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8. 우리가 기억하는 다산의 얼굴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6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8) 우리가 기억하는 다산의 얼굴

 

백성 섬기는 따스한 선비로 다가와 수염이 덥수룩한 茶山,

정자관을 쓴 茶山, 갓을 쓴 茶山, 안경을 낀 茶山 …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 외증조부 윤두서를 빼닮은 정약용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다산 정약용 얼굴들은 

다산의 모습과 실제로 얼마나 닮아 있을까?

 

다산의 초상은 대략 여섯종류가 전한다.

 

사방관을 쓰고 수염이 덥수룩하면서고 근엄한 다산,

정자관을 쓴 삽화,

십자가를 걸고 갓을 쓴 다산,

안경을 끼고 부드러운 인상의 정약용,

얼굴이 갸름하면서도 수염이 많지 않은 이미지 등 다양하다.

 

지금 내 마음 속에 그려진 정약용은 어떤 모습일까?

다산은 스스로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정분(精分)은 외가에서 받은 것이 많다”라고 하였다.

외탁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그의 외모를 상상할 때

언뜻 떠오르는 것이 그의 외증조부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이다.

다산의 모습이 우리에게 처음 공개된 것은

1936년 7월 16일 ‘다산서세백년기념’으로 동아일보의 기념행사에서였다.

이때 동아일보는〈다산선생의 일생〉(정인보),〈다산의 사상〉(백남운),

<이조 유학사상의 정다산과 그 위치〉(현상윤) 등의 논설과 함께 다산의 저술연표,

다산과 홍씨부인의 유필, 마현의 다산생가 등과 함께 그 모습을 삽화로 그려 공개하였다.

어떤 과정을 거쳐 누가 그렸는지 등이 밝혀져 있지 않고,

상세한 묘사가 아닌 삽화 형식의 간략한 것이기는 하지만, 외탁했다는 그의 회고를 전적으로 믿고

윤두서의 자화상을 깊이 참조하여 작업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선각자 정다산님

(1959 · 박서보)

■ 선각자 정다산님

다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다산의 모습은 1959년 12월에 박서보 화백이 그린 ‘선각자 정다산님’이란 초상이다.

이 역시 정식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없는 삽화 형식의 그림으로 다산선생기념사업회에서 묘비를 건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큰 형수의 동생이었던 이벽(李蘗)과의 친분과 서학(西學)에 대한 논쟁, 매형 이승훈(李承薰), 스승 권철신(權哲身)의 천주교와의 관계, 천주학에의 연루 문제로 인한 형들 정약전(丁若銓) · 정약종(丁若鍾), 그리고 자신의 인생 역정 등은 다산이 과연 천주교 신자였는가의 문제를 둘러싸고 현재까지 논란을 지속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서는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그가 천주교인이었다고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산 정약용 표준영정

■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다산 정약용 초상

이 영정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의 다산이다.

문화체육부에서는 1973년부터 우리 역사상의 위인, 사상가, 전략가 및 우국 선열로 민족의 추앙을 받는 선현들의 동상·영정의 난립을 예방하고자 그 제작과 관련된 전문 사항에 대한 권고 및 지도를 해오고 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문화체육부 장관이 동상 · 영정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제작한 영정에 대해 ‘정부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을 ‘표준영정’이라고 한다.

이 다산 정약용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려

1974년에 지정한 표준영정인데,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초상화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학자다운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두루마기를 입고 사방관을 썼으며, 양손도 다소곶이 모은 모습이다.

표정 역시 너그러워 보이는데, 제대로 갖춘 다산의 초상으로 최초의 작품이다.

이로써 다산의 모습은 우리에게 확실하게 다가섰다.


 

   

 

정약용 초상(2009·김호석)

■ 안경을 쓴 다산 정약용

안경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선물로 받아 조선에 돌아옴으로써 알려졌다. 서역 만리(滿利)라는 나라에서 생산되었는데, 이때는 애체(雲愛雲逮 )라고 하였다.

“노인들이 눈이 어두워 작은 글자를 분별하지 못할 때에 양쪽 눈에 걸면 작은 글자도 밝게 보이며, 그 편리함 때문에 장차 가정에서도 반드시 갖출 것”이라는 스승 성호 이익(李瀷)의 평과 같이 다산이 살던 때에는 비교적 많이 사용되었다.

다산이 모셨던 국왕 정조나, 개국통상과 수레 · 벽돌 · 동전 등의 사용을 적극 주장하며 《북학의(北學議)》를 지은 박제가(朴齊家)가 안경을 썼음은 분명하지만, 다산이 안경을 썼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강진군의 요청으로 김호석 화백은 이 초상화에서 안경을 쓴 다산의 모습을 그려냈다.

두루마기 역시 남색으로 보다 인상적이고, 사방관의 형태 역시 다른 모습이다.

1974년의 표준영정과 비교하여 온화하고 여유있는 모습이며, 그 특징을 안경으로 잡아냈다.

조선후기 서양문물의 영향과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려는 그의 의지,

방대한 독서와 저술 등의 학구적인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다산을 통해 나타난 우리의 꿈

이밖에도 다산의 모습으로 알려진 1~2종의 초상이 더 있다.

시대나 작자를 알 수 없는 개인 소장의 초상도 있고,

독립기념관에 사진본으로만 보존중인 역시 간략한 형태의 초상도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그 제작 시기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래지 않다.

1930년대 중반부터 우리에게 다가온 다산의 이미지는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약 25년에서 30년 간격으로 그려진 그의 외모에는

각각의 시기에 우리가 바랐던 다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을 종합하여 실학을 완성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그의 개혁사상에 대한 우리의 꿈이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그리고 있는 정약용의 모습이기도 하다.

앞으로 다산의 이미지가 어떻게 전개될지가 궁금하다.

- 김성환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3월 14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