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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11. 가슴에 묻은 자식들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4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11) 가슴에 묻은 자식들

 

 

6남3녀중 여섯을 모두 천연두로 잃어 애끓는 아비의 심정…

아! 한스럽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은 풍산 홍씨와 혼인한 뒤 6남3녀의 자식을 낳았지만, 6명을 천연두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사진은 다산 선생이 풍산 홍씨와 결혼해 서울로 이사가기 전까지 살았던 남양주 생가의 모습.

 

 

 


다산은 고향 마재에서 34년을 지냈다. 74년 그의 생애 중에서 반평생을 마재에서 보낸 것이다.

그는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의 4남 1녀 중 4남으로

1762년(영조 38) 6월16일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다산이 태어나던 그해 생원시에서 3등 13위로 합격한 정재원은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80년(정조 4) 호조좌랑, 예천군수를 지냈으며,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니

다산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외모나 기질은 외탁한 것이라고 말했다는데서

외가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의 부모, 자식들

다산이 처음 마재를 떠난 것은 15세 때인 1776년(영조 52).

홍화보(洪和輔)의 딸인 풍산 홍씨와 결혼한 직후 과거공부를 위해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 남촌에 살림집을 얻은 것이다.

20세가 되던 1781년(정조 5) 7월에 첫딸을 낳았으나, 그 기쁨도 잠시 그 딸은 5일 만에 죽었다.

첫아이였던 만큼 기쁨도 컸지만, 아비의 정을 주기도 전에 잃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으랴.

하지만 슬픔도 잠시. 그는 이후 4남을 얻는다.

 

22세 때인 1783년(정조 7) 2월 둘째형 약전과 함께 초시에 합격했고, 4월에 회시에서 생원이 되었다.

집도 회현방 재산루(在山樓)로 이사하였으며, 9월에는 큰아들 학연(學淵)이 태어났다.

25세 때인 1786년(정조 10) 2월 별시의 초시에 합격하는 동시에 7월에 둘째 아들 학유(學游)가 태어났다.

그리고는 1789년(정조 13) 1월 28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배다리를 설치하는 공사에 규제(規制)를 만들었으며, 12월에 셋째 아들 구장을 보았다.

1792년 2월에는 딸 효순(孝順), 1796년 11월에 넷째아들 삼동(三童)이 태어났다.

1789년 이후 10여 년 동안 다산은 중앙과 지방의 여러 벼슬을 지냈다.

물론 서학(西學), 서교(西敎)와 관련한 모함도 끊이지 않았지만,

정조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병조참지 · 동부승지 · 형조참의 등을 지냈고,

1799년(정조 23) 12월에는 늦둥이 농장을 보았다.

 

 


■ 가슴 속에 묻은 자식들

그러나 다산은 6남 3녀 중 장남인 학연과 둘째 학유, 그리고 딸 하나만을 성장시킬 수 있었을 뿐

나머지 자식 여섯을 모두 잃었다. 1780년 예천에서 유산한 아이까지 합하면 일곱이었다.

자식을 앞서 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만,

그것도 여섯을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는 아비의 심정이란…

이런 애끓는 심정을 그는 글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셋째아들 구장이 태어난 해는 아버님의 회갑이었으므로,

아버님께서 그 애를 사랑하시어 늘 동갑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송구스러워 ‘구장’이라고 불렀다.

그 애에 대한 사랑이 유달리 깊어 구악(懼岳)이라고 바꾸어 불렀는데,

구악도 매우 따라 잠시도 떼어놓지 못하게 하였다.

1791년 3월 내가 진주로 아버님을 뵈러 갈 때, 간신히 다른 말로 속이고서야 길을 나설 수 있었는데,

천연두를 앓으며 여러 번 아버지를 부르고 애써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주에서 돌아와서 보니 구악이 아직 얼굴을 알아보기는 하였으나, 전처럼 가까이 따르지 않았고,

며칠이 지나서 다리의 종기로 기운이 다하여 죽었다.

지금 날짜를 따져보니, 구악이 막 신음하며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나는 관현악을 벌여놓고 노래하며 춤추며

촉석루(矗石樓) 아래 남강(南江)에서 물결을 따라 오르내렸던 것이다. 아! 한스럽도다.

가을 난초가 저절로 나서 / 성하고 성하더니 먼저 시들었구나
혼(魂)은 올라가 희고 깨끗하여 / 꽃 아래에서 놀고 있으리

-어린 아들 구장의 광명(壙銘)


둘째 딸아이는 어미가 순산한 것을 효(孝)라고 여겨 처음에는 효순(孝順)이라고 불렀는데,

부모의 사랑이 깊어져 그를 부를 때 호동(好童)이라고 하였다.

조금 컸을 때는 감아 빗는 머리가 이마를 덮어 늘어진 품이 게의 촉수와 같았음으로

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다시 한글로 ‘게압발(揭押勃)’이라 불렀다.

성품도 효순하여 부모가 화가 나서 다투면 옆에서 웃음 지으면서 화를 모두 풀어 주었으며,

부모가 간혹 때가 지나도록 밥을 먹지 않으면 애교스런 말로 식사를 권했다.

