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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Gijuzzang Dream 2011. 11. 17. 08:24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혼례식의 기록, 『가례도감의궤』

  

 

조선시대에도 결혼은 인생에서 최고의 경사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특히 왕실의 결혼은 국가의 행사 중에서도 가장 큰 경사의 하나였으며,

왕실의 결혼을 가리켜 ‘가례(嘉禮)’라고 칭하였다.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는 1627년(인조 5) 소현세자의 가례에서 시작하여,

1906년에 거행된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가례까지 기록하고 있어서,

『가례도감의궤』를 통해서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특히 말미에 그려진 그림 반차도는 축제의 기분을 한껏내는 생동감 깊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서

당시의 결혼식 행사에 직접 참여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반차도는 마치 오늘날 영상 자료로 촬영한 듯한 효과를 안겨다 준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揀擇: 왕비 후보의 선택)을 비롯하여, 납채(納采: 청혼서 보내기),

납징(納徵: 결혼 예물 보내기), 고기(告期: 날짜 잡기), 책비(冊妃: 왕비의 책봉),

친영(親迎: 별궁으로 가 왕비 맞이하기), 동뢰연(同牢宴: 혼인 후의 궁중 잔치),

조현례(朝見禮: 가례 후 처음으로 부왕이나 모후를 뵙는 의식) 등 혼인의 주요 행사를 비롯하여,

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의 재료와 수량,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행사와 관련하여 각 부서간에 교환한 공문서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그린 반차도를 그려넣어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체계적이고 화려하게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시대 의궤의 꽃이라 칭할 만하다.

 

현존하는 의궤 중에서는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에서부터

사도세자와 『장조헌경왕후가례도감의궤』까지는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부터 혼인 행사의 전 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2책으로 제작했다.

 

이들 책은 특히 반차도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1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는

행렬이 8면에서 18면에 걸쳐 그려질 정도로 규모가 소략하고 왕비의 가마만이 그려진데 비하여,

2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에는

왕과 왕비의 가마가 함께 그려지면서 46면에서 92면에 이르는 긴 행렬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그만큼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가례 행사가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왕실 혼례식의 주요 절차

 

 왕실의 혼인에서 가장 먼저 필요했던 절차는 간택이었다.

간택은 왕실에서 규수를 선택하는 것으로, 왕실의 혼사에는 3차례의 간택이 실시되었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결혼에 앞서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 정도에 불과했다.

간택은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택에 참여하는데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간택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도

간택을 기피하는 이유가 되었다.

 

 

 

 

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 똑같은 복장을 입었다.

초간택 시의 복장은 노랑저고리에 삼회장을 달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재간택,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은 조금씩 늘었다.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뽑힌 처녀가 부인궁으로 나갈 때 입는 옷은 비빈(妃嬪)의 대례복으로

거의 왕비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삼간택에 뽑힌 규수는 별궁에 모셔졌다.

별궁은 예비 왕비가 미리 왕실의 법도를 배우는 공간의 기능과 함께

왕이 친히 사가(私家)에 가는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별궁으로 가장 많이 활용된 곳은 어의동 별궁이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시에는 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이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반차도로 보는 영조 혼례식 행렬의 이모저모

 

조선시대 왕실 혼인의 규모와 대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데는 반차도(班次圖)가 가장 유용하다.

반차도는 혼례식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오늘날 결혼식 기념사진 또는 영상물과 같은 성격 을 띠고 있다.

반차도를 통해 참여인원이라든가, 의장기의 모습, 가마의 배치 등 결혼식 현장의 생생한 모습들을

접할 수 있는데, 마치 당시의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린 것은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하였다.

반차도는 오늘날 국가 행사나 군대의 작전 때 미리 실시하는 도상 연습과 같은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영조와 정순왕후 결혼식의 경우 친영일은 6월 22일이었지만

친영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6월 14일날 이미 제작되어 국왕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모두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영을 가례의 하이라이트라고 여긴 때문이다.

반차도에는 국왕의 대가(大駕) 앞을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전사대(前射隊)를 비롯하여

주인공인 왕비와 국왕의 가마 이들을 후미에서 호위하는 후상(後廂), 후사대(後射隊) 등과

행사에 참여한 고위관료, 호위병력, 궁중의 상궁, 내시를 비롯하여 행렬의 분위기를 고취하는 악대,

행렬의 분위기를 잡는 뇌군 헌병 등 각종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하여 행진한다.

이들 중에는 말을 탄 인물의 모습도 보이고 걸어가는 인물의 모습도 나타난다.

여성들의 모습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말을 탄 상궁을 비롯하여 침선비 등 궁궐의 하위직 여성들의 모습까지 다양하다.

 

 

 

 

행렬의 분위기를 한껏 높이는 의장기의 모습도 흥미롭다.

행렬의 선두가 들고가는 교룡기와 둑기를 비롯하여

각종 깃발과 양산, 부채류는 당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해 주고 있다.

수백 명이 대열을 이루는 이 행렬은 바로 당시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최대의 축제 퍼레이드였다.

그리고 이 행렬의 모습을 오늘날에도 현장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큰 행운인가?

 

 

 

  

반차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왕의 행차를, 뒷부분에는 왕비의 행차를 그렸다.

王의 연은 임시가마인 부연(副輦) 다음에 배치되어 있으며,

왕비의 연 앞에는 왕비의 책봉과 관계된 교명(敎命) · 옥책(玉冊) · 금보(金寶) · 명복(命服)을 실은

교명요여, 옥책요여, 금보채여, 명복채여가 따르고 있으며 왕비의 연은 그림의 말미에 위치해 있다.

왕과 왕비의 가마 전후에는 전사대와 후사대가 따르고 있다.

왕의 연은 사방을 열어 놓아 내부를 볼 수 있게 하였으며, 왕비의 연은 내부를 볼 수 없게 하였다.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인물들은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왕과 왕비의 가마를 중심으로 하여

후면도, 좌측면도, 우측면도의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반차도는 한 각도에서 잡은 그림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행렬이 정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늘날로 치면 카메라를 여러 각도에서 잡음으로써 현장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과 같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를 통해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은 우리에게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다.

  

-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NEWS  Vol.481 (20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