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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사행(使行)을 다녀온 화가들

Gijuzzang Dream 2011. 11. 21. 23:20

 

 

 

 

 

 

 

 


  

 2011 서화관 테마전

 

 “중국 사행(使行)을 다녀온 화가들”

 

 

 

           ㅇ 전시기간: 2011. 10. 27(목)~2012. 1. 15(일)

           ㅇ 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2층 서화관 회화실

           ㅇ 전시작품: 강세황필 <영대기관첩> 등 33점

         ㅇ 전시내용:  조선시대 중국에 파견된 대규모 사행단에 속해

                   조선의 화가들이 남긴 사행 관련 회화작품을 통해

                   중국문화의 수용과 창조적 대응과정,

                   사행에서 화가의 역할과 그들이 남긴 작품 등을 조명.

        


 

국립중앙박물관은 테마전 “중국 사행使行을 다녀온 화가들”을 개최한다.

2011년 10월 27일(목)부터 2012년 1월 15일(일)까지 서화관 회화실에서 열리는 이번 테마전에는

조선 사행단이 중국을 다녀온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는 서화(書畵) 33점이 출품된다.

 

사행(使行)은 외교적 임무를 띄고 중국 등에 파견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 파견된 조선 사행단의 규모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역관(譯官), 의관(醫官), 화원(畵員) 등 정관(正官) 30여 명을

포함하여 3백 명 내외에 이르렀으며 조선시대를 통틀어 총 500여 회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었다.

 

이번 전시는 사행단에 속해 중국의 예술과 문화를 직접 접하고 수용하면서 활발하게 교류하였던

화가(畵家)들을 특별히 조명하고자 기획되었다.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은 새로운 문화를 직접 접하여 사행의 여정과 문화교류의 결실을 그림으로 남겼다.

 

화가가 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는 크게 세 가지였다.

도화서(圖畵署) 소속 화원화가(畵員畵家)들은 선발과정을 통해 사행단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그들은 주로 사행의 여정을 그리거나 입수가 어려운 그림과 지도를 베껴 그리는 일 등을 맡았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처럼 화원이 아니어도

정사(正使)나 부사(副使)의 직책으로 다녀왔던 문인화가들도 있었다.

그 외에 김정희(金正喜, 1786-1856)처럼

삼사(三使)가 특별히 데려갈 수 있었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다녀온 화가도 있었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하였다.

 

제1부 “사신(使臣)의 영접과 수행, 새로운 문화와의 만남”에서는

조선과 명 관리들이 사행(使行)을 통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그림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사행은 중국의 정치외교적 상황에 따라 육로로 가기도 했고 해로로 가기도 하였다.

명이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육로로 가던 사행길이

명나라와 후금(後金)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는 육지에서 벌어지는 각축전을 피해 바닷길로 바뀌었는데,

바닷길 사행은 훨씬 더 멀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항해조천도>는 1624년 인조의 등극을 인준받기 위해 떠난 이덕형 사행단의 일정을 따라

그 여정을 기록한 그림이다. 선사포에서 배를 대고 출발하기 위해 이동하는 조선 사신들의 행렬,

등주(登州)에 도착한 후 육지로 이동하여 북경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풍경들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외에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조선의 문사들과 화가들은 그들을 수행하면서

시문을 나누고 요청하는 그림을 그려주면서 활발하게 교류하였던 양상도 볼 수 있다.

 

제2부 “사행을 통한 조선후기 문인들의 회화활동”에서는

일흔이 넘어 평생을 간절히 꿈꾸던 사행을 떠나게 된 강세황이 생생한 사행의 현장을 담은

역작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과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을 선보인다.

부사(副使) 강세황이 산해관(山海觀)을 지나 북경에 이르기까지 지나는 길에 접한 풍경을 화폭에 담고,

함께 갔던 정사(正使) 이휘지(李徽之, 1715~1785), 서장관(書狀官) 이태영(李泰永, 1744~1803)이

함께 시를 읊어 시화첩(詩畵帖)으로 꾸민 것이다.

