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5. 천주교와의 만남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7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5) 천주교와의 만남

 

개혁사상사 다산의 마음을 흔들다

 

 

 

 

   
한국 천주교 발상지 광주 천진암.

 

 


한강 배위에서 천주교 전파 이벽과의 만남…


1784년 4월15일,

한강 물길을 따라 서울을 향한 배가 두미협(현재 팔당댐이 있는 협곡)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배에서 이벽(李檗)은 천지(天地) 조화의 시초와 육신과 영혼이 죽고 사는 이치를 얘기했다.

정약용은 정신이 황홀하고 놀라 마치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정약용(丁若鏞)이 나이 23세로,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형제들과 함께 맏형수의 기일에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서울로 돌아가는 참이었다.

함께 배를 탄 이벽(李檗, 1754~1786)은 자는 덕조(德操)이고, 호는 광암(曠庵)이다.

정약용보다 8살 위였다.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인 그는 정약용의 맏형수 남동생, 즉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이었다.

그는 정약용의 맏형수인 누님의 제사에 참석했던 것이다.

이벽의 집안은 무반 집안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이부만(李溥萬)은 건장하고 총명한 아들을 무관으로 출세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경서공부에 열중하였다.

당시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양서적도 열심히 탐독했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들과 중국의 서광계(徐光啓) 등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아울러 서양의 과학지식 등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벽은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기호 지방의 젊은 남인학자의 무리에 속했다.

이가환(李家煥) · 이승훈(李承薰) · 권철신(權哲身) · 권일신(權日身) 그리고 정약용 형제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일찍이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소외된 남인 가문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사상에 더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1779년(정조 3년) 권철신 · 정약전(丁若銓) 등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유학 경전을 공부하는 강학회(講學會)를 가졌다.

이때 이벽이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학자들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는 유학에 대한 토론과 이해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후일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는 어디까지나 유학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정약용이 한강 배위에서 이벽에게서 받았던 감동과 충격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날 4월15일의 광경을 시로 남겼다.

‘벗 이덕조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다[同友人李德操乘舟入京]’는 제목의 시였다.

이 시에서 그날 한강변의 풍경을 묘사한 데 이어,

“소식(蘇軾)은 재주 높아 물과 달을 얘기했고 / 이응(李膺)은 이름 높아 신선과 같았지 /

내 재주 졸렬하여 기댈 것 없음을 잘 알아 / 낡은 경전을 공부하여 옛 성현 보답하려네”라고

읊고 있다.

소식은 적벽부(赤壁賦)를 통해 세상을 관조하는 통쾌한 기상을 드러냈다.

이응은 강직하여 수난을 겪지만 명성을 얻어 특별히 배를 타게 되는데,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그의 모습이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신선 같았다고 한다.

정약용은 배 위에서 천주교를 얘기하는 이벽의 모습을 이들에 비유하여 묘사한 것이다.

   
천주교를 전파한 이벽.


 

정약용은 서울에 돌아와 이벽을 찾아가 <천주실의>와 <칠극(七克)> 등 몇 권의 책을 빌려 보았다.

그리고선 비로소 마음이 흔연히 서교(西敎), 즉 천주교에 기울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정약용이 이벽과 학문적으로 만난 것은 유학에 관한 것이 먼저였다.

정조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인 <중용>에 관한 과제를 주었다.

다산은 이 과제를 위해 이벽을 찾아가 밤샘 토론을 벌였다.

그 토론 끝에 정조 임금에게 올린 것이 <중용강의>였다.

정조는 정약용의 의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정약용은 <중용강의보>를 내면서

그 서문에서 이벽과 함께 토론한 지가 30년이 지났다며 추억하고 있다.

노장(老莊)조차도 불온시할 정도로 주자학이 교조화되었던 당시의 사상적 폐쇄사회에서

천주교와의 만남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상적 억압사회도 자유로운 영혼을 가둘 수 없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욱 자유를 염원하고 추구하는 면이 있다.

이벽은 더욱 과감하게 일을 진척시켰다.

1784년 겨울, 이승훈이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그에게 더 많은 천주교 서적을 얻어 올 것과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했다.

이승훈은 스스로 성당에 찾아가 영세를 받아왔다.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생적으로 공식적 천주교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이듬해 여러 천주교 서적들을 챙겨서 돌아왔다.

 

이벽은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고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가까운 양반학자와 인척들 및 중인계층의 인물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이벽은 역관인 중인 김범우(金範禹)와 친했는데,

김범우가 청나라를 왕래하며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을 이벽이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벽의 성서에 대한 인식은 <성교요지(聖敎要旨)>라는 저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벽은 교단조직을 갖추고 그 지도자로서 천주교 전례의식을 주도하였다.

