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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 17. 다산과 북학(北學)사상

Gijuzzang Dream 2011. 9. 28. 12:53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17) 다산과 북학(北學)사상

 

 

“오랑캐 淸에서도 배워야”…

조선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다

 

 

   

박제가와 정약용이 뱃길을 통해 서로 만나던 남양주 월계(수종사 인근 남한강)와 초천(苕川 : 다산 고향 인근의 강) 일대의 풍광.

다산은 한 편지에서 한강변의 나무그늘 아래에서 박제가와 만나고 싶다고 썼다.

 

 


북학(北學)의 어원

조선시대 윤근수(尹根壽)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에게 바친 제문(祭文)에

‘북학(北學)’이란 말이 나온다.


옛날 고려 말기에 가정과 목은이 살았지요
천자가 계신 북으로 배우러가서[北學] 제과에 잇따라 올랐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북학’은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중화(中華)의 선진문물을 배운다는 의미로 널리 사용해 왔다.

원래 북쪽은 천자의 자리라는 동양전통의 방위관념에 따라

천자가 계신 북쪽으로 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한양에서 출발해 육로로 북경을 갈 경우에

북쪽으로 가야하는 실제적인 이유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정월 초하루에 임금이 북경에 있는 중국 천자를 향해 새해인사를 해야 한다.

조정의 신료들을 모아놓고 천자가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는 것을 망궐례라 한다.

   
목민심서
정조 2년(1778) 박제가(朴齊家)가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北學議)』라 이름붙인 것은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익혀 오히려 더욱 발전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北學議』서문에서 원래 ‘북학’이라는 말의 출전(『孟子』 「 文公章」)을 소개하며, 중국의 변방에 해당하는 조선의 학자들은 선진적인 중화문물을 적극 배워야 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한 글이다.

만약에 중국이 한족(漢族)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였다면 우리나라 학자들 중에 ‘북학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중국이 유사 이래 오랑캐로 분류되어 왔던

이민족 집단인 청조(淸朝)에 의해 통치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오랑캐 정권인 청조를 배우자는 ‘북학’은 당시 대다수 선비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효종 이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노론의 ‘북벌론(北伐論)’,  ‘소중화사상(少中華思想)’에 도전하는

이단적이고 새로운 이념이었던 것이다.

북학파 학자들은 오랑캐의 법이라 하더라도 좋은 것은 배워야한다는 변법론(變法論)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이 중화의 유제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소중화사상’에 반대하여

중화라는 것은 불변하는 지리적 개념이지 사람이나 사안에 따라 옮겨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북학론(사상)의 핵심은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이다.

북학파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데 있다.

백성과 나라에 필요하면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도 배워야 한다는 실리론자들이었다.

그러나 노론 일각에서 걱정한 것처럼

북학파 학자들이 주체의식이 결여된 맹목적인 친청(親淸)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배격할 것은 배격하는 실리적 대청외교 인식을 시종일관 고수하였다.


다산의 북학론

남인 실학자인 정약용은 비록 이익으로부터 직접 사사받지는 못했지만

15세 무렵부터 이익의 저서를 접하게 되면서 그의 사상을 흠모하게 된다.

이익의 고제(高弟)는 권철신과 안정복이었고,

이들이 살던 곳은 정약용의 고향마을과 매우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교류는 없다 할지라도 같은 남인으로서 인척·친분관계가 서로 얽혀있다.

   
이상적 서화첩

정약용은 여느 북학파 학자들처럼 중국에 직접 체류한 경험도 없다. 그러나 성호학파의 와 북학파 학자들에게서 전해 받은 각종 서학서(西學書)와 청대 실학자들의 저서들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조선학계는 탕평책의 영향으로 당색에 매이지 않고 서로 배울 것은 배우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유형원의 경우도 영조 대에는 그의 경륜에 관심이 표명되고『반계수록』이 간행되기에 이르렀거니와 그가 남인임에도 홍대용은 물론 노론계에서도 『반계수록』을 중요한 저술로 취급하고 있었다.

북학파 학자들의 출신배경과 가문의 정치적 성향 등을 분석해 보면 남인계의 정약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론계열의 학자들이고 소론도 결국 학문적 경향에서는 노론과 큰 차이가 없다고 볼 때 북학파 인물들은 대체로 서인(西人)의 학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인 성향이외에 박지원이 남인 유형원을 조선 최고의 학자로 추켜올렸듯이 남인학풍이 북학사상에 끼친 내재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보겠다.

북학파의 학문적 계보에 관해서는 정인보가 쓴 『담헌서』서문에 일부 밝혀져 있다.


홍대용은 이재 황윤석과 함께 미호 김원행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이때 성호 이익이 아직 생존하고 있어 자손 · 문제자들은 실(實)을 숭상하고 용(用)을 힘썼으며,

선생이 좋아하는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가 모두 다 일찍이 『성호사설』을 읽었고

석치 정철조를 좋아했으며, 초정 또한 다산(정약용)을 좋아했다.