태어난 지 24개월 만에 천연두를 앓았는데, 발진이 잘 안 되고 검은 점이 되더니 하루 만에 죽었다.

용모가 단정하고 예뻤는데, 병이 들자 초췌하여 검은 숯 같았다.

죽으려고 열이 오르는데도 잠깐 애교스런 웃음과 말을 보여 주었으니, 가련하다.
- 어린 딸 효순의 광지(壙志)



귀양에서 돌아와 규성(奎星) 운이 열려 부인이 아기를 가져 사내아이를 낳았다.

문명(文明)을 받았고 막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세 가지 기쁨이 있어 삼동(三童)이라고 불렀다.

나면서부터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뼈가 볼록 튀어나와 모가 져서 복서(伏犀)라고 불렀다.

이런 모습은 나하고 비슷했으나 나보다 더욱 컸다.

1797년 가을에 가족을 이끌고 곡산으로 나갔는데, 다음해 8월 천연두가 돌아 발진이 되었다.

배설을 하지 못하여 아감창(牙疳瘡)이 심해지더니 9월4일 어린 나이에 죽었다. 슬프다.

네 모습은 숯처럼 검게 타 / 예전의 귀여운 얼굴 다시 볼 수 없구나
귀여운 얼굴은 황홀하여 기억조차 희미하니 / 우물 밑에서 별 보는 것과 마찬가지구나
네 영혼은 눈처럼 결백하여 /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들어갔구나
구름 속은 천리만리 멀기도 하여 / 부모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 어린 아들 삼동의 예명


막내아들 농아(農兒)는 1799년 12월 태어났다가 1802년 11월에 죽었다.

홍역이 천연두가 되었고, 천연두가 종기로 되었던 것이다.

나는 강진의 적소(謫所)에서 글을 지어 그 아이 형에게 보내 그 무덤에서 곡(哭)하고 알리게 하였다.

네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 겨우 세 돌일 뿐인데, 나와 헤어져 산 것이 2년이나 된다.

사람이 60년을 산다고 할 때, 40년 동안이나 부모와 헤어져 산 것이니, 이야말로 슬픈 일이라 하겠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의 근심이 깊어 너를 농(農)이라고 이름지었다.

얼마 후 집안의 화(禍)가 근심하던 대로 닥쳤기에 너에게 농사를 지으며 살게 하려 한 것뿐이었으니,

이것이 죽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으면 기꺼이 황령(黃嶺)을 넘어 열수(洌水)를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으니, 어찌하겠는가.

1801년 겨울 과천의 점사(店舍)에서 어미가 너를 안고 나를 전송할때,

어미가 나를 가리키며 ‘네 아버지다’라고 하니, 네가 따라서 나를 가리키며 ‘아버지다’라고 했으나,

너는 아버지가 아버지인 줄을 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웃사람이 집으로 떠나갈 때, 소라껍질 2개를 보내며 너에게 주라고 하였더니,

네 어미의 편지에 “애가 강진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소라껍질을 찾다가 받지 못하면 풀이 꺾이곤 하였는데,

애가 죽어갈 무렵에 소라껍질이 도착했다”라고 했으니 참 슬픈 일이다.

네 모습은 깎아놓은 듯이 빼어난데, 코 왼쪽에 조그마한 검은 사마귀가 있고,

웃을 적에는 양쪽 송곳니가 뾰족하게 드러난다.

아아, 나는 오로지 네 모습만이 생각나서 거짓 없이 너에게 고하노라.
- 아들 농아(農兒)의 광지(壙志)



■《마과회통》의 저술

다산은 아이 6남 3녀 중 4남 2녀를 모두 천연두로 잃었다.

막내아들은 강진의 배소에서 그 소식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자식을 앞에 세웠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을 다산.

“나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데 살아 있고, 너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나은데 죽었다”는

그의 한마디는 자식을 보낸 부모 모두의 심정일 것이다.

그가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 E. 제너의 우두방(牛痘方)을 소개하면서까지

 1797년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한 것 역시 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의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 대부분을 마재 두척산(斗尺山)에 있는 선영인 증조부의 묘 옆에 묻었다.

4일만에 잃은 첫딸을 제외하고, 모두 그곳에 묻었다.

어린 나이에 먼저 간 아이들을 가슴으로 보듬어 항상 곁에 두고자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모두 6남 3녀를 낳았는데, 산 애들이 2남 1녀이고 죽은 애들이 4남 2녀이니, 두 배이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잔혹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할 것인가.”

구장 · 효순 · 삼동… 자식 여섯을 정을 주기도 전에 잃었으니 심정이 오죽했으랴.

다산은 천연두 퇴치를 위해 <마과회통>을 저술, 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의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그가 18년 가족과 떨어져 홀로 강진에서 살 수밖에 없었음에도 고향을 그리며,

돌아와서도 평생 마재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였던 것이다. 

 

- 김성환 실학박물관 학예팀장

- 2011년 4월 4일, 경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