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특별전] 초상화이야기 4 - 충신과 공신

Gijuzzang Dream 2011. 11. 17. 08:00

 

 

 

 

 

 초상화 이야기 - 충신과 공신

 

 

忠은 유가에 있어서 철학적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으로서

다수의 전체에게 공평하게 성실을 다하는 태도를 말하나,

윤리적으로는 군신관계에 있어서 신하가 국가와 군주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받드는 도리를

일컫는 것으로서 孝와 함께 유가의 핵심 원리로서 강조되어 왔다.

 

충신에 대한 이념은 유가사상의 전래와 함께 일찍이 수용되어

신라 화랑도 탄생의 밑걸음이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려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주자학이 수용되고

조선왕조의 개국과 함께 국가적 지배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충절에 대한 교육은 더욱 체계화, 공고화되었다.

 

고려에서 조선왕조 교체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개를 지켜 선죽교에서 암살당한 정몽주,

단종에 대한 충절로 복위를 도모하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과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출사를 거부하여 은둔한 생육신 등은

세월이 지난 후 대표적인 충신의 이야기로 전해지면서 그 초상이 귀하게 모셔졌고

한말과 일제시대의 국권회복 및 저항운동의 한 배경이 되었다.

 

정몽주 초상 / 이한철, 조선

 

조선말기 화원화가 이한철(1808-1880 이후) 이 그린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의 관복반신상 초상이다.

얼굴 표현은 얼굴 각 요소의 윤곽선과 주름을 진한 갈색으로

그리고 얼굴에 입체감 표현을 거의 가하지 않아

제작 당시의 표현 기법보다는 모본의 양식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까지 대표적인 화원화가가 그 초상을 그렸던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전반을 통해 충신으로 추앙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천우 초상 / 한종유, 조선

 

이 작품은 조선 초기의 무신인 이천우의 초상이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아들로

1369년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여러 번 왜구를 토벌했고,

1392년 태조의 건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이 초상은 이천우가 젊어서 그려 받은 공신상 중 하나로 추정되는데

1400년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원본을

1774년 도화서 화원이었던 한종유가 이모한 것으로 보인다. 


안면은 외곽선 및 이목구비를 굵기가 가는 일정한 선으로 묘사하고,

콧날을 나타내는 선 역시 가는 먹선으로 마치 옆 모습처럼 표현하였다.

옷 주름선 역시 음영이 표현되지 않은 고식이다.

양 무릎 사이로 흘러내린 옷 주름선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조선 초기의 초상화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으로

이 초상화가 이모본이지만 원본을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천우 초상>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고인상으로 18세기에 이모된 작품이지만

 조선 초기의 복제와 형식 기법이 충실히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신숙주 초상/ 조선, 15세기 중엽 / 고령 신씨 문충공파 종약회

  
신숙주는 본관이 고령,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이며 뛰어난 학식으로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삼정승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조선 문관이다. 

<신숙주 초상>은 오사모에 녹포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를 취한 채

교의 위에 앉아 있는 좌안 팔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을 따르고 있어서

신숙주가 몇 차례에 걸쳐 공신에 채록되었을 때 중의 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믿어지는데,

문관 3품에 해당하는 백한흉배와 삽은대의 도상이 화면에 등장하고 있어서,

그가 단종을 퇴위시킨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에 책훈되었을 때인 1453 무렵,

혹은 그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안면 등 화면 여기저기가 조심스럽게 후보되어 있으나,

섬세한 안면부의 묘출과 대조되는 단령의 직선적이고도

꺾임이 심한 필법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

교의에 호피나 표피 대신에 끈으로 방석을 매어 사용하는 것이나,

채전 없이 맨 바닥에 족좌대와 교의를 설치하여 담박하게 배경을 처리한 점,

화면 중앙의 커다란 직금 흉배를 통해 귀한 신분과 높은 공훈을 드러내면서

단령 안에 착용한 자색 목깃과 트임 사이로 드러나는 홍색 안감으로 포인트를 더해주는 패션 감각 등은

1476년 적개공신상까지 지속되는 조선 초기 공신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장말손(1431-1486) 초상 / 조선, 15세기/  인동 장씨 연복군종택

 

세조-성종 때의 문신인 장말손의 초상이다.

이 초상은 조선 전기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으로서 적개공신책록을 기념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관복의 흉배에 금실로 수놓은 백한 문양등을 고려해 볼 때

연복군에 임명된 성종 13년(1482)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삽은대를 착용하고 공수자세를 취한 채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얼굴을 살구색으로 칠한 후 적갈색으로 윤곽을 표현하였으나

볼의 오목한 부분에는 선염기를 약간 가하였다.

입술은 붉은 기가 돌고 눈매의 표정이 살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준다.

목위로 바짝 올라간 단령, 팔뚝 아래에 있는 교의의 손잡이 가지런한 두 발,

각진 의복선, 단령의 왼편 틀임 사리로 내공과 첩리 등이 세차게 뻗어 있는 모양 등에서

조선 전기 공신상의 특색을 잘 반영하고 있다.  


 

 주도복 초상 / 함안 박물관  / 상주 주씨 문중 기탁

 

주도복 초상은 유교 윤리인 충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임금을 향한 충직한 신하로서의 애도를 표현하고 있는

이 그림은 18세기 이전 공신상이나 사대부상과는 달리 화면 구성이 독특하다.

주도복은 영조가 승하한 소식을 듣고 사당 앞에 제단을 차려

3년간 조석으로 북쪽을 향해 절하고 통곡하였는데 이를 조정에서 듣고 가상히 여겼다고 한다.

 

상단에는 “영종대왕국휼복상도英宗大王國恤服喪圖”라고 씌어 있다.

그 아래 오른쪽 상단에는 여막이 있고, 좌측 상단에는 비각과 함께

돌로 쌓은 대 위에 향로와 촛대가 놓여 있어 임금을 잃은 슬픔을 상징화하였다.

 

 

공신(功臣)이란 국가와 왕실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공을 세운 사람을 지칭하는데,

공신호와 함께 공신상을 그려 사여함으로써

신과 자손에게는 치하와 보상을 하고 다른 신민에게는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 태조 23년(940)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당을 두어

동서 벽에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삼한공신을 그렸다고 하나 현전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공신에서부터 분무공신에 이르기까지 총 28종의 훈봉공신호가 수여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공신들은 정해진 날 반사의식에 참여하여 각종 상전을 수여받고

다음날 공신회맹제를 지냄으로써 공신간의 결속과 조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였다.

 

왕명에 의하여 제작된 공신도는 대개 두 본을 제작하여

한 본은 조정에서 보관하고 나머지 한 본은 종손가에 내려 봉안하게 하였는데,

대체로 오사모에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와 각대를 두르고 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를 취한 채

교의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의 좌상이 도상으로 그려졌다.

 

조선 중기에는 화려한 채전이 바닥에 깔려 조선적 특색을 드러내고,

조선 후기에는 두루마리보다 경제성과 편의성이 우수한 화첩 형식을 수용하여

한 면에 공신의 관직과 이력을 쓰고 다른 한 면에 초상을 그려 넣는 형식이 선호되기도 하였다.

공식적인 공신호의 책훈은 분무공신호가 마지막이지만

소위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교의에 앉은 전신좌상이라는 ‘공신상 형식’은

18세기 이후 사대부 사회에 영향을 미쳐 관복본 초상화의 성행을 낳기도 하였다.

 

- 김울림 학예관,  "충신과 공신" 과 초상화 설명 중에서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뉴스, 포토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