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7. 이가환과 실학의 만남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6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7) 이가환과 실학의 만남

 

 

정조대왕의 정치적 동반자… ‘화성 개혁’ 이끈 핵심인물

 

 

 

조선시대 개혁군주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신하는 과연 누구였을까?

정조시대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정조는 어느 특정인만을 사랑하지 않았다.

여러 당파에 자신의 뜻과 함께 하는 젊은 선비들을 정조는 무척 사랑하였다.

그 중 남인으로 한정하자면 단연코 정약용과 이가환이다.

정약용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이가환은 생소하다.

하지만 정약용은 실제 그의 삶에 있어서 이가환에게 너무나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가환이 죽고 나서 장문의 묘지명을 그가 지었던 것이다. 그것도 비분강개하면서 말이다.

 

이가환은 그 유명한 실학자 성호 이익의 후손으로 본관은 여주였다.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익(瀷)의 종손, 할아버지는 명진(明鎭)이고, 아버지는 용휴(用休)이며, 어머니는 유헌장(柳憲章)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 진사가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가환은 이익의 친형인 이잠의 종손으로 태어났기에

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조선후기 당쟁의 한 복판에 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다산시문집


 

어린 시절부터 천재란 소리를 들었던 이가환은 성리학과 실학을 동시에 공부하였다.

기억력이 뛰어난 그는 정약용의 표현대로 한번 본 글은 평생동안 잊지 않았고,

제가백가에서 천문학, 수학 그리고 수의학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학문이 없을 정도였다.

1778년(정조 2) 2월 정조는 문신 제술에 수석을 하여 6품으로 승진시킨 승문원 정자(正字) 이가환을 불러

다양한 견해를 물어보았다.

본인 역시 대단한 학자이지만 모든 학문을 꿰뚫고 있는 이가환은 그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다.

역대 중국 국가의 관제와 군사제도 등에 대한 이가환의 지식은 정조를 놀라게 하였다.

더 나아가 이가환은 서양 선교사들이었던 마테오리치와 테렌스의 <천주실의>와 <기기도설>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고 동·서양 천문학의 차이점을 설명해주었다. 이는 성호 이익의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천문과학능력은 이가환과 함께 공동연구를 통해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

이가환은 1780년 비인현감으로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예조낭관으로 영전하였다.

정조는 1년 뒤인 1781년 이가환을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하였다.

사헌부 지평은 관리들의 탄핵 감찰권과 일반 백성들의 검찰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막강한 자리였다.

더불어 국왕의 명령을 받아 법률을 집행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요직이었다.

정조는 이가환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기에 특별히 발탁한다는 이야기를 직접 함으로써

이가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조정의 대소신료들 모두가 알게 하였다.

아마도 이 시기는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이 잠시 낙마하여 은거하였던 시기였기에

채제공을 대신할 새로운 남인의 인물을 키우고자 하는 의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가환은 이미 국왕 정조 앞에서 1등으로 합격한 학문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가환의 승진과 요직 임명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당시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 양성을 추진하였다.

훗날 장용영을 신설하고 1791년에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하였을때

‘문치규장(文置奎章) 무설장용(武設壯勇)’이라 하여

학문을 육성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고 무예를 육성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즉 규장각과 장용영이 정조의 인재육성 정책의 근본 기관이었던 것이다.

특히 규장각은 학문 육성만이 아닌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중추 기관이었다. 이 규장각의 핵심 인물들이 바로 초계문신이었다.

초계문신은 당파를 가지지 않고 당대 최고의 젊은 학자들을 선발하여

정조의 친위 세력으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위하여 최측근 세력인 초계문신 육성에 진력하였고

그 중의 한명으로 이가환을 선발하였다.

이가환의 뒤를 이어 초계문신이 된 정약용·정약전과 더불어 남인의 초계문신으로서 정조를 보필하였다.


이가환은 정조 16년인 1792년 9월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 곧이어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이가환은 이제 정조의 왕권강화 정책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러한 성장으로 인하여 노론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하였다.

노론세력들은 이가환의 대사성 임명을 극도로 반대하였고, 정조는 계속해서 이를 묵살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다.

