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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초상화이야기 1 - 통치자의 위엄

Gijuzzang Dream 2011. 11. 17. 07:53

 

 

 

 

 

 초상화 이야기 - 통치자의 위엄

 

문명의 발생과 함께 정복자와 통치자의 초상은 권력을 시각화함으로써

현존 지배질서의 정당화와 지배이념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하는 훌륭한 도구로서 발전해왔는데,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 이래 통치자의 초상에 내포된 이러한 맥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일찍이 한나라 때 삼황오제와 같은 신화적 인물이 벽화로 그려지고

남북조시대 고개지, 육탐미와 같은 화가들에 의해 재위 중인 황제의 실제 초상이 시도되다가,

당나라 때부터 염입본과 같은 궁정화가에 의해 황제의 초상이 본격적으로 그려지게 되어

송, 원, 명, 청을 거쳐 그 제작과 봉안제도가 발전하는데,

중국 황제상과 그 제도는 한국의 어진과 일본의 미에(御影)가 발생, 발전하는데 있어서

일종의 원형으로서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어진

이재진 모사. 201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조 어진

조석진, 채용신, 조선, 1900년, 국립고궁박물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묘주 초상이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초상에 대한 기록을 감안할 때

한국에서 왕의 초상은 늦어도 삼국시대부터는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어진이 활발하게 제작되어 많은 진전이 세워졌는데,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조와 역대 군왕의 어진을 봉안한 개성의 경령전 외에도

불교식 영당으로서의 원당 진전이 있었으며 회화뿐만 아니라 소조 혹은 주조로 초상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는 유가적 이념에 기초한 어진 봉안 체계를 더욱 발전시켜

국조인 태조의 수용만을 받드는 태조 진전과 열조(列朝)의 수용을 받드는 선원전을 병행 설치, 운영하여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과시하였다.

특이한 점은 조선시대 어진의 경우 향사 의례용 초상으로 철저히 한정되어 제작될 뿐,

추모나 감상을 위한 그림, 궁중 기록화의 회화적 대상으로서 그려지는 것은 철저히 기피되었다는 점이다.

 

연잉군 초상

박동보, 조선, 1714년, 국립고궁박물관

 

반면, 일본에서는 1088년 고이치조 천황의 딸이 부친의 어영을 헌정했다는 기록을 필두로

헤이안과 가마쿠라, 남북조시대와 무로마치 모모야마를 거치면서 발전했는데,

한국이나 중국처럼 일정한 곳에 봉안한 것이 아니라,

천황마다 연고가 깊은 사찰에서 제작을 주관하고 개별 사찰에 모셔져 향사(享祀)되는 경향이 분명하며,

기록을 목적으로 한 니세에(似繪)방식의 천황상도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철종 어진

이한철 등, 조선, 1861년, 국립고궁박물관

 

 고종 어진

전 채용신, 20세기 초, 국립중앙박물관,이홍근 기증

 

 다카시마 센자이

일본, 메이지, 1874년, 도쿄국립박물관

 

 오보이 초상

중국, 청, 18세기 중엽-20세기 초 비단에 색, 스미스소니언 아서엠새클러갤러리

 

이렇게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의 국왕 초상은 그 제작과 봉안 제도에 있어서

국가적 상징 체계 및 전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면서 출발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유교적 조상숭배와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적 내세관에 뿌리를 둔

오랜 기간의 역사적 수용과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적 보편성 안에서도 다채로운 전개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김울림 학예연구관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 전시 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포토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