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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9. 다산, 역사를 논하다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5

 

 

 

 

 

茶山 朝鮮의 새길을 열다

 

9. 다산, 역사를 논하다

 

 

500여 권 방대한 저술… 조선의 역사 · 지리에 깊은 관심

 

 

 

다산은 평생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담은 것으로,

비판적인 인식을 통해 조선이 보다 나은 사회로 진전되기를 바라는 방안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전문적인 역사서를 저술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은 물론 중국의 역대 문헌을 고증해 그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청나라에 부용적인 위치로 떨어질지 모르는 조선의 영토를 확정하고자 했다.

이런 의도에서 저술된 대표적인 것이

1811년 초고를 완성하여 20년 넘게 수정 보완한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이다.

 


■《문헌비고간오》의 저술

그런데 이 책을 저술하기 이전부터 다산은 조선의 영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89년(정조 13) 5월 정조는 내각(內閣)에서 지리책(地理策)으로 직접 시험을 보았는데,

그는 이때 이미 고조선의 강역, 그 수도인 평양의 위치, 한사군의 위치, 발해에 대한 역사 등에 대한

문제들을 만주를 아울러 적극 논의하였다.

또 〈폐사군론(廢四郡論)〉을 지어 숙종 이후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있었던

폐사군을 다시 설치하자는 논의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조선학(朝鮮學)에 대한 관심이 역사·지리에까지 확장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 또한 그런 차원에서 저술되었다.

1800년(정조 24) 1월 정조의 병세가 위중함을 직감한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5개월 후 6월 정조가 승하했다.

고향에 돌아온 후 “삼가고 삼갈 것”을 다짐하며

당호(堂號)마저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은 그가 처음 저술한 책이 《문헌비고간오》였다.

이 책은 《삼국사기》나 《동국여지승람》그리고 《문헌비고》 등

고려시대 이래 조선 전 · 후기에 국가에서 편찬된 역사 지리지에서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저술되었다.

하지만 저술의 시작은 이미 서울에서 정조를 모시고 벼슬하면서부터 였을 것이다.

규장각에서 많은 자료를 접하면서부터

그는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는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하나하나 정리하였을 것이며,

마재로 돌아온 후 그것을 재차 재정리하여 《문헌비고간오》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아방강역고》의 저술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다산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01년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문헌비고간오》의 저술을 경험으로 조선의 역대 강역에 대해 상세한 고증작업을 시도하였고,

1811년 《아방강역고》의 초고를 마무리한다.

즉 이 책은 10권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강역에 관한 역사 지리서 성격의 저술이다.

하지만 이때 저술된 《아방강역고》는 완전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해배(解配)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만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작업이 이루어졌다.

1833년에 〈북로연혁(北路沿革)〉, 〈서북로연혁(西北路沿革)〉의 속편이 이루어졌고,

1830년대를 전후하여 〈발해속고(渤海續考)〉가 증보되었다.

작업을 시작한지 20여 년이 넘어 비로소 완성을 본 것이다.

저술의 목적은 당연히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에 있었다.

책의 내용은

권1 조선고(朝鮮考, 箕子) · 사군총고(四郡總考) · 낙랑고(樂浪考) · 현도고(玄?考),

권2 임둔고(臨屯考) · 진번고(眞番考) · 낙랑별고(樂浪別考, 春川) · 대방고(帶方考),

권3 삼한총고(三韓總考) · 마한고(馬韓考) · 진한고(辰韓考) · 변진고(弁辰考),

권4 변진별고(弁辰別考, 迦羅) · 옥저고(沃沮考),

권5 예맥고(濊貊考) · 예맥별고(濊貊別考, 江陵) · 말갈고(靺鞨考),

권6 발해고(渤海考),

권7 여진고(女眞考, 九城) · 거란고(契丹考) · 몽고고(蒙古考),

권8 졸본고(卒本考, 夫餘)·국내고(國內考) · 환도고(丸都考, 安市) · 위례고(慰禮考),

권9 한성고(漢城考) · 팔도연혁총서 상(八道沿革總敍 上),

권10 팔도연혁총서 하 · 패수변(浿水辨) · 백산보(白山譜)로 이루어져 있다.

 


문헌비고간오 · 아방강역고 등 문명사 중심 역사 파악
철저한 현실적 고증 통해… 조선의 영토 확정 저술


그가 이처럼 조선 8도의 연혁을 상세하게 정리하고,

후에 평안도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북방지역의 정보를 증보한 것은

이곳이 조선의 강역임을 보다 확실하게 고증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의 고사(古史)는 황당하고 저속하여 하나도 그것을 근거로 할 수가 없는 경우에 많고,

삼한(三韓)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기타의 사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라는 《강역고》의 서문은 다산이 이 책을 지은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하(遼河)를 경계로 그 이동이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한 요동론(遼東論)에서 그의 입장은 더욱 분명해진다.


