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6. 요동백 김응하 下

Gijuzzang Dream 2007. 12. 9. 13:49

 

 

 

 

 (26) 요동백 김응하 (下)

“압수 머리에 작은 사당 세웠으니/ 멀리 노니는 넋은 언제 오시려나/

오늘 아침 비바람이 강가에 몰아치는데/ 원한에 찬 물결 위에 검을 짚고 서 있네.”

심하전투가 끝난 지 딱 1년 뒤인 1620년 3월4일.

월사 이정귀(1564~1635)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김응하 장군의 사당을 지나다가 이런 시를 남겼다. 이정귀의 회고담이 생생하다.

파병된 조선군 8000여명이 몰살당한 요녕성 본계시 환인 만족자치현 홍당석 벌판. 보급품을 받지못한 조선군은 패배할 것을 뻔히 알면서 싸워야 했다. /이승수씨 제공


“압록강을 건너려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돌이켜보니 김응하 장군 및 2만의 관군이 전사한 날(3월4일)이니

그 분들의 넋이 비바람이 되어 돌아온 것이겠지. 가슴이 울컥하여 노래 세 수를 지었다.”<월사집 권7>


▲ 김응하 신격화 프로젝트

1619년 심하전역에 파병되어 후금군에 장렬하게 전사한 김응하 장군은

전쟁영웅으로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요동파병군의 총사령관이던 강홍립이 후금군에 투항하자

(실은 광해군의 밀명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하게 된다.

 

명나라의 요동 군문(軍門)에서는 항복한 강홍립의 가족을 조선 조정이 어찌 처리하는지를 주목했고,

후금과 조선의 결탁을 의심하는 유언비어가 들끓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광해군으로서는 김응하 장군의 결사항전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즉각 김응하 장군 헌창사업에 돌입한다.

광해군은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을 비호하며 후금의 눈치를 살피는 한편

명나라의 환심을 사려 서둘러 김응하 장군을 치켜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왕은 1619년 3월19일 ‘자헌대부 겸 호조판서’로 추증했고,

5월 6일에는 중국 장수가 지나는 길목에 사당을 세울 것을 전교했다.

6월21일에는 이 사당에 충렬(忠烈)이란 편액을 하사했다.

“급히 중국 장수가 지나는 길목에 사당을 세우라(急急立祠于唐將所經處)”고 지시한 것은

고도의 외교술로 평가된다. 다분히 전시용인 것이다.

<속잡록>을 인용한 <연려실기술>은

“명나라 신종도 김응하를 요동백(遼東伯)으로 봉하고 처자에게 백금을 내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김응하의 충절과 의리는 화이(華夷·중국과 오랑캐)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광해군일기, 1622년 7월14일)고 자평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명나라의 의심을 덜기 위한 광해군의 외교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차원에서 김응하 장군의 무공을 기리고 추모하는 <충렬록(忠烈錄)> 간행을 지시한 것이다.

심하 전역 직후 박희현(1566~?)은 김응하 장군의 전설적인 행적과 무공을 담은 <김장군전>을 썼는데,

<충렬록>은 바로 이 <김장군전>을 저본으로 하여 간행된다.

충렬록의 모태가 된 <김장군전>은

그때까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던 심하 전역의 전황은 물론

김응하 장군의 영웅적인 삶과 장렬한 최후를 마치 ‘신화의 인물’로 그리고 있다.

 

당대의 문장가 유몽인이 “사마천의 솜씨에 견줄 만한 책”이라 극찬했을 정도였다.

이런 <김장군전>을 토대로 쓰여진 <충렬록>의 편찬과정에는

국왕인 광해군은 물론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총출동했다.

김응하 장군을 천거한 영의정 박승종(1562~1632)을 비롯해

대북파의 수장 이이첨과 서인을 대표하는 이정귀 등이 고루 참여하고 있다.

만시(挽詩 ·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시)를 지은 이가 90명이었으니

'글 좀 쓴다’는 당대의 문인들이 모두 가담한 것이다.


▲ <충렬록>을 중국에 퍼뜨려라

이 <충렬록>의 편찬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낳았다.

우선 외교적인 측면. 광해군은 이 책을 단순히 편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훈련도감에서 간행하여 국내뿐 아니라 중국 유입을 적극 유도했다.

“(충렬록의 간행은) 장군의 절의를 알릴 뿐 아니라

(광해군의) 밀교(密敎 ·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후금과의 전쟁에서 형세를 봐가며 판단하라고 밀명을 내린 것을 뜻함)의

 흔적을 가리기 위한 것”(<청야만집> 이희겸)이라는 분석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의 장수도 후금과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의 죽음을 온 나라가 추모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려 한 것입니다.”(한명기 명지대 교수)

이처럼 김응하 헌창사업은

군주를 비롯해 신료들의 정파와 이념을 초월하여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시킨 가운데 이뤄졌다.
김응하 장군에 대한 추모 열기는 광해군이 실각시킨 인조반정 이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니 더욱 고양되는 기현상을 빚는다.

이는 주도권을 잡은 서인의 지향과 일치했던 까닭이다.

