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고려말 출신 이양소선생 | ||||
- 不事二君 절개 ‘위대한 은둔 -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민통선 이북(연천 중면 적거리 신포동). 해발 100m쯤 돼보이는 야산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말 충신이자 두문동 72현의 한 명인 이양소 묘를 찾는 여정은 험난했다. 키만큼이나 자란 수풀과 나무를 헤치고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안내한 후손(이희풍씨)의 낯엔 찾아온 손님들에게 송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문인석은 얼굴이 길쭉한 돌하루방을 연상케 한다. 또렷한 턱수염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자랑하고 있다. 카랑카랑한 선비의 모습 그대로다. 무자비한 잡초의 공세에다 풍화작용으로 인한 극심한 마모까지…. 얼핏 보아도 오래 전에 쇠락한 가문의 묘소 같다.
죽음에 이르러 이양소 선생은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록)에 ‘고려진사 이양소’라 썼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얼마나 ‘요령없이’ 사신 분인지…. 그는 조선을 개국한 이방원(태종)의 동갑내기 친구였다. 두 사람은 1382년(우왕 3년) 나란히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시쳇말로 ‘불알친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개국으로 두 사람은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친 이양소 선생은 조선이 건국되자 그 길로 연천땅 도당곡(陶唐谷)에 은거했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청구야담>에 나온 얘기를 풀어보자.
물색이란 입은 옷이나 생긴 모양으로 더듬더듬 찾아간다는 뜻이다. 선생을 찾아낸 태종은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한때의 우정을 회상한다. 그러면서 운치있는 시를 나눈다. 먼저 태종의 차례. 바로 이양소 선생의 시구 말미에 읊은 ‘월초생(月初生)’은 태종의 첫사랑 여인이었던 것이다. 옛 동무가 태종의 가슴에 ‘희미한 첫사랑’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태종은 깜짝 놀라 술상을 걷고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준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그 중차대한 시점에서 선생은 ‘노’를 선택한다. 선생과 이방원(태종)은 어릴 적에 곡산(황해도) 청룡사에서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다. 당시 소년 이양소는 곡산의 산수에 흠뻑 빠져 있었다. 임금이 된 후 이양소를 곡산군수로 임명해 버렸다. 이것은 옛 친구를 어떻게든 출사하도록 하기 위해 임금이 낸 꾀였다. 하지만 선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화산(淸華山)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는 은나라 처사 백이의 청풍(淸風)과, 송나라 때의 충신 희이(希夷)가 숨어 살았던 화산(華山)에서 한자씩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태종은 이양소 선생이 살던 곳을 으리으리하게 꾸며 이화정(李華亭)이라는 현판까지 내렸지만 그조차 싫어했다. 대신 선생은 심심유곡에 초가집을 짓고 안분당(安分堂)이라 이름하면서 거기서 살았다. 뜰에는 살구나무를 심고 거문고를 타면서 독서로 남은 생을 보냈다. 선생이 죽자 태종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此人生不可屈其心 死不可汚其身也).” “장지는 연천땅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선생의 유언 때문이었다.
선생과 함께 두문동 72현이었던 저 유명한 야은 길재마저도 아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야말로 밑천까지 다 보여준 동기동창 친구가 국왕이 되었고, 그 친구가 그토록 출사하기를 원했는데 그걸 끝내 박차버렸으니…. 거기에 자손들에게까지 앞으로 12대까지는 벼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니…. 그리고 ‘위대한 은둔은 (세상을 피하는 게 아니라) 도시에서 은둔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열마디 다 제쳐두자.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옛 주인을 섬긴 이양소 선생에 대한 평가는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너무도 ‘대쪽 같은’ 그러나 ‘바보 같은 삶’을 산 것이다. 지도자가 무릎을 꿇고 필요한 인재를 모신다는 소식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나라의 대권을 꿈꾸는 자들이 오만해지지 않겠는가. 새삼 이양소 선생, 그리고 태종과 같은 인물이 생각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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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 72현’ 이란
- 조선개국 반대 절의 지킨 고려유신 -
두문동 72현은 조선개국을 반대한 72명의 고려유신들을 일컫는 말이다.
두문동(枓門洞)은 개성 북쪽 만수산 아래 있는 동네이며,
고려 유생들이 빗장을 걸어닫았다는 바로 그곳이다.
그들이 생존했던 시대는 여말선초이다.
하지만 두문동 72현이 본격적으로 각광받은 때는 조선후기로 접어든 영조 16년(1740년) 무렵이었다.
이때 정권을 잡은 노론계열은 성리학 명분론에 위배되는 과거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아래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두문동 72현을 추승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왜 72현이었는가.
김정자의 논문(두문동 72현의 선정인물에 대한 검토)에 따르면
공자의 72제자를 본뜬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기> 공자세가는
“공자의 제자는 3000명에 달했는데,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만 해도 72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엄선된 공자의 72제자는 중화의 대표적인 현인으로 인식되었다.
두문동 72현의 삶은 세갈래로 나뉜다.
정몽주, 김약항처럼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길재와 이양소, 원천석, 서견, 배상지, 민유, 김선치, 맹희도, 문익점 등은 은둔·낙향파에 속한다.
또한 은거·낙향·유배 이후 다시 정계에 진출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안성, 조견, 하자종, 이행, 김자수 등은 태종대 이후에까지 계속 활약했는데,
이들은 조선의 새로운 정치세력이 되었다.
태종은 특히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조선개국공신을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두문동 72현의 일부 자손들이 태종에 의해 임용되었다.
태종은 심지어 그가 직접 죽였던 정몽주의 자손 둘을 등용하고,
이색의 아들 둘과 손자 5명까지 대간을 비롯한 요직에 기용한다.
그러고 보면 이양소 선생은 같은 두문동 72현 가운데서도 보기드문 삶을 살아간 분이다.
사실 제대로 은둔한다는 것도 힘들다.
은둔이라는 것도 고도의 정치활동일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나라를 맡아달라”는 요임금의 간청을 듣고
“귀가 더러워졌다”면서 귀를 씻은 은둔의 대명사 허유라는 인물이 있다.
그런데 그 허유를 두고 “진정한 은둔지식인이 아니다”라고 비꼬는 측도 있다.
은둔을 빌미로 요임금과 세상을 흥정했으며, 심지어 그 흥정을 즐겼다는 비판이다.
문제는 진정한 은둔이 신체적인 은둔이 아니라 정신적인 은둔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양소 선생의 은둔은 정신적 은둔의 대명사라 할 수 있지 않은가.
- 이우형 / 현강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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