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파주 주월리 육계토성 (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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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우로 ‘고대사’ 가 꿈처럼 펼쳐지다 -
“온조는 한수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溫祚都河南慰禮城)~.” (삼국사기 온조왕 즉위조·기원전 18년) 한수 남쪽의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해야겠다’. 이듬해 정월 천도했다.” (삼국사기 온조왕 13 · 14년조, 기원전 7 · 6년) 그 중 하나가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남하한 온조세력의 첫 도읍지다. 즉위년조에는 곧바로 한수 남쪽 위례성에 세웠다고 했지만, 13년 · 14년조에는 천도사실을 언급한 뒤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전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렇다면 하남위례성 이전에 (하북) 위례성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1997년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발견을 계기로 풍납토성이 본격조사된 덕분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8~기원전 6년까지 백제의 첫 도읍지였을지도 모르는 (하북)위례성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북위례성의 존재조차도 의심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는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고 비정했다. (여유당전서 ‘강역고’)
이후 대다수 학자들은 다산이 말한 ‘삼각산 동쪽기슭’이라는 표현을 중시, 하북위례성의 위치를 짚어갔다. 중랑천변을 따라 내려가면 한강과 만나고 그 한강 건너편에 하남위례성(풍납토성)이 있으니 그런대로 일리있는 추론이었다. 게다가 이 중랑천변 일대에는 일제 때까지만 해도 토루(土壘)의 흔적이 뚜렷했다. 중곡동 일대에서는 백제시대 석실분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1993년 윤무병 당시 원광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성곽’이라는 글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을 슬쩍 얹어놓는다. 경기 연천 적성읍 서북방에 해당되는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 존재가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0,000 지도에는 육계토성지(六溪土城址)라고 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한강 북쪽이 아니라 훨씬 북쪽인 임진강 유역에 풍납토성과 비슷한 성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사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도 “육계성은 주위가 7692척인 성~”이라고 언급돼 있다. 하지만 육계토성을 하북위례성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꿈에서도 못할 일이었으리라.
# 꿈처럼 펼쳐진 고대사의 세계
1996년 임진강 홍수로 노출된 주거지 모습. 주월리/이상훈기자
그런데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지 2014년이 흐른 1996년 여름. 이상기후에 따른 집중호우가 한반도, 특히 임진강 유역을 덮쳤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부었다. 3일간 내린 강우량은 연평균 강우량의 50%에 달했다. 맨처음 백제적석총이 있는 삼거리(연천)를 찾았는데요. 거기서 홍수로 무너져버린 사구(沙丘) 단면에서 빗살무늬 토기 같은 선사시대 유물들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강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후 4시쯤 육계토성을 들렀는데….” 수마가 깊이 1m나 되는 땅표면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엄청난 토기편들과 철제유물들이 노출돼 있었습니다. 홍수가 마치 체질하듯 흙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유물과 유구들이 햇빛에 노출된 것이죠.” 경기도박물관이 조사에 나섰다. 일단 조사에 앞서 ‘토기 밭’으로 일컬어질 만큼 유물이 널려있는 표토층 수습작업에 나섰다. 급한 목소리로 경기도박물관에 연락했다. 유적이 훼손되고 있었어요.” 더 이상의 유적 파괴를 막기 위한 긴급 수습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파면 팔수록 유구와 유물이 쏟아지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홍수로 마구 떠내려온 지뢰가 유적 전체에 나뒹굴어 있었다. 지뢰는 널려있고, 조사면적은 넓고, 시간은 없고…. 그러나 경작지를 복구해야 수해에 따른 보상문제가 해결되는 미묘한 상황에서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한양대박물관이 조사를 맡았던 구역에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나타났다. 당시 한양대구역의 발굴을 책임졌던 황소희 연구원(현 한양대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나섰다. 막 복토를 위한 흙을 쏟아부으려던 덤프트럭을 몸으로 막아선 것이었다. 흙을 가득 싣고 온 덤프트럭이 막 쏟아부을 참이었어요. 여차하면 흙더미에 깔렸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유적만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풍납토성 발굴 때도 주민들과의 충돌로 유적일부가 훼손당하는 비운을 겪지 않았던가. 아니 풍납토성도 1925년 을축대홍수로 휩쓸려 나갔고, 일부 유구와 유물이 드러났는데, 육계토성도 96년 홍수로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지 않았나. |
육계토성도 개발 광풍
필자가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자부심이 하나 있다. 바로 육계토성이다.
1996년 임진강 대홍수로 강유역이 쑥밭이 되었을 때
필자가 찾아낸 육계토성 내부의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
도처에 산재한 유실 지뢰의 불안, 악취 속에서 온 몸에 날거머리처럼 달라붙었던 파리떼들,
속살의 상처를 드러낸 대지 위에 뒹굴던 그 많던 유구와 유물들, 그리고 치유의 긴 고통들….
벌써 10년이 넘어버린 1996년 8월24일 당시의 굵직한 기억들이다.
군부대가 실시한 지뢰탐색 작업의 결과(?)로
여기저기 수북하게 쌓여 있던 주 · 단조 철부와 각종 철제유물들….
구석기와 빗살무늬토기편, 완형의 경질무문토기옹, 백제초기의 다양한 토기편들과
주거지 바닥들이 뒤엉킨 상태에다 강변으로는 무수한 석곽분들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좁은 면적에서
우리 역사의 모든 시기 유물이 밀집되어 세상에 선보인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더 나아가 육계토성이 안고 있는 고고 · 역사적 의미의 중요성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현재 육계토성은 서울 풍납토성의 전철을 밟으려 한다.
개발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파주 일대와 민통선 지역의 특수한 상황들이
작금 문화재 경시의 그릇된 가치관과 맞물리고 뒤늦은 행정절차들로 인해
그 소중한 연결고리들이 한 순간에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1997년 신년벽두에 한강변에서 풍납토성을 발견한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려 본다.
만약 1960년대에 풍납토성을 보존했다면 천문학적인 보상 없이도
한성백제의 500년 역사를 완전하게 되살릴 수 있었다는 그 안타까운 심정을….
이제 자칫하면 육계토성도 풍납토성 내부의 쭉쭉 뻗은 아파트촌처럼 바뀔 수 있다.
개발의 유혹에 견뎌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지이며 한반도 문명의 중심축인 임진강과 휴전선 일원.
지금 그 일대 어느 땅을 밟더라도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다.
지금 제대로 조사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더는 기회가 없음을….
짐작은 하겠지만 땅값이 지금도 말도 못하게 올라있다.
〈이우형 / 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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