김응하 장군 헌창사업은

정조대 후반이 되어서야 대명의리론의 학문적인 정리작업과 함께 마무리 된다.

1798년 간행된 <중간(重刊)충렬록>이 그것이다.

이 책에는 심하전역(1619년) 이후 조정이 시행한 김응하 추모사업이 편년식으로 기술됐다.

여기에 실린 민종현의 서문이 눈에 띈다.

“동방에서 대의(大義)는 배신(陪臣 · 제후의 신하가 천자를 상대하여 자신을 낮춰 부르는 말)으로서

황조(皇朝)를 위해 죽은 것보다 더 성대한 것은 없었다.

배신사절(陪臣死節)의 의리가 김응하에게서 비롯됐으며

김장군은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세웠다.”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장군이 한마디로 명나라 황제를 위해 죽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 천생 군인이었던 김응하

이승수 한양대 강사는

“광해군 시대에는 외교적인 실리와 각 정파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크게 이름을 떨쳤던 김응하 장군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성리학적인 명분론과 정권유지 차원에서 더욱 헌창된다”고 밝혔다.

“물론 김응하 장군의 대단한 무공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군인으로서 임무가 주어졌을 때 결사항전의 자세로 싸웠으니까요.

하지만 그 분의 업적은 정치권력에 의해 너무 신격화됐습니다.

작전권도 앗기고 보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패전이 불문가지였던 상황인데도 전쟁터에 나서야 했던 장군의 인간적인 고뇌 같은 것이

제대로 그려졌다면…. 죽음을 예견한 장수의 인간적인 측면 같은 것….”

무릇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상황에 맞게 바뀐다.

천하의 혼군(昏君), 그리고 배신자로 낙인찍힌 광해군과 강홍립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들어 활발하게 이뤄지는 게 단적인 예다.

실리외교의 전형처럼 말이다.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때 그토록 영웅으로 추앙받던 김응하 장군에 대한 평가는 줄어든 감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태의 눈금으로 이리저리 평가되는 것이다.

김응하 장군이 무슨 후대의 평가를 잘 받으려고 이역만리 먼 곳 심하에서 무모한 죽음을 택했겠는가.

그는 명령을 받은 군인으로서 조선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광해군은 양손에 카드를 들고 명과 후금 사이를 오가며

아슬아슬한 등거리 외교를 펼칠 수 있었다.

나라를 위해 죽은 장군의 넋이 고귀한 가치를 갖는 이유다.
- 2007년 8월 31일 경향, 이기환 선임기자 / 철원에서

 

 

 

 

 

  

 

 

 

 

 

 

산화한 파병군 병사들…조국은 끝내 외면

“백수의 늙은 서생은 모래밭에 뒹구는 백골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운명인가 합니다.”
1619년 3월1일. 요동파병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이민환이 군량미 보급을 맡은 윤겸진에게 쓴 편지다.

춥기는 하지, 식량 보급은 전혀 이뤄지지 않지, 명나라 장수는 되지도 않는 지시를 내리지….

이민환의 울부짖음은 조선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지난 1월 말 심하전역(深河戰役)의 현장답사에 나서 조선군이 몰살당한 비극의 벌판을 둘러본 이승수 한양대 강사의 말.

“4일 오후 한나절 동안 김응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8000명이 죽었습니다.

바로 그곳이 요녕성 본계시 환인 만족자치현 홍당석 벌판입니다.

길 왼쪽 언덕에 피신한 강홍립군은 동료들이 도륙당하는 모습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을 겁니다.

다음날 항복하고 후금군과 함께 허투알라로 갔어요.”

그뿐이 아니었다.

 

이승수씨에 따르면 강홍립을 따라 투항한 조선군 가운데 탈출한 뒤 돌아온 조선군사는 2700명이었다. 탈출하지 못한 이들은 농노(農奴)가 되었다.

탈출하다가 굶어 죽은 조선군 시신도 길에 즐비했다.

파병군 1만3000명 가운데 1000~1500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홍세태(1653~1725)가 지은 <김영철전>은

심하전역에서 포로가 된 김영철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19살 때 참전한 김영철은 후금 장수의 가노(家奴)가 되었다.

혼인해서 아이까지 낳았으나 향수를 이기지 못했다. 탈출을 감행해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국은 만어와 한어가 능통하다는 이유로 평생 부려먹었다.

1637년 가도정벌, 1640년 개주전투, 1641년 금주전역 등에 차례로 차출된다.

그는 무려 86살까지 군역에 시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수성졸(성을 지키는 졸병)을 면치 못했다.

 

홍세태는 김영철을 동정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사정이 이럴진대 무엇으로 천하의 충의지사를 권면할 것인가(何以勸天下忠志之士)!”

김응하 장군은 그래도 전쟁영웅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산화한 파병군 병사들의 넋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광해군은 1619년 9월 명나라 총병 유정과 유격 교일기의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싸운 조선군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수씨는 “지배층의 관심은 오로지 의리와 명분을 밝히는 것이었으며

비참하게 죽었거나 포로가 된 파병군 병사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일침을 놓았다.
- 이기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