1785년(정조 9) 봄에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이 중심이 되어 모임을 가졌다.

마침 형조의 금리(禁吏)들이 지나다가 여러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보고

노름 현장이라 의심하여 덮쳤다. 안에 들어가 보니 기이한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양반들과 중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권일신(權日身) 부자와 정약용 형제들도 있었다.

금리들은 현장에서 천주교 서적과 성상들을 압수했다.

이것이 천주교 비밀모임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다.

 

형조판서는 중인 김범우만을 옥에 가두고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곧 정치적으로 비화됐다. 공교롭게 연루된 인사들이 대부분 남인들이었다.

정조는 탕평책을 내세워 남인들을 기용해 노론의 일당독재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했고,

노론들은 남인의 부상을 억제하려 했다. 노론에게 천주교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 성리학이 교조화되어 있던 터라 성균관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반대여론이 형성되었다.

남인 내에서도 정치적 부담 등으로 인해 반대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연루된 집안에서는 파란이 일어났다. 이벽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배교를 요구했다.

아들이 거절하자 목매어 죽으려 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벽은 효심과 신앙이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번민하던 이벽은 전염병에 걸려 이듬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벽과 유학에서부터 학문적으로 만나 광주 천진암서 잦은 강학회는

후일 신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수년동안 천주교에 경도되었던 정약용은 진산사건을 계기로 관계를 끊었지만…
한번 연루된 천주교는 평생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주어진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사상적인 개방 태도는

노장을 비롯한 제가의 다양한 흐름을 자신의 학문으로 집대성해,

참다운 실학자이며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벽의 죽음을 정약용은 매우 슬퍼하여 ‘벗 이덕조에 대한 만사[友人李德操輓詞]’를 지었다.

여기서 닭이나 집오리들이 시샘을 받은 선학(仙鶴)으로 이벽을 비유했다.

고매함과 순수함을 갖추고 그 말씀이 깊은 감명을 주었는데, 가을바람 타고 홀연 날아가 버렸다.

그의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을 그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표현했다.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선배이자 벗이었던 이벽이 죽은 뒤에도, 천주교 모임은 계속되었다.

26세인 정약용은 이승훈과 함께 성균관 근처마을인 반촌에서 비밀강습회를 열었다.

이 모임은 다른 성균관 친우들에게 알려져 서로 분열하여 적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약용은 회고하기를, 이 정미반회사건 이후로도 수년 동안 천주교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해년(1791년) 진산(珍山)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와 관계를 끊었다고 말하고 있다.

   
정약종이 지은 ‘주교요지’는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말로 지은 최초의 교리로서 초기 교회발전에 절대적 공헌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진산사건은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다.

유교의 핵심인 효 질서와 천주교의 교리가 상용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두 사람은 처형되고, 정부는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을 내렸다.

정약용도, 처음 천주교를 접할 때는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회고함으로써,

그 문제와 정부의 공식적 금지가 자신이 천주교를 절연한 이유였다고 말하고 있다.

본디 보유론의 관점에서 천주교를 수용했던 유학자들은 이제 택일할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의 인생과 저작을 통해 볼 때,

천주교의 영향이 배었다 할지라도 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주자 성리학의 교조적 해석에 반대하고, 원시유학으로의 복귀를 강조한 유학자였다.

불교나 노장에 대한 태도에서도 유학자의 면모를 보였다.

저 피안이나 구원보다 현세와 인간적 노력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한번 천주교와 연루된 정약용은 평생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797년,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사정을 진솔하게 밝혔다.

충심어린 변명과 정조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정적들은 끊임없이 공격했다.

결국 보호자였던 정조가 돌연 세상을 뜨자 정적들은 죽이려 대들었다.

바로 1801년의 신유옥사(辛酉獄事)였다. 정약용 형제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헤어졌다.

셋째 형 정약종은 순교하고,

천주교와 거리를 둔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나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학우와 형제들이 갈라지고 생사를 달리하게 한 사상적 폐쇄성과 억압은 암울한 시대의 징표이다.

지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시기에 정약용은 결코 주어진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노장(老莊)을 비롯한 제가(諸家)의 다양한 서적들을 섭렵했다.

뿐만 아니라 외래의 서학과 천주교에도 관심을 갖고 천착했다.

정약용의 학문은 당시 다양한 사상적 흐름을 자신의 학문으로 소화하고 집대성함으로써 이뤄졌다.

사상적으로 개방된 태도가 있었기에 실학자로서 또 사상가로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상적 개방성이야말로 다산학과 실학의 징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

- 2011년 2월 21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