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13) 일찍 뜬 詩의 눈 |
민초의 삶 담아 조선의 詩를 꽃피우다 |
남양주의 작은 사찰로서 두물머리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인 수종사(水鐘寺)는 다산 정약용이 차를 즐기고 시를 썼던 곳이다. |
수종사(水鐘寺)라는 눈맛 좋은 절이 있다.
운길산 중턱에 자리한 절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말 그대로 장관이다.
두물머리 인근의 들판과 한강물이 더할 나위 없이 수려한 수채화를
이루는 것이다.이 맛에 다산도 수종사 사랑이 각별했던가.
거기에 고향의 어린 시절 추억까지 얹히니
“즐거움에 오히려 나 홀로 서서/한 밤 더 자며 아니 돌아가고파”라고 읊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담쟁이 험한 비탈 끼고 우거져(垂蘿夾危 )
절간으로 드는 길 분명치 않은데(不辨曹溪路)
응달에는 묵은 눈이 쌓여 있고(陰岡滯古雪)
물가에는 아침 안개 떨어지누나(晴洲散朝霧)
샘물은 돌구멍에서 솟아오르고(地漿湧嵌穴)
종소리 숲 속에서 울려 나오네(鍾響出深樹)
-「遊水鐘寺」부분
수종사에서 공부할 때(14세) 쓴 시다. 일찍부터 범상치 않은 눈과 묘사력이 드러난다.
일곱 살 때 이미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은 지세가 다른 탓(遠近地不同)”이라 쓰지 않았던가.
이후 그의 시눈[詩眼]이 보여줄 묘파의 예고 같다.
다산 정약용.
‘다산학’으로 집대성되는 조선의 ‘큰 산’. 시만 해도 2천500여 수가 7권의 문집에 담겨 있다.
책문 · 논 · 설 · 서 · 기 · 발 등을 합치면 『다산시문집』이
모두 22권(고전종합번역 DB로 볼 수 있음)이니, 과연 다산다운 괴력이다.
그러니 짧은 지면에서는 몇몇 시를 중심으로 다산의 문학적 꿈과 실현을 엿볼 수밖에 없겠다.
■ 시 꽃을 피우다 - 죽란시사
‘매화꽃이 피면, 살구꽃이 피면, 복숭아꽃이 피면, 참외가 익으면, 서지에 연꽃이 피면, 국화꽃이 피면’
무엇을 할까? 그때마다 일단 ‘모인다’.
누구의 도저한 풍류일까. 바로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즐거운 구실이다.
‘죽란시사’란 희귀한 꽃과 과일나무를 심어 가꾼 다산의 터 ‘죽란’에 꾸린 시모임.
‘번개’ 이유로는 최고의 운치 아닌가.
시의 벗들(정약전 · 윤지눌 · 이유수 · 이치훈 · 채홍원 · 홍시제 · 한치응 등 모두 14명)과
때때로 만나 시를 나누는 즐거움이 그만큼 컸나 보다.
철은 가을인데 쌀은 더 귀하고(歲熟米還貴)
집이 가난해도 꽃은 많다네(家貧花更多)
가을빛 속에 꽃이 피어(花開秋色裏)
다정한 사람들 밤에 서로 찾았네(親識夜相過)
술 따르며 시름까지 보태 따르고(酒瀉兼愁盡)
시가 지어지면 즐거운 걸 어쩌나(詩成奈樂何)
-「竹欄菊花盛開 同數子夜飮)」 부분
죽란시사의 즐거움이 훤히 보이는 시다. 활짝 핀 국화 앞에 시의 벗들과 앉으니 얼마나 기꺼우랴!
하지만 술잔을 기울이며 “시가 지어지면 즐거운 걸 어쩌나” 하는 중에도 다산은 풍류로만 기울지는 않는다.
“가을인데 쌀은 더 귀하고”처럼 당대 현실을 도외시 않는 시의 한 축이 묻어나는 것이다.
이런 표현에서도 우리는 다산의 실학적 문학관을 엿볼 수 있다.
■ 화성을 오가며 읊조리다
다산은 ‘조선 성곽예술의 꽃’ 화성에도 공이 크다.
화성의 설계자일 뿐만 아니라 거중기 등으로 축성의 과학적 실현에 기여한 때문이다.
그런 화성을 오갈 때마다 다산은 감회가 더했을 법하다.
장안문 문 밖에는 용 깃발을 세워두고(長安門外建龍旅)
호위병과 시종신들 비단옷을 다 입었지(衛士從臣盡錦衣)
다섯 군교 군사 통솔 북소리가 울리고(五校勒軍 鼓動)
두 대열 길 정리라 생황소리 퍼졌지(兩行淸道鳳笙飛)
자궁께서 내린 술 모든 신하 목 적시고(慈宮綠 沾恩遍)
군주 타신 붉은 교자 능침 뵙고 돌아갔지(郡主紅轎拜寢歸)
이곳을 지나간 게 엊그제와 같거니(此地經過如昨日)
다리 가의 수양버들 아직도 무성하네(御橋楊柳尙依依)
-「行次華城 恭憶春日陪扈之事 然有作)」 전문
시에서 그리는 정조의 화성 행차 모습과 풍광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는 행차 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만든 ‘배다리’ 시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가을 지난 뒤에 배를 모아서/ 눈 내리기 전에 다리 만드니
새 나래 붉은 난간 두 줄로 서고/ 고기비늘 흰 널판자 가로로 깔려”(「過舟橋」)처럼
묘사를 세세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구체성 중시는 생생한 현실 속의 표현을 많이 골라 쓰는 데서도 엿볼 수 있는 시적 특성이다.