왜 단군조선을 불신하였을까.

하지만 다산은 고조선의 시작을 단군으로 보지는 않았다.

〈조선고〉의 시작이 기자(箕子)에서 출발하고 있고,

평안도와 함경도가 본래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땅이었다고 밝히고 있음에서 그러하다.

또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우리 역사에 대한 체계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도 보인다.

우리 역사의 주류를 조선과 한(韓)이 구성하는 동이(東夷)로 보고,

고구려 · 동예 · 백제 등이 속해있는 예맥과 중국 진(秦)나라 유민으로 이루어진 진한이 포함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등에서 그렇다.

특히 단군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 고대사를 기자에서 시작하는 조선과 삼한의 이원적인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성명이 왕검(王儉)이라는 것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선인왕검(仙人王儉)에 대한 설명이 우리의 역사[東史]에 두루 실려 있으나…

왕검은 지명(地名)으로 단군의 이름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혹 신인(神人)이 박달나무[檀木]으로 내려왔다거나…하는 것도

사람과 신(神)이 섞여있다는 것인데 사리에 벗어난다.”,

“동사(東史)에 단군이 팽오(彭吳)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팽오에 대한 설명도 잘못된 것으로 크게 다루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다산이 단군의 고조선 건국에 대해 불신한 것은

문명사(文明史)를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고자 했던 그 나름의 역사관이 작용한 것이다.

그 역시 우리나라가 조선을 이름으로 얻은 것은 기자 이전부터였지만,

그 이전의 조선은 야만 상태로 보았다.

물론 자신도 기자가 평양에서 실시했다는 정전설(井田說)을 믿지 않았지만,

그것은 기자가 동래함으로써 비로소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전통적인 유자(儒者)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요순의 이상 정치를 지향하고 개혁의 이념을 그곳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애닯다마다 / 주머니 속에 처한 듯 궁벽하거니
삼면으로 바다가 에워쌌는데 / 북방에는 산맥이 누르고 있어
사지 삭신 언제나 펴지 못하니 / 욕망 염원 그 어찌 채울 수 있나
성현은 만 리 밖에 멀리 있거니 / 뉘 능히 이 어둠을 밝혀 주려나
고개를 들어 온 누리 쳐다보아도 / 보이는 것 없어라 정신만 흐려
남의 것 모방하기 급급하여 / 흠은 미처 정밀히 못 따지는데
뭇 바보가 한 천치 치켜세우고 / 왁자지껄 다 함께 받들게 하니
순박한 옛 풍속을 간직하였던 / 단군의 세상보다 못하다는 거야
(《다산시문집》 제1권, 시, 나의 하소연[述志] 중에서 두 번째)



■ 발해에 대한 관심, 하지만…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적극 다루어 남북국시대론(南北國時代論)을 주창한 실학자로

유득공(柳得恭)과 그의 저술인 《발해고(渤海考)》는 유명하다.

다산 역시 발해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였다.

《아방강역고》에서는 발해를 다룬 〈발해고〉를 썼고,

1830년경에는 다시 이를 증보하여 〈발해속고〉라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그는 기자조선의 후예들이 위만조선이 망한 후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계승되었고,

발해가 망한 후에는 정안국(定安國)을 건국하였음을 논증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발해는 고구려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자국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듯이

발해 역시 우리의 역사 범위 안에서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 말갈, 여진과 관련하여 이해되고 있었다.

다산은 실학시대에 대두된 요동을 중심으로 하는 고조선 인식, 고구려 중심의 인식,

우리 역사로서의 발해에 대한 인식에 비판적이었다.

그가 《문헌비고간오》, 《아방강역고》를 저술하면서 유지하였던 기본 태도는

자료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고증에 있었다.

그리고 그 토대에서 당시 대두되고 있던 만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인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7세기에는 북벌론(北伐論)을 통해 만주를 우리의 역사 영역으로 적극 포함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다산은 이 움직임에 반대한 것이다.

철저한 현실 인식을 통해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그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요동론〉에서 극단적으로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인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을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고까지 하였다.

그의 이런 역사 인식은 조선의 역사가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에 부용적인 위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다산의 이런 역사인식을 현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는 앞으로의 숙제로 남는다.

 

김성환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3월 21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