 

화원화가 이필성(李必成, 생몰년 미상)이 심양관을 그려오라는 영조의 명을 받들고

사행단을 수행하면서 그려온 <심양관도첩>(명지대학교 LG연암문고)도 함께 선보인다.

1759년 영조와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에 참여하는 등 화원화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이필성의

유일한 현존작이며, 왕실의 요청으로 제작한 사행기록으로의 면모를 강세황 시화첩과 비교하고자 한다.

 

제3부 “조 청(朝 淸) 교류의 장, 사행과 문인들”에서는

조선 지식인들의 ‘병세의식(幷世意識)’,

즉 다른 지역에 살고 있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에서 출발하여

청나라 지식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갖고 한층 활발해지는 조 ․ 청 교류를 살펴본다.

 

이러한 교류의 중심에는 경화세족(京華世族)과 역관(譯官)이 있었는데

이를 상징하고 주도하는 인물이 바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였다.

김정희가 연행을 통해 사제관계를 맺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영향과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과의 관계 속에서 <세한도(歲寒圖)>가 그려지게 되고,

이상적이 연행길에 중국에 가져가 많은 중국 문사들의 발문을 받게 된 맥락 속에서

연행을 통한 조청 교류의 산물로서 <세한도>를 조명하였다.

또한 중국 사행의 경험과 교류의 결실이 주체적으로 종합되어

조선 후기 사회가 지향하던 이상사회의 모습을 읽어볼 수 있는 작품으로 <태평성시도>를 소개하였다.

전시에 나온 조선 후기 8폭 병풍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는

사행 화가의 눈에 비친 청나라 수도 연경(지금의 베이징)이 얼마나 놀라웠을지 짐작케 한다.

저자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과 수레, 상점, 크고 작은 토목공사, 길거리 공연 등

왁자지껄한 활기가 아주 볼 만하다.

 

사행은 문화충격이었다. 다녀온 지식인들은 책을 써서 이를 알렸다.

<열하일기>가 대표적이다. 연암 박지원은 이 책에서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얕볼 게 아니라

그들의 앞선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당시로선 도발적인 주장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개최하는 작은 전시이지만

조선시대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이 남긴 회화 작품을 통해 생생한 사행길의 현장을 느끼고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수용하는 양상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림 1.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선사포(旋槎浦)

선사포에서 출발하는 장면, 조선 후기, 종이에 엷은 색, 40.8×68.0㎝, 국립중앙박물관

 

 

 

 

 

 

1624년의 사행을 그린 <항해조천도>다.

곽산(郭山)의 선사포에서 출항하여 가도(椵島)를 거쳐 중국 등주(登州)에 상륙한 후 육로로 이동하여

북경에 이르는 길을 25장면으로 그렸다. 여정 중에 있는 주요 사적과 풍경이 그려지고

마지막 폭에서는 선사포로 다시 돌아와 배를 대는 장면이 그려졌다. 조선후기에 모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2.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영대빙희(瀛臺氷戱)

강세황, 조선 1784년, 종이에 먹, 화첩크기(23.3×13.7㎝), 국립중앙박물관

 

 

1784년 10월부터 1785년 2월까지 정사(正使) 이휘지(1715~1785), 부사(副使) 강세황, 서장관(書狀官) 이태영(李泰永, 1744~1803)이 진하사은 겸 동지사행(進賀謝恩兼冬至使行)으로 사행을 갔을 때 제작한 시화첩이다.

1784년 12월 21일 청나라 건륭제와 함께 영대(瀛臺)에서 빙희연(氷戱宴)을 관람하고 그린 <영대빙희도>가 실려 있다.