정조가 아무리 강력한 국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여도

국왕이 신하들과 오랫동안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일종의 타협책으로 전체적인 모양세를 갖추는 인사를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가환을 개성유수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정조가 이가환을 개성유수로 임명하는 문제로 이틀간을 밤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좌의정인 채제공에게 할 정도로 이가환은 정조의 정국운영에서 핵심이 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가환이 너무도 똑똑하고 향후 재상이 될 능력이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너무도 견제가 심했고

정국 구상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면서 그를 개성유수로 임명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표면에는 탕평 인사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만큼 정조와 이가환은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 베론학당

이처럼 이가환이 개성유수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한편으로 그가 이잠(李潛)의 종손이었기 때문이다.

이잠은 경종 재위시에 노론에 의해 대역죄인으로 몰려 국문중에 맞아 죽었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이잠의 종손을 정조가 총애하니 그들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승지였던 노론의 차세대 지도자인 심환지는

이가환이 역적 이잠의 후예라는 이유로 조정에서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가환의 종조(宗祖)에 대해서는 나도 그 이름을 익히 듣고 있으나,

종조는 종조이고 종손(宗孫)은 종손이다.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맡겼는데 이가환이 문사(文士)가 아니라는 말인가.

경 또한 과구(科臼) 중의 사람으로 옛 습관을 면하지 못하고 이렇게 뭇사람들을 따라 하고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라고 심환지를 나무라며 이가환을 지켜주었다.


정조가 이렇게 이가환을 변호함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천주교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가환은 당시 서학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그도 역시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로서 활동하였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남인 집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으로 볼 때 천주교 세력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맡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가환은 천주교에서 조상의 제사를 금지한다는 결정을 듣고 곧바로 배교를 선언한 인물이었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도 이가환과 거의 같은 시점이었다.

아마도 이가환과 깊은 상의가 있었던 것으로 우리는 보아야 한다.

 

훗날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같은날 임명하였다.

이들 지역이 천주교가 흥성한 지역이라 이들을 임명하여

천주교 세력을 약화시켜 천주교인이라는 누명을 벗겨주기 위함이었다.

실제 이 두 사람은 천주교를 토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충주목사와 금정찰방으로 재직할 당시 많은 천주교인들을 배교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것이 당시 이가환의 입장에서는 정조를 돕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정조는 이가환이 배교를 선언하였기에 더 이상 천주교와 연계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의 불우한 가문과 처지로 인하여 일부 과격한 글쓰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거꾸로 우리 조정의 잘못 때문이지 이가환의 잘못이 아니라고 적극 두둔해 주었다.

이잠의 죽음이야말로 조정의 잘못이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잠의 죽음이 노론 때문이었으니 거꾸로 노론은 혹을 떼려다 붙인 꼴이 되었다.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 2월 화성으로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을 다녀온 후

이가환에게 화성의 축성을 비롯한 도시기반시설 모두를 책임지고 맡아 추진하도록 하고,

정약용에게 민첩하니 이가환을 도와 자신의 정국 운영 구상을 완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정조는 상왕이 되어 화성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새로운 조선을 만들려고 했다.

 

이처럼 이가환에게 화성의 마무리를 부탁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열정 때문이었다.

정조는 공개적으로 남인의 영수였던 채제공의 후임으로 이가환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 뒤를 이어 이가환의 후임으로 정약용을 재상으로 임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정조는 이가환과 정약용을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로 인식하였고

이들의 경륜과 지혜를 세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반대세력의 집중적 견제로 인하여 정조의 정국 구상은 잠시 지연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정조가 승하한 것이다.

결국 정조의 승하로 인하여 이가환은 천주교의 우두머리가 되어 1801년에 끝내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정조가 꿈꾸었던 대일통(大一統)의 세상을 만들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그가

끝내 지혜를 세상에 펼치지 못하고 대역죄인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어떤 세상을 꿈꾸었는지

정약용이 남긴 이가환의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이 역사의 무서움이자 기록의 서늘함인 것이다.

그래서 이가환은 죽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그를 찾는 것이다.

-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컬리지 교수
- 2011년 3월 7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