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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초상화이야기 7 - 역사의 맞수

Gijuzzang Dream 2011. 11. 17. 08:18

 

 

 

 

 

 

 

 

 초상화 이야기역사의 맞수 

 

 

1. 이야기 하나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는 전란의 책임을 묻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찾아가게 된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대사를 조롱하는 시를 지어 굴욕감을 주려고 하였으나,

사명대사는 오히려 의연함을 잃지 않고 폐부를 찌르는 시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감탄케 하였다.

사명대사는 도코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8개월 동안 능숙한 수완과 외교적 노력을 하여

본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도록 이끌어 내고,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압송된 3,000여명의 포로를 송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사명대사 진영

조선, 1796년경 / 보물 제 1505호, 동화사 성보박물관

 

사명당 유정(1544-1610)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승병을 이끌고 나와 전공을 세웠던 인물로서

임란 후 대일 강화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민족의식을 발현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의 의좌상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오려 결가부좌하고,

불자를 들고 있다. 많은 사명당 영정에 비해 수염이 유독 길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

일본, 에도 초기 / 교토대학 박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창시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인물은 궁궐 내의 운겐시키(붉은 바탕의 세로줄 사이에 꽃 마름모 등의 색무늬를 짜 넣은 비단)가

둘러져 있는 다다미 위에 의관속대 차림으로 앉아 있다.

배경에는 도쿠가와 가의 문장이 새겨진 수막이 드리워져 있고, 그 위로는 금니로 채색된 구름이 피어있다.

수막 너머로 펼쳐진 산수화에는 사후에 그를 모신 사당인 도교쿠로 짐작되는 건물이 그려져 있다.

 

 

 

2. 이야기 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붕당 정치라고 일컬어질 만큼 당파에 의해 정국의 주도권이 좌지우지 되었다.

17세기 중후반 조정에서는 예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 논쟁의 두 축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 바로 허목과 송시열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이상이 현실 사회에 구현된 것이 바로 예라고 여겼다.

 

송시열 초상

조선후기/ 국보 제 239호 

 

심의에 복건을 쓰고 오른쪽을 향한 공수 자세의 반신상이다.

평생 주자의 학설을 잇는 것으로 자부했던 송시열(1607-1689)은

문하의 제자들이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함에 따라 후학들의 추앙과 존숭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과 사상은 조선후기 강력한 지배이념이 되었다.

열 초상화에 보이는 송시열의 용모는 이목구비의 모습, 주름살의 위치와 형태,

수염의 모양 등이 대부분 비슷하여 그의 외모를 규정하는 특징적인 형상을 이룬다.

 

 

송시열과 허목은 국가 최고 권위의 상징이었던 왕실에서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인물이다.

자신의 학문적 근거와 원칙을 통해 국론의 통일을 실천하려는 정치적인 리더들의 모습을

간복본과 유복본 초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허목 초상

이명기 / 조선 1794 

 

"여윈 얼굴 긴 눈썹에 늘씬하고 출중하여 보기에 신선 같았고,

대하면 강직하고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었으니 요컨대 세상에 드문 분이었다."

 

허목(1595-1682)의 초상은 그 생김새와 느껴지는 성품이 이의 기록에 부합된다.

허목은 퇴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하여 17세기 남인의 거두로서 이후 후학들에게 만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사모를 쓰고 서대를 부착한 담홍색 관복을 입은 반신상으로 허목의 82세상을 이모한 것이다.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조선시대 초상화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전하는 전신사조에 무게를 두었다.

예술가적 기질이 뛰어난 허목은 ‘정신은 유형이 아니라 무영이므로, 무형을 본뜰 수 없다’라고 하여

초상화의 본질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송시열은 당시 사대부들과 달리 자신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단순히 그려지는 피사자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과 의식을 적극 투영시키는데 능동적이었다.

예의 실천자로서 제례에서 초상화는 필수적이라고 여기면서

부모의 초상화를 모시는 사람을 높이 샀고, 성현을 그린 초상화도 소중히 다루었다.

 

 

 

 

3. 이야기 셋

 

한편,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동인을 제치고 득세하였고, 서인은 숙종 초에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약 100여 년 가량 각종 현안에 대해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보였다.

노론과 소론, 그 분열의 중심에는 송시열과 윤증이 있었다.

 

 윤증 초상

장경주 / 조선/1744년경 / 윤완식 기탁 

 

윤증의 좌안칠분면으로 초상화의 제작에서부터 이모까지의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윤증(1629-1714)은 송시열의 제자로 소론의 영수였으며,

청렴한 학자로 많은 후학에게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두손을 포개어 가지런히 모은 채 꿇어 앉아 있는 윤증 초상은 사방관을 쓰고 있으며,

사방관 안으로 상투관과 하얀 동곳, 그리고 대머리의 형상이 훤히 비치도록 묘사되어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각이 진 필선으로 그린 흰색 도포 위에

검은 광다회를 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유학자로서의 표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송시열과 대립 관계였던 윤증은 초상화 그리는 것을 극히 꺼려하여

화사가 몰래 그를 관찰하여 초상화를 그릴 정도였다.

시열과 윤증은 원래 스승과 제자사이였다.

그들의 숙명적인 맞수 관계는 아버지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서 일어난 회니시비가 발단이 되었다.

이후 윤증의 아버지가 숨을 거둔 후 일어난 묘명문제에 이어, 신유의서로 인하여 의절하게 되었다.

 

 송시열 초상의 얼굴 부분

 

1687년 윤증이 쓴 편지에서 송시열의 학문은 기질이 편벽돼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그의 존명배청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 편지를 송시열이 보게 되었고, 이후 노·소론의 분당을 가속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한 소론은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대립되었다.

주자학의 절대주의자로서 존명배청의 정치철학을 지닌 송시열과는 반대로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도모하고 현실에 바탕한 정치를 꿈꿨다.

그들의 초상화에는 붕당정치 밑바닥에 도도히 흐르는 정치 철학과 사상이 숨겨져 있다.

 

- 문동수, 학예연구사

-2011년 11월 2일 큐레이터와의 대화

-<초상화의 비밀> 전시 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소식, 포토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