 

그림 3. <사로삼기첩(槎路三奇帖)> 서산(西山樓閣)

강세황, 조선 1784년, 종이에 먹, 화첩 크기 : 23.3×13.4cm

 

 

 

 

1784년 동지사행으로 사행을 갔을 때 제작한 시화첩이다.

“사로(槎路: 배를 타고 가는 길, 즉 사행길을 말함)”에서 만난 세 가지 기이한 경치를 담았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기이한 경치는 계주(薊州)의 ‘계문연수(薊門烟樹)’,

북경 이화원의 풍경을 그린 ‘서산(西山)’,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묘가 있는 ‘고죽성(孤竹城)’이다.

각각의 경치에 대한 삼사(三使)의 제시가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정절의 표상, 강녀묘(姜女廟)를 그렸다

 

그림 4. <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 심양관구지(瀋陽館舊址)

종이에 색, 명지대학교 LG연암문고

 

 

 

  

 

1760년 11월 동지사행(冬至燕行)을 배경으로 제작된 연행기록화다.

1760년 11월 2일, 영조는 사행을 떠나는 정사 홍계희(洪啓禧, 1703~1771), 부사 조영진(趙榮進),

서장관 이휘중(李徽中)을 불러 심양관(瀋陽館)을 그려오라고 명하였다.

사행단에 속했던 화원화가 이필성(李必成)이 그린 화첩으로,

이미 사라진 심양관의 옛터에 세워진 찰원(察院)을 심양관 대신 그렸다.

총 16폭으로 구성되었으며, 목차 1폭, 제발 5폭, 그림 7폭, 문자로 도해한 배반도 3폭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1. 사행길

 

사행이란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외국에 가는 길을 말한다.

중국과 일본 사행이 주를 이루었던 조선시대에 특히 중국 사행은

중요한 일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거나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사행단은 약 3 백명 정도가 되었는데,

정사, 부사, 역관, 의관, 화원 등 30여 명 만이 주요 임무를 띤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수행인원이었다.

2천리가 넘는 오가는 길은 총 다섯 달 정도가 소요되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지만,

당시 다른 나라에 가 본다는 것은 평생 경험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보다 넓은 견문과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사행을 평생 꿈꿔왔던 지식인들도 있었다.

 

 

특히 화가들은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직접 접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사행의 여정과 문화 교류의 결실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화가가 중국 사행을 다녀오는 계기는 크게 세가지였다.

 

첫째, 도화서 소속 화원화원로 이들은 주로 사행의 여정을 그리거나

입수가 어려운 그림 혹은 지도를 베껴 그리는 일, 새로운 그림 기법을 배워오는 일 등을 맡았다.

둘째 화원으로서가 아닌 정사나 부사의 직책으로 사행을 다녀온 문인화가들도 있었다.

1784년 부사로 사행을 다녀온 강세황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셋째, 비공식적으로 사행길에 합류할 수 있었던 자제 군관이었다.

정사는 정원외로 4명을 부사는 3명을 추가로 데려갈 수 있었는데,

대개 전 · 현직 무관을 데려갔으나, 자신의 친척을 데려가는 일도 있었고

이런 자격으로 다녀온 화가들이 이정(1578-1607), 김정희(1786-1856) 등이었다.

 

 

2. 강세황의 시화첩

 

강세황은 61세에 처음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평소 중국의 문물을 배우기 위해 중국 사행가기를 소망하였다.

1778년 사행길에 오른 박제가(1750-1805)에게 주었던 시에서

 

"중국에 출생하지 못한 것이 한이며,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이기에 지식을 넓힐 도리가 없다.

중국학자를 만나서 나의 막힌 가슴을 터놓기가 소원이었다.

어느덧 백발이 되었는데 어떻게 날개가 돋힐 수가 있을까"

 

라고 하였다. 

 

이렇듯 중국 가보기가 소원이었던 강세황은 72세가 되던 해인 1784년

정사 이휘지, 서장관 이태영과 함께 부사직으로 사행길에 오르게 된다.

