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양구 펀치볼(上) | ||||
- 중학교 발굴단 ‘선사유적’ 을 캐내다 -
강원도교육청으로부터 해안중(亥安中) 발령을 통보받았다. 아마 편치볼이라 하면 귀에 확 들어올 것이다. 해안면은 56년 4월 이른바 ‘정책이주민’들이 정착한 이후 민통선 이북에 있는 유일한 면단위 마을이다. 휴전선이 지척이고, 민북지역이다 보니 학술조사가 어려웠다. 마침 도교육청이 역사·생태부문 전공자인 교사 5명을 뽑아 해안중학교에 발령을 낸 것이다.
역사를 공부했다지만 학술조사에는 경험이 없던 터였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집 마당에서 꼬마가 무슨 돌 같은 것을 갖고 노는 걸 보았다. 유심히 살펴보니 돌로 깎은 무슨 도구가 분명했다. 아니 이것은 돌로 만든 창이었다. 김교사는 잠깐의 노력으로 민무늬토기 조각과 석기를 갈던 숫돌 조각 등 선사시대 유물들을 대거 수습했다. 김교사는 그때부터 신바람을 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비군 훈련을 위해 조성된 참호였다.
방학 때를 주로 이용했는데, 유물이 다치지 않게 얼마나 조심스럽게 했는지….” 발굴구덩이 밑바닥(1m20㎝ 깊이)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토기편을 비롯해 수많은 석기, 토기 조각들을 수습한 것이다. 1년반이 지난 뒤 정리해보니까 유물이 라면상자로 2상자가 되더군요. 그래 어떻게 해요. 학교에다 (유물을 진열할) 책장 좀 사달라고 했어요.” 전시실의 이름은 해안중 향토사료관. 이 유적이 학계에 보고되기 시작한 것은 정식 학술조사가 시작된 87년부터. 강원일보가 기획한 민통선 북방지역 생태문화계 조사단의 일원으로 해안면을 방문한 최복규 강원대 교수의 말. 해안면 지역을 쭉 조사했는데 아, 거기서 20여기의 고인돌을 확인했어요. 소양강 상류로 유입되는 성황천과 해안천가에 고인돌 무덤이 흩어져 있었지요.” 그때 조사단에 참여했던 김병모 한양대 교수도 김동구 교사에게 “대단한 유적을 발견했다”고 평가했다. 이 일이 있고나서 해안중학교가 문화공보부에 의해 ‘문화재보호학교’로 지정되었어요.”
아직 지표조사만 이뤄졌을 뿐인데 이 지역에선 10만년 전으로 편년될 수 있는 구석기 유물과, 신석기시대 대표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시대의 표지유물인 고인돌떼와 점토대기(덧띠무늬) 토기, 그리고 철도자(쇠손칼) 등 초기 철기시대 유물이 시차를 두고 나타났다.
물론 김동구 교사가 확인한 빗살무늬 토기편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덧띠토기, 검은간토기, 고배형토기, 쇠뿔모양 손잡이, 홈자귀, 간돌도끼, 숫돌, 갈판, 돌끌, 보습, 가락바퀴 등 청동기시대 덧띠토기 주거유적에서 출토되는 전형적인 유물 조합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이 첩첩산중에 구석기인들이 둥지를 틀었다는 점, 그리고 구석기인들이 물러간 다음에도 신석기인, 청동기인, 초기 철기시대인들이 단절없이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유적을 조사했던 차재동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는 “신석기의 경우 빗살무늬 토기가 북한강 최북단 내륙지역에서 나왔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띠토기인들의 경우 지표 채집만으로도 주거유적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유물 갖춤새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어요.” 해석했다. 청동기 주거지만 보면 BC 3세기대 대규모 취락지라는 해석이다. 왕성한 이동력을 기반으로 사냥, 채집 생활을 한 구석기인들이야 이런 첩첩산중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정착생활로 나름대로는 편안한 생계기반을 갖고 있던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은 왜 이 오지에 둥지를 틀었을까. 사람이 들어와 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들어가는 입구가 얼마나 가팔랐는지….” 옛 사람들은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가 최상류 지류인 인북천에 닿았을 것이다. 그런 뒤 해안분지 동쪽지역인 당물골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들은 별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첩첩산중, 그 험난한 물길과 계곡을 아슬아슬 통과해서 닿은 땅. 그들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광활한 초원. 그것은 피안의 세계였을 것이다.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세상사, 괴롭고 힘겨운 세상사 모두 잊고 살았을 것이다.
8월 어느 날 기자는 ‘왜’라는 궁금증을 안고 해안분지에 닿았다. 수속을 밟고 군인이 지키는 초소를 지나 가파른 외길을 10여분 달려 올라갔다. 여정의 끝은 을지전망대. 비무장지대 철책 위에 선 해발 1049m의 전망대에 섰다. 그리고…. |
해발1280m의 습지 ‘용늪’ | ||
대암산(1304m)을 넘어가는 길에 안개비가 무섭게 내린다. 험하고 먼 굽이굽이 길이다.
그런데 대암산 정상 바로 밑 북 사면, 해발 1280m나 되는 곳에 엄청난 습지가 있다니 상상이나 할 일인가. 용늪이다. 용늪은 둘레 1045m, 면적 3.15ha에 달하는 고층습원이다.
이런 고원에 왜 습지가 생겼냐면 기온차가 크고 연중 5개월 이상 영하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 때문에 안개일수도 170일 이상 된다.
이런 혹독한 기후 때문에 식물이 분해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퇴적됐다. 5000년 동안 1.4m가량의 이탄층이 시대별로 켜켜이 쌓인 것이다.
용늪은 1966년 비무장지대(DMZ) 조사단에 의해 발견됐는데, 현재는 람사협약에 의한 습지(1997년)로 지정됐다. 가히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각종 식물 190여종, 곤충 220여종이 보고된 바 있다. 군부대 주둔지역이기도 하고, 늪의 육화현상이 빠르게 진행된 탓이다. 이에 따라 용늪으로 들어오는 물길이 끊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요즘에는 원주지방환경청과 국립환경과학원, 관할 군부대 등이 주체가 되어 용늪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김기용 원주지방환경청 생태관리팀장은 “군부대와 생태 전문가 등으로 용늪 보전클러스터를 만들어 늪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보전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한때는 육화의 책임을 두고 논쟁이 빚어졌다고 한다. 70년대말 군부대가 스케이트장을 만들려고 용늪에 둑을 쌓았다는 둥, 지나친 학술조사로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 육화가 가속화되었다는 둥…. 하지만 지금 보면 군부대가 사람들의 무분별한 접근을 막아 그나마 현상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도 나올 수 있겠다.
어찌됐든 사람이 문제다. 5000년간 보존된 자연생태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이 역시 사람인 것을. 그런데 요즘엔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심상치 않은 한반도의 기후 변화가 그것이다. 기후 변화가 용늪, 아니 우리의 자연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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