일찍부터 묘사력이 뛰어난 다산은 일곱살때 이미 시를 지었고 화성을 오가며,
수종사에서, 고향에서 등등 읊은 많은 시들이 그 수가 2천500여 수, 문집이 7권이나 된다.
14명의 시의 벗들과 때때로 만나 시를 지으며 나누는 즐거움이 컸다.
그는 당대의 현실을 읽고 쓰고 전하였는데 민초들의 삶을 풍자하고 표현해 문학관 역시 실학적이다.
늘 묻고 찾고 쓰는 것을 평생 놓지 않았고 우리를 깨우고 이끄는 참으로 높고 깊은 산임은 틀림이 없다.
■ 조선의 삶을 담아 조선의 시를 쓰다
‘지금 이곳’의 현실을 직시하며 바른 세상을 꿈꾼 다산.
이는 민초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 고발과 비판을 함축하는 시편들로 나타난다.
보통 양반사대부와는 다른 시선으로 당대의 현실을 읽고 쓰고 전했던 것이다.
노전마을 젊은 아낙 길고 긴 통곡소리(蘆田少婦哭聲長)
현문 향해 나아가며 하늘에 울부짖기를(哭向縣門號穹蒼)
전쟁 나간 지아비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夫征不復尙可有)
남자가 그것을 자른 일은 들어본 적 없다네(自古未聞男絶陽)
시아버지 삼상 나고 애는 물도 안 말랐는데(舅喪已縞兒未 )
조자손 삼대가 모두 군보에 실리다니(三代名簽在軍保)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薄言往 虎守 )
이정은 으르렁대며 마구간 소 몰아가고(里正咆哮牛去 )
칼 갈아 방에 들더니 자리에 피가 가득(磨刀入房血滿席)
자식 낳아 당한 군액 한스러워 그랬다네(自恨生兒遭窘厄)
-「哀絶陽」 부분
오죽하면 ‘군액’의 원인이 된 ‘양근’을 잘랐을까.
처절한 현장 묘사는 그 자체로 강렬한 고발과 비판이 된다.
굶주림만으로도 지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또 뜯기고 짓밟히는 민초들의 삶.
다산은 그런 현장을 보는 대로 붓을 든다.
“관가의 마구간에 살진 저 말은/ 진실로 우리들의 피와 살이네
(…중략…)
무릎 펴고 보채는 아기 달래다/ 고개 숙여 서캐를 잡고 있자니
두 눈에 피눈물이 왈칵 쏟아져”(「飢民詩」),
민초의 입장에서 “피눈물” 현장들을 낱낱이 담아낸 것이다.
실제로 보고 겪은 이 땅의 삶을 쓰는 과정은 목민의 바른 길을 모색하는 길이기도 했다.
그런 특성은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은 것이라면 시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고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 것이 아니라면 시가 아니다.”
이 대목은 관념적인 유학자 틀을 벗고 ‘지금 이곳’의 삶을 중시한 다산의 문학관을 보여준다.
‘권선징악’이라는 전통적 가치 중시는 여전하지만, 실학자답게 문학적 실천을 중시한 것이다.
아울러 돌아볼 것은 “나는 조선 사람인지라, 조선 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일세.”라는 언명이다.
조선 사람답게 조선의 삶을 조선의 시로 쓰겠다는 말은 지금도 서늘하게 등을 친다.
■ 고향에 돌아와 시를 짓다
18년이라는 기나긴 유배를 끝내고 다산은 고향 소내(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돌아왔다.
뜻밖에 고향 마을 이르렀는데(忽已到鄕里)
문 앞에는 봄물이 흘러가누나(門前春水流)
(…중략…)
남녘 땅 수천 리를 노닐었으나(南遊數千里)
이와 같은 곳은 찾지 못했네(何處得玆丘)
-「소내의 집에 돌아오다(還苕川居)」전문
꼭 이맘때의 모습을 그린 시에는 돌아온 기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긴 유배생활에 다산은 늙고 지쳐 있었다(57세).
그렇다고 붓을 놓을 리 없는 이가 바로 다산이다.
엄혹한 유배지에서도 그토록 방대한 저술을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구하는 세상을 위해 다산은 늘 묻고 찾고 쓰는 붓을 놓지 않았다.
평생 ‘호학(好學)’으로 궁구한 학문 그리고 문학...
다산은 갈수록 우리를 깨우고 이끄는 참으로 높고 깊은 산이다.
- 정수자 시인
- 2011년 4월 25일,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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