강세황이 사행길에 그린 <영대기관첩>은

영대에서 행해지는 기인한 경관인 '빙희(氷戱)'를 그림과 시로 담아낸 것이다.

 

  영대기관첩이 전시되고 있는 전시실 모습

 

1784년 12월 21일 건륭제는 강세황 일행을 초대하여 영대에서 빙희연을 베풀었다.

빙희(氷戱)란 팔기장병들이 스케이트를 타면서 활을 쏘는 무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당시 조선에서 파견된 사행단에게 '빙희'는 매우 낯설고 진기한 광경이었다.

강세황이 그린 영대빙희에는 황제가 타고온 가마와 용주, 그리고 얼음 위에 설치된 홍살문과

스케이트를 타면서 활을 쏘는 청나라 부관들의 빙희가 묘사되어 있어,

강세황 일행이 보고한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영대빙희 부분 / 영대기관첩 / 강세황(1713-1791)

 

또 다른 화첩 <사로삼기첩>에는

사행길에 만난 세가지 기이한 경치를 담은 시화첩이 그려져 있는데,

그 세가지 경치는  계주의 '계문연수', 북경 이화원이 포함된 '서산',

백이숙제의 묘가 있는 '고죽성' 순으로 그려져 있다. 

 

 

 

 사로삼기첩 전시 모습

 

 

서산(西山) / 사로삼기첩 / 강세황  / 조선 1784년

 

강세황의 사행은 그가 70세가 넘어 달성한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가 남긴 연행화첩들은 자신의 간절했던 소망이 가져다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생생하게 담아낸 꿈의 기록이면서

오늘날 그 시대의 풍습과 풍류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 큐레이터와의 대화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사실 한가지 -

 

 

  

   

11월 9일 민길홍 학예사가 강세황의 시화첩을 설명하고 있다.

 

강세황 시화첩에는 강세황과 더불어 정사 이휘지, 서장관 이태영 삼사가

강세황이 그린 그림 옆에 화답을 하듯 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이휘지의 낙관만 흰 종이가 덮여져 있다.

이는 이 화첩을 소유했던 이휘지의 후손들이 조상의 낙관에 대한 예우를 보이기 위해

낙관을 가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포토갤러리

 

 

 

 

 사행을 통한 교유와 그 산물 <세한도>

 

김정희의 연행은 그의 나이 24세인 1809년 10월에 시작되었다.

부친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동지 겸 사은부사로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했다.

김정희는 청나라에 가서 평소 만나고 싶어했던

운대 완원, 야운 주학년, 옥수 조강(玉水 曹江), 심암 이임송(心庵 李林松) 등의 명사들을 만났다.

운대 완원(芸臺 阮元 , 1764-1849)은 청대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김정희는 그를 만나서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 완원의 ‘완’을 따서 ‘완당(阮堂)’이라는 당호를 만들 정도로 그를 존숭했다.

옹방강 문하의 예술가 주학년(野雲 朱鶴年, 1760-1834)도 김정희를 환대하여

그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여러 인맥을 통해 갖은 노력 끝에

귀국을 며칠 앞둔 1월 말에 김정희는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 1733~1818)을 만날 수 있었다.

김정희의 학문적 능력에 감탄한 옹방강은

그의 애장품인 소동파 초상화와 1768년부터 수장해 온 소동파의 진적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등

진귀한 서적을 보여주었고 귀국한 이후에는 서신 왕래를 통해

옹방강에게 경학지도를 받으면서 청나라 학예의 정수를 흡수했다.

 

아버지 김노경이 김정희의 형 김명희(山泉 金命喜, 1788-?) 와 함께 간 두번째 연행 덕분에

더욱 확대된 청나라와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학문의 폭과 깊이를 키우게 된 김정희는

1840년 6월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자신의 두번째 연행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김홍근(金弘根, 1788~1842)의 상소로 무고하게 고문을 당하고 곤장을 맞아

만신창이가 된 김정희가 가게 된 곳은 연행이 아닌 제주도 귀향길이었다. 