박제가는 이미 조헌·유형원·이익 등의 실천적 학문경향을 실학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용후생을 주장한 박지원을 그들보다 높이 평가함으로써 북학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북학파의 주장이 뚜렷한 원류가 있고 사상적 지향점이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신분질서가 와해되면서 학문적으로 뛰어난 서얼과 중인들이

대거 정치계와 학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서얼 출신의 박제가가 남인 명문 정약용에게 가르침을 주고

노론 벌열 김정희의 유년기에 학문을 지도하기도 했다.



규장각서 ‘북학파’ 박제가와 의기투합
문학 · 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서로 영향
정조 승하하자 정치적 탄압에 의해 함께 귀양길 유배지서도 이강회 등 제자들 모아 교육했다.
결과적으로 다산의 학문은 경세치용학과 북학파의 이용후생학,

그리고 실사구시학을 종합 계승한 것이다.


정약용과 박제가의 인연은 규장각에서 함께 일하면서 비롯된다.

당시 정조는 총애하던 젊은 문인들이 규장각에서 연구에 전념하도록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약용은 특히 박제가와는 의기가 투합하여 절친하게 지냈는데,

12살의 나이차이로 봐서 친구라기보다는 사제(師弟) 관계에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사람의 친분을 말하는 기사는『여유당전서』에 약간 보인다.

정약용은 길이 어긋나서 박제가와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박제가가 지어 보내온 시를 극구 칭찬하고 얻은바 많았음을 감사하고 있다.


영공(令公; 박제가)의 시묵을 애완하여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데,

넉넉히 10여 일의 기한을 주셔서 실컷 즐길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내 주신 시문(詩文)의 광채가 신령스럽고 번뜩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시가(詩家)의 혈맥까지를 알게 해주니 그 가르쳐 주심이 깊기만 합니다.

-『여유당전서』 1집, 권18. 「박제가에게 답함」


이처럼 정약용은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의 문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박제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 제일의 문장가로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시풍(詩風)은 리얼리즘에 가까운 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이며 정약용의 시작(詩作)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정약용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여타 북학파 학자들과 동일하다.

그는 청나라의 문물을 수입하여 북학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내가 규장각에서 서적을 교열하였는데,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 6권을 보았으며,

그 후에는 박지원이 저술한 『열하일기』 20권을 보았는데

거기에 기록된 중국 기구(器具)의 제도는

보통 사람의 의견으로서 능히 추측하지 못할 만한 것이 많았다.

나의 생각에는 별도로 한 관청을 설치하여 명칭을 이용감(利用監)이라 하고

오로지 북쪽에 가서 배워오는 것[북학]을 업무로 한다는 것이다.

-『경세유표』 권2, 「사관지속(事官之屬)」

또한 그는 「방례초본서」에서

“이용감을 설치하고 북학의 방법을 의론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는 것은 바꿀 수 없을 것이다”고

확고한 신념을 보였다. 이 같은 사실에서 정약용이 박제가로부터 북학의 정수를 전수받았으며,

그의 생각을 직접 정책에 반영시킬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가 주장한 북학의 범위는 비단 기술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정치 ·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 걸쳐져 있었다.

흔히 조선시대 종두법 연구를 정약용이 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박제가가 중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두종(痘種)을 완성하고

이를 자신의 조카에게 직접 실험하고 나서 두 사람이 함께 종두법을 연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정약용의 농업사상에 국내의 다른 누구보다도 박제가의 영향이 짙게 깔려있음은

『목민심서』, 「권농」편에 중국의 역대 권농책을 열거하면서

국내학자로는 유일하게 박제가의 권농성(勸農說)을 인용한 것으로 봐서 잘 알 수 있다.

 

정약용의 중농사상은 ‘상업을 돕되 농업을 중시한다’

또는 ‘농업과 상업의 이득을 적절히 절충하자’는 것이고,

앞선 시기의 무조건적 ‘중농’과 ‘중상’보다 발전된 형태의 경제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화폐는 나라의 큰 보배로서 긴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청 · 일 등 동북아를 벗어난 대외통상론과 그에 상응한 화폐제도 개혁론을 구상 · 제시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그가 남인학파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북학파의 상업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잘 알 수 있다.

박제가와 정약용은 문학, 경제, 과학 모든 분야에 걸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이들의 관심이 고고한 학문적 이상이나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함께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종두법을 함께 연구하던 이 해에 정조가 승하함으로써

정치적인 탄압에 의해 함께 귀양길에 오르는 신세가 된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훗날 정약용의 제자인 이강회(李綱會)는 박제가의 이용후생적 경제사상을 적극 계승하였다.

그는 수레의 이점, 선박의 제조법 등을 거론하면서 “박제가의 『북학의』는 헐뜯을 수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다산의 학문은

기호남인학파의 중농(重農) 및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학과 북학파의 이용후생학,

그리고 이들의 실사구시학을 종합 계승한 것이다.

한마디로 위당 정인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를 높인 인물이다.

- 양상훈 실학박물관 연구원

- 2011년 05월 30일, 경기일보