽음을 당하는구나!” 이렇게까지 굽신대는 데도 신라를 핍박하면 더는 참을 수 없음을 암시한 것이다. 신라는 672년 당군의 반격에 예성강 이북을 잃었다. 675년 2월에는 요처 중의 요처 칠중성에서 대회전을 벌인다. 대신 부사령관 이근행이 그 직을 인계 받는다. 문무왕은 이때 양동작전을 벌인다. 당나라에 사죄사신을 보내 조공한다. 당나라는 문무왕의 사죄를 받아들이고는 빼앗았던 왕의 관작을 회복시킨다. 이에 화가 난 당나라군은 9월 설인귀를 대장으로 침공했으나 신라군의 반격을 받아 1400명과 병선 40척, 군마 1000필을 잃었다. 설인귀가 도망가자 당군은 본때를 보여주겠다면서 20만대군을 동원한다. 그러나 신라는 매소성에 주둔한 당군을 공격하여 쫓음으로써 매소성 대첩을 이룬다. 당나라는 이듬해 2월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평양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겼다.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겨난 것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 역사 |
매소성 전투는 신라 지도층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671년 당군 5300명을 깨고 백제고토를 회복한 신라는 이듬해 석문(황해 서흥)에서 당나라군의 반격을 받아 패퇴한다. 이때 비장(裨將 · 군사참모)이었던 원술도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우다 죽으려 했다. 하지만 보좌관 담릉이 나섰다. 원술은 끝내 되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보다 더 엄청난 고통이었다. 원술은 왕의 특전으로 풀려났으나 시골(田園)로 숨어 버렸다.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673년) 어머니(지소부인)를 뵙기를 청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했다. 지아비가 죽었으니 이젠 아들을 따라야 하나 아들이 아들 구실을 못했으니….”
화랑으로서 불충과 불효를 저지른 원술에게 675년 매소성 전투는 와신상담의 일전이었다. 원술은 수치심을 씻으려 힘껏 싸워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원술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가 무슨 상이냐”면서 끝내 벼슬길에 몸담지 않았다. 무려 5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당시 서울인구가 40만명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1000만명이 훌쩍 넘는 공전의 히트작이었던 셈. ‘매소성 전투와 원술’ 이야기는 이 순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필칭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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