유배 기간이 길어지자 지인들의 소식이 점점 끊겨졌다.

 

그러나 역관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3-1865) 은 김정희에게 사행을 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서 보내주고 청나라 지인들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다.

사행을 20회 이상 다녀온 그는

시문집 <은송당집(恩誦堂集)>을 생전에 연경에서 발간할 만큼 뛰어난 문인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역관 집안 출신인 이상적은

1829년 처음 사행길에 올라 63세로 작고할 때까지 30년 동안 조선을 대표하는 사행역관으로

10차례 이상 연경에 가서 조선과 청의 학자를 매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상적이 청나라 문인들과 널리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희의 후광 때문이었다.

김정희 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청나라 문인들은 이상적을 환대하였다.

 

 

 

김정희는 유배 전이나 이후에나 늘 마음을 다해 자신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는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림을 그려 그에게 주고자 했다.

당대 학예 연찬의 중심에 있다가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하고 초라한 유배객이 되어버린

김정희 자신의 처지와 스승이 처한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어도 시류에 흔들리지 않은

이상적의 송백과 같은 의리를 그림에 담아

굳세고 골기있는 구양순체의 해서로 쓴 발문에서 김정희는 『논어』의「자한(子罕)」편 중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구절을 언급한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그 사이의 집으로 이루어진 <세한도>는

절제미와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

진한 먹물을 물기가 바짝 마른 붓에 조금씩 묻혀서 사용하는 초묵법을 이용해서

까칠까칠한 붓질로 추움 겨울의 메마르고 활량한 분위기를 돋우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고목이 되어가는 소나무를 통해 김정희가 처한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

소생의 기운이 메말라 사라져 버린 듯한 상황에서도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은 기운차게 솟아올라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히 하고 있는 모습은

한결 같은 이상적의 의리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라는 의미의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에는

이상적에 대한 김정희의 고마움과 이상적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꾹 눌러 담겨 있는 듯하다. 이처럼 <세한도>는 그림으로 내용과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로써 서화일치의 극치를 보여주어 조선문인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김정희의 연행을 통해 사제 관계를 맺은 옹방강의 영향과 연행에 의해 빛을 발한

이상적과의 사제 관계 속에서 탄생된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가을 연행을 떠나는 이상적에게 보내졌다.

이상적은 이에 감격하여 연경으로 가져갔다.

이상적의 연경 방문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오찬(吳贊)과 그의 처남 장요손(張曜孫)과 친구들은

<세한도>를 보고 김정희가 처한 상황에 비분함을 금치 못하며

높은 지조를 지켜줄 것을 제발을 통해 격려했다.

세한도가 청대 문인들에게 소개됨에 따라 김정희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더욱 고조되었고

이상적의 인지도 역시 <세한도>에 의해 더욱 높아졌다.  

 

김정희를 존중하는 중국 문인들의 제발과 제첨으로 장황된 <세한도>는 김정희에게 보내졌다.

김정희가 이 때 받은 감동은 <완당선생전집> 권 4 <여이우선상적>6권에 실려있다.

 

 

이후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인 역관 김병선(金秉善, 1830~?)의 소유가 되었고

아들 김준학(金準學, 1859~?)이 1914년 이후 자신의 글을 추가하여 새롭게 꾸몄다.

1930년대에 김정희 연구가인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가 <세한도>를 소장하게 되었으나

1944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의 노력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손재형은 1949년 세 사람에게 보이고 발문을 받았다.

그 해 윤달 음력 7월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와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이 발문을 주었다.

그리고 9월에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에게 보여주어 12월 5일 마지막 발문이 남겨졌다.

이렇게 해서 현재 모습의 세한도가 전해지게 된 것이다.

 

* 위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테마전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 전시 도록에서 발췌

- 국립중앙